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267)
촤르륵.
린이 정체불명의 가이드북을 펼친다.
“흠······.”
턱을 만지면서 진지하게 고민하는 린.
그 모습을 옆에서 에반젤린이 반짝이는 눈동자로 바라본다.
베아트리체는 관심 없는 듯 힐끗힐끗 바라보고 있다.
“벳푸를 대표하는 가장 유명한 관광지는 여기 있는 벳푸 지옥 순례라고 하는군.”
팔랑팔랑.
린이 가이드북을 펼쳐 우리에게 보여준다.
거기에는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형형색색의 연못이 있었다.
피처럼 붉은 열탕부터 바다를 연상시키는 코발트빛 연못까지.
다양한 열탕 사진이 가이드북에 실려 있다.
그것도 쓸데없이 풀컬러로.
확실히 사진을 보니 신기하기는 하다.
일본에서 온천으로 가장 유명한 도시답게 별별 관광지가 다 있는 모양.
“그것 말고도 사파리, 유원지, 수족관, 케이블카도 유명하다고는 하는데······.”
뒤적뒤적.
린이 가이드북을 뒤적이며 말한다.
사파리, 유원지, 수족관, 케이블카 같은 건 굳이 여기서 볼 필요가 없는 것 아닌가?
“덕성. 너는 어디가 가고 싶나?”
린이 이쪽을 바라본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베아트리체와 에반젤린의 시선도 이쪽을 향한다.
“소녀도! 소녀도 궁금한 것이와요! 김덕성님! 어딜 가고 싶으신 것이와요?”
착.
에반젤린이 기도하는 포즈로 나를 바라보면서 눈을 반짝인다.
일본 애니메이션에서나 보던 초롱초롱한 눈빛.
저걸 실제로 보니까 좀 그렇다.
얘는 눈이 무슨 LED 램프인가?
왜 이렇게 반짝거려.
아무튼, 내 목적지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지옥 순례부터 하지.”
어차피 온천욕은 밤에 숙소에서 할 테니까.
지금은 관광을 즐겨야 한다.
“하와와와······. 소녀는 김덕성님의 의견에 따르겠사와요.”
에반젤린이 얼굴을 붉히면서 웃는다.
“알겠다. 그럼 그쪽으로 안내하겠다.”
탁.
린이 가이드북을 덮는다.
“잠깐! 인간들이여! 여의 의견을 안 듣고 멋대로 정하다니! 괘씸하도다!”
뒤늦게 베아트리체가 항의했지만, 린은 베아트리체의 항의를 무시했고 에반젤린은 말없이 베아트리체를 쓰다듬었다.
“으윽······.”
쓰담쓰담을 받는 베아트리체의 얼굴이 붉어진다.
그렇게 우리의 벳푸 관광이 시작되었다.
*
지옥 순례는 가마솥지옥, 귀산지옥, 바다지옥, 피연못지옥, 회오리지옥, 흰연못지옥, 승려지옥, 산지옥, 금룡지옥의 총 아홉 지옥으로 구성된다.
물론 말이 지옥이지 진짜 지옥은 아니고, 사람이 접근하기 힘들 정도로 높은 온도의 열탕이 분출되는 장소가 지옥 같다고 해서 에도 시대부터 지옥이라고 부르던 명칭이 현대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지옥이 된 것이다.”
탁.
린이 가이드북을 덮으면서 말한다.
덜컹.
버스 바깥에는 수증기가 군데군데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벳푸 시내가 보인다.
온천 도시라더니 땅만 파면 유물이 나오는 경주처럼 여기는 땅만 파면 온천수가 솟아오르는 모양.
“하와와와와······. 지옥이라니······. 소녀, 듣기만 해도 섬찟하면서도 신기한 기분인 것이와요!”
린 옆자리에 앉은 에반젤린의 눈동자가 빛난다.
“흠. 지옥 순례라······. 보나 마나 여가 경험한 진짜 ‘지옥’의 하위 호환이겠지만, 인간 세계에도 꽤 쓸 만한 장소가 있군. 꽤 흥미로워. 부디 내 고향이었던 다크 플레임 헬의 편린이라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어.”
드물게 베아트리체도 관심을 보인다.
그녀의 외눈이 붉게 빛난다.
다크 플레임 헬은 대체 어디야?
어이가 없네.
“그럼 가장 먼저 가는 지옥은 어디인 것이와요? 시노자키 공.”
“가마솥 지옥이다.”
에반젤린의 질문에 대답하는 린.
때마침 버스가 목적지에 도착한다.
버스에서 내리자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모습과 함께, 커다란 오니 동상이 보인다.
커다란 솥 모양의 조형물 위, 오래된 놀이공원에 세워진 싸구려 조형물처럼 쓸데없이 기괴하게 생긴 빨간 오니 동상이 인상적이다.
“옛날에는 여기에서 올라오는 증기로 물을 데우거나 음식을 만들어서 신에게 바쳤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들었다. 그래서 가마솥 지옥이라는 이름이 붙은 모양이야.”
어김없이 린의 설명이 뒤따른다.
증기로 밥을 해 먹었다고?
진짜로?
희한한 짓도 다 하는군.
“여기가 지옥 순례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곳이라고 들었는데······.”
“어서 가보는 것이와요!”
눈을 반짝이는 에반젤린.
여기서 제일 흥분한 것처럼 보이는 그녀가 린의 지시도 받지 않고 안쪽으로 뛰어 들어간다.
“어, 잠깐. 기다리거라. 계약자여!”
에반젤린을 따라가는 베아트리체.
“이러다가 저 두 사람을 놓칠지도 모르겠군. 우리도 얼른 가도록 하지. 덕성.”
린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한다.
그녀를 따라 가마솥 지옥에 입장한다.
저 멀리 진흙 열탕을 구경하고 있는 에반젤린과 베아트리체가 보인다.
“우와아아아······.”
눈을 반짝이는 에반젤린.
가까이 가서 보니 증기가 엄청나게 피어오르는 진흙탕이 있다.
뜨거운 기운이 느껴지는 것만 제외하면 그냥 진흙탕이랑 별로 다를 바 없는 수준.
이걸 볼거리라고 지금.
내가 혀를 차고 있던 그때.
“여기 간판! 일본어 말고 한글로도 쓰여있는 것이와요!”
에반젤린이 옆에 있는 간판을 가리키며 말한다.
아니 진흙탕이 아니라 간판을 보고 놀란 거였나?
그녀 말대로 정말로 간판에 일본어와 한글이 병기되어 있다.
일본 찾는 관광객 중에서 한국인이 1위라더니, 이런 데서 한글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런데 글씨체가 영 별로네.
“어라? 저기 마시면 10년은 젊어지는 온천수라고 적혀 있사와요!”
에반젤린의 손가락이 저 멀리 있는 약수터 비슷한 곳을 가리킨다.
그냥 약수터와의 차이점이라면, 역시 수증기로 자욱하다는 것.
대나무로 만들어진 간판에는 일본어와 한글로 나란히 ‘한 잔 마시고 10년 젊어지세요!’라고 친절하게 쓰여 있다.
온천수를 마시면 10년이 젊어져?
딱 봐도 거짓말일 가능성이 농후한, 관광객 상대로 약 파는 사기가 틀림없다.
“하와와와······. 마시면 젊어지는 온천수라니, 신기한 것이와요.”
“흠흠. 가마솥 지옥의 온천수에는 특별한 효능이······.”
“그걸 누가 믿냐?”
“큿······.”
내가 말을 잘라내자 입술을 깨무는 린.
그래도 어쨌건 지역 명물일 테니 한 번 마셔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 온천수 약수터로 향한 그때.
거기에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에반젤린보다 좀 더 진한 분홍색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거유 미녀.
그녀의 모습을 확인한 린이 놀란 목소리로 말한다.
“마유즈미 선생님?!”
“누, 누누누누가 마유즈미 선생님이라는 거죠?!”
린의 말에 놀라서 손사래를 치는 마유즈미 선생님.
그녀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선생님······. 소녀가 보기에는 마유즈미 선생님이 맞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와요!”
옆에서 에반젤린이 분홍색 트윈테일을 흔들면서 말한다.
“아, 아니에요! 선생님은 절대 10년 젊어진다는 말에 혹해서 온천수를······. 흡!”
에반젤린의 말을 들은 마유즈미 선생이 당황한 표정으로 말하다가 입을 틀어막는다.
그녀의 말을 들은 린, 에반젤린, 베아트리체의 표정이 묘해진다.
우리 사이에 미묘한 침묵이 흐른다.
침묵을 깬 건 린.
그녀가 조심스러운 말투로 말한다.
“선생님······. 젊어지고 싶으셨군요.”
“흠. 하긴 여의 귓가에도 마유즈미 선생은 노처녀라고 들었으니 말이야.”
옆에서 베아트리체가 악의 없는 순수한 목소리로 말한다.
노처녀.
그 말을 들은 마유즈미 선생의 안색이 새하얘진다.
“서, 선생님은 노, 노처녀가 아니에요!”
마유즈미 선생이 빨개진 얼굴로 소리친다.
설정집에 실린 마유즈미 선생의 나이는 스물다섯.
초혼 연령대가 20대 후반~30대 초반인 한국의 현실로 미루어 볼 때, 마유즈미 선생의 나이는 한국 기준으로는 절대 노처녀가 아니다.
하지만 여기는 안타깝게도 내가 살던 현실이 아니라 비상식이 상식이 되는 라노벨 세상.
여자가 24살부터 노처녀 취급받는 건 라노벨 세상의 ‘상식’이다.
즉, 마유즈미 선생 역시 라노벨 세상의 잘못된 상식의 피해자인 것이다.
“저, 절대 나이랑 상관없이 젊음을 유지하는 이사장님을 동경하는 건 아니니까요! 10년 전의 제가 남자들이 줄 서서 운동장을 채울 정도의 전성기라서 온천수를 마시고 10년 전의 진짜 ‘마법소녀’로 돌아가려는 망상을 한 것도 별로 딱히 아니니까요!”
마유즈미 선생이 양 주먹을 불끈 쥔 채로 소리친다.
“뭐야? 무슨 일이야? 에리링. 방금 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어, 저기 주인님이랑 마유즈미 선생님이잖아?!”
“서, 서서서설마 당신?! 교환학생으로도 모자라 선생님까지 유혹한 건가요?! 더 이상의 도둑고양이는 전속 시녀로서 용납 못 해요!”
“지이이이이이······.”
“니시시시. 언니들 진정해. 마유즈미 선생님은 ‘아직’ 안 넘어갔다구. 뭐 어차피 초☆카와이☆갸루★여동생 하루는 누가 더 늘어나건 상관없지만! 그런데 언니들. 이 위장. 의미 있는 거야? 초 의미 없는 것 같은데.”
“시끄러워요! 조용히 해요! 쿠로사와 양!”
근처에서 엑스트라가 아닌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샤사삭.
그러자 황급히 근처 수풀에 몸을 숨기는 네 미소녀가 보인다.
올리비아, 마코토, 에리, 하루였다.
하필 복장도 선글라스, 중절모, 마스크에 바바리코트다.
심지어 딴에는 위장한다고 네 명 모두 양손에 나뭇가지를 들고, 중절모에는 나뭇잎을 끼워두고 있다.
저렇게 하면 진심으로 눈에 안 띈다고 믿는 건가.
심각한데.
“흐윽······.”
마유즈미 선생이 어깨를 떤다.
그 모습을 본 린이 어색한 말투로 말한다.
“서, 선생님. 힘내십시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김 군!”
덥석.
선생이 내 손을 잡는다.
이건 또 무슨 경우야?
갑자기 당황스럽다.
“서, 선생님. 그렇게 노처녀 같아요?! 여자 전문가인 하렘왕 ‘검은 귀축’ 김 군의 의견을 선생님 듣고 싶어요!”
초롱초롱.
마유즈미 선생님의 분홍색 눈동자가 빛난다.
누가 무슨 전문가라고?
그걸 왜 담임 교관이라는 양반이 진지하게 믿고 있냐고.
어이가 없다.
[파트너. 레이디가 진지하게 질문하는데 실례되는 대답을 할 건 아니지?]머릿속에서 흑태자가 말한다.
“김 군······.”
마유즈미 선생이 말끝을 흐린다.
그녀의 눈빛이 이쪽을 향한다.
흑태자의 말을 굳이 따를 필요도 없다.
“아뇨 별로 노처녀 안 같은데요.”
내 상식은 아직 온전하니까.
나는 아직 라노벨 세상의 상식에 타락하지 않았다.
“저, 정말인가요?!”
마유즈미 선생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의 얼굴이 밝아진다.
“와아아아. 고마워요! 김덕성군!”
와락.
마유즈미 선생이 나를 끌어안는다.
그녀의 부드럽고 커다란 감촉이 가슴팍에 뭉개진다.
“고맙긴 개뿔. 그냥 사실만 말한 겁니다. 좀 떨어지십쇼.”
마유즈미 선생을 밀어낸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다.
“후후. 선생님 완전 기분 좋아졌어요! 역시 이런 미신이랑 유사과학 따위는 안 믿는 게 좋아요! 생도 여러분도 미신에 속아 넘어가는 일이 없도록 해요!”
기분이 좋아진 마유즈미 선생이 자리를 떠나면서 말한다.
방금까지 미신에 속으려고 했던 사람이 한 말이라 그다지 설득력은 없었다.
에휴.
관광하다가 이게 대체 무슨 꼴인지.
속으로 혀를 내두르던 그때.
“······덕성.”
등 뒤에서 왠지 평소보다 차가워진 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