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115)
그녀는 기존의 신분을 완전히 버리고 새로운 신분, 새로운 얼굴, 새로운 모습, ‘한서진’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달고 국정원 블랙 요원으로 다시 태어났다.
한서진에게 있어서 한국 최강 헌터라는 신분은 그렇게 극단적인 수단으로라도 버리고 싶은 족쇄였다.
특채를 제안한 국정원 역시 그런 점을 노렸으리라.
역설적으로, 블랙 요원이 되고 나서야 한서진은 의무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관계였다.’
하지만 분명 소년의 몸과 정신으로는 버거울 터인 책무를 짊어지고 있는데도, 김덕성은 묵묵히 책무를 소화해내는 걸 넘어, 한국의 이름을 전 세계에 떨치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타국 귀화라는 선택이 존재했는데도, 그러지 않았다.
김덕성은 과거의 자신처럼 버겁다고 책임감 없이 의무를 내던지지 않고 영웅 약소국인 조국을 위해 헌신했다.
‘김덕성 님은 고작 그 정도 중압감에 짓눌려 의무를 내던진 나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하신 분.’
그렇기에 오히려 충분히 오만해질 수 있는 자격이 있고 그래도 되는 상황.
하지만 그는 항상 겸손했다.
영웅에게는 발닦개나 다름없는 헌터인 자신에게도 항상 예의를 갖춰 대하고 선을 넘지 않았다.
그때부터였을지도 모른다.
한서진이 진심으로 김덕성에게 몸과 마음을 바치기로 결심한 건.
‘김덕성 님······.’
그녀의 전부가 된 그분을 떠올리자 한서진의 얼굴이 미세하게 상기됐다.
그 모습을 눈치 채지 못한 에리가 말한다.
“그럼 이 데이트 계획은······.”
“언젠가는.”
한서진이 말허리를 자른다.
“제가 만일······. 데이트라는 행위를 할 날이 오게 된다면, 그럴 날을 대비해서 미리 짜둔 계획입니다.”
그분의 발닦개에 불과한 자신이 그분과 데이트라는 걸 할 기회가 황송하게도 주어진다면.
이렇게 하고 싶다.
한서진은 자신의 소망을 목구멍 너머로 삼키면서 리모콘 버튼을 눌렀다.
“추가 질문 없다면 회의는 여기서 마무리하겠습니다.”
짝, 짝짝짝짝짝.
한서진의 기세에 눌린 에리와 마코토가 박수를 친다.
박수 소리를 듣는 한서진의 입가에 메마른 미소가 걸린다.
마코삐의 러브러브 데이트 대작전
[······트너······.]익숙한 목소리가 머리를 울린다.
흑태자?
눈을 뜬다.
“윽.”
온몸이 비명을 지른다.
주변을 둘러본다.
익숙한 천장과 방 내부가 시야에 들어온다.
내가 거주하는 기숙사다.
잠깐, 기숙사?
아까 분명 연습실 바닥에서 기절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정신이 들어? 파트너?]“깨어나셨군요. 김덕성 님.”
흑태자의 목소리와 한서진의 목소리가 뒤섞여 울린다.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몸을 반쯤 일으킨다.
“누가 날 여기로 데려다 놓은 거지?”
“사이온지 아리스 씨입니다.”
내 질문에 한서진이 평소처럼 사무적인 목소리로 답한다.
아리스인가.
[그 아가씨. 파트너를 공주님 안기로 안고 여기까지 배달했다구.]흑태자가 쓸데없는 추가 정보를 지껄인다.
공주님 안기라니.
그런 쪽팔린 짓을, 내가 기절해 있어서 그 꼴을 못 본게 다행이다.
“김덕성 님께서 기절한 사이에 카미야 마코토 씨가 다녀갔습니다.”
마코토가?
갑자기 뜬금없이 왜?
눈썹이 꿈틀거린다.
“김덕성 님께 할 말이 있다고, 기숙사 뒤뜰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전하라 했습니다.”
기다리고 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반사적으로 창밖을 바라본다.
다행히 에리 때처럼 비는 내리지 않지만,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 같은 흐린 날씨다.
이러다가 비가 내리면 그날의 시즌 2가 반복되는 거다.
그 꼴을 볼 수는 없다.
“돌겠네.”
침대에서 일어나면서 몸을 푼다.
우드득, 우득.
뼈마디 꺾이는 소리가 울린다.
신기하게도 몸이 무겁거나 아프지는 않았다. 자는 사이에 회복된 모양.
“갔다 올게.”
“안녕히 다녀오십시오.”
한서진이 공손하게 허리를 숙인다.
그녀의 배웅을 받으면서 방을 나선다.
*
김덕성이 나간 모습을 확인한 직후.
한서진이 귀에 블루투스 이어셋을 착용한 뒤 차가운 목소리로 말한다.
그녀가 노트북 화면을 켜자마자 뒤뜰 광경이 보인다.
마코토의 옷에 달린 단추 카메라를 통해 보이는 화면이었다.
“카미야 마코토 씨. 김덕성 님께서 방금 방에서 출발했습니다.”
“침착하고 사전에 짠 계획대로 진행하면 됩니다.”
한서진의 목소리가 귓구멍 속 마이크로 이어폰을 통해 마코토에게 전달된다.
기숙사 뒤뜰.
우두커니 선 마코토가 입술을 깨물고 있다.
“응······.”
비장한 표정으로 기다리는 마코토의 눈에 김덕성의 모습이 비치기 시작한다.
마코토가 입술을 깨물면서 커다란 가슴 위에 손을 올린다.
마코토의 심장이 요동친다.
“진짜 기다리고 있었네.”
탁.
그녀 앞에서 걸음을 멈춘 김덕성이 눈썹을 꿈틀대며 말한다.
“얼마나 기다렸냐?”
무심코 던지는 한마디에 마코토의 얼굴이 빨갛게 물든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린다.
주군에게 심장 소리가 들키지는 않을까?
마코토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귓속에서 한서진의 목소리가 울린다.
그녀의 차분한 목소리를 듣자 마코토의 들끓던 감정이 일부분 가라앉는다.
‘침착해. 마코토. 침착해야 해.’
마코토가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면서 고개를 숙인다.“나 오, 오래 안 기다렸어. 한 반나절 정도······?”
오래 안 기다렸다는 말과 반나절이라는 모순된 조합.
한서진이 직접 써준 대사였다.
얼마 전 니시자와 에리를 기다리게 한 일에 대한 그의 죄책감을 자극하는 멘트기 때문에 데이트 신청 수락을 쉽게 얻어낼 수 있다는 설명을 덧붙여서 말이다.
“오래 안 기다리기는 개뿔이······. 염병. 하여간 미련하게 기다리기는.”
김덕성이 한숨을 쉰다.
그의 눈썹이 꿈틀한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마코토.”
그의 시선이 마코토를 향한다.
꿀꺽.
마코토가 마른침을 삼킨다.
[카미야 씨. 지금입니다.] [긴장하지 마시고 차분하게 말씀하시면 됩니다.]한서진의 지시가 울린다.
마코토가 얼굴을 붉힌 채 말한다.
“주, 주군! 나 주군과 단둘이 도, 도쿄 구경을 하고 싶어!”
마코토의 말에 김덕성의 미간이 구겨진다.
마코토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덧붙인다.
“나,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뒤로는 제대로 도쿄 구경을 한 적이 없으니까. 저번 멘토 외출 때는 리츠코가 끼어들어서 다 망쳐버렸고······. 그러니까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된 외출을 하고 싶어.”
그녀가 고개를 숙이며 교복 치마를 만지작댄다.
“······정말 뻔뻔한 부탁인 건 알지만, 그래도 니시자와 양이나 시노자키 양처럼 나도······. 정말 주군이랑 같이 나들이······. 하고 싶어.”
기어들어가는 마코토의 목소리.
[잘하셨습니다. 카미야 씨.]한서진의 목소리가 마코토의 귓속에 울린다.
그녀의 말을 들은 김덕성이 속으로 한숨을 내쉰다.
마코토의 부탁을 거절하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다.
‘역시 그때 린이랑 에리 소원인지 뭔지를 들어주는 게 아니었어.’
그녀의 말대로 린과 에리와 이미 시간을 보내버린 이상, 마코토의 부탁을 거절할 명분이 없다.
어쩔 수 없이 들어줘야만 한다.
형평성을 위해서라도.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
결정을 내린 김덕성이 마코토를 바라보며 말한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비 오기 전에 안으로 들어가자고.”
김덕성의 말을 들은 마코토의 눈동자가 커진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응! 주군! 부탁 들어줘서 고마워!”
[카미야 씨. 지금이 기회입니다. 김덕성 님한테 돌격하세요.]한서진의 지시에 맞춰 마코토가 김덕성의 품에 뛰어든다.
“······역시 주군이 최고야.”
마코토의 커다란 가슴이 김덕성의 품에서 뭉개진다.
갑작스럽게 안겨 오는 마코토를 얼떨결에 끌어안은 김덕성이 한숨을 내쉰다.
“염병······.”
그렇게, 마코토와 김덕성의 외출이 결정되었다.
*
시간이 지나 외출 약속을 한 토요일.
이케부쿠로역.
신주쿠, 시부야와 함께 도쿄를 대표하는 번화가답게 인파와 차량이 넘쳐나는 이곳에 수상할 정도로 커다란 검은색 대형 밴이 서 있다.
짙은 썬팅 때문에 차량 내부를 들여다볼 수 없게 되어 있는 밴 안쪽에는 첩보 영화를 연상시키는 수많은 모니터와 전자기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한서진이 공작금으로 마련한 특수차량이었다.
“우와. 대단해. 한서진 씨. 대체 뭐 하는 사람이야? 이 차는 어디서 난 거고?”
특수차량 내부를 본 에리의 턱이 쩍 벌어진다.
“김덕성 님의 개인 비서입니다. 이건 사비로 구입했습니다.”
한서진이 장비 점검을 하면서 차분한 목소리로 말한다.
“한서진 씨. 엄청 멋있어! 에리링. 한서진 씨를 조금 동경하게 되어버릴지도? 히히.”
에리가 개목걸이를 만지며 웃는다.
그녀의 과한 리액션에도 불구하고 한서진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본인의 업무를 속행했다.
“장비 점검 끝. 현장 상황을 송출합니다.”
팟.
차량 내부 한쪽 면을 가득 메운 모니터에서 이케부쿠로 곳곳의 광경이 보인다.
가운데 달린 가장 큰 모니터에는 마코토의 옷에 달린 단추 카메라 영상이 보인다.
지잉.
마이크에 빨간 불이 들어온다.
“아, 아. 마이크 테스트. 카미야 씨. 제 목소리 들리십니까? 제 목소리가 들리면 양손을 하늘로 뻗쳐 기지개를 켜 주십시오.”
한서진의 목소리가 귓구멍 속 초소형 이어폰을 통해 마코토에게 전달된다.
이케부쿠로 역 앞 벤치에 앉은 마코토가 자연스럽게 양손을 하늘로 올려 기지개를 켠다.
[통신 이상 무. 확인 완료했습니다.] [마코삐. 실수하지 말고 잘해보는 거야. 주인님의 하트를 마코삐의 애교로 녹이는 거야!]한서진과 에리의 목소리를 들으며 마코토는 입술을 깨물었다.
‘한서진 씨도, 니시자와 양도. 이렇게까지 날 응원해주는데······. 그 상냥한 마음에 보답하지 않으면······.’
마코토가 양 주먹을 불끈 쥐며 각오를 다진다.
오늘을 위해 에리가 골라준 사복을 입고, 그녀에게 직접 화장을 받은 마코토였다.
마코토가 아직은 어색한 사복 스커트를 만지면서 가방에서 에리에게 선물받은 손거울을 꺼내 그녀의 얼굴을 살핀다.
화장 한번 제대로 해본 적 없던 평소 얼굴과는 다른, 에리의 메이크업이 더해져 한층 화사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이 거울 안에 비친다.
낯설다.
‘나, 조금은 여자다워졌을지도······.’
한껏 기합을 넣은 옷차림과 화장.
이 정도면 주군의 마음에 들 수 있을까?
마코토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헤실헤실 웃었다.
[어때. 마코삐. 에리링 비장의 화장법과 향수가! 히히히.] [니시자와 양의 화장 실력은 놀랍습니다.]마코토의 귓속에서 두 사람의 목소리가 울린다.
“벌써 와 있네.”
거울을 보며 머리핀을 만지작대던 그때.
그녀의 귓가에 그의 목소리가 들린다.
마코토가 고개를 든다.
거기에는 김덕성이 있다.
[침착하십시오. 카미야 씨. 연습한 대로 하면 다 잘 될 겁니다. 우선 김덕성 님께 다가가 팔짱을 끼십시오. 커다란 가슴의 매력을 어필하는 겁니다.]한서진의 지시를 듣는 마코토의 얼굴이 빨개진다.
‘가슴의 매력······.’
커다랗고 쓸모없는 흉한 가슴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본인의 커다란 가슴이 주군에게 기쁨을 줄 수 있다면.
그렇다면 얼마든지 사용해줄 수 있다.
결심을 굳힌 마코토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주군. 보고 싶었어.”
마코토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면서 자연스럽게 김덕성의 팔짱을 낀다.
[지금부터 마코삐의 러브러브 데이트 대작전 시작이야!]에리의 선언과 함께, 두 사람의 데이트가 시작되었다.
*
덥석.
마코토가 자연스럽게 팔짱을 낀다.
팔뚝에서 그녀의 커다란 가슴 감촉이 느껴진다.
난감하다.
보는 눈이 이렇게 많은데 떼어낼 수도 없고.
[파트너, 너 이 자식. 호강하는데? 부럽다.]흑태자가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인다.
“배고플테니 우선 밥부터 먹자. 주군. 이 근방에서 유명한 돈가스 전문점을 아는데, 거기로 가도 괜찮아?”
마코토가 조용한 목소리로 얼굴을 붉히며 웃는다.
평소와는 다르게 그녀의 얼굴이 새삼스럽게 예뻐 보인다.
물론 마코토도 원작 히로인 캐릭터답게 미소녀이니만큼, 원판이 예쁘기는 한데, 오늘은 미모가 한층 물오른 느낌이다.
은은한 꽃향기가 코 끝에 느껴진다.
머리에 꽂은 머리핀도 검은색이 아닌 핑크색 꽃 모양 머리핀.
짧은 스커트와 커다란 가슴이 돋보이는 셔츠도 보인다.
[오, 저 마코토라는 아가씨. 기합 엄청 빡세게 넣은 모양인데?]흑태자의 말대로 쓸데없이 차려입은 모습.
“주군, 혹시 돈가스 싫어해?”
마코토가 옆에서 가슴을 부비부비한다.
부드러운 감촉이 계속 느껴진다.
얘가 평소랑 다르게 왜 이래? 뭐 잘못 먹었나?
마코토는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의 캐릭터. 린처럼 육탄 공세를 즐기는 타입이 아니다.
내 의지와는 다르게 피가 들끓는다.
돌겠네, 진짜.
이케부쿠로 번화가 한복판에서 욕을 퍼부을 수도 없고, 난감하다.
“아니. 좋아하니까 빨리 가자.”
이 외출인지 뭔지를 빨리 끝내야 한다.
“알았어! 안내할게!”
마코토의 손에 이끌려 역 앞을 떠나려던 그 순간.
내 눈에 수상할 정도로 커다란 검은 밴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