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stand again RAW novel - chapter 22
여기에 있는 어떤 배우도, 유라를 후배 취급하고 있지 않았다.
‘아니, 배우 취급인가.’
태화야 선배 말고 ‘씨’라 불러 달라는 말에 그렇게 부를 것이나, 다른 배우들의 경우 태연하게 ‘유라 씨’라 불렀다.
마치 너 같은 건 인정할 수 없다는 것처럼 그들은 웃는 얼굴로 유라를 유리시켰다.
유라도 그것을 눈치챘는지 잠시 얼굴을 굳히더니 곧 생글생글 웃으며 상민을 살갑게 대했다.
조명이 위치를 잡고 창식이 의자에 앉자 커다란 박수 소리와 함께 연기가 시작됐다.
1-4.
결혼식 전날 일방적으로 파기를 통보받고 우울한 바다를 붙잡고 그녀의 엄마 이은하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고 늘어진다.
자신도 이유를 모른다 소리치는 딸을 다그치고 그렇게 모녀간의 싸움이 시작되려던 찰나, 아래층에서 올라온 가람이 은하를 다독인다.
결국 똑같이 서러워져 우는 은하를 위로하고 가람은 친구의 마음이나 풀어 줘야겠다며 바다를 단골 술집으로 데려간다.
가람이 바다와 친한 친구임을 알리는 동시에 사건의 장소로 이동하는 장면이었다.
“너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파혼이라니!”
“나도 몰라! 엄마까지 왜 그러는데. 딸인 내 편 들어줘야 하는 거 아니야?”
“이 화상아! 니 편을 들긴 무슨 니 편을 들어! 너너, 하 서방에게 뭘 했길래 갑자기 이런 소리가 나와?”
상민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유라를 닦달했다.
그녀의 얼굴엔 배신감마저 감돌고 있었다.
“진짜 모른다고! 나도 왜 그랬는지 알고 싶다, 흐읍! 진짜······.”
울컥 솟는 서러움에 입을 막은 그녀를 보고도 상민은 화가 안 풀린다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니가 뭘 잘났다고 울어!”
“자, 자, 어머니, 진정하세요.”
그녀가 다시 유라의 등짝을 때리려던 그 순간, 태화가 둘 사이에 끼어들어 상민을 말렸다.
어찌나 다급하게 온 것인지 그의 이마엔 작게 땀이 맺혀 있었다.
“가람이 넌 끼어들지 말고······!”
“어머니, 화나신 건 이해해요. 하지만 바다가 그런 애가 아닌 건 어머니께서 더 잘 아시잖아요.”
씁쓸한 얼굴로 말리는 태화를 보고 상민은 속으로 감탄했다.
서글서글하던 인물이 가볍고 헤퍼 보이는 남자가 된 것도 놀라운데 그 위에 안타까움이란 감정까지 덮여 있었다.
‘······요즘 애답지 않은 연기네.’
생활 연기가 대세가 되면서 연기에 배우의 색이 묻어나는 것이 흔해졌다.
그러나 태화의 연기는 ‘이태화’ 본인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가람을 연기하는 동시에 ‘가람으로서’ 심정을 표현했다.
“······허흐흑!”
그녀가 절망한 표정으로 울음을 터뜨리자 태화는 상민을 껴안고 어깨를 토닥였다.
“우리 어머니 참 눈물 많으셔. 저 맹꽁이가 누구 닮았······. 아아.”
토닥이는 와중에 농을 걸던 그는 팔뚝을 짓누르는 악력에 엄살을 떨며 더 빠르게 상민의 어깨를 두드렸다.
“자, 예쁜 어머니? 얼굴 드시고. 제가 바다한테 다 물어보고 올 테니까, 걱정 말고 한잠 푹 주무세요.”
아기 달래듯 어르는 말투에 상민은 헛웃음을 흘린 후 그의 뒤에서 흐느끼는 유라를 응시했다.
얼굴을 파묻고는 있으나 이쪽 연기도 그럭저럭 어울렸다.
“······알았어. 늦으면 연락하고.”
“네, 어머니 들어가세요! ······야, 맹꽁이. 일어나. 어휴, 얼굴 보소. 귀신이 언니야 하겠네. ······아악!”
그녀가 문을 닫고 나가마자 태화는 거친 태도로 유라의 이불을 빼앗으며 엉망이 된 그녀의 얼굴을 흉보다 주먹으로 명치를 맞았다.
“멍청이처럼 질질 짜지 말고 가자.”
“······어딜?”
“술 마시러. 아, 잠깐만. 네 얼굴 한 장 남기······ 아아!”
폰을 꺼내다 한 대 더 맞은 그는 나가라는 그녀의 외침에 ‘문 뒤에 있을 테니까 얼른 화장 고쳐. 기집애가······.’라고 말하다 베개를 피해 얼른 문밖으로 사라졌다.
씩씩거리던 유라는 곧 화장대로 다가가 화장 휴지로 눈가를 문지르며 투덜댔다.
“······저, PD님? 저희 컷하는 장면 끝난 거 같은데요.”
“으허헉! 어어? 컷, 컷!”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태화가 창식의 어깨를 톡톡 건드리며 말을 걸자 귀신이라도 본 듯 기겁하던 그가 손을 휘저으며 컷을 외쳤다.
그제야 끊을 타이밍이 지난 것을 깨닫고 다들 묘한 표정으로 웅성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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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승우씨
드라마의 촬영 환경은 열악하다.
시청률이 어느 정도 보장된 주말 드라마나 속도 싸움인 일일 드라마의 경우 총 네 대의 카메라가 배치되어 동시 편집마저 가능하지만, 이런 인기 없는 월화 드라마의 경우 2대만 주는 것도 감지덕지였다.
tvM이 드라마에 많은 돈을 투자하고는 있으나 그것이 시청률 3퍼센트 대의 월화 16부작에게까지 미치진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주연 캐스팅이나 홍보에 더 치중한 나머지 환경은 뒷전이 되었다는 게 맞는 얘기였다.
‘태양을 품은 바다’의 경우도 카메라가 부족하긴 마찬가지였다.
대본에 적힌 장면 수에 비해 컷은 더 세분화돼 있었으며 사실 상민이 나간 뒤 컷이 외쳐져야 했다.
‘······넋 놓고 구경해 버렸어.’
‘가람이 너무 자연스럽게 행동해서······.’
‘근데 유라 연기력이 저 정도로 좋았나?’
각자 다른 생각을 하던 스텝들은 묘한 눈으로 태화를 쳐다봤다.
단순히 간식으로 환심을 하려하는 신인인 줄 알았는데, 상민을 말리고 유라를 타박하는 태도에선 아까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타이밍을 잊은 게 아니야······.’
옆에 있던 스텝이 묘하게 불만스러운 얼굴을 한 창식을 힐끔거렸다.
그는 상민이 나간 순간 컷을 외치려 했다.
1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스쳐 지나간 태화의 표정이 아니었다면, 그 표정이 사람들을 홀리지 않았더라면 촬영은 예정대로 흘러갔으리라.
‘······1화 초반인데 시청자들한테 너무 긴장 없다고 까이려나.’
스텝은 짜증이 드러난 PD의 얼굴에서 슬그머니 시선을 뗀 후 실 없는 생각을 했다.
상민을 내보내고 유라를 향해 짓궂은 말을 내뱉기 전 태화의 얼굴엔 복잡한 감정이 떠올랐다.
친구를, 그렇다고 연인을 바라보는 것도 아닌 묘한 표정.
누구나 그가 어떤 감정으로 여주인공을 보는지 단박에 알아차릴 얼굴이었다.
태연하게 장난을 치고 타박하는 행동이 더 역설적으로 다가온지라 끝난 것을 안 몇몇도 조금 더 둘의 말다툼을 지켜봤다.
“다시 한번 갑니다! 클로즈업으로 갈 거니까 표정 연기 주의하고······.”
머리를 거칠게 털어 낸 PD는 사람들을 향해 큰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카메라의 개수가 적은 터라 각도에 맞게 같은 장면을 반복해서 찍어야 했다.
‘그게 아니라도 이걸 어떻게 써.’
창식은 찍힌 장면을 되감아 보며 화를 억눌렀다.
동원된 두 대의 카메라가 제 본분을 잊고 태화의 얼굴을 클로즈업해 버렸다.
다음 장면에서 원래의 위치로 돌아갔어도 명백한 NG였다.
‘이쪽 잘못이니 나무랄 수도 없잖아.’
화면 밖으로 벗어났거나 대사를 잊었다면 대놓고 망신을 줬겠지만, 이건 제 위치를 지키지 못한 제작진의 실수.
트집 잡아 봤자 신뢰를 잃는 건 자신이었다.
‘방심했어.’
연기를 잘하는 것은 오디션 당시 파악했지만 연극과 단역만 적혀 있는 필모그래피를 보고 몇 번 실수할 것이라 예상했다.
연극과 촬영은 달랐으니까.
그러나 정작 첫 실수를 벌인 건 자신들이었다.
‘······누가 이기는지 해 보자고.’
신인의 연기력을 알았으니 촬영부 스텝들도 더 이상 이런 바보 같은 실수는 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 하루 어떻게든 깎아내리겠다 결심하며 창식은 메가폰을 들었다.
***
“어머, 태화 후배. 그럼 내내 연극 쪽에 있던 거네? 후후, 나도 연극 출신이라 그런지 좀 그리운걸.”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PD는 신들린 사람처럼 완벽하게 장면들을 끊어 냈고, 배우들도 큰 실수 없이 자신들이 맡은 부분을 해냈다.
NG가 없던 것은 아니나, 늪이 되진 않았다.
‘이 친구는 크게 될 거야.’
자신의 도시락에 고기가 없다고 투덜거리며 상민은 태화를 살폈다.
한번 대사 실수가 나면 압박감으로 인해 촬영이 장기화되는 경우가 많다.
실수로 인한 주변의 눈초리, 똑같은 실수를 반복해선 안 된다는 부담감, 자책감 등이 합쳐져 악순환을 만드는 것이다.
이번 촬영에도 몇 번 ‘그럴 뻔’한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은근슬쩍 다가간 태화와 대화를 나누고 그들은 무사히 장면을 넘겼다.
‘아이돌도 생각보다 노력하고 있고······.’
“유라 후배, 그거 안 먹으면 나 먹어도 될까? 정말 늙은이에게 이런 거친 음식만 주고 말이지.”
“네, 네! 선배님! 얼마든지 드세요!”
친근하게 대하는 상민을 보며 유라는 환한 얼굴로 자신의 식판을 내밀었다.
“고마워. 이렇게 맛있는 게 많은데 정말 딸이나 매니저나 너무하기 그지없다니까. 귀신이야, 귀신.”
상민은 냉큼 미트볼 하나를 입에 넣고 시치미를 땠다.
물 뜨러 갔다 돌아온 매니저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살피고 있었다.
‘착하고 노력하는 앤데 왜 소문이 그렇게 났지?’
남아 있는 나물을 집으며 상민은 의아한 눈으로 웃고 있는 유라를 응시했다.
부족한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나 특별히 모자라다 느낄 정돈 아니었고, 연습량도 많아 보였다.
인기만으로 배우 놀음하려는 일부랑 달리 자세가 되어 있는 ‘후배.’
건너건너 들었던 ‘말’관 전혀 달랐다.
‘······미움을 산 거려나.’
작은 기획사에 있다고 했으니 더러운 일을 피하려다 이리 됐을 가능성이 높았다.
방송국 출입이 막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마도 언론 쪽, 부장급은 못 돼도 꽤 영향력 있는 기자이리라.
‘직접 건드릴 수준은 못 되니까 말이나 퍼트려 둔 거겠지.’
타인을 끌어내리기 좋아하는 동네인 만큼 약간의 불만 지펴 두면 알아서 타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성격 좋고 인간 좋기로 소문난 연예인들조차 루머 한두 개씩은 가지고 있었으니까.
‘버틸지 못 버틸지가 관건인가······. 버티면 좋겠네.’
가면을 쓰기 때문일까.
연예계는 거짓일 게 확실한 정보조차 여지를 남겨 뒀다.
아내밖에 모르는 애처가 배우에게 사실은 내연녀가 있다는 ‘소문’, 해외 명문대 출신인 가수가 사실은 학위를 위조했다는 ‘소문’, 아파서 군대에 가지 못한 개그맨이 진단서를 조작해서 빠졌다는 ‘소문’······.
상민도 3년 전쯤 재산 때문에 남편을 죽였다는 소문이 돌았다.
정말 믿고 그녀를 독하다 욕하는 이도 있었으며 망가진 이미지 때문에 한동안 밥줄이 끊기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