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ory of a Knight In A Ruined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65)
군주와 기사들의 싸움은 다른 병사와 약탈자들이 함부로 끼어들기 힘든, 신화적인 영역의 싸움이었다.
땅을 내리치면 작은 지진이 일어난다고 느껴질 정도로 거대한 존재와 맞서는 것이니 당연한 일.
그렇기에 그들이 싸우는 곳은 약탈자도 병사가 싸우는 곳에서 수백 미터는 떨어져 있었다.
잠시 진영에서 떨어져 군주와 기사들의 싸움을 관찰하던 아르센에게 엘로이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때?] [안 좋아, 굉장히.]분명 군주를 무찌르기 위해 처음 달려들었던 기사는 여섯 명, 그리고 지금 남은 기사는 여전히 여섯 명이었다.
한 명도 죽지 않았나, 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주위에 널브러진 시체 몇 구가 그 사실을 부정했다.
약탈자와 싸우던 기사들이 합류해 숫자를 채웠을 뿐, 이미 상당수의 기사가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이쪽 상황은 거의 정리가 끝났고······.’
남은 약탈자들은 이제 그 수가 병사들보다도 적어 위협이 된다고 보기 어려웠다.
마인 역시 다른 기사들이 해치웠는지 더 찾아볼 수 없었고.
마법사 부대는 마력을 모두 소진해 번개를 뿌릴 수 없게 되었지만, 그들은 마법사이기 이전에 강력한 마법 무구로 무장한 전사들이었다.
엘로이즈의 보호 아래서 싸우기만 한다면 목숨을 잃지는 않으리라 생각됐다.
다시 진영으로 돌아온 뒤, 아르센은 바즈칼을 불러 지시를 내렸다.
“군주 사냥을 도우러 가야겠다.”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대답하는 바즈칼의 얼굴에 다소 겁먹은 기색이 어려있음을 읽기는 어렵지 않았다.
하기야, 저 멀리서도 들려오는, 천지를 울리는 굉음 아래서 그 누가 겁을 먹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르센 역시 전혀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현재 상황상, 군주를 잡지 못하면 이 싸움 자체가 무의미해진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을 뿐.
결국 저 군주를 사냥하지 못한다면, 놈은 산맥 서쪽에서 다시 무리를 꾸릴 것이다.
세상은 넓고, 약탈자와 마인은 어디에나 널려 있으니.
서쪽으로 넘어간 뒤, 도와줄 아군이 없는 상태에서 저 괴물을 다시 만나는 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위험해도 해야 할 일은 해야지. 마룬 경, 이곳 지휘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쇼!”
마룬이 활을 흔들며 씩 웃었다.
저 대책 없는 유쾌함에 조금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아르센은 엘로이즈에게도 당부의 메시지를 보냈다.
[병사들을 잘 부탁해. 몸조심하고.]전장 통제에 능한 엘로이즈가 있기에 병사들을 맡기고 떠날 수 있었다.
마룬 역시 기사로서 제법 도움이 될 테지만, 엘로이즈처럼 많은 병사를 보조하는 능력은 없었으니.
[절대 무리하지 마! 빨리 여기 정리하고 도우러 갈 테니까!]엘로이즈의 말에 아르센은 씩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 * *
“저게 대체······가까이서 보니까 더 어이가 없네요.”
자신감을 잃은 듯한 바즈칼의 목소리.
이를 무시하고, 아르센은 군주의 상태를 관찰했다.
다행히 죽은 기사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는지 군주는 몸 여기저기에서 피를 쏟아내고 있었다.
군데군데 누군가의 무기가 박혀있기도 했다.
워낙 체구가 큰 탓에 그것이 유효한 타격일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도우러 왔습니다!”
기사들의 기세를 북돋고자 소리치며, 아르센은 바즈칼과 함께 돌격했다.
그때, 다쳤는지 옆구리를 감싸 쥐고 주저앉아 있던 기사 한 명이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기승수에서 내리십시오! 녀석 앞에선 쓸모 없······?”
소리치던 기사는 이어지는 광경에 자기도 모르게 말끝을 흐렸다.
당연하게도, 생물이 아닌 아르센의 진은 전혀 군주에게 겁먹지 않고 나아간 탓이다.
바즈칼의 거대 호랑이가 멈춰 선 것과는 별개로.
먼저 전진한 아르센은 조금 전 진영에서 떠나기 직전 가져온 무기를 바꿔 들었다.
평상시에는 잘 들고 다니지 않는, 대형 마수에게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4m짜리 장창.
그중에서도 엘로이즈가 직접 마법을 부여한 폭발창이었다.
“저자는?”
“동부 기사다!”
다른 기사들의 외침이 귓가로 들려오는 가운데, 아르센은 정확히 창을 조준한 채 진의 속도를 높였다.
기승수를 타지 못한 다른 기사들과 진에 탄 그의 속도는 차원이 달랐다.
잠시 군주의 시선이 돌아간 틈을 타, 아르센의 창이 군주의 몸통 한곳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
다른 공격에 비해 꽤 고통스러웠는지, 군주가 짧게 비명을 내지르며 아르센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눈에 담긴 흉악한 분노에 저절로 다리가 떨려오는 것이 느껴졌지만, 아르센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창에 마력을 최대한 주입한 뒤 물러섰다.
잠시 후, 요란한 소리와 함께 창이 폭발했다.
■■■■■■■■———!
이번 비명은 조금 전과 비교할 수 없이 거대하고 길었다.
혹시 몸통이 잘려 나가지 않을까 하는 희망적인 기대를 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정도 타격은 주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 얼마나 강인한 육체와 항마력인지, 폭발창을 깊숙이 찔러넣고 터트렸음에도 군주의 몸통에 남긴 흔적은 하찮기 그지없었다. 고작 한쪽 살점이 푹 패였을 뿐.
안에서는 하얗게 빛나는 건재한 골격이 드러나 육체적 강인함을 과시했다.
이것이 상급 마수조차 일격에 해치웠던 물건임을 생각하면 경악스러운 일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아르센이 맞서 싸우고 있는 상대는 이쪽의 공격을 가만히 서서 맞아주는 허수아비가 아니었다.
군주는 통증을 느낀 방향을 향해 거대한 꼬리를 휘둘러, 대지를 통째로 쓸어내리는 방식으로 화답했다.
“온다-!”
“뛰어서 피해라!”
군주를 공격하던 다른 기사들의 비명을 들으며, 아르센은 진을 조종해 최대한 높이 도약했다.
발밑으로 매서운 풍압이 지나감과 함께, 어마어마한 양의 흙먼지가 일어나 온 세상을 덮었다.
결국 아르센이 땅에 다시 착지했을 때, 주변은 연막탄이 터진 것과 다름없는 환경이 되어 있었다.
육안으로 무언가를 식별할 수 있을만한 상황이 아니었지만 아르센은 적의 모습을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마법 투구로 보는 시야 속에서, 강대한 마력이 들어찬 군주의 육체가 그 무엇보다 빛났던 탓이다.
다행히 군주 역시 흙먼지 사이를 식별하는 능력은 없는지 머리를 이리저리 돌리며 자신에게 접근하는 이가 있나 확인하는 모습을 보였다.
잠시 주위를 확인하던 아르센의 시야에 기사 두 명이 보였다. 수상하게도, 기사 한 명이 다른 기사의 뒤쪽에서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었다.
‘뭐야?’
아르센은 즉시 진을 몰아 그쪽을 향해 달렸다.
* * *
“이런 썅, 뭔 먼지가······.”
겁에 질린 거대 호랑이를 뒤에 남겨둔 뒤, 바즈칼은 직접 달려 군주의 앞까지 도착했다.
마침 군주가 꼬리를 한 번 휘둘러 어마어마한 흙먼지를 일으킨 시점에서.
당연하게도, 아르센처럼 마법 투구도 없는 그로서는 전혀 주위를 식별할 수 없었다.
“형님! 어디 계십니까? 형님!”
바즈칼은 크게 소리쳐 아르센을 불렀다.
어차피 한참 멀리 떨어진 군주가 그의 목소리를 들을 것 같지도 않았기에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그때, 뒤에서 조심스럽게 걸어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보통은 이런 소란스러운 환경에서 발소리 따위를 인식할 수 없겠지만, 본래 사냥꾼 출신이었던 만큼 바즈칼은 이런 부분에서는 대단히 예민한 편이었다.
즉시 고개를 휙 돌리자 보인 것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멈춰 선 기사였다. 조금 전 기승수를 두고 오라고 경고했던.
“다치진 않으셨습니까?”
“음? 아, 네. 뭐.”
다치지는 않았냐고 물어보며 당당히 걸어오는 기사의 모습에서 바즈칼은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차려입은 갑옷, 느껴지는 마력까지. 이상한 것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그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기도 전, 다가온 기사가 어깨너머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기, 저건 도대체 뭡니까?”
“네?”
바즈칼은 기사가 가리킨 곳을 돌아보고자 몸을 돌렸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투창이 날아와 바즈칼의 옆을 지나쳤다.
“어?”
날아온 투창은 곧바로 기사의 어깨에 꽂혔다.
단단하기 그지없는 합금 흉갑을 천옷처럼 가볍게 꿰뚫고.
기사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높이 들어 올렸던 검을 떨어트렸다.
“아니, 어떤 새끼가!”
바즈칼이 경악한 것도 잠시, 흙먼지를 뚫고 기사 하나가 나타났다. 흑성철 갑옷에 진을 탄 기사, 아르센이었다.
“형님?”
“떨어져!”
아르센의 고함과 함께 바즈칼은 재빨리 고개를 숙이며 옆으로 굴러 거리를 벌렸다.
덕분에 옆에 있던 기사가 휘두른 일격은 허망하게 머리 위를 스쳤다.
이후, 기사의 온몸을 뒤덮고 있던 갑옷이 꾸물거리고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고통 때문에 원래 형상을 유지하기 어려운 것처럼.
‘이런 거였나?’
그 모습을 보며, 아르센은 며칠 전 키라트가 이야기했던 ‘인간을 흉내 내는 마인’이 이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갑옷 모양새까지 바꿔가며 흉내 낼 수 있는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지만.
마력 자체는 기사와 비슷한 방식으로 돌아가는 탓인지, 아르센의 마법 투구로도 놈의 정체를 간파할 수 없었다.
대놓고 등 뒤에서 칼을 휘두르려는 자세를 취하지 않았다면 반신반의해서 타이밍을 놓쳤으리라.
“뒤통수치려다 딱 걸렸군.”
“아니, 도대체 어떻게 된······?”
그제야 바즈칼은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분명 조금 전만 해도 다친 것처럼 주저앉아 있던 기사가 멀쩡한 모습으로 접근해 온 것이다.
조금 전에는 아르센을 급히 따라간다고 미처 도와줄 생각을 못 하고 무시해 버렸지만, 아마 돕는답시고 부축해주거나 했으면 바로 옆구리에 칼침을 맞았을 것이다.
조금 전 검을 든 자세에는, 뒤에서 바즈칼을 몰래 베어버리겠다는 의도가 명확히 담겨 있었으니.
“이런 썅, 뭐 이런 하찮은 수작에······.”
속임수라기도 우스운 방법에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그리고 꼼짝없이 당할 뻔했다는 오싹함에 바즈칼은 분통을 터트렸다.
“잠깐, 기다리십시오, 지금 뭔가 오해가!”
가짜 기사가 말도 안 되는 변명을 주워섬기려던 순간, 이미 아르센은 진을 타고 돌진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진이 앞발을 들어 검을 든 팔과 몸통을 찍어눌러 무력화시켰고, 아르센의 검이 내리찍혔다.
입안으로 파고든 검이 연수를 꿰뚫으며, 가짜가 어떤 헛소리로 현혹하려 했는지는 영원히 알 수 없게 되었다.
한 번 버르적거린 뒤, 가짜 기사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혹시 모르니 확실하게 죽여놔. 이상한 오해 받으면 곤란하니까 머리통은 따로 떼놓고.”
“알겠습니다!”
얼른 일어나 시체를 향해 분노에 찬 검격을 날리는 바즈칼을 뒤로 한 채, 아르센은 다시 군주에게 시선을 돌렸다.
조금 전 흙먼지가 일어나자마자 절묘한 타이밍에 가짜 기사가 접근했던 것으로 보아, 애초부터 계획된 작전이 분명했다.
그래서 아르센은 죽은 기사 중 몇 명이 이런 방법으로 살해당했으리라 짐작했다.
막상 겪어보니, 군주는 움직이는 속도 자체는 빠를지언정 순발력은 둔한 편이었던 탓이다.
기사들이 모두 정신 놓고 들이받은 게 아니고서야 여섯 명씩이나 희생될 정도는 아니었다.
‘이런 개수작이라니, 똑똑하기도 하셔라.’
하지만 지금, 놈의 숨겨진 칼날을 잘라내는 데 성공했다.
이에 만족하며 아르센은 투창을 꼬나 쥐었다.
다시 사냥에 들어갈 시간이었다.
“우아아아아아!”
가까이 다가가니, 기사 한 명이 비명을 지르며 군주의 몸통에 달라붙어 칼을 내려찍는 모습이 보였다. 조금 전 아르센의 폭발창이 낸 상처 부위를.
그게 누군지 알아보기는 어렵지 않았다.
카릭. 모든 동료를 잃고 혼자 살아남은 서부 출신의 기사.
투구는 어디 내다 버렸는지 헝클어진 장발을 그대로 드러낸 채, 그는 열심히 몸통을 찍어내고 있었다.
그 순간, 아르센은 카릭이 위기에 처했음을 깨달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사들과 실랑이를 벌이던 군주가 자신의 몸통에 달라붙은 카릭을 노려보고 있었기에.
“카릭 경!”
아르센이 힘껏 소리쳤지만 들리지 않았는지, 아니면 무시하는 것인지 카릭은 맹목적으로 칼을 찍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그 모습은 사람이라기보단 고장 난 로봇처럼 보였다.
말로 제지할 수 없다고 판단한 아르센은 투창을 들었다.
“흡!”
강력한 기세로 쏘아진 투창은 그대로 카릭이 달라붙어 있는 몸통 옆 부분에 박혔다.
군주의 단단한 비늘을 얼마 뚫지는 못했지만, 애초에 그것이 목적이 아니었기에 상관없었다.
카릭을 향해 군주의 상반신이 날아들 무렵, 아르센이 미리 설정한 대로 투창이 폭발했다.
“으아아!”
폭발 투창의 위력은 기사의 몸을 상하게 하기는 부족하지만, 몸을 밀어내는 정도는 충분했다.
카릭은 폭발을 견뎌내지 못하고 튕겨져 날아갔다.
당연하게도 카릭이 저 멀리 날아간 만큼, 그를 낚아채려던 군주의 손은 텅 빈 허공을 그러쥐게 되었고.
군주의 실망과 분노에 찬 시선이 아르센을 향했다.
“혹시 화났니?”
아르센은 그 모습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물었고, 그에 대답하듯 군주는 입을 크게 벌렸다.
그 입에서 나온 것은 욕설도 고함도 아닌 불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