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ademy’s Black-Haired Foreigner RAW novel - Chapter (310)
제 308화
내가 원하는 바
그녀가 펼쳐낸 심상전개의 공간이 조금씩 줄어든다.
절망의 검은 공간을 희망의 빛처럼 물들인 새하얀 하늘도, 바닥에 그려진 새하얀 공간도 순식간에 줄어든다.
실체화됐던 정령 아마테라스 역시 순식간에 형체를 잃으면서 양산으로 빨려 들어간다.
놈의 대답에 손이 무의식적으로 부르르 떨린다.
입술을 깨문다.
‘······나 때문이었나.’
결국은 나 때문이었다.
내가 빙의해서.
내가 살아남기 위해 듀랜달을 취득하고 원작을 비틀어서.
내가 주인공 유지 대신 이 세상을 선점하고 독식해서.
내가 메사이어를 자극해서.
모든 게 내 행동과 그로 인한 나비효과 때문이었다.
“자아! 김덕성 군. 얌전히 사지를 내어주시죠. 마스터의 명령이 있으니 죽이지는 않겠지만······. 뭐 마스터께서 당신을 멀쩡한 상태로 데려오라고 하지도 않으셨으니까요. 더는 반항하지 못하게, 다시는 제 선생님을 유혹하지 못하게, 말 잘 듣는 인형으로 만들어드리겠습니다.”
프로페서가 검을 치켜든다.
“어비스── 제네레이터!!!”
놈이 스킬명을 외치자, 검은 어둠이 꾸물거린다.
꾸물거리던 검은 어둠이 심연의 구체로 뭉쳐 그대로 빠르게 쏘아진다.
어비스 제네레이터.
원작 11권에서도 프로페서가 사용했던 스킬.
원래 마력으로 사용해도 강력하지만, 심상전개 상태에서 심연의 어둠 보정을 더해 사용하는 어비스 제네레이터는 EX랭크 수준에 걸맞는 위력을 지닌 파괴 스킬.
원작에서는 전성기 모드의 세이라가 막아냈지만, 지금은······.
나도 세이라도 막아낼 수 없다.
이제 남은 세이라의 심상전개 공간도 얼마 되지 않는다.
이대로면 진다.
아니, 패배가 문제가 아니다.
저 공격을 맞으면 무조건 죽는다.
내가 그런 절망적인 결론을 내린 그때.
“······꼬마야······.”
옆에서 세이라가 희미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나를 향한다.
“······너는······. 너는 반드시 살아야만 한다······. 너는······.”
세이라가 이를 악문다.
[누님······.]머릿속에서 흑태자가 말한다.
세이라의 몸에서 꺼질 듯한 흰색 마력이 불타오른다.
그녀의 몸이 하늘로 두둥실 떠오른다.
“너는······. 너만은······. 지키겠다. 10년 전에는 지키지 못했지만······. 지금도 그럴 수는 없다! 이 몸이 너만은······. 살리겠다! 반드시 지키겠다!”
화르르륵.
세이라의 몸에서 하얀 불길이 타오른다.
흑태자가 말끝을 흐린다.
알고 있다
지금의 세이라는 무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처 입은 마력로를 혹사해 마력을 뽑아내고 있다는 사실을.
어쩌면······. 그녀는······.
“파이브 크라운즈이자 백색 여제, 그리고 슈오우 영웅 학원 이사장의 이름으로!! 김덕성! 이 몸은 너를 살리겠노라!”
이번 공격으로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릴지도 모른다.
죽지는 않겠지만, 마력로에 영구적 손상을 입는 건 확정이다.
어쩌면 모든 능력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빌어먹을.
이를 악문다.
뭐라도 해야 한다
그래야 하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지금 내가 달려들어봤자 오히려 프로페서 좋은 일만 시키는 거다.
그렇다고 프로페서를 이길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원작과 다르게 프로페서가 이상한 병기를 들고왔을 때부터, 이미 모든 게 어긋났으니까.
엿 같네.
철저한 무력감이 온몸을 지배한다.
“선생님!”
그 모습에 프로페서가 당황한 목소리로 외친 순간.
번쩍!
세이라의 몸에서 하얀 섬광이 일어난다.
콰-과-과-광!
그녀의 몸을 가린 하얀 휘광과 어비스 제네레이터의 검은 구체가 충돌한다.
흑과 백의 충돌과 함께 눈이 멀 듯한 빛이 시야를 가린다.
“······아······.”
한 줄기 희미한 탄식이 들려온다.
스르륵.
하늘에서 그녀가 떨어진다.
요시자키 세이라.
전투 모드가 해제된 모양인지, 검은 고스로리 드레스로 돌아간 그녀가 입에서 피를 토하면서 바닥에 쓰러진다.
세이라의 심상전개가 해제되며 검은 심연의 압박이 다시 몸에 가해진다.
하지만 나는 마력을 강제로 일으키며 움직였다.
움직여서 하늘에서 떨어지는 그녀를 받아들였다.
탁.
세이라가 내 품에 안긴다.
“······이제야 이 몸한테 공주님 안기를 해 주는구나······. 얄궂은 꼬마 같으니······.”
세이라가 희미하게 웃는다.
투구를 해제한다.
맨 얼굴이 드러난다.
세이라가 피 묻은 손으로 내 뺨을 만진다.
“······이 몸은 신경 쓰지 말거라. 꼬마야. 네가 이 몸을 걱정하기는 백 년은 이른 것이니······. 살아라. 무조건 살아라. 그것이 내 마지막······.”
툭.
세이라의 고개가 떨어진다.
그녀의 마력이 희미해지고, 숨소리가 가늘어진다.
또 희생했다.
멍청하게.
제 목숨을 던져 가면서.
고작 나 따위를 지키자고.
어째서 라노벨 세상에 사는 인간들은 다 멍청한 호구들 뿐인가?
손이 파르르 떨린다.
“······김덕성······. 스승님을 그따위로 만들다니······. 이제 더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오늘······. 마스터의 명령을 어겨야겠군요. 저는······. 저 프로페서는······. 당신을 죽이겠습니다.”
귓가에 프로페서의 헛소리가 들린다.
“어비스!! 제네레이터!!”
프로페서가 발악하듯 외친다.
검은 구체가 다시 쏘아진다.
시야에 검은 구체가 보인다.
놈은 나를 죽인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번 공격은 정말로 나를 죽일 정도의 위력일 것이다.
[파트너······.]머릿속에서 흑태자의 안타까운 목소리가 들린다.
그가 말했다.
자신의 도움은 이번뿐이라고.
다음부터는 너 혼자서 헤쳐나가야 한다고.
생각해보면 빙의 이후부터 지금까지.
미래를 안다고, 원작을 안다고 잘난 척 이리저리 돌아다녔지만 나 혼자 이룬 건 아무것도 없었다.
거의 모든 전투에서 나는 타인의 도움을 받았다.
올리비아에게, 카스미 선배에게, 마코토에게, 에리에게, 마유즈미 마유 선생님에게, 시노자키 이치로에게, 린에게, 베아트리체에게, 에반젤린에게, 아리스에게, 하루에게, 유지에게, 이시하라에게, 한서진에게, 벨라에게.
힘들 때마다, 상대하기 어려운 적이 나타날 때마다 나는 그 고난을 타인에게 떠맡기기만 했다.
진정으로 홀로 위기를 마주한 적은 없었다.
‘난······. 나는······.’
내가 지금까지 해온 일이 정말 잘한 일이었을까?
원작과는 이미 광년 단위로 떨어진 스토리.
나 아니었으면 다칠 일 없던 히로인들이 나 대신 다치는 일까지.
빙의라는 이름으로 저지른 업보, 사이다라는 이름으로 저지른 이기적인 일을 나는 이제야 돌려받는 걸지도 모른다.
올리비아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국뽕 너튜브에서 떠들어대는 것처럼.
나는 영웅 따위가 아니다.
라노벨 읽다가 빡쳐서 빙의됐던 평범한 오타쿠 출신 취준생이었을 뿐이었다.
그래, 그뿐이다.
다가오는 검은 구체를 보며 눈을 감는다.
흔한 회귀물 웹소설처럼, 죽기 전에 보이는 주마등 따위는 없었다.
이제 끝인가.
내가 그렇게 생각하던 그때.
[정신 차려, 파트너!]머릿속에서 흑태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너는 할 수 있어. 이 흑태자 님이 보장한다고! 기억 안 나? 생사의 기로에서 대적과 싸울 때라면 심상전개를 각성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때가 바로 지금이야! 파트너!]‘무슨 헛소리를······.’
소년만화 같은 소리라니.
여기는 라노벨 세상이지만 현실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는 주인공이 아니다.
그렇게 편의주의적인, 형편 좋은 위기 속 각성 이벤트 따위, 나에게 일어날 일은 없다.
어이가 없다.
그래.
차라리 없어지는 것이 낫다.
나는 빙의자였으니까, 어쩌면 내가 없어지면.
다들 원래대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원작처럼.
내가 그렇게 생각하던 그때.
[······네가 지금까지 해온 행동들, 네가 지금까지 해온 것들 전부. 의미없는 일 같은 게 아니야.]머릿속에서 흑태자가 말한다.
‘뭐라고······?’
[파트너. 너는 상냥한 남자이자 진정한 젠틀맨이야. 네가 해온 일은 틀리지 않았어. 내 동생은, 모든 사람은 너한테 구원받았어. 네 의도야 어쨌건······.]머릿속에서 흑태자가 말한다.
[위선도 선이야. 파트너. 네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녀들은 구원받았고. 그래서 그녀들이 파트너를 좋아하게 된 거야. 그런데 여기서 그냥 포기할 거야? 이대로 포기하면 내 동생이, 너를 사랑하는 그녀들이 울 거라고! 그리고 나는 그 꼴, 절대 용납 못 해! 내 동생을 울리면 아무리 파트너라도 피눈물을 흘릴 각오는 해야 하니까, 그러니까······.]흑태자가 말한다.
[포기하지 말고. 기억해. 그날의 감각을. 그리고 맞서. 너라면 할 수 있어. 파트너. 이 흑태자 님이, 파이브 크라운즈의 일원인 위대한 라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보장하지! 도와줄테니 떠올려, 그 날의 감각을!]흑태자의 말과 함께 내 머릿속과 몸에 강제로 그날의 경험이 새겨진다.
흑태자가 합일을 통해 전달해준 것이다.
[파트너. 잘 들어. 심상전개는······. 자신이 만들어낸 소우주를, 자신이 만들어낸 심상풍경을, 네가 생각하는 신념을,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바를 현실에 덧씌우는 거야. 그리고 보여주는 거야. 적에게, 내 신념은 이거라고.]신념?
내가 원하는 바라고?
흑태자의 설명이 머릿속을 강타한 순간.
불현 듯 깨달음이 찾아왔다.
신념.
그래, 내가 진짜로 원하는 건······.
그건······.
구체가 지척으로 다가온다.
마력이 저릿저릿 느껴지던 순간.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떠올렸다.
나의 신념을, 내가 진짜로 원했던 소원을.
너무나 당연하지만, 말하기 낯간지러워서 잊고 있었던 것을.
그건 바로.
‘······아무도 나 때문에 죽거나 다치지 않는 것.’
그 누구도 나 대신 나서서 뭘 맞고 죽지 않는 세계.
그것이야말로 내가 원하던 풍경이었다.
소년만화나 라노벨스러운······.
‘아니, 이건 소년만화도 라노벨도 아니야.’
소년만화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웹소설이다.’
따지고 보면 그렇다.
웹소설에서 조연과 히로인의 죽음은 금기고 드리프트다.
조연이나 히로인이 죽으면 그 즉시 고구마라고 댓글과 쪽지로 무수한 5700자 공격이 들어오고 하차 선언이 줄을 이을 것이다.
웹소설의 주인공은 결코 히로인과 조연이 죽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웹소설 주인공은 압도적인 먼치킨 능력으로 적을 처음부터 찍어누르고, 고구마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위기의 존재 자체를 말살한다.
어쩌면 웹소설이야말로 라노벨보다 훨씬 상냥한 세상일지도 모른다.
내게 필요한 건······. 그건······.
그런 사이다였다.
죽음이라는 고구마를 박살내고, 모두가 행복한 사이다를 현실에 구현하는 것이었다.
[그래! 정답이야! 파트너!]머릿속에 흑태자의 목소리가 울리는 순간.
마력로와 블랙 스톤이 공명한다.
우우우우우우웅!가슴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벳푸 때와는 다르다.
강제로 끌어올려졌던 그때와는 달리, 나의 의식이 스스로 확장된다.
감각과 의식, 정신이 끝없이 확장되며 수많은 정보들이 뇌리로 들어온다.
그것은 전능감이었다.
전율감이었다.
벽을 부수고 깨달음을 얻어 현경이 된 듯한 전능감이 온몸을 휘감는다.
그 사이에서 진언이 홀연이 떠올랐다.
그것은 내 신념을, 나의 심상을, 내가 완성한 소우주를 현실에 새기는 트리거.
눈을 뜬다.
검은 구체가 멈춰 선 듯 보인다.
그 상황에서 나는 선언했다.
[모두를 구원하는 현실]【Break the Fourth Wall】
내 신념을 상징하는 진언이 현실에 새겨진다.
그리고.
세계가 뒤집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