A Story of a Knight In A Ruined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151)
땅 밑의 인간, 지저인(地底人)과 만나 가장 먼저 들은 질문은, 올무의 노예냐는 것이었다.
아르센은 차분한 어조로 이에 답했다.
“올무의 노예가 아니라 적입니다. 어쩌면 당신들과 같을.”
“아저씨, 이 녀석 말을 이상하게 하는데. 수상쩍게.”
지저인 중 누군가가 아르센의 말투를 트집 잡았다. 석궁을 든 병사였는데, 변성기가 갓 지난 듯한 애매한 목소리로 보아 아직 어린 소년인 듯했다.
이러한 태도를 무례하다 느꼈는지, 옆에 있던 바즈칼이 발끈하여 소리쳤다.
“애송이, 말조심해! 여기 있던 놈들을 모조리 해치운 게 형님이시란 말이다!”
“쉿! 미친 거요? 올무가 들으면 어쩌려고······.”
처음 나섰던 기사가 기겁하며 작게 속삭였다.
아르센은 슬쩍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일단 좀 구석진 곳에서 얘기하죠. 피차 올무에게 들키면 곤란한 처지인 거 같으니.”
“······좋소.”
흔쾌히 수락하는 모양새가, 아무래도 상대는 자기들의 전력이 그리 꿀리지 않는다고 믿는 모양이었다.
이쪽은 기사가 세 명이지만, 저쪽은 석궁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함께 있는 탓이리라.
아르센은 굳이 그 착각을 수정하지 않았다.
중앙 통로를 벗어나 보조 통로 사이를 지나게 될 때쯤, 그들은 간단히 이름을 나누었다.
“티막이오.”
“아르센입니다.”
“우선, 조금 전에는 실례했소. 사과해라, 아짐.”
아짐이라 불린 소년은 자존심 상한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지만, 이내 불퉁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 억지로 사과한다는 듯한 태도에 바즈칼이 다시 화를 내려 하자, 아르센은 눈짓으로 그를 제지했다.
그리고, 티막을 보며 요구했다.
“우선 혀를 보여주시죠. 저희도 보일 테니.”
모름지기 모르는 인간을 만났다면 가장 먼저 혀뿌리를 확인해야 하는 법.
그러나 그 요구에, 상대는 황당하다는 듯 대꾸했다.
“갑자기 혀를 보여달라니, 무슨 소리요?”
“약탈자······여기서는 어떻게 말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마수의 피를 마시고 오염된 인간인지 확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원하신다면 저희 쪽에서 먼저 확인하게 해 드리죠.”
“마수의 피를 마시는 게 뭐가 문제기에?”
그 이해할 수 없는 대답에 아르센이 얼굴을 찌푸리자, 기사가 고개를 저으며 혀를 내밀었다.
“어쨌든 알겠소. 이러면 되오?”
“혀뿌리를 보여주셔야 합니다.”
그는 이게 무슨 바보짓이냐는 듯한 표정으로 혀를 손가락으로 잡아 높이 들었다. 그러고는, 쳐다보고 있는 부하들에게도 혀를 내밀 것을 지시했다.
그들의 혀뿌리는 모두 선홍색이었기에, 아르센과 바즈칼, 아눈 역시 투구를 벗고 혀뿌리를 보였다.
“확인됐소?”
“네. 확인했습니다.”
그렇게 묻는 티막의 표정으로 보아, 아마 이것을 이방인들의 기이한 풍습 정도로 취급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어지는 질문이 그 사실을 증명했다.
“조심스럽게 묻자면, 그쪽은 확실히 우리와 말투나 풍습이 꽤 상이한 것 같소. 저 금속으로 된 탈것 역시 그렇고. 혹시 당신들은 저 올무의 땅 너머에서 온 거요?”
“올무의 땅 너머 말입니까?”
“올무들이 차지하고 있는 지역 건너편 말이오. 그곳에도 사람이 산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설마 진짜일 줄은 몰랐는데.”
아무래도 그들은 아르센을 당연히 자신과 같은 지하 주민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잠시 고민한 뒤, 아르센은 솔직하게 밝혔다.
“저희는 지상에서 왔습니다. 저 위에서요.”
그 대답에, 지하의 주민들 사이로 경악이 퍼져나갔다. 마치 보이지 않는 파동처럼.
이를 세심히 관찰하는 한편, 아르센은 천천히 근육을 이완시켰다.
만약 이들이 종교적인 이유나 관습으로 그들을 적대하려 한다면, 모두 죽이거나 제압할 생각이었기에.
그러나 그들의 반응은 아르센의 예상과 달랐다.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정말 지상이라는 게 존재하는 거였나?”
“아무도 살 수 없는 지옥이라고 들었는데!”
“놀랍군, 놀라워!”
서로 마주 보고 떠드는 그들의 얼굴에서 딱히 적대적인 감정은 엿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신기한 동물이라도 보는 듯이 감탄하며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지상은 어떤 곳이오?”
“여기는 어떻게 내려온 거요?”
“거기도 올무가 사나?”
“태양이라는 게 정말로 그리 밝습니까?”
쏟아지는 질문의 홍수.
아르센은 슬쩍 아눈과 바즈칼을 내세워, 다른 이들이 그 질문을 대신 받도록 했다.
그런 뒤, 이들의 대장으로 보이는 티막에게 물었다.
“당신이 이들의 대장입니까?”
“맞소.”
“혹시 이 지하에서 인간들이 살게 된 지 얼마나 지났는지 알고 있습니까? 왜 여기에서 지내는지도요.”
그 연원을 묻는 말에, 티막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모르오. 아마 아무도 모를걸. 옛날에는 역사를 적은 책이라는 게 있었지만 다 실전된 지 오래요. 지상이라는 곳이 있었고 우리가 거기서 내려왔다는 것만 알고 있소.”
“어째서?”
“이야기는 많소. 우리가 죄를 지어서라는 이야기도 있고, 지상에서 악마와 같은 존재들을 피해 들어왔다는 이야기도 있고······.”
마치 먼 옛날을 회상하는 노인 같은 어조였다. 나이를 짐작하기 힘든 얼굴이지만, 기껏해야 사십 살쯤 되었을 얼굴에는 어울리지 않는 태도였다.
”만약 정말 그런 이유라면 우리네 선조들은 정말 머저리들일 거요. 악마가 존재한다 한들 저 추잡한 올무 놈들만 할까.”
그 목소리에는 진한 공포와 원한이 담겨 있었다.
“그건 그렇고, 아까 혀를 보여달라고 한 이유는 무엇이오? 지상의 사람들은 마수의 피를 마시면 이상하게 된다고 믿소?”
그 질문에, 아르센은 자신이 알고 있는 약탈자에 대한 정보를 말해주었다.
이를 들은 티막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기이하군.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소. 굳이 마수의 피를 먹을 이유도 없긴 하지만, 설령 먹는다고 해도 독이 있는 종이 아니라면 무해할 텐데······.”
아무래도 지상과 지하의 차이점 중 하나인 모양인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아르센으로서도 짐작할 수 없었다.
이야기하던 도중, 그들은 본대가 주둔하고 있던 은신처에 도착했다.
은신처 앞에서 나와 그들을 반긴 것은 마룬이었다.
“오셨습니까, 아르센 경! 오오, 이 사람들은 아까 그곳에서 봤던······.”
마룬이 수다를 떨기 위해 시동을 걸려던 순간, 지저인들은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일제히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더니 마룬을 향해 절하며 크게 외쳤다.
조금만 큰 소리를 내도 올무가 듣는다며 두려워하던 조금 전의 반응을 생각해 보면 놀랄 만한 태세 전환이었다.
“위대한 마법사를 뵙습니다!”
“네?”
마룬이 멍청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이 소란에 다른 마법사들이 다가오자, 지저인들은 거의 기절할 듯이 머리를 땅에 박아 가며 절했다.
“아니, 마법사들께서 이렇게 많이······실로 복되도다······.”
그중 몇몇은 어찌나 격하게 감동했는지 울음을 터트리기까지 했으며, 다른 지저인들의 얼굴에도 경외와, 감동, 공포가 얽힌 기묘한 감정이 어려 있었다.
그로부터 몇 분, 마룬이 직접 나서서 설득하고 나서야 무릎 꿇었던 지저인들을 다시 일으킬 수 있었다.
어느 정도 진정하기는 했으나, 그들은 여전히 이곳에 있는 수십 명의 마법사를 보며 기뻐하고 있었다.
다른 기사들, 덤으로 전투 인형들을 보면서도.
“이렇게 많은 마법사에, 수호자까지 있다니, 이제 올무 놈들의 위협에서 훨씬 안전해질 수 있겠군. 좋은 일이야, 정말로, 진정으로 좋은 일이야!”
그렇게 말하는 티막의 얼굴이 얼마나 기뻐 보이는지, 처음 만났을 때보다 열 살은 젊어진 것처럼 보였다.
아직 서로 협조한다거나 돕겠다는 이야기 따위는 한 적도 없음에도, 같은 사람이니 당연히 도우리라 생각하는 것일까.
그런 그를 향해 아르센은 질문을 던졌다.
“올무가 마법사에게 많이 약합니까?”
“물론이오. 우리 수호자들이 올무를 붙들고, 마법사가 친다. 가장 기본적인 전술이지. 앞을 지킬 수호자만 충분하다면 마법사 한 분이 올무 수십 마리를 죽일 수도 있소.”
아무래도 이 올무들은 항마력이 없거나, 있더라도 대단치 않은 수준인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의 뛰어난 신체 능력을 고려했을 때, 기사보다 마법사가 올무를 상대하는 데 더 효과적이리라.
기사가 주변의 한두 명을 상대로 칼질하는 동안 마법사는 불과 벼락을 뿜으며 수십 명을 해치울 수 있으니.
“혹시 당신들은 마법사를 보면서 그······이상한 느낌을 느끼지 않는 겁니까?”
“당연히 느끼오. 인간을 초월한 힘을 행사하는 대가로 그분들이 받은 저주이지. 마땅히 감당해야 할 것이고.”
아무래도 이들은, 세뇌에 가깝게 마법사를 숭배하는 것으로 특유의 혐오감을 떨쳐내려 한 모양이었다.
마법사를 보며 느끼는 혐오감을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공포와 같은 것으로 승화시켰다 해야 할까.
마법사와 인간이 공존하는 성공적인 사례 중 하나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한쪽이 다른 한쪽을 일방적으로 숭배할 뿐인 관계를 공존이라 하기는 어려우리라.
“당신들 중에는 마법사가 별로 없습니까?”
“유감스럽게도 그렇소. 거기다 싸움에 적합한 힘을 타고나시는 분들도 많지 않아서······.”
하기야, 그룸과 같은 선천적인 치유술사는 큰 쓸모가 없을 터였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올무들을 쓸어버릴 수 있는 강력한 공격 마법일 테니까.
애초에 올무들을 습격하러 온 무리에 마법사가 없는 것만 봐도, 이들에게 전투 마법사가 많지 않을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쨌든,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마침 잡아놓은 올무가 둘 있으니 실험이라도 해봐야겠군요.”
아르센의 말에, 티막의 얼굴에서 표정이 지워졌다.
“지금, 뭐라고 했소?”
“네? 두 놈을 잡아놓았다고······.”
“놈들 어딨소!?”
어찌나 크게 고함을 질렀는지 귀가 아플 정도였다.
상대의 무례에 얼굴을 찌푸리는 한편, 아르센은 차분히 대답했다.
“구석에 가둬 놓았습니다, 그런데 왜······.”
“빨리 놈들을 죽이시오! 올무들은 살아있는 동포의 위치를 확인하는 능력이 있소! 곧 여기로 올무들이 쳐들어올 거요!”
그의 말에 아르센 역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르센은 재빨리 고개를 돌려 리노에게 지시했다.
“리노, 잡혀있는 놈들을 다 죽여라! 바즈칼, 모두에게 이동 준비하라고 알려!”
올무의 약점을 알게 되었지만, 그것이 당장 올무들과 전면전을 치러도 좋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제대로 싸울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올무 수천 마리가 덤벼들기라도 한다면 곤란한 일.
아르센의 지시에 바즈칼과 리노가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알겠슴다!”
두 사람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통로 쪽에 배치되어 있던 척후병이 기승수를 몰며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적습! 적습입니다! 정체불명의 무리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 * *
달려오는 올무의 숫자는 약 사십여 마리였다.
칼만 들고 있던 화살 발사기 주변의 올무와 달리, 이들은 석궁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놈들의 체격이 평범한 인간보다 큰 만큼, 그 석궁과 안에 담긴 화살 역시 길고 굵었다.
그 규모와 무장을 보고 아르센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도의 한숨을.
‘좋아. 저 정도면 어렵지 않게 이길 수 있다.’
게릴라의 습격 정도로 여겼는지, 쳐들어온 적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티막과 그의 일행이 저 올무 군대에게 습격당했다면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죽었을 테니 과할 정도로 많은 인원을 보냈다고 해야겠지만, 아르센 일행을 상대로는 아니었다.
설령 티막의 말과 달리 놈들이 마법에 강하다 해도, 저 정도는 아르센이 치고 빠지면서 해치울 수 있었다.
“크으.”
“적, 많다!”
기세 좋게 들이닥친 것도 잠시, 놈들은 아르센 일행을 보고 깜짝 놀랐는지 돌진을 멈추었다.
저들이 마법사의 존재를 간파할 수 있는지는 몰라도, 일단 일반인보다 월등히 큰 체격을 지닌 기사의 존재 정도는 육안으로 식별할 수 있을 터.
전투 인형까지 합치면 열 명이 훨씬 넘는 기사들을 보고 압도당한 모양이었다.
서로 간의 거리는 약 백 미터.
기사와 올무는 서로를 식별할 수 있을지언정 마법의 빛이 닿기에는 조금 먼 거리여서, 평범한 전사나 마법사들은 상대를 볼 수 없었다.
아르센은 재빨리 지시했다.
“마법사들, 전방으로 벼락 공격!”
보이지 않는 적을 공격하라는 지시에 당황한 것도 잠시, 삼십여 명의 마법사들은 일제히 앞으로 손을 뻗었다.
넓은 중앙 통로와 달리, 이 보조 통로의 좌우 너비는 고작 이십 미터 정도에 불과했다.
즉, 이 정도 숫자의 마법사들이 일제히 마법을 쓴다면 적이 보이지 않아도 통로 전체를 뒤덮을 수 있었다.
주문이 만들어지며 손에서 빛이 솟구치자, 올무들 역시 놀라 비명을 지르며 석궁을 겨누었다.
“막앗!”
기사와 전투 인형, 병사들까지 마법사들의 앞에 서서 화살을 막았다. 방패와 무기, 갑옷이 모여 만들어진 철벽.
그 철벽을 향해 사격이 시작되었다.
“큭!”
마치 빗방울이 쏟아지듯, 수십 발의 화살이 퉁퉁거리며 갑옷과 방패를 두들겼다.
관통되지 않았음에도 묵직한 통증을 안길 정도의 물리력에 몇몇 병사들이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뿐, 금속을 뚫고 살점을 뜯어낸 것은 없었다.
누군가가 환희에 차 외쳤다.
“다 막았다!”
다행히도 이들의 화살은 고정된 화살 발사기의 그것처럼 강력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이쪽이 공격할 차례.
마법사들의 손에서 주문이 완성되고, 벼락이 몰아쳤다.
마치 마수 무리를 공격할 때처럼.
대부분이 약해졌을 뿐 목숨은 부지했던 마수들과 달리, 올무들은 벼락 폭풍 아래에서 무력하게 죽어 나갔다.
저 정도 숫자의 올무라면 기사 서너 명 정도는 우습게 죽일 수 있을 것을 생각하면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후우······.”
“끝났나?”
폭풍이 지나간 뒤, 맨 뒤에 있던 살아남은 올무 대여섯 마리가 뒤돌아 도망치려는 것이 보였다.
이를 보며 티막이 외쳤다.
“살려보내선 안 되오!”
그가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언어를 구사하는 지성체들에게 자신의 정보를 노출할 생각은 없었다.
아르센과 다른 기사들이 일제히 진을 몰아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