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e Sword Sense RAW novel - Chapter 75
31화 남천검객의 제자 (3) – 전체수정 >
“후우.”
작약당의 마루를 내려오는데 이렇게 상쾌할 수가 없다.
나의 손에는 서지 두 장이 들려있었는데, 이것은 양 부인과 조 호위가 자신들의 손으로 내게 저질렀던 짓들을 소상히 적어놓은 것이었다.
이것도 모자라 나는 양 부인의 직인마저도 받아냈다.
-너는 갈수록 미친 늙은이를 닮는 것 같냐?
소담검이 혀를 내둘렀다.
이 정도는 약과다.
독단만으로는 저 악랄한 여자를 믿을 것 같은가.
이렇게 자필 증거를 남겨놔야 섣불리 반전을 꾀해보려는 수작을 부리지 못할 것이다.
뭐 둘 다 죽을 각오를 한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그럴 것 같진 않네.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 외로 양 부인과 조 호위는 어릴 적부터 교분을 쌓은 관계라 그런지, 서로에 대한 애착은 확실히 강했다.
그러니까 독단적으로 일을 벌여도 이를 숨겨줬겠지.
안 그랬다면 조 호위를 희생시킨 후에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떼며 나를 몰아붙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도 힘들 것이다.
조 호위가 허튼 짓을 하면 양 부인의 해독제를 주지 않는다고 했고, 양 부인이 허튼 짓을 하면 반대로 조 호위의 해독제를 주지 않는다고 했으니까.
-이럴 때 보면 인간들은 신기해. 뭔가 많이 감정적이라고 해야 할까? 이성적이지 못한 것 같아.
-그렇기에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라고….
-네 전주인이 얘기했다고?
-흠흠. 그래.
남천철검이나 소담검의 말이 맞다.
인간이 철저하게 이성적이라면 분란이나 실수도 없었겠지.
그러나 모든 인간은 이성보다는 감정적이었고, 그 감정이 매사에 개입되었기에 불완전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용서, 자비라는 평화적인 방법도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개뿔이다.
나는 그들이 진심으로 괴로웠으면 한다.
그게 진정한 복수가 아닌가.
‘사람을 물린 게 독이 됐군.’
마루에서 내려오면서 나는 양 부인의 어리석음을 비웃었다.
자존심 때문에 조 호위를 제외하고 모든 시비들을 작약당 건물에서 한참 떨어지게 한 그녀였다.
저들 수준으로는 장원 내에서 무슨 대화가 오고갔는지 알 수도 없을 것이다.
작약꽃 정원에서 의아하게 쳐다보는 시비들을 개의치 않고서 나는 유유히 작약당 부지를 빠져나왔다.
-히히. 역시 너랑 붙어있음 지루할 일이 없어. 이제 연회까지 기다릴 거야?
그러려고 했는데 생각이 바뀌었다.
어차피 저쪽에서 먼저 건드렸으니 굳이 최선책으로 평화롭게 기다릴 필요가 있을까?
-어떻게 하려고?
아마도 가주를 비롯해 본가의 사람들은 골머리를 썩고 있을 것이다.
만나고 있는 손님들만 없었어도 지금쯤 소가 내 당주들을 불러서 긴급회의를 열었을 지도 몰랐다.
아니 소가 내 당주들은 이미 모였겠구나.
‘잘됐는데.’
-응?
이참에 내가 먼저 그들을 움직여야겠다.
나는 서둘러 객당으로 향했다.
* * *
나의 뒤를 사마영과 조성원이 따르고 있었다.
지금 우리가 향하고 있는 곳은 장원 내 내당 건물이었다.
내당에는 당주들이 모여서 회의하는 장소가 있다.
사마영이 내게 전음을 보냈다.
객당에서 이들을 데리고 나오자 시비들을 비롯해 몇몇 무사들이 다급히 따라붙었다.
어딜 향하냐는 말에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아서 그들은 난처해하며 쫓아오고 있었다.
어차피 장원 내에서는 어딜 돌아다니든 감시망이었다.
-웅성웅성!
내당 건물 마당에는 각 당의 당주들을 수행하는 보좌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래봐야 여덟 명에 불과했지만 이들이 익양소가를 이끌어가는 여덟 당의 사람들이었다.
이는 역시 예상대로 내당에 당주들이 회동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를 알아본 이들이 수군거리며 쳐다보았다.
이를 전혀 개의치 않고 내당 건물로 다가가자 여덟 명의 보좌들이 다급히 앞을 가로막았다.
“멈추십시오. 도련님.”
“왜 막는 거죠?”
왜 막는지는 물론 알고 있다.
내가 후기지수 대표 자리를 요구한 것에 대한 대책 회의 중일 테니까 들어가게 내버려둘 수야 없겠지.
보좌들이 난처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예전 같으면 냉정하게 가라고 했겠지만 남천검객의 제자라는 신분 때문에 함부로 대할 수 없어서일 것이다.
한 보좌가 조심스럽게 내게 말했다.
“지금은 본가 관련 문제로 회의 중이라 누구도 들이지…..”
“누가 말이죠?”
그 말에 보좌가 아차 싶었는지 순간 입을 다물었다.
가주는 지금 내당 회의실에 없었다.
그럼 당주들 중에 한 사람이 들이지 말라는 게 되는데, 익양소가에서 나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자는 가주와 배다른 두 형들뿐이었다.
“당주들께서 그런 말을 한 거라면 문제될 건 없겠군요.”
“아아….도련님.”
“비켜주시죠.”
강압적인 내 목소리에 결국 그들이 양옆으로 물러섰다.
이들의 태도를 보면 과거에는 내가 정말 무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회귀 전이었다면 이 상황에서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나를 내쫓았을 지도 모른다.
내당 건물의 마루로 오른 나는 회의실로 향했다.
문을 두드릴 필요도 없었다.
-쿵!
회의실의 문이 열리자 긴 탁자에 앉아 있던 여덟 명의 당주들이 동시에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들에게 포권을 취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각 당의 당주님들.”
그런 나의 인사에 그들이 바깥에 있던 보좌들과 비슷한 표정들을 지었다.
난처함과 당혹감이 섞여 있었다.
내가 이곳에 들이닥칠 거라고 누구도 생각 못했겠지.
그런데 엉덩이들이 참 무겁네.
“익숙하기는 하지만 아무도 인사를 받아주시지 않는군요.”
그런 내 말에 하석에 앉아 있던 당주 다섯 명이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내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사당의 당주 목산영이 셋째 도련님께 인사드립니다.”
“오당의 당주 감우문이 셋째 도련님께……”
이런 와중에도 일어나서 인사를 하지 않는 상석에 앉은 세 명.
대당주라 불리는 일당의 당주 하장균.
이당의 당주 진기형.
삼당의 당주 양문석.
일당의 당주 하장균은 오직 가주 소익헌을 제외한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워낙 꼿꼿한 인사라 이해하는 바였다.
반면 이당의 당주 진기형과 조곡양가 출신인 삼당의 당주 양문석은 정실 소생들을 지지하는 이들이라 내게 자존심을 지키려는 모양이었다.
가장 상석에 앉아 있던 대당주 하장균이 입을 열었다.
“밖에서 회의 중이라고 막았을 텐데, 어찌 멋대로 들어오신 겁니까?”
“제가 못 들어 올 곳이라도 온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당주 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가주님과 소가주, 그리고 각 당의 당주들뿐입니다. 그걸 모르실 리가 없을 텐데요.”
역시 대당주라 불리는 자다웠다.
내가 남천검객의 제자이든 뭐든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할 말을 해댔다.
익양소가에서 가장 오래된 가신이자 일류의 벽을 벗어난 고수라서 그런지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자신감이 넘쳤다.
“대당주의 말이 옳습니다. 아무리 도련님이라고 하셔도 이건 무례한 짓입니다. 정히 할 이야기가 있으시다면 따로 시간을 잡도록 하시지요.”
삼당의 당주 양문석이 거들었다.
어떻게든 나를 내보내고 싶어 안달이 났다.
그를 보니까 예전의 기억들이 떠오른다.
참 좋지 않은 기억들이다.
“양문석 당주님.”
“네?”
“오랜만이라서 그런지 참 적응이 되지 않는군요. 예전처럼 윽박을 지르면서 나가라고 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시치미를 떼기는.
그래. 가해자는 이런 걸 잘 기억하지 못하지.
“아아. 그럼 제가 상기시켜드려야 겠군요. 그때 양문석 당주님께서 친히 저를 본가 밖으로 내쫓지 않으셨습니까?”
아직도 그때가 생생하다.
양문석이 직접 삼당의 무사들을 데리고 와서 나를 강제로 내쫓았다.
심지어 그때는 가문에서 내쳐졌으니 익양소가의 사람이 아니라고 이렇게 말했지?
“그때는 저한테 뭐라고 했더라. 아아 맞다. 다시는 본가에 기웃거리지 마라 쓰레기 같은 놈아. 라고 했던가요?”
양문석의 얼굴이 얼음처럼 굳어졌다.
이제 좀 기억나나보지?
나는 빙그레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갑자기 도련님이라고 하시니 적응이 되지 않는군요. 그때처럼 불러주시죠.”
몇몇 당주들이 눈살을 찌푸리면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들은 그나마 가문에서 내게 선을 넘지 않았던 이들이었다.
양문석의 눈빛이 꽤나 매서워졌다.
이런 자리에서 내가 옛일을 들먹일 줄은 몰랐겠지.
“후우.”
그때 양문석이 굳혔던 표정을 풀면서 말했다.
“아아. 제가 그랬던가요? 불혹을 넘기고 나서부터는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일 년만 지나도 곧잘 잊어먹곤 한답니다. 혹여 그 때문에 도련님께서 심기불편 하셨더라면 이 양모가 사죄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녀석. 짜증나는데.
그래.
예전부터도 능구렁이 같은 자였다.
조곡양가 출신인 그는 예전부터 나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기에 온갖 수작으로 어머니와 우리 남매를 곤란한 상황에 빠뜨리곤 했다.
그런데 예전과 지금을 혼동하나 보네.
나는 양문석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아. 그랬군요. 한데 괜찮으십니까?”
“네? 무엇이?”
“고작 일 년도 전의 일이 잘 기억이 나시지 않는다니, 당주로서 현역으로 일을 맡기에는 버거워보이시는 군요. 은퇴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내 말에 양문석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 내가 당신에게 말발에서 밀릴까.
그리고 어디서 은근슬쩍 넘어가려 해.
“농입니다. 농.”
나는 웃으면서 손을 휙휙 휘저었다.
양문석이 불쾌했지만 살짝 허탈했는지 표정이 풀어졌다.
그때 정색을 하듯이 인상을 굳히고서 말했다.
“한데 가신인 양 당주가 현 가주의 삼남에게 그런 무례한 언사를 저질러놓고 사죄드리겠다는 말 한 마디로 어물쩍 넘어가려 합니까?”
“그게 무슨…..”
“제대로 예를 갖춰서 사죄하시지요.”
그 말과 함께 나는 일부러 기도를 열었다.
절정의 고수에 오르면 기운을 흘려서 상대에게 위압감을 줄 수 있다.
내게서 흘러나온 기운을 느꼈는지 당주 양문석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져갔다.
“큭.”
여기서 자존심을 지킬 수 있을까?
그때 이당의 당주 진기형이 끼어들었다.
“지금 뭘 하시고 싶으신 겁니까? 명색이 남천검객의 제자 분께서 과거의 일을 들춰서 사사로운 복수라도 하고 싶으신 겁니까?”
남천검객의 제자라는 것을 역으로 파고들어, 곤란해 하는 당주 양문석을 구원해줬다.
양문석이 대당주 하장균에게 고맙다는 눈빛을 보냈다.
그때 뒤에 있던 사마영이 피식거리며 말했다.
“가신의 지나친 무례함을 짚은 것이 언제부터 사사로운 복수였는지. 나참 익양소가는 위계질서가 참 엉망이네요.”
얼핏 내게만 말한 것 같지만 모두가 들으라고 한 소리였다.
맞는 지적이었지만 그녀가 나선 것을 오히려 빌미 삼으려고 했는지, 이당의 당주 진기형이 일부러 격하게 화를 냈다.
“어딜 외인이 본가의 일에 함부로 왈가왈부하는 것이오! 도련님께서는 어찌 이렇게 무례한 자를 본가의 중차대한 일을 논하는 자리에 데려….”
-흠칫!
당주 진기형이 하던 말을 멈췄다.
사마영에게서 풍겨지는 날카로운 기운에 순간 말문이 막힌 것이다.
그녀의 눈빛이 사람을 죽일 때와 같아졌다.
‘아.’
아니나 다를까.
귓가로 허락을 구하는 전음이 쇄도해왔다.
내가 제약을 걸어놓지 않았다면 당주 진기형은 옛적에 저 세상으로 갔을 지도 몰랐다.
지금도 난처해보이긴 했지만.
-이야 벌집을 건드렸네.
소담검이 신이 나서 재잘거렸다.
어느 정도 본가 내에서는 나에 관한 이야기가 전달된 줄 알았는데, 전부는 아닌 모양이다.
나는 짐짓 그녀를 말리는 척 말을 꺼냈다.
“사제. 진정하게.”
“사제?”
당주 진기형의 표정이 굳어졌다.
내가 사제라고 한다면 당연히 그녀의 신분도 남천검객의 제자가 된다.
당연히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당주께서는 사제를 데려온 것이 많이 불쾌하셨나보군요.”
그런 나의 말에 진기형의 표정이 바뀌었다.
태도 일변이라고 해야 할까.
“어인 말씀이십니까? 데려오실 수도 있지요. 귀한 손님이신 줄도 모르고 이 진모가 무례를 범했습니다. 부디 소협께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주시길.”
-히야. 진짜 빠르네.
소담검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빠른 태세 전환이었다.
어지간히 남천검객의 위명이 신경 쓰이기는 했나 보다.
-아님 겁먹어서 그런 걸지도.
그때 잠자코 이를 지켜보고 있던 당주들의 수장격인 대당주 하장균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회의는 가주께서 오시면 진행해야겠소. 각 당주들께서는 이만 퇴실하도록 하시지요.”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서둘러 회의를 끝내버리려고 했다.
그렇게 내버려둘 수야 있나.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서 명을 내렸다.
“문닫아.”
“넵!”
그런 나의 명에 조성원이 회의실의 문을 닫고서 문고리를 걸어 잠갔다.
그리고는 조성원과 사마영이 마치 문지기라도 된 것 마냥 회의실 문 앞을 가로막았다.
이에 당주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
대당주 하장균이 날카로워진 눈매로 입을 열었다.
“지금 이게 무슨 짓입니까?”
한순간에 회의실이 긴장감으로 물들었다.
문을 막아버렸으니 경계심이 생겨나는 것도 당연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대당주를 위시한 여러분들과 제대로 대화를 나눌 수가 없을 것 같더군요.”
“다른 의도가 더 강해보입니다. 도련님.”
-슥!
대당주 하장균의 손이 어느새 허리춤에 있는 도병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것이 신호가 되었는지 당주들 역시도 자세를 취했다.
회의실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그때 운을 뗐다.
“좋은 제안 하나 하죠.”
“제안?”
뜬금없는 나의 말에 당주들이 인상을 찡그렸다.
의아해하는 그들에게 나는 씨익 하고 웃으며 말했다.
“줄을 갈아탈 수 있는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끝
ⓒ 한중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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