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ory of a Knight In A Ruined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98)
그 뒤로도 아르센은 많은 것을 물었다.
남부의 환경이나 문화, 사회 구조 등.
크렌은 조금 귀찮아하면서도 성실히 대답해 주었기에 아르센은 꽤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라수르 역시 잡담에 끼어들어 많은 정보를 전해 주었다.
그는 베테랑 발굴꾼으로서, 그리고 강력한 발굴단의 부단장이자 실무자로서 다양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아르센이 공략해야 할 ‘미개척 유적’이 그들의 목표인 만큼, 그에 대한 정보를 상세히 얻을 수 있었다.
일방적으로 물어보기만 한 것은 아니고, 아르센 역시 자신의 지식 보따리를 풀었다.
벨루안에서부터 여행을 오며 보았던 여러 영지의 문화, 그리고 에피소드만으로도 어지간한 영웅 일대기 하나라고 해도 봐도 좋았기에 할 이야기는 많았다.
특히 산맥의 군주를 토벌하는 이야기를 하는 중에는, 크렌조차 이야기에 집중하느라 눈을 빛낼 정도였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던 중, 라수르가 창밖을 보더니 말했다.
“이제 슬슬 돌아가야겠는데? 날이 어두워지려고 하는군.”
그 말을 듣고 나무 창 너머를 내다보니, 바깥에는 이미 노을이 짙게 깔려 있었다.
노을을 보며 시간이 지난 것을 실감하자, 아르센은 갑자기 몰려오는 피로감에 자기도 모르게 슬쩍 눈을 감쌌다.
그것을 눈치챘는지, 라수르가 웃으며 말했다.
“아르센 경도 피로해 보이는군. 오늘 대화는 여기까지 하고 돌아가는 게 어떻겠소? 너무 늦으면 동료들도 걱정할 테니.”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덕분에 좋은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라수르 경, 크렌 경.”
크렌은 무뚝뚝하게 음,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했다.
크렌의 부하들과도 인사를 나눈 뒤, 아르센은 라수르와 함께 여관을 나섰다.
그때, 문 앞까지 마중을 나온 크렌이 작게 인사를 남겼다.
“다음에는 더 강한 기사가 되도록.”
그 안에는 아마 ‘더 치열하게 대련할 수 있게’라는 의미가 들어 있으리라.
정말 여러 의미로 한결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아르센은 정중히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답했다.
슬슬 어둠이 깔리는 거리를 지난 끝에 다시 여관으로 돌아왔을 때, 아르센을 맞이한 것은 엘로이즈였다.
너무 늦지 않았냐고 닦달하는 것도 잠시, 그녀는 아르센의 얼굴에 가득한 피로를 읽었는지 조심스레 물었다.
“안색이 안 좋아 보여. 혹시 어디 다친 거 아냐?”
“괜찮아. 이건 그냥······.”
아르센은 자세히 설명할까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몇 이유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너무 피곤하다는 것이었다.
“좀 일이 있었어. 나쁜 건 아니고, 이야기할 것도 좀 있는데 지금은 너무 피곤하네.”
“그럼 일단 들어가서 자. 힘들게 싸웠으니까 당연히 쉬어야지.”
엘로이즈는 자나크와의 결투로 인해 지쳤다고 생각한 것이었지만, 사실 아르센의 안색이 나쁜 것은 크렌과 치른 화끈한 대련 때문이었다.
자나크와 세 번 싸우는 것보다 크렌과 한 번 대련하는 것이 더 힘들다 생각될 정도였으니 말 다한 것 아니겠는가.
물론, 그만큼 얻은 것도 많았다.
방에 들어온 아르센은 엘로이즈의 도움을 받아 갑옷을 벗은 뒤 침대에 누웠다.
쌓인 피로로 인해 수마가 밀려오는 것을 느끼는 가운데,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엘로이즈가 아르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작게 속삭였다.
“고생했어, 센. 한숨 푹 자.”
엘로이즈의 목소리를 들으며, 아르센은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입에서 말이 나오기 직전 수마가 아르센을 삼키고 말았다.
덕분에, 아르센이 하려던 말 역시 꿈의 세계로 사라졌다.
‘자기는 머리 쓰다듬지 말라더니.’
* * *
다음날, 죽은 듯이 잔 뒤 일어난 아르센을 찾아온 것은 격한 근육통이었다.
실로 오랜만에 찾아온 이 불쾌한 손님을 반기며, 아르센은 엘로이즈에게 어제 얻은 정보를 전했다.
정수의 본질, 남부, 그리고 왕에 대한 이야기까지.
엘로이즈는 그것을 듣고 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어쩌면 그 괴물이랑 싸워야 할 수도 있다는 거네.”
“그야······그렇지. 안 그래도 되기를 바라지만.”
아르센이 대답한 후,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그때, 엘로이즈가 의자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그러려면 장비가 좋아야겠지? 일단 물건부터 보자.”
“물건?”
“자나크에게서 얻은 전리품.”
“아.”
“센이 나가 있는 동안에 어떤 물건인지 확인해봤거든. 사용하는 방법 같은 거 알려줄게.”
그제야 아르센은 자신이 그것을 맡겨놓고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본래 유물에 관심이 없던 것도 아닌데, 크렌과의 만남이 워낙 충격적이었던 탓일까.
유물에 의지하는 상대를 꺾은 뒤, 유물에 전혀 의지하지 않는 상대에게 압도적으로 꺾인 경험 때문이리라.
이 여관은 지하실에 꽤 넓은 공간이 있어서, 아르센은 여주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지하실을 빌리기로 했다.
어두운 지하실, 우선 마법의 빛을 띄운 뒤 엘로이즈가 마법 배낭에 손을 집어넣었다.
“첫 번째는 이거.”
엘로이즈가 처음 꺼낸 것은 자나크가 입었던 갑옷이었다.
당연하게도, 자나크의 갑옷은 아르센이 입기에는 사이즈가 맞지 않았다.
평범한 갑주라면 엘로이즈가 직접 크기를 조정해 주겠지만, 마법이 걸린 유물을 마음대로 녹이고 조정했다가 어떤 문제가 생길지 알 수 없었다.
그런 아르센의 의문을 엘로이즈는 간단히 해결해 주었다.
“크기 조절 기능이 있어.”
“그래?”
“응. 듣기로 유물 갑주는 대부분 이런 기능이 있다더라.”
잠시 질량 보존의 법칙은 어떻게 되는 건지 궁금해졌지만, 마법에서 그런 것을 따지는 것도 우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손에서 열기를 뿜어 금속을 녹이는 것부터가 열역학 법칙 따위는 엿 바꿔먹은 일 아닌가.
“다행이네. 어떻게 하는데?”
“내가 조정해줄게. 갑옷에 손을 얹어.”
그 말대로 갑옷에 손을 얹자, 엘로이즈가 맞은편에서 갑옷에 손을 댄 채 가만히 정신을 집중했다.
잠시 후, 갑옷이 물처럼 녹아내리더니 아르센의 몸을 휘감기 시작했다.
“이건······.”
“가만히 있어.”
엘로이즈의 말대로 그 자세를 유지한 채 기다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액체화된 갑옷이 몸을 단단히 감싸며 다시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갑옷은 자나크가 입던 때와 마찬가지로 아르센의 머리를 제외한 전신을 감싸게 되었다.
아르센의 몸에 딱 맞는 사이즈로 변형된 채.
“다 됐어. 느낌 어때?”
“이건······대단한데. 맨몸 같아.”
아르센이 원래 입고 있던 흑성철 갑옷 역시 그의 몸에 맞춰 만든 것이었지만, 아무래도 기술의 한계가 있으니만큼 갑옷을 입었을 때 특유의 불편함이 있었다.
관절 가동범위가 좁아진다던가, 몸을 틀 때 미묘하게 걸리는 느낌이 있다든가 하는 등.
하지만 지금, 아르센은 몸에 무언가를 걸쳤다는 느낌 외에는 아무 저항감도 느낄 수 없었다.
몸에 딱 맞는 운동복을 입으면 이런 느낌일까.
갑옷을 벗어보려 했지만 이 갑옷은 관절 부분까지 잘 늘어나는 기묘한 소재로 되어있어, 평범한 방법으로는 벗을 수가 없었다.
“벗는 것도 마법으로 해야 돼?”
“응. 마법사가 해줄 필요는 없고, 기사가 쓸 수 있도록 조정되어 있어. 가슴에 손을 얹고 마력을 주입해봐.”
그 말대로 따르자, 등과 팔뚝, 허벅지와 종아리 뒤쪽이 시원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슬쩍 몸을 뒤로 빼자, 마치 매미가 허물을 벗듯 갑옷의 뒷부분이 벗겨지며 몸이 빠져나왔다.
그 모습을 보며, 아르센은 즉시 이 탈착 방식을 악용할 방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거 다른 사람이 벗겨버릴 수도 있을까?”
“입고 있는 당사자의 마력에만 반응하게 되어있어. 다른 사람이 벗길 수 있게 되면 너무 바보 같잖아.”
“다행이네.”
고대인의 지혜에 감탄하며, 아르센은 다시 갑옷에 들어가 마력을 주입했다.
곧바로 뒷부분이 닫히며 다시 갑옷을 착용한 상태로 돌아갈 수 있었다.
“좋아하는 와중에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갑옷의 방어 기능은 복구할 수가 없더라.”
그 말을 듣고 갑옷을 보니, 확실히 아르센이 집중적으로 공격했던 상반신 부분은 문양에서 빛이 나지 않고 있었다.
팔과 다리 부분은 아직 빛나고 있었지만, 이래서야 급소를 방어하는 기능은 상실됐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
“응.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회복되는 방식이 아니라, 누군가 주문을 다시 불어넣어야 하는 형식이라서. 제대로 된 방호술사가 주문을 부여해줘야 해.”
아르센 역시 엘로이즈가 방호 주문에 능하지 않음은 잘 알고 있었다.
그녀 역시, 계통이 맞지 않아서 루덴의 스승이 만들었던 수호석을 복구하는 데 실패했었으니.
“별부르미의 마법사 중에서는 그쪽 전문가가 없고?”
“응. 애초에 다들 그리 수준 높은 마법사도 아니라서.”
아르센은 아쉬움에 한숨을 내쉬었다.
“이렌느 님이라면 갑옷을 복구해주실 수 있었겠지?”
“응. 그렇다고 돌아갈 수는 없잖아.”
“그렇지.”
그나마 위안이 되는 점이라면, 갑옷 자체의 방어력 역시 흑성철 갑옷에 뒤처지지 않는다는 점일까.
거기다 입고 벗기 편하고 활동도 편하며, 일회용에 팔다리 한정이라지만 방어 주문까지 걸린 갑옷인 만큼 그 가치는 충분했다.
아르센은 흑성철 갑옷을 마법 배낭으로 보내며, 새로운 친구를 환영하기로 했다.
그런 뒤, 이번에는 자나크가 사용하던 전투 도끼를 들었다.
자루의 길이만 1.5m에 달하는 이 거병은, 누가 봐도 한 손으로 쓰라고 만들어진 물건이 아니었다.
그래도 아르센은 일반 기사를 초월하는 근력을 지닌 만큼, 그리 어렵지 않게 들고 휘두를 수 있었다.
몸도 풀 겸 가볍게 붕붕 휘두르는 모습을 보던 엘로이즈가 말했다.
“사용법은 간단해. 마력을 불어넣은 상태로 휘둘러.”
“좋아. 어디······.”
그 말대로, 아르센은 날에 마력을 주입하며 도끼를 세로로 휘둘렀다.
격렬한 파열음과 함께 돌로 된 바닥에 깊은 상흔이 생겨났다. 기사가 온 힘을 향해 무기를 내려찍은 것 같은.
엘로이즈가 이를 보며 작게 감탄했다.
“오.”
그렇게 감탄하는 엘로이즈와 달리, 아르센은 그다지 석연치 않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강하긴 한데, 함부로 쓸 건 아니네.”
“왜?”
“마력 소모가 너무 심해. 남발하다간 곤란하겠어.”
그 말대로, 이 무형의 칼날을 날리는 공격은 아르센이 생각했던 것보다 마력의 소모가 심했다.
기사 중에서는 최고 수준의 마력을 가진 아르센조차 일반 공격처럼 마음대로 사용하기에는 부담이 될 정도였다.
“자나크는 속전속결로 끝낼 생각이었나 봐. 이렇게 마력 소모가 심한 기술인 줄 알았으면 차라리 피하면서 시간을 끌 걸 그랬나.”
그랬으면 갑옷의 방호 주문을 많이 소모하지 않고 이길 수 있었겠지만, 어쩌면 마력이 떨어진 자나크가 항복을 선언했을 수도 있었다.
원한을 품은, 거기다 야비한 현지 기사와 한 도시에서 머무르느니 차라리 조금 손해를 보는 편이 나았다.
아르센은 이 도끼를 새로운 애병으로 사용하기로 했다.
도끼는 그다지 사용해본 적 없으니 용법을 조금 배워야겠지만, 익숙해진다면 장검을 쓸 때보다 훨씬 강한 파괴력을 보일 수 있으리라.
도끼 자체도 굉장히 튼튼하고 날카로운 명품일뿐더러, 마력 소모가 상당하다 해도 유물의 기능 역시 강력했으니.
“다음은······그러고 보니 그 귀걸이는?”
시종일관 싸움을 유리하게 이끌어가던 아르센을 한번 위기에 빠트렸던, 바닥을 미끄러지게 만드는 귀걸이.
내심 아르센이 제일 탐냈던 물건이기도 했다.
결투 중에 그런 물건을 사용한다면, 어지간한 기사들은 풀잎 베듯이 간단히 해치울 수 있을 테니까.
아르센의 질문에 엘로이즈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거? 있긴 한데, 쓸모는 없어.”
“왜?”
“현대 마법사가 만든 일회용 유물이더라고. 루덴이 만들어준 순간이동 막대기처럼.”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능력을 횟수 제한 없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유물이었다면, 이를 가진 자나크가 고작 경비대장 정도로 만족하지는 않았으리라.
아르센처럼 민첩한 기사가 아니고서야, 평범한 기사는 유물을 사용해 넘어트리고 공격하면 그만이었을 테니까.
“어째 너무 손해 보는 기분인데.”
무슨 아군이 된 적 같은 클리셰도 아니고, 적이 사용하던 강력한 무구를 가져오니 죄다 하자가 있는 상황 아닌가.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그렇게 아쉬워하는 아르센을 보며 엘로이즈가 격려하듯 말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어차피 얻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던 물건들이잖아.”
“그건 그렇지.”
아쉬움을 털어내며, 아르센은 마지막으로 팔찌와 목걸이였다.
자나크가 끝까지 사용하지 않은 물건들. 정확히는 사용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던 물건들이었다.
이 둘은 꽤 유용한 기능을 가지고 있었는데, 목걸이는 투사체 공격을 감지해 경고하는 능력이 있었으며 팔찌는 체력 소모를 보조하는 기능이 있었다.
두 가지를 착용한 모습을 본 엘로이즈가 풋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 있으니까 되게 이상해.”
그 말대로, 갑옷을 입은 뒤에 위에 목걸이랑 팔찌를 차고 있으니 비주얼이 심히 괴이했다.
유물을 가지고 있음을 노골적으로 노출하는 모양새라 실전적으로도 좋지 않았고.
다행히, 갑옷을 조금 조정하는 것으로 유물을 안에 착용한 채 위를 갑옷으로 두를 수 있었다.
* * *
유물을 확인한 후, 아르센은 다시 회의를 열었다.
이 유적 도시는 무려 시장에서 영지 전역을 그린 지도를 팔았기에, 그것을 펼쳐놓은 커다란 방이 회의실이 되었다.
그리고 아르센이 그중 한 곳을 짚으며 말했다.
“이번에 갈 곳은 여깁니다.”
“어, 형님. 거기는······.”
“그래.”
아르센이 가리킨 곳에 있는 유적은, 과거 ‘호랑이 발톱’ 발굴대가 동료를 잃고 퇴각한 곳이었다.
마법 함정이 가득한 것으로 알려진, 이레 유적.
그리고 별부르미가 단서를 숨겨놓은 후보지 중 하나이기도 했다.
“이번에는 챙겨올 게 많을 것 같으니, 아눈 경과 병사 몇 명만 남기고 모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