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iger follows the wild flowers on the cliff RAW novel - Chapter 100
100. 범이 온다
눈이 펑펑 내리는 지리산, 해도 뜨지 않은 새벽에 벼랑 끝의 너와집은 새하얀 연기를 뿜어 올리고 있다.
“할매, 진짜 용하네. 언제 올 줄 알고 물을 끓였대?”
“용하긴 염병! 한 달 내내 물만 끓였당게.”
“아아아아아악!”
우렁찬 비명 소리에 솥단지를 들여다보던 할매가 치맛자락을 부여잡고 안방으로 뛰어들었다.
“워메! 워메! 산모가 뭔 놈의 악을 그리 쓰냐. 얼라 놀라 도루 들어가것다.”
“할매! 하악, 하악.”
대들보에 길게 늘어트린 천을 손에 감아쥔 창이 시뻘게진 얼굴로 거친 숨을 토해 냈다. 갈라진 입술로 피가 흐르자 할매가 천 조각을 접어 그녀의 입에 밀어 넣었다.
“이빨 상헌당게! 말도 드럽게 안 들어 처묵어.”
목에서 이마까지 핏대가 선 창이 붉게 실핏줄이 터진 눈으로 할매가 밀어 넣은 천 조각을 탁 뱉어 냈다.
“왜 이리 안 나와. 언제 나와.”
“내가 안다냐! 시방 나올라고 안 그냐.”
할매와 창의 실랑이 소리에 눈 내리는 마당을 서성이는 장호의 몸에서도 연기가 피어오른다.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마당을 오가는 그의 뒤로 털을 바짝 세운 단이마저 어쩔 줄 모르고 으르렁댔다.
압록강에서 지리산까지 그 머나먼 길을 아내를 등에 지고 조심조심 돌멩이도 피해 걸어온 장호는 창의 비명 소리에 가뭄철 논바닥처럼 가슴이 쩍쩍 갈라졌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으애. 으앵. 으애애애.”
갓난아기 울음소리를 능가하는 우렁찬 비명에 마루로 뛰어오른 장호가 안방 문을 열어젖혔다.
“옘병! 문짝 뽀사불면 어쩐당가! 워메, 워메!”
창에게 이불을 덮어 대는 할매의 욕설에 장호가 너덜거리는 안방 문을 간신히 세워 놓고 다가앉았다. 한겨울에 땀으로 흠뻑 젖은 아내의 모습에 가슴이 미어진다.
“부인…….”
“보셔요. 제가 아이를 낳았습니다.”
입술이 다 터져서 웃음 짓던 창이 품에 안은 핏덩이를 내밀자 붉게 충혈된 그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나는, 나는.”
“가서 뜨신 물 가져오소.”
할매의 말에도 부부는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생각보다 작고 못생겼어요.”
“씻겨 놓으면 이쁘당게. 뜨신 물 가져오소. 물!”
할매의 성화에도 장호는 쑥떡이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양수도 마르지 않은 새까만 머리에 큼직한 입, 꼭 감긴 눈매가 시원스레 뻗어 있다.
안방으로 머리를 들이밀던 단이가 간신히 세워 놓은 문짝을 떨어트려 버리자 할매가 폭발했다.
“염병하고 다덜 안 나가!”
할매의 불호령에 몸을 일으킨 장호가 콧구멍을 벌렁대는 단이의 목덜미를 잡아당겼다.
“나가자, 단이야. 나중에 보여 주마. 나가자.”
문지방에 발톱을 박은 단이를 끌어내는 장호는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금줄부터 걸어야 하나? 문부터 고쳐야 하나?’
부엌의 솥단지를 통째로 안방에 옮기고, 떨어져 나간 문짝을 움켜쥐었다. 뚝딱뚝딱 못질하여 고치고, 방으로 들어가 바람이 들지 않게 이불을 들어 문 위에 고정했다.
“낭군님, 이불 안 막아도 돼요. 답답해.”
“초이레는 오무락달싹 말어. 애 낳고 뼈에 바람 들면, 평생 고생이랑게. 찬물은 만지지도 말고, 삼키지도 말고.”
이것도 말라, 저것도 말라 잔소리를 쏟아 내던 할매가 창의 입술에 꿀을 발랐다.
“방에 틀어박혀 숨만 쉬라는 거네.”
“아따~ 그놈, 눈도 안 뜨고 잘 찾아 묵네.”
젖을 빨고 있는 쑥떡이를 보며 헤벌쭉 웃던 할매가 다가앉으려는 장호에게 물었다.
“금줄은 걸었능가?”
앉지도 못하고 방을 나선 장호는 돌아오는 길에 인가에 묵을 때마다 짚을 얻어 만든 새끼줄을 집어 들었다.
“그거 쑥떡이 금줄이었어요?”
대문이 없어 이리저리 금줄 두를 자리를 찾는 장호에게 다가선 총총이 까르륵 웃음을 터트렸다.
“무슨 금줄을 그렇게 두껍게 만들었어요?”
“튼튼하게 자라라고.”
“저는 형부가 멧돼지 잡으려고 만드는 줄 알았네요.”
두껍기도 너무 두껍고 숯과 솔가지, 예쁜 돌멩이에 참나무를 깎아 만든 방망이까지 좋다는 것들을 모조리 엮어 모양새가 요란하고 우습다.
“단이가 저러고 있는데 부정 탄 게 들어오겠어요?”
어슬렁어슬렁 마당을 맴돌며 안방을 노리는 단이를 쳐다보던 장호는 새삼 뿌듯한 마음에 가슴을 쫙 폈다.
“제 새끼는 가야산에 두고 어찌 우리 쑥떡이에게 관심일까?”
“단이 새끼들도 벌써 다 컸겠어요.”
“새끼들이 뛰어다닌다고 다 컸다 하겠느냐. 사냥도 할 줄 알고, 스스로 지킬 줄 알아야 다 큰 거지.”
“그러고 보면 사람 새끼는 크는 데 너무 오래 걸리죠? 똥오줌 가리는 데도 한참 걸리잖아요.”
“그만큼 오래 살지 않느냐.”
“우리 쑥떡이도 오래오래 건강했으면 좋겠어요.”
나무에 금줄을 매는 총총과 장호는 새하얀 눈이 어깨에 쌓이는 줄도 모르고 환하게 웃었다.
밤이 되어도 부부는 잠들지 못한 채 퀭한 눈으로 쑥떡이를 내려다보고 있다.
“참으로 잘생기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잘생긴 아기를 보지 못했소.”
“손가락 발가락에 손톱 발톱까지 어른의 것과 똑같은데, 어쩌면 저리도 작을까요?”
아기라는 존재 자체를 처음 보는 장호와 창은 쑥떡이가 마냥 신기하다.
“아프지 않고 잘 커야 할 텐데.”
“부인과 나 닮아 나왔으니 건강할 게요.”
“눈은 언제 뜰까요?”
“젖을 많이 먹으면 뜨지 않겠소?”
“젖을 너무 많이 먹었는데, 탈이나 안 날지.”
걱정이 태산인 창을 바라보던 장호는 웃음이 나왔다.
“부인을 만났을 때 내 마음이 그러했다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다 자라서 만났는데.”
“목숨보다 소중한 무언가가 생겨나면 두려움도 함께 생겨나는 법이라오.”
삶에 연연하지 않는 그에게 창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죽음을 넘어서는 공포였다.
지난 기억에 미소 짓는 장호를 바라보던 창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창이 역적이란 것을 알면서도 그녀를 놓지 않았던 그 마음이 얼마나 고달팠을까.
“이제 제 마음이 고달플 차례인가 봅니다.”
“너무 걱정 마오.”
“걱정 근심이 어디 마음대로 되더이까.”
자신을 보며 안절부절못하던 장호가 비로소 이해된 창은 반복되는 삶의 과정이 오묘하다.
“아내 손가락 바늘 찌를까 걱정하던 분은 어디로 가셨답니까.”
“쑥떡이 자라는 사이, 이 몸도 조금은 자랐다오.”
“다 큰 어른이 더 자랄 데가 어디가 있답니까.”
“지켜야 할 가족이 늘면 그만큼 더 크고 단단해져야 하지 않겠소?”
창의 정인에서 낭군으로, 또 쑥떡이의 아버지로 진화한 장호는 이미 모든 것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른 새벽, 지쳐 잠든 창에게 꼼꼼하게 이불을 덮어 주던 장호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밀어 올렸다.
탁. 소리가 나게 입이 닫히자 그녀가 눈을 떴다.
“바람 들면 안 좋다 하여…….”
머쓱해하던 장호는 몸을 일으키는 창에게 이불을 폭폭 덮었다.
“좀 더 자오. 해 뜨려면 멀었소.”
“밤새 못 주무셨는데, 어딜 가시려고요.”
“땔감이 부족할 듯하여 나무하러 가오.”
“방 안이 불타고 있습니다. 나무 안 하셔도 됩니다.”
부부가 소곤대는 사이 쑥떡이가 꿈틀대자 창과 장호는 동시에 입을 다물어 버렸다.
잠 못 자고 피 말리는 육아 전쟁의 시작이었다.
꼬물꼬물 미간을 찌푸리는가 싶더니 입이 벌어지자 창이 잽싸게 젖을 물렸다. 오물오물 쑥떡이가 젖을 빨자 한숨을 내쉰 부부의 속삭임이 다시 시작되었다.
“조금만 해서 오리다.”
“방이 너무 덥습니다.”
“따뜻해야 한다 하지 않소.”
속닥속닥 실랑이를 하던 장호는 밖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방을 나서 부엌으로 향했다.
“벌써 기침하셨습니까?”
장호의 문안 인사에 미역국이 담긴 솥단지를 들여다보던 할매가 허리를 펴며 웃었다.
“잘 잤능가.”
“예. 조식을 하기엔 너무 이르지 않습니까.”
“삼신할매헌테 멱국 올릴라 그라제. 삼신할매 먼저 자시고 산모가 묵어야 아가 잘 커. 자네는 어디 갈라고?”
“땔감 좀 하러 갈까 합니다.”
“그랴. 많이 해 오게. 산모는 찬물도 마심 안 된게. 물은 하루 죙일 끓여야 혀. 기저귀도 빨아야 쓰고.”
비싼 의원 대신 무녀를 찾던 실정상 산파로 불려 다닌 할매는 육아 전쟁에 돌입한 부부에게 천군만마였다.
“다녀오겠습니다.”
장호가 부엌을 나서자 눈 쌓인 마당에는 발자국만 잔뜩 찍혀 있고 단이는 보이지 않았다. 두어 걸음 떼기도 전에 창고 쪽에서 싸리비를 든 총총이 달려왔다.
“피곤할 터인데, 어찌 이리 일찍 일어났느냐?”
“마당에 눈 쓸려고요. 어디 가세요?”
식구가 많으니 한 말 또 하고 한 말 또 하고.
“그럼 저도 갈래요. 단이가 밟아 놔서 잘 쓸리지도 않아요. 그냥 사냥이나 갈까 봐요.”
장호가 무어라 답할 새도 없이 방으로 뛰어든 총총이 금세 편전을 움켜쥐고 나왔다.
“할매가 끓인 미역국 맛없어서 도저히 못 먹겠어요.”
속삭이던 총총의 뒤로 부엌에서 밥상을 차려 나오는 할매와 눈이 마주친 장호가 그녀를 입을 막아 버렸다.
“소금 타서 먹으면 먹을 만하다.”
“소금 타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입을 막은 손을 밀어낸 총총이 장호를 따라나섰다.
“어제 형님 얼굴 못 보셨어요?”
미역 줄기를 씹던 창을 떠올린 장호가 한숨을 내쉰다.
새끼를 낳은 고래가 미역을 뜯어 먹고 지혈이 되는 것을 보고 고구려인들이 산모에게 미역을 먹였다는데.
“부엌에 솥단지 보세요. 한 달 내내 먹게 생겼어요. 꿩이든 토끼든 간에 뭐라도 잡아서 쑥떡이 줄래요.”
“쑥떡이는 젖 먹는다.”
“꼭 미역 먹어야 젖 나오는 거였어요?”
아이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장호의 침묵에 해인사에서도 고기 잔치를 벌였던 총총은 그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쑥떡이가 아직 맛을 몰라서 그렇지, 산모가 맛난 것을 먹어야 젖도 맛있게 나오지 않겠어요?”
음식 타박 않는 장호가 먹기에도 고역스러운데 창은 오죽할까 싶어 그의 마음이 출렁였다.
“싫으면 마세요. 저는 오늘부터 다른 거 먹을래요.”
돌아서는 총총을 붙잡은 장호가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창은……. 토끼 안 먹는다. 너구리도…….”
“알았어요! 토끼 빼고, 너구리는 저도 안 먹어요.”
눈 쌓인 숲을 달리는 총총을 응시하던 장호가 슬그머니 집을 돌아보았다.
“조모님 몰래 먹일 수 있으려나.”
창의 입에 고기 넣을 생각에 장호는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며 산길을 오른다.
“살어리랏다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머루랑 다래랑 먹고 먹자 청산에 살어리랏다네~”
덤으로 사는 인생은 하나에서 둘이 되고, 둘이 셋, 넷이 되었다. 먼 길 돌아 만난 인연에게 더 이상의 악몽은 존재하지 않았다. 사선을 넘어 생사의 기로에서도 서로의 손을 놓지 않았던 부부는 하루하루가 새날이요, 매일매일이 무지갯빛 미소로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