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stand again RAW novel - chapter 134
그래도 개인 연습이나 여가까지 함께 즐기자고 달라붙는 사람이 없어 다행이라 여기며, 태화는 남아 있는 일과를 소화했다.
***
태화는 딱히 급에 따라 사람을 가려 사귀지 않았다.
호의를 가지고 다가오는 이는 비슷한 호의로 대했고, 웃음 속에 칼을 가진 이들은 거리를 벌렸다.
그러나 이러한 대처에는 큰 문제가 있었는데, 생각보다 많은 수의 인간들이 자신들보다 잘난 이에게 시기와 질투를 느끼며 그렇지 않더라도 이용하거나 덕을 보고 싶단 생각을 한다는 것이었다.
숙소에 머무는 어중간한 인지도의 배우들, 언젠간 감독이 되고 싶어 이 기회에 어떻게든 발을 넓혀 보려 발버둥 치는 스텝들도 그러했다.
그들은 다른 거물 배우들과 달리 숙소에서 죽치고 있는 태화와 친해지고 싶어 했다.
그가 연습 벌레인 걸 알고 질린 표정을 지으면서도 앞에서는 웃으며 이런저런 권유를 건넸고, 가끔은 본인들의 외모를 믿고 다가오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 상황이 이어지다 보니 태화가 그 자신의 인기나 인지도보다 밑에 있는 이들과 적당히 거리를 뒀다.
그러니까, 일부러 사람에게 급을 메기고 저보다 못한 이들을 무시한 건 아니란 의미다.
「왼쪽이 약하시네요.」
「이런 괴물 같은 녀석. 그래도······!」
「앗.」
「아직 농구로 날 제치려면 멀었단다 아가야.」
쑨다오밍은 태화의 손에 있던 공을 재빠르게 가로채 그대로 슛을 날렸다.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린 농구공은, 곧 골대를 크게 한 바퀴 돌곤 그물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굉장하시네요.」
「어릴 땐 선수를 지망했으니까. 아직도 녹슬지 않았지.」
184란 선수치고 작은 키 때문에 배우로 전향한 것뿐이지, 아니라면 지금쯤 NBA에 있을 거라며 그는 시원한 웃음을 흘렸다.
촬영이 석 달이 넘어섰을 때, 두 사람은 상당히 가까워졌다.
태화의 노력이라기보다 그의 연기력에 호감을 품은 다오밍이 제멋대로 다가왔다고 말하는 게 옳았다.
그는 현호와 비슷한 천재성을 지녔으면서도 현호와 달리 고분고분하고 예의도 바른 태화를 좋아했다.
당연히 그런 호감은 행동으로 이어졌고, 태화는 ‘친해지고 싶다’라는 문자를 온몸으로 드러내는 다오밍을 거절하지 않았다.
‘뭐, 주변은 그리 생각 안 하는 것 같지만······. 확실히 삼국 프로젝트에 참여할 정도라 그런지 다들 야망이 상당히 노골적이야.’
태화에게 술자리나 함께 놀 것을 권유했던 이들은 그가 다오밍과는 친하게 지내는 것을 보며 ‘너도 자기보다 높은 이랑만 사귀려 하는 속물적인 인간이구나?’란 시선을 숨기지 않았다.
그들은 태화를 마치 ‘사랑했으나 친구와 바람난 남친과 마찬가지로 좋아했으나 남친과 바람난 베프’를 보듯 바라봤다.
‘둘 중 어느 쪽이 난 진 모르겠지만.’
사실 그들은 중국의 스타 다오밍과도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하는 듯 보였다.
여러 문제 때문에 다가가진 못해도 쑨다오밍을 보는 그들의 눈엔 언제나 아쉬움이 감돌았다.
‘그래서 더 나한테 저러는 거 같기도 하고······.’
‘너무 저러지만 않았어도 가끔 어울렸을 텐데’라 생각하며 태화는 이따 현규에게 저들의 시선에서 벗어날 적당한 방법을 물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야. 태화야?」
「아, 네?」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던 그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너 혹시 천재냐?」
「······그건 또 무슨 말이세요.」
태화는 무슨 헛소리냐고 나올 뻔한 말을 애써 공손하게 바꿨다.
쑨다오밍은 혼자 생각하고 결론 내리는 일이 잦았는데, 꼭 그렇게 내린 결론을 당사자에게 아무런 앞뒤 없이 묻는 경우가 많았다.
질문을 받는 사람으로선 상당히 뜬금없고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아직 서른도 안 됐는데 원어민 수준으로 할 수 있는 언어 수가 너무 많잖아? 저 박현호도 따로 중국어 강사 맨투맨으로 붙여서 대사 확인하는데 넌 전혀 그러지 않고.」
「아.」
그제야 어렴풋이 내용을 이해한 태화가 작게 탄성을 뱉었다.
태화는 모르고 있던 사실이지만 촬영 중 필요한 외국어 대사를 따로 교습을 받지 않는 주연은 태화가 유일했다.
아무리 잘해도 외국인의 한계에 부딪혀 일부 검수가 필요한 그들과 달리 그는 ‘언어’라는 재능 덕에 원어민과 같은 수준의 이해도와 언어 전달 능력을 갖췄다.
그렇기에 임팩트 있는 외국어 대사도 혼자만의 연습을 통해 정확히 감정을 전달할 수 있었고 가끔 있는 작은 걸림마저 주변 배우들에게 묻는 수준으로 해결했다.
‘다들 많지 않은 외국어 대사를 혼자 연습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협력자들’의 촬영 현장은 조금 독특했다.
특히 삼국의 영웅들이 모여 있는 장면은 상당히 특이하게 진행됐다.
카메라에 찍히는 이들이 서로 다른 언어로 대사를 뱉고 있으니 다른 촬영 현장에서는 보기 힘든 장면인 게 분명했다.
목소리가 겹치는 부분에 한에선 언어를 통일했으나 배우들은 기본적으로는 자신들의 모국어로 표정과 감정을 연기했다. 그 편이 더 감정전달에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단순히 연기 때문이라면 다른 방법을 사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복잡한 어른들의 사정이 포함되어 있었다.
외국어에 더빙을 입히기보다 자막과 내보내는 일이 일반적인 한국과 달리, 중국은 모든 대사를 보통화로 다시 녹음하고 그것을 자막과 함께 송출한다.
일본의 경우는 그 정도가 더 심해서, 외화 전문 성우라는 분야가 따로 있을 정도로 자막을 혐오했다.
그렇다 보니 한국을 제외한 두 국가는 더빙이 필수였고, 그들은 ‘그냥 한국도 나중에 더빙시키자!’라는, 배우들의 일을 하나 더 늘려 균형을 맞춰보자는 생각을 하게 됐다.
효율만 따지면 삼국 인물들이 만나 대화하는 장면은 한국어로 통일하는 게 맞았으나, 두 국가 입장에서 자존심이 상했기에 내려진 결정이었다.
한국이 싫어할 게 뻔했기에 그들은 당근도 함께 마련했다.
그들은 아주 짧은 장면을 추가해 한국판에선 수호자들이 모여 있을 때 한국어를 사용한다는 설정을 부여했다.
‘수호자들을 모아 대항하자 처음 외친 국가가 한국이니 그것을 존중해 한국어를 사용한다’라는, 조금 허술하면서도 한국인들이 볼 땐 기분 좋은 내용을 더한 것이다.
······사실 그 과정에서 중국과 일본도 각각의 이유로 자국어를 사용한다는 내용이 중국판과 일본판에 은근슬쩍 추가됐다.
어차피 두 국가의 버전에선 한상일이 처음부터 중국어나 일본어를 쓰게 될 테지만, 그래도 타 국가 인물들이 합의하에 중국어나 일본어를 사용한다는 건 나름 유의미한 장면이었으니까.
비슷하지만 다른 장면을 찍어야 하는 배우들만 열심히 갈렸다.
세 국가의 언어를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배우들을 일부러 찾았던 누군가에게는 허탈할 수 있는 이야기였으나, 원래 일이라는 건 계획대로 풀리지 않는 법이었다.
직접 연기해야 하는 배우들은 오히려 그 결정을 은근히 환영했다.
외국어로 단어 하나, 뉘앙스 하나에 긴장하면서 연기를 펼치는 것보다 원래 예정된 일을 좀 더 늘리고 영상 촬영은 모국어로 진행하는 편이 나았으니 말이다.
그런 이유로 배우들이 정말 신경 써서 외국어 대사를 뱉어야 하는 건 한 달 뒤, 한 달에 걸쳐 진행될 더빙 현장으로 미뤄졌다.
태화가 의아해했던 이유는 여기 있었다.
현재 외국어로 뱉어야 하는 대사는 긴 문장이 얼마 없었고, 양도 많지 않았다.
굳이 전문 강사가 붙어 교정할 수준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잘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네.」
「사실 지금은 외국어로 대사할 부분이 많지 않잖아요. 벌써부터 그렇게 한다는 게 이른 것 같기도 하고 역시 선배님들이란 생각도 들고······.」
「아부는. 다 너 때문인데.」
「네······?」
다오밍은 기분 좋게 웃었다. 태화가 한 발짝 늦게 대화를 따라오는 것이 즐거운 눈초리였다.
「네가 소림과 야쿠자들 소굴에 찾아가 깽판치는 장면을 촬영했을 때 두 국가의 언어를 모국어처럼 능숙하게 떠들었잖아.」
여전히 이해 못 하는 후학을 위해 쑨다오밍은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사실 그의 마음 한구석엔 이런 자존심 상하는 이야기 따윈 하지 말라고 외치는 자아가 존재했다.
그러나 그런 질투에 가까운 감정과 현실에 대한 외면이, 연기에 있어 독에 가깝다는 걸 다오밍은 알고 있었다.
「앞서가던 우리로선 위기감을 가질 수밖에 없던 장면이지.」
그래서 그는 다른 주연들이 애써 감췄던 사실을 태화에게 알렸다.
끝
ⓒ 마늘소금
커다란 TV의 화면 속. 상일이 바닥을 굴러다니며 혼자 멜로 영화를 찍다가 반 바퀴를 더 굴러 넓은 등에 안착했다.
양반 다리를 한 채 두루마리를 확인하고 있는 진혁의 등이었다.
「좀 떨어져라.」
화면 안의 임진혁이 입을 달싹거리자, 주시 중이던 박현호가 마이크에 대고 중국어로 대사를 읊었다.
날파리 보듯 귀찮아하는 진혁의 등을 타고 한상일이 천천히 어깨까지 기어올랐다. 성인답지 못한 행동인데도 장난기 서린 얼굴과 어우러져 위화감이 없었다.
진혁의 어깨를 잡고 축 늘어진 그는 호영에게 보였던 것처럼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동정인지 애정인지 모를 감정을 스승에게 호소했다.
「사랑하는 스승님, 제자는 스승님께 상당한 관심이 있습니다.」
옆에서 대기 중이던 태화도 한상일이 입을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애교 섞인 목소리를 흘렸다.
그리고 그 순간, 재생 중이던 화면이 멈췄다.
「두이화 선생. 싱크로가 살짝 맞지 않는데 ‘제자는’이란 부분을 그냥 ‘제자’로 줄여주세요.」
「알겠습니다.」
해드폰으로 들린 수정 사안에 태화는 몇 번 대사를 중얼거리곤 다시 움직이는 화면에 맞춰 대사를 내뱉었다.
「사랑하는 스승님, 제자 스승님께 상당한 관심이 있습니다.」
그의 입이 닫히는 것과 동시에 화면 속 한상일도 말을 줄였다.
「떨어지라고.」
「아, 쫌. 너무 하잖습니까. 파문 제자도 제자인데 좋아하는 사람에게 까인 제자의 여린 마음도 이해해달라고요.」
「나 바쁘다.」
「스승니임.」
「쯧, 징그럽게.」
박현호는 화면 속 임진혁이 그러하듯 미간을 한껏 찌푸린 채 평소보다 약간 굵은 목소리로 대사를 진행했다.
가끔 모국어와 외국어의 목소리가 달라지는 사람이 있는데, 현호의 목소리 또한 중국어로 말할 땐 조금 더 깊은 음색을 냈다.
흔히 동굴 목소리라 불리는 음성으로 조정실의 여성 스텝 중 일부는 이미 몽롱한 표정을 지은 채 유리 너머로 현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놈한테 이런 면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상일이 스승의 등에서 미운 일곱 살을 흉내 내며 앙알대던 장면이 야생마를 닮은 여성, 유메의 얼굴로 바뀌었다.
클로즈업된 그녀의 표정엔 떨떠름함이 감돌았다. 아니, 그 외에도 불쾌함, 경멸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이 함께 표류했다.
약 2초간 우메의 얼굴을 비치던 화면은 곧이어 한상일을 클로즈업했다. 가늘게 뜬 눈과 삐뚜름한 입술은 상대의 화를 돋우기 딱 좋은 모양새였다.
「눈치 없긴. 너 빨리 꺼지라고 이러는 거잖아.」
「무······!」
「시끄럽고 이쪽으로 와서 이 술식이나 확인해라. 일하라고 불러왔더니······.」
둘이 티격 거리려던 찰나 두루마리에 시선을 두고 있던 진혁이 시선을 아래로 고정한 채 입술을 움직였다.
「아하, 그러고 보니 카타노 그룹의 원류도 일본 주술사집단이었죠? 이래서 천재에 의지한 집단 유지는 장기적으로 안 좋은 건데 말이죠.」
「너 내 욕하냐?」
약간의 노기가 담긴 목소리를 무시하며 상일은 두루마리의 내용을 손으로 훑었다.
그리고 단숨에 주요 술식의 원리와 구조를 말로 풀어냈다.
문자를 하나하나 집는 유려한 손길을 따라 태화는 부지런히 입을 놀렸다.
입 모양이 없는 장면이라 해도 제한된 시간 내에 말을 마쳐야 하는 건 동일했기 때문이다.
약간의 음률을 담은 설명이 노랫가락처럼 이어졌다.
놀라는 우메의 얼굴, 그리고 상일의 설명을 이해하고 감탄하는 진혁의 모습이 차례차례 화면에 떠올랐다.
「그런 의미였군.」
「용건이 끝난 것 같으니 전 이만 가볼게요. 아참, 쟨 사모(師母)로 안 어울릴 거 같아요. 전 반대표를 드리겠습니다.」
방을 나섰던 상일이 다시 문을 반쯤 열고 진혁을 향해 입을 놀렸다.
대화의 상대는 스승이었지만 누가 봐도 우메를 놀리기 위한 말이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지금까지 어찌어찌 참았던 우메가 손에 든 잔을 문 쪽으로 던졌다.
빠르게 날아간 다기는 간발의 차로 닫힌 문에 막혀 명을 달리했다.
「네. 좋습니다. 30분 쉬고 들어가겠습니다. 세 분 수고하셨습니다.」
시근덕거리는 우메와 작게 한숨을 내쉰 진혁의 모습이 페이드아웃 되자 해드폰 너머로 음향 PD의 목소기가 들려왔다.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주연 삼인방은 머리를 누르던 물건을 벗어내고 가볍게 몸을 풀었다.
태화도 작게 한숨을 몰아쉬곤 물병을 든 채 녹음실을 나섰다. 밀폐된 공간에서 작업하다 보니 신선한 공기가 고팠던 탓이다.
‘으으······. 오늘 벌써 3시간째 작업이네. 아직 중국어는 반 정도 남았고, 일본어도······.’
그는 지나간 날과 앞으로 남은 일정을 손으로 꼽으며 몸을 떨었다.
일반적으로 1시간 반짜리 영화를 녹음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 다섯에서 여섯 시간.
물론 문제없이 진행될 경우의 이야기였고 입의 싱크로나 분위기 등의 애로사항이 생기면 고작 90분짜리 영화를 위해 20시간이 소모되는 일도 있었다.
그리고 ‘협력자들’의 상영시간은 150분. 그중 일본과 중국에서 개봉할 영화는 100퍼센트 더빙이 필요했다.
‘한국판 완성됐을 땐 삼분지일 왔다고 생각했는데.’
한국에서 상영될 버전은 중반과 후반, 수호자들이 서로 대화하는 부분만 한국어를 덧씌웠고, 나머지는 자막으로 처리했다.
애니메이션이 아닌 이상 더빙 영화는 영화관에서 인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두 국가의 완전 더빙을 보고 아쉬움을 느낀 한국 정부가 뒤늦게나마 VOD는 일반 버전과 더빙 버전을 내고 싶단 의사를 개진했으나, 그렇게 되면 7월 성수기를 노린 개봉이 물 건너갈 위험이 있어 기각됐다.
‘더빙이 삼일도 아닌 한 달씩이나 진행된다고 했을 때 알았어야 했어······.’
더빙을 준비해온 팀은 촬영이 진행되는 동안 입 모양에 맞는 각국의 대사를 다시 작성하고, 더빙에 필요한 성우들을 모집했다.
그렇게 준비된 상태에서 한 달.
그것은 정말 완벽에 완벽을 기울여 그 어떤 위화감도 없이 작업을 마치겠다는 의지였다.
“아, 살 거 같다······.”
옥상 정원으로 나간 태화는 의자에 앉아 잠깐의 평화를 만끽했다.
중국은 전부 먼지로 가득 차 있을 것 같다는 편견이 있지만 사실 도시에서 벗어난 외곽의 경우 ‘불어라 동남풍이여’를 시전한 덕에 상당히 깨끗한 공기를 자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