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ory of a Knight In A Ruined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150)
“정신이 드나?”
누군가의 질문에, 순찰자 우크는 눈을 떴다.
고통으로 흐릿한 시야, 위쪽에서부터 빛이 느껴졌다. 어둠에 익숙한 그의 눈에는 지나치게 밝은 빛.
그들 사이에서 구전으로만 전해져 내려오는 저 바깥 세계, 지상에서 볼 수 있다는 태양이 이런 느낌일까.
횃불조차 밝게 느껴지는 그로서는 괴로울 뿐이었다.
“너무, 밝다······.”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빛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저 다리에서 끈적이는 피가 흐르는 것만이 느껴질 뿐.
귀에서는 끊임없이 고통에 찬 신음과 거친 숨소리가 들려 왔는데, 우크는 시간이 지나서야 그것이 자신이 내는 소리임을 깨달았다.
드디어 눈을 똑바로 떴을 때, 그의 눈에 보인 것은 유감스럽게도 동족이 아니었다.
그들의 왕국을 위협하는 주적, 머리털 달린 짐승들.
금속과 천으로 몸을 두른 그것들 사이에, 검푸른 갑옷을 입은 괴물 하나가 우뚝 서 있었다.
우크는 그 괴물이 자신의 머리를 후려쳤음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말은 할 줄 아는 모양이군.”
* * *
“말은 할 줄 아는 모양이군.”
분명 조금 전, 너무 밝다고 말하는 것을 똑똑히 들었다.
그 억양과 어조가 기괴할지언정, 분명 지상에서 사용하는 언어였다.
내심 언어가 통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기에 놀랐지만, 아르센은 그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본래 심문자는 철저한 무표정을 고수해야 하는 법이다.
“좋아, 더 말해 봐라. 너희는 뭐지? 설마 인간이냐?”
아르센의 질문에 상대는 대답하지 않고 이리저리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아마 여기가 어디인지 확인하고, 혹시 지원군이 오지 않을까 기대하는 모양이었다.
놈에게는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그들은 현재 중앙 통로를 벗어나 근처의 보조 통로로 숨어들어와 있었다.
이 정체불명의 존재들이 더 몰려들 것을 우려한 탓이다.
행여나 이런 놈들이 수백 명 이상 몰려든다면 피해를 보지 않을 수 없을 테니.
잠시 둘러보다 체념했는지, 놈이 얼굴을 늘어트리며 답했다.
“······인간? 아니다, 우리는, 올무. 신의 자손.”
그렇게 대답하는 놈의 얼굴은 인간과 크게 다름에도, 그 표정에서 드러나는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노골적이기까지 한 우월감.
너희는 지금 포로라고, 이 상황에서 뭘 믿고 그렇게 뻗대는 듯한 표정을 짓냐고 따지지는 않았다.
그저 다리에 박힌 창을 가볍게 흔드는 것이면 족했다.
“쿠어어어억!”
“알았으니 그만 웃어. 귀여운 얼굴도 아닌 주제에. 올무라는 건 네 이름이냐? 아니면 네 종족의?”
“종족, 이다. 내 이름은, 우크.”
“좋아, 계속 이렇게 협조적으로 나가자고. 그래서, 왜 우리를 공격했지? 저 물건은 어떻게 만든 거고?”
아르센의 질문에 놈이 눈을 뒤룩뒤룩 굴렸다.
짐작건대, 털어놓을지 버틸지를 고민하는 것이리라.
선택에 도움을 주고자, 아르센은 다시 한번 다리에 꽂힌 창을 빙빙 돌렸다.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말한, 말한다!”
아무래도 아르센의 도움에 크게 감동한 모양이었다.
고문이란 사실 원하는 정보를 얻기보다는 듣기를 원한 정보를 얻게 될 가능성이 더 큰 반쪽짜리 심문 기술 중 하나지만, 지금 그들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다.
다시 창에 손을 얹자, 놈이 기겁하며 입을 열었다.
“너희, 너희 인간들, 침입자다! 우리 왕국!”
그렇게 시작한 설명은 이 족속들 특유의 기괴한 말투 탓에 다소 알아듣기 어려웠으나, 어느 정도 해석할 수는 있었다.
듣기로, 놈들은 이 지하에 나름 큰 왕국 비슷한 것을 세웠으며 심지어 왕까지 있다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아르센 일행과 같은 종족, 즉 인간은 그 왕국을 위협하는 적대 세력 중 하나였고.
“적대 세력 중 하나라고?”
“맞다. 두 다리로 걷는 괴물, 노예, 유용하다. 하지만, 위험하다. 커다란 인간, 강하다.”
그 말의 의미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인간을 노예로 삼아 부리고 있으며, 지하에도 기사가 있다는 뜻이리라.
아르센은 화살을 쏘던 발사기를 턱짓하며 물었다.
“저것도 인간이 만든 거냐?”
“맞다. 너희들, 손재주 좋다.”
아르센은 슬쩍 고개를 돌려 엘로이즈를 보았다.
그녀는 조금 전 중앙 통로에서 그들을 위협했던 발사기를 확인하는 중이었다.
이를 위해 거대한 발사기와 그 부속 부품들을 모조리 뜯어내어 옮겨야 했다.
“엘리, 어때?”
“일단 발사하는 본체는 마법의 힘이 들어가지 않은 순수한 기계장치고, 화살을 운반하고 만들어내는 게 유물이야. 원래 모양은 모르겠지만 엄청나게 정밀하더라. 기계장치 쪽은 뛰어난 장인이 만든 물건이야.”
“장인이라······그보다, 화살을 만든다고?”
“맞아. 암석이나 토양을 변형해서 화살로 만들어내는 마법이 걸려 있더라. 짐작이지만······비교적 최근에 만든 유물 같아.”
쉼 없이, 컴퓨터 게임의 무한 탄창이라도 되는 듯 날아오던 화살의 정체가 그런 것이었을 줄이야.
말 그대로 땅 파서 나오는 화살을 쏘아대고 있었으니 그 자리에서 천년만년 버텨봐야 의미가 없을 터였다.
이쪽에서 적극적으로 반격한 것이 정답이었던 셈이다.
“우리가 활용할 수는 없을까?”
“힘들어. 일단 놈들이 중요한 부품을 망가트려 놓기도 했고, 애초에 한 자리에 고정해 놓고 사용하는 것을 전제로 만들어진 물건이야. 너무 크기가 커. 금속은 꽤 단단하긴 한데, 그렇게 희귀한 소재도 아닌 거 같고······.”
엘로이즈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어 부정했다.
그 말대로 이 화살 발사기, 그리고 세트가 되는 유물의 크기는 지나치게 컸다.
아르센을 비롯한 기사 몇 명이 힘을 더했음에도 열 명 이상이 들어야 했을 정도.
이런 걸 들고 다니면서 사용할 수는 없고, 뜯어내어 활용할 구석도 없다면 결론은 하나였다.
“그러면······가질 수 없다면 부숴야지.”
이것이 올무들의 손에 다시 들어가 수리된다면 다시 위협적인 병기가 될 터.
아르센이 손짓하자, 바즈칼과 리노가 망치를 들었다.
“힘 좀 써볼까!”
“합!”
바즈칼이 망치를 휘두르자 쾅, 하고 굉음이 울리며 발사기의 중심축 하나가 으스러졌다.
그것을 시작으로, 두 사람은 신명 나게 망치를 놀려 발사기를 부수기 시작했다.
섬세한 부품 하나하나를 으스러트려 아예 재활용할 여지가 없도록, 철저하게 파괴했다.
“부, 부수지 마라! 귀한 거다!”
그 모습을 보며 올무, 우크가 경악한 듯 외쳤다.
그 얼굴에서 묻어나는, 뭐 이런 무식한 족속들이 다 있냐는 듯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이를 무시하며, 아르센은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너희들의 왕국은 어느 정도 크기지? 올무는 몇 마리나 있고?”
“숫자······어렵다. 매우 많다. 크기, 엄청 크다. 왕국 끝, 반대쪽 끝, 가려면 먹이 수백 번 먹어야 한다.”
이 미개하기 짝이 없는 답변에 가벼운 고문까지 더해가며 캐물었으나, 놈은 만족스러운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지하 공간이라는 특성상 하루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시간을 표현하는 단위도 정립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놈들이 먹이를 하루에 몇 번을 먹는지 알 도리가 없으니, 먹이를 수백 번 먹으며 가야 하는 거리가 어느 정도인지도 알 수 없었다.
“인간들의 위치는 아나?”
“노예들, 우리 왕국의 심장, 야생 인간, 모른다. 그것들, 우리들, 숨는다.”
아무래도 노예 인간들은 이 올무의 왕국 수도에 있으며, 노예가 아닌 인간들은 올무들에게서 숨어 살기에 위치를 모른다는 듯했다.
그렇게 수십 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심문한 끝에 그럭저럭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마침내 아르센이 질문을 마치고 물러나려 하자, 놈이 다급히 물었다.
“내 동료, 살았나?”
그 질문에 아르센은 자기도 모르게 놀라고 말았다. 이 괴물들에게도 동료애가 있었나 싶었기에.
“······그래, 살아 있기는 하지.”
너무 머리를 세게 때렸는지 아예 일어나지도 못하고 제대로 대화할 수도 없게 되었지만, 어쨌든 살아 있기는 했으니까.
* * *
리노를 옆에 두어 놈을 감시하게 한 뒤, 아르센은 대책 회의를 열었다.
이번에 알아낸 정보를 공유한 뒤, 앞으로 어떻게 할지를 논의해야 했다.
“아무래도 저 올무라는 놈들이 이 지하 통로를 점거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수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수백 명에서 수천 명은 되는 거 같더군요.”
“그 정도라면······.”
모두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비록 올무와 제대로 싸워본 것은 아르센 한 명이지만, 저 화살 공격이 얼마나 무시무시했는가는 똑똑히 맛본 탓이다.
수십 명의 기사와 병사, 마법사들이 화살 발사기를 돌리는 올무 세 마리 때문에 통로 하나를 지나가지 못하고 엎드려 있어야 하지 않았던가.
그런 그들에게 아르센은 긍정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 화살 발사기, 그렇게 흔한 장비는 아닌 모양입니다. 설치할 수 있는 곳도 제한적이고요.”
그 말에 모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발사기만 없다면 그리 크지 않은 마수에 불과하니 수백 마리 정도라면 어떻게든 되지 않겠느냐고,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아르센은 찬물을 끼얹었다.
설령 전의를 잃더라도, 상대를 과소평가하다 죽는 것보단 나을 테니까.
“하지만 놈들의 신체 능력 자체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일단 평범한 병사들은 일대일로 상대할 수 없을 거고, 대여섯 마리 이상이 덤벼든다면 기사라고 해도 위험합니다. 열 마리 이상이면 기사라고 해도 확실히 죽을 것이고.”
그렇게 말한 뒤, 덤덤히 덧붙였다.
“저라도 놈들 수백 마리가 동시에 덤벼든다면 죽을 겁니다. 아무래도 체력에 한계가 있으니까요.”
“으음······.”
“설마, 아르센 경조차.”
아르센의 압도적인 무력을 알고 있었던 만큼, 그조차도 엄청난 숫자 속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말에 모두가 침울한 기색을 띠었다.
물론 아르센 혼자서 끊임없이 치고 빠지면서 게릴라전을 하다 보면 언젠가는 다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본대가 습격당해 위기에 처한다면 그 역시 도망가지 못하고 계속 싸워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해 보면, 안전하다고 할 수도 없었다.
잠시 침묵.
무거운 침묵 속에서, 아르센은 본론을 꺼냈다.
“저희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습니다. 첫째로는 이대로 저 왕국을 돌파하거나 몰래 우회하는 것이고, 둘째로는······.”
말을 멈추고 위쪽을 올려다보자, 라티스가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듯 말했다.
“지상으로 돌아가서, 남부 왕국을 돌파한다는 거군요.”
“네. 적어도 그들은 영지나 성채에 갇혀 있을 테니까요. 이 지하 통로에 비해 저희에게도 익숙한 환경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두 선택지 중 어느 한쪽이 낫다고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본래 지하 통로를 이용하는 이유는 지상으로 갔다가 거인왕과 그의 병사들에게 들켜 공격당할 것을 우려한 탓이었는데, 지하에서도 비슷한 수준의 위험을 겪어야 한다면 우회 자체가 그 의미를 잃는 셈이다.
호랑이를 피하려다 곰을 만나는 꼴이니.
“일단 좀 생각해 보죠. 당장은······.”
그때, 저 멀리에서 아르센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르센 경!”
고개를 돌려 보니, 마룬이 다가와 있었다.
그는 중앙 통로 근처에서, 혹시 다가올지 모를 적의 지원군을 경계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사람입니다,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 * *
아르센은 바즈칼과 아눈 두 명을 대동하여 통로를 향해 달렸다.
기사 세 명이 전력으로 진을 모는 탓에 그 속도는 질풍과도 같았다.
“이거 복잡해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달리는 도중 아눈이 외치듯이 말했다.
그 말대로, 그들은 추적을 피하고자 보조 통로를 세 개쯤 바꿔 가며 안쪽으로 파고든 상태였다.
이리저리 꼬인 데다 길의 모양도 비슷한 탓에, 길을 잃지 않을까 하는 것은 괜한 우려가 아니었다.
“괜찮습니다! 길은 다 외웠으니까요!”
그렇게 대답할 때쯤, 마침내 보조 통로가 끝났다.
세 기사는 벽에 숨어 조심스레 올무들이 주둔해 있던 곳을 살폈다.
‘강해 보이는데.’
그들의 구성은 생각보다 충실했다.
차림새는 마수 가죽으로 보이는 것을 걸친 추레한 모양이나 기사가 두 명이나 있었으며, 다른 열 명 역시 잘 단련된 전사로 보였다.
기사 두 명은 창이나 검을 들고 있었고, 다른 일반인들은 큼지막한 석궁을 들고 허리에 검을 차고 있었다.
일단, 지금 전력으로도 이길 수 있는 수준으로 보였기에 아르센은 직접 부딪쳐보기로 했다.
“가보죠.”
그렇게 선언한 뒤, 아르센은 천천히 흑사자를 몰아 그들에게 다가갔다.
다가가는 아르센의 기척을 느꼈는지, 기사 둘이 먼저 무기를 겨누고 다른 전사들 역시 석궁을 겨누었다.
그들은 아르센의 모습을 보고 크게 당황한 듯했다.
“아니······.”
햇빛을 보지 못한 탓인지 창백한 피부, 영양을 골고루 공급받지 못한 탓인지 전체적으로 얼굴이 퀭했다.
눈까지 휘둥그레 뜨고 있어, 그 얼굴이 참으로 기괴하게 보였다.
“당신들은 대체······? 설마 올무 놈들의 노예요?”
이들의 억양 역시 그 올무라는 놈들과 비슷했다. 그나마 놈들 특유의 뚝뚝 끊어지는 말투는 쓰지 않아서 다행이라 해야 할까.
어쩌면 올무는 인간들에게 언어를 배운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그 반대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