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ory of a Knight In A Ruined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152)
살아남은 올무들과의 전투는 시시했다.
일단 숫자도 얼마 없는 데다, 놈들이 거의 폭탄처럼 터져 나온 벼락의 파도를 맞고 전의를 잃었던 탓이다.
아르센과 기사들은 도망치는 올무들의 뒤통수와 등에 망설임 없이 무기를 꽂아 넣었다.
기사들이 살아남은 놈을 도륙하는 동안, 병사들은 기승수를 타고 주위를 돌며 도망가는 놈이 없도록 촘촘히 포위망을 구성했다.
“쿠억!”
도끼의 바람 칼날에 걸려 날아가는 목.
아르센은 단순히 상대를 쓰러트린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철저하게 머리를 자르고 심장을 찔러 숨통을 끊었다.
다른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
뭘 모를 때야 이것들을 살려서 써먹어 보려고 했지만, 그저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동족들을 부른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그럴 수는 없었다.
거기다 언어가 존재하는 놈들의 특성상, 한 마리라도 살려 보낸다면 그들 일행에 대한 정보가 모두 넘어갈 터.
집요하게 마지막 한 마리까지 모두 죽이고서야, 기사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다 죽인 건가? 도망친 놈은?”
“없습니다. 제가 맨 끝에 있던 놈을 죽였거든요.”
아눈이 자신만만하게 말하며 웃었다.
그의 창은 한 올무의 가슴을 꿰뚫고 있었는데, 그 안쪽에서부터 수십 갈래의 가시가 솟구쳐 신체 내부를 난자해 놓은 탓에 끔찍한 꼴을 하고 있었다.
그도 잠시, 창을 이리저리 조작하자 튀어나와 있던 가시가 쑥 들어가, 그제야 창을 뽑을 수 있게 되었다.
“쓸수록 맘에 든단 말입니다, 이 창.”
흐뭇하게 웃는 모습과 걸레짝이 된 올무의 시체는 참으로 어울리지 않았지만, 아르센은 그냥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티막을 향해 고개를 돌려 물었다.
“이곳은 피가 너무 흘러서 머무르기 적합하지 않을 것 같군요. 올무들이 더 몰려올 것 같기도 하고. 혹시 머무르기 좋은 곳을 추천해주실 수 있습니까?”
이를테면 당신들의 본거지라던가, 라는 말은 굳이 직접 입 밖으로 낼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아르센의 암시를 알아들었는지 티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는 두려워하면서도 기뻐하는, 기묘한 표정이 어려 있었다.
“우리들의 터전으로 안내하겠소. 여기서는 조금 멀지만, 다들 저걸 타고 있으니 금방 갈 수 있을 거요.”
그가 가리킨 것은 아르센 일행의 병사와 마법사들이 타고 있는 기승수였다.
여러 지역을 돌며 모은 탓에 산양, 말, 늑대 등 온갖 모양새는 다 모아 놓은 기승수들.
이 뛰어난 탈것 덕분에 그들은 많은 수의 노약자를 대동하고도 빠른 속도로, 오래 움직일 수 있었다.
덤으로 지하에서도 태양의 움직임에 영향을 받는지 일정 주기마다 잠에 빠져, 밤낮을 구분하며 날짜를 가늠할 수 있게 해주기도 했다.
“좋습니다. 부탁드리죠.”
* * *
지저인의 본거지로 가는 길은 꽤 복잡했다.
보조 통로에서 또 보조 통로로, 거기서 또 다른 보조 통로를 쉼 없이 가로질러야 했다.
가는 동안 지도를 만들어 대충 기록을 남겼기에 그럭저럭 돌아가는 것은 가능할 것 같으나, 제대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현지인 길잡이가 필요할 것 같았다. 아니면 여기서 오래 활동하며 직접 익숙해지거나.
지도를 그리는 것은 다른 이에게 맡겨야 했는데, 아르센에게는 또 다른 업무가 있었던 탓이다.
이 지저인들의 대장, 티막과의 대화였다.
“궁금한 게 있소만.”
“말씀하시죠.”
“어떻게 내려온 거요? 지상으로 가는 길은 저 앞쪽, 올무의 영역 너머에 있다고만 전해질 뿐인데, 정말 그쪽에 지상으로 통하는 길이 있소? 하다못해, 올무의 영역을 통과하는 방법이라도.”
표정이 꽤 간절한 것이, 방법만 안다면 당장에라도 지상으로 나가고 싶어 하는 듯했다.
아르센은 고개를 저으며 그의 기대를 부정했다.
“저희는 북쪽에서 왔습니다. 아마 당신들이 말하는 올무의 영역과는 반대 방향일 겁니다.”
“북쪽이라고? 그게 어느 쪽이오?”
좀 더 이야기를 나눠 보니 이곳에서 방향이란 중앙 통로를 기준으로 정하는 것으로, 남쪽으로 가는 것이 앞쪽이고 북쪽으로 가는 것이 뒤쪽인 모양이었다.
이런 지식을 통해 기준을 잡아, 아르센은 지저인들이 이해할 수 있게 풀어 설명했다.
“그러니까, 저희는 아까 그 큰 통로를 통해, 여기보다 훨씬 더 뒤쪽에서 왔습니다. 꽤 멀리서요.”
아르센 일행이 북쪽에서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티막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쪽으로 간 사람 중 돌아온 이가 없었소. 그래서 후방의 경계 너머까지 가는 건 금기 중 하나였지. 심지어 올무 놈들도 그쪽으로는 함부로 가지 않아서 올무보다도 무서운 놈들이 산다고 믿었는데······.”
“그러고 보면, 후방에는 독기가 남아 있긴 하더군요.”
“독기?”
티막이 아예 그 개념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기에, 아르센은 친절하게 설명했다.
그들이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지상의, 대기(大氣)를 가득 채운 오염된 기운에 관한 이야기를.
“아마 뒤쪽으로 깊이 들어간 사람들은 독기를 쐬어 죽었을 겁니다. 기사나 단련된 전사는 독기를 이겨낼 수 있습니다만.”
“뒤쪽으로 갔던 이들 중에는 수호자도 있었소.”
“그렇다면······어쩌면 티막, 당신과 다른 지하 사람들은 아예 독기에 내성이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으음.”
어쩌면 이들이 마수의 피를 마셔도 약탈자가 되지 않는 것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이들의 모체가 되는 전투 인형의 차이 때문일수도 있고.
사실 애초에 독기 문제가 없었더라도 아르센 일행의 목적지는 남쪽이라, 그들을 위해 문을 열어주기 위해 북쪽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그런가, 지상은 정말 전설로 내려오는 것처럼 지옥 같은 곳인 모양이군······.”
티막과 동료들의 얼굴이 퍽 어두운 것이, 내심 아르센 일행을 보고 지상에서의 삶을 기대했던 모양이었다.
잠시 후, 티막이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당신들은 무엇 때문에 지하로 왔소? 당신들이 말하는 그 독기를 피해서 온 거요?”
“아니요, 딱히 그런 건 아닙니다.”
아르센은 자세한 내용은 설명하지 않고, 그저 이 지하 통로를 이용해 지상의 위협을 피해 목적지까지 가려 한다는 것만을 알렸다.
그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듣고, 티막은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라면······확실하군. 당신들이 목적지까지 가려면 올무의 영역을 지나야 할 거요. 이 앞쪽으로 가다 보면 작은 길을 통해서는 지나갈 수 없는, 큰길을 지나야만 하는 구역이 있는데 거기가 바로 올무의 영역이니까.”
티막은 간단한 지도까지 그려주며 이해하기 쉽게 설명을 도왔다.
아르센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이 정보가 사실이라면, 지하 통로를 지나기 위해서는 올무들과 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기에.
“그 올무라는 놈들, 얼마나 있습니까?”
“모르겠소. 놈들의 특성상 포로로 잡아두기도 마땅찮으니 어떻게 정보를 캐낼 수도 없고······.”
그렇게 말하더니, 자신 없는 어조로 덧붙였다.
“놈들이 각 구역의 정찰병이나 경계병은 몇 마리씩만 배치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 수가 엄청나게 많지는 않은 것 같소. 기껏해야 수천, 혹은 만 마리 정도일까.”
“그 정도라면······생각보다는 괜찮군요.”
수십만 마리가 넘는 올무들이 주둔하고 있다면 그냥 지상으로 돌아갈 생각까지 하고 있었건만, 그 정도라면 치고 빠지는 게릴라 전술로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인간이라면 몰라도, 올무들은 딱히 기승수같은 걸 타지도 않는 만큼 기동력이라면 아르센 일행이 우월할 테니까.
거기다 그들은 올무의 천적이라고 할 수 있는, 압도적인 마법사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일단 이들의 본거지에 머물면서 정보를 좀 더 모아야겠군.’
티막이 거짓말을 하거나 잘못 알고 있을 가능성도 있으니, 다짜고짜 올무와 싸우겠다고 정할 필요는 없었다.
우회할 수 있는 길이 있을 수도 있고, 올무의 숫자가 생각보다 훨씬 많을 수도 있으니.
이후, 아르센은 계속해서 티막과 대화를 나누었다.
지하 세계의 여러 상식, 그들의 생활 방식과 정보를 습득하기 위하여.
“그 석궁, 직접 만드는 겁니까?”
“맞소. 옛날에 어떤 장인이 발명한 건데, 올무 놈들을 해치우기 딱 좋은 무기라서 애용하고 있지. 유감스럽게도 올무들이 인간 장인 몇 명을 납치한 이후에는 놈들 역시 석궁으로 무장하게 됐지만 말이오.”
정작 지상에서는 대형 마수들의 존재 탓에 석궁은커녕 활조차 사냥용 무기 수준으로 전락했건만, 올무라는 인간과 비슷한 크기의 주적 때문에 이런 무기가 발달한 것일까.
“이 지하에 인간은 얼마나 있습니까?”
“우리도 모르오. 다 같이 모여 사는 게 아니라 크게는 공동체 단위로, 작게는 가족 단위로 나뉘어서 살기 때문에······아마 우리도 다 모이면 수천 명 정도는 될 거요. 그보다는 좀 적을 수도 있고.”
티막은 인간들이 여러 집단으로 잘게 쪼개져 방대한 보조 통로 여기저기에 흩어져서 살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마법사가 속한 집단은 우월한 대접을 받는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다음으로는 기사, 이들의 말로는 수호자가 있는 집단이 대접을 받으며 기계장치 등을 능숙하게 만들어내는 집단은 다른 집단의 보호를 받는 대신 석궁이나 기타 유용한 도구를 제공한다고.
‘숫자 자체는 비슷하지만······인간 쪽이 종(種)으로서는 훨씬 약하지. 비슷한 수라면 밀릴 수밖에 없어.’
짐작건대, 올무 한 마리가 평범한 인간 전사 열 명은 감당할 수 있을 터였다.
거기다 놈들은 야간 시야가 뛰어난 만큼, 이런 어둠 속에서라면 일방적으로 석궁 사격을 당해야 할 터.
인간들이 왜 밀려난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런 것도 있소. 보시오. 시간을 알려 주는 물건이지.”
그가 내민 것은 놀랍게도 회중시계였다. 해를 볼 수 없는 환경에서 시간을 무엇을 기준으로 계산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단하군요.”
지상에도 이런 물건은 없건만, 적은 숫자에다 그마저도 흩어져서 살아가는 지저인들이 이런 높은 기술력을 갖췄다는 사실에 아르센은 순수하게 놀란 감정을 표현했다.
그런 아르센을 보며 티막이 자랑스럽게 웃었다.
“하지만 올무 놈들의 기술도 얕볼 수 없소. 어떻게 만드는지는 도통 모르겠으나, 올무들은 마법의 힘이 담긴 물건을 만들 수 있거든.”
“유물 말입니까?”
“유물? 그렇게 부르나? 어쨌든, 당신이 입은 갑옷 같은 그런 물건 말이오.”
그 말을 듣고, 아르센은 엘로이즈의 말을 떠올렸다.
화살 발사기와 한 세트로 존재하는, 대형 화살을 만들어내는 유물은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했던가.
아무래도 올무들은 영구 지속형 유물을 만들 수 있는 듯했다. 아직 지상 인류의 마법 기술이 일회용 유물을 만드는 수준에 그친다는 점을 생각하면 놀라운 성취였다.
거기다 그들에게 부족한, 기계를 다루는 공학적 지식은 인간 노예를 이용해 보충하는 모양이고.
“올무 중에도 마법사가 있습니까?”
“못 봤소. 아마 없거나, 있더라도 놈들의 본거지에서 마법이 담긴 물건을 만들기만 하는 모양이오.”
아르센은 고개를 끄덕이며 정보를 머릿속에 담았다.
그리고, 미뤄두었던 질문을 하나 더 꺼냈다.
“저희가 가는 곳에는 몇 명이 살고 있습니까?”
“백 명 정도요. 이 근방에서는 가장 큰 무리에 속하지. 그리고 본거지를 지키는 수호자가 한 명 더 있소.”
얕보이기 싫다는 듯 덧붙인 말에 아르센은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으나, 내심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백 명 중 기사가 세 명이라니, 수만 명이 살아가던 벨루안에서 기사가 고작 십수 명이었음을 생각해 보면 굉장히 높은 비율이었다.
하기야, 이곳의 인간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매일매일을 생존 투쟁으로 보내는 만큼 일부 전사 계급만이 수련을 쌓는 벨루안과 비교하기는 힘들 터였다.
아니면 이쪽 인간들이 조금 더 기사로 각성할 확률이 높은 것일 수도 있고.
그때, 아르센을 보며 티막이 농담하듯 말을 던졌다.
“그러고 보면 바깥에도 보석 눈의 혈통이 사는 모양이구려. 사실 그 눈 때문에 나는 처음에 당신들이 우리와 같은 지하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소.”
“보석 눈? 그게 뭡니까?”
“음? 그야······당신과 같은, 특이한 눈을 가진 사람을 말하는 거요. 이 지하에도 그런 눈을 가진 집단이 있거든.”
아르센의 보라색 눈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벨루안을 비롯한 동부 지역은 물론, 세상 어디를 둘러봐도 찾기 힘든 색상이었다.
서부에는 자안(紫眼)이라고 할 만한 색상이 드물게 있었으나 사실 짙은 푸른색 눈이 주위의 빛을 받아 보라색으로 보일 뿐, 언제 어디서 봐도 제비꽃처럼 진한 보랏빛을 띠는 아르센의 눈과는 달랐다.
아르센은 최대한 동요한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혹시 그들을 한번 만나볼 수 있겠습니까?”
“그들에게 관심이 있소? 워낙 폐쇄적인 작자들이라 장담할 수는 없지만······내 한번 주선해보겠소. 어차피 조만간 여러 집단에 그대들을 소개할 생각이니.”
그렇게 말하던 중, 앞에서 무언가 금속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깡통을 차는 것 같은 경쾌한 소리.
그러자 통로 앞쪽에 있던 장애물 몇 개 사이에서 순식간에 석궁 두 개가 튀어나왔다.
“정지!”
“이이, 인간이면 대답해라! 대답 안 하면 쏜다!”
놀랍게도 윽박지르는 목소리는 어린 소년과 소녀의 그것이었다. 기사 특유의 시야 덕에, 아르센은 상대의 얼굴을 확실하게 포착할 수 있었다.
기껏해야 십 대 초중반 정도일까, 두 경계병은 들고 있는 석궁이 버거워 보일 정도로 어렸다.
그런 그들을 향해, 티막은 반가움을 가득 담아 대답했다.
“경계 잘 서고 있었구나. 라타, 오루.”
“티막 아저씨?”
“올무를 물리치고 돌아온 거야?”
반가워하는 한편, 갑자기 소녀가 뛰어 나가려던 소년의 어깨를 붙들고는 정색하며 말했다.
“티막 아저씨의 목소리를 훔친 괴물일 수도 있어. 두더지 뱃살!”
“두더지 뱃살은 황색이끼 가루를 넣어 삶는 것이 최고지. 내가 먹기에는 좀 싱겁지만 말이다.”
“아저씨!”
아르센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대화를 통해 진짜라고 확신했는지, 두 소년 소녀가 석궁을 내려놓고 달려왔다.
티막은 두 어린아이를 각각 한쪽 팔로 안아 들어 올린 뒤 빙빙 돌았다.
꺄르륵 웃으며 신나게 몇 바퀴를 돈 뒤에야 내려온 소년과 소녀는, 그제야 티막의 뒤에 선 사람들을 보았는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이 사람들은 다 어디서 왔어? 다른 무리?”
그 질문에, 티막은 유쾌하게 웃으며 답했다.
“아니, 이 사람들은 지상에서 왔단다.”
두 어린아이는 입을 쩍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