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stand again RAW novel - chapter 27
지아가 화장을 지우러 가고 얼마 뒤, 문자를 받은 승우는 그녀가 있는 대기실에 발을 들였다.
매니저나 코디는 어디로 갔는지 지아는 홀로 방을 지키고 있었다.
“흐흡, 승우 오빠!”
그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참고 있던 눈물을 터뜨리며 품에 달려들었다.
둘 이외에 아무도 없는 공간이었으나 승우는 그녀의 몸이 닿지 않도록 거리를 조절하고 자연스럽게 다가가 눈물을 닦아 줬다.
너무나 교묘하고 상냥한지라 안길 생각이었던 당사자조차 눈치채지 못한 거절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 가고 너만 있어?”
“짜증 나게 옆에서 뭐라고 하잖아요. 누구 돈 받고 일하는지도 모르는 그런 애들, 필요 없어요.”
‘쫒아낸 거네.’
연예계에서 자라 온 지아는 이런 면에서 철이 없었다.
항상 누군가 받혀 주는 생활을 하다 보니 타인을 함부로 대하는 것에 무감했고, 감독이나 작가 이외 스텝들도 종종 제 아랫사람처럼 부렸다.
오랫동안 배우 생활을 한 만큼 그럭저럭 쓸 만한 연기를 펼쳤지만 세계가 좁아서인지 깊이는 부족했다.
그 정도의 배우는 많으니 부러 까다로운 아역 출신을 쓸 필요는 없었다.
일이 점점 줄어드는데도 그녀는 근본적인 원인을 고치는 대신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으로 불안을 해소했다.
“나, 진짜 잘못한 거 없는데, 그냥 걔가 너무 건방져서 선배로서 따끔하게 대한 것뿐인데에.”
승우는 헛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선배들에게 귀여움만 받고 자란 주제에 어디서 나쁜 것만 배웠다.
‘아, 조금은 내가 가르쳤나?’
과거 조언해 주는 척 이용해 먹었던 것을 기억하고 그는 새삼스럽다는 눈으로 지아를 응시했다.
정진해야 할 부분을 안 늘리고 마이너스 요소만 올리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아가씨였다.
“따끔한 건 좋지만 물 세 번은 심했어.”
“오빠도 걔 편이에요? 걔가 더 어려서?”
스물세 살.
빨리 피고 빨리지는 아이돌과 달리 배우로서 한창인 나이인데도 그녀는 나이를 따지며 조급하게 굴었다.
점차 자신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는 사실에 여유가 없는 탓이리라.
‘이용하기 딱 좋은 모습인데. 태화한테 붙여 볼까.’
주변을 보는 시야가 극단적으로 좁다.
이런 사람은 신뢰하는 이의 말을 쉽게 따르고 부주의하게 행동한다.
잠시 태화에게 보내 볼까 고민하던 승우는 곧 자신의 계획을 접었다.
그렇게 해서 귀찮음이 사라질 것 같지도 않았거니와 한 번 쓰고 버리기엔 지아는 아직 쓸모가 많았다.
“다들 지아를 미워할까 봐 그렇지. 지아도 오래 기다리는 건 싫어하잖아? 후배를 교육하는 것도 좋지만 준비가 까다로운 부분에선 자제하는 게 좋아.”
물이야 따르면 되지만 젖은 머리와 옷은 말려야 했다.
뺨을 때리는 거면 모를까, 이런 장면을 반복하는 건 주변의 언짢음도 함께 샀다.
“그게 걔들 하는 일이잖아요.”
“최나영 작가님은 자기 대본 가지고 알력 싸움하는 거 싫어하셔.”
달래기 귀찮아진 승우는 웃는 얼굴로 작가의 이름을 팔았다.
이미 작가의 귀에 들어갔을 테니 쓸모없는 조언.
그러나 종알거리는 입술을 다물게 하기엔 효과적이었다.
“지아는 10년 넘게 연기했잖아? 유라 씨는 고작 2년밖에 안 됐으니까 선배답게······.”
“유라씨 인거죠?”
거리감 느껴지는 호칭에 지아는 밝아진 얼굴로 승우를 바라봤다.
그녀는 그에게 호감이 있었다.
뾰족한 자신을 상냥하게 대해 주는, 그러면서도 대가나 콩고물을 바라지 않는 남자.
한창 사랑 중인 소녀는 그 한 단어에 가지고 있던 짜증을 날려 버렸다.
‘······단순하긴.’
대사 외우는 걸 보면 나쁜 머리는 아닌데 생각도 짧고 남자 보는 눈도 없다.
지아를 달래며 승우는 쓸 수 있는 패를 정리했다.
***
“괜찮아요?”
“아, 태화 씨.”
밝게 웃는 그녀를 보며 태화는 손에 든 음료를 건넸다.
“날씨 탓에 차가운 걸로 할까 하다가, 지금을 따뜻한 게 나을 것 같아서.”
“······고맙습니다.”
유라는 잔잔한 미소로 감사를 표했다.
찬물을 계속 맞은 탓에 말리고서도 으슬으슬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따뜻한 온도를 만끽하며 한 모금 마신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혀에 닿은 커피가 평소에 비해 너무 썼다.
“미안해요. 유라 씨 건 이쪽이었네요.”
유라의 얼굴이 찡그려진 것을 보고 태화는 작게 웃으며 다른 컵을 건넸다.
크게 C라 적힌 탓에 착각하기도 어려운 컵을 말이다.
“······태화 씨가 이런 장난을 칠 줄은 몰랐어요.”
장난칠 정도로 친해진 것 같아 들뜨면서도 다시금 떠오르는 쓴 맛에 그녀는 인상을 썼다.
가까워진 건 좋아도 쓴 커피는 별개였다.
“저도 몰랐죠.”
“네? 뭐라고 하셨어요?”
“아뇨, 아무것도.”
한숨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태화는 그녀의 물음을 얼버무렸다.
가족도 아닌 타인에게 이런 자잘한 장난을 치게 될 줄은 몰랐으나 신이란 작자가 조건을 바꾼 탓에 어쩔 수 없었다.
[로키가 숙련도 50%를 제물로 조건을 변경했습니다.] [동일 인물에게 장난을 걸 수 있는 횟수가 5회로 제한됩니다.]눈을 잠시 가리고 알아맞히기를 하는 정도도 괜찮다는 걸 알게 된 뒤, 그는 매일 아침 어머니의 뒤로 가 눈을 가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처음엔 놀라던 선미도 아들의 나이답지 않은 장난에 웃으며 장단을 맞춰 줬다.
부끄럽긴 해도 가족이니 괜찮다 자위했건만 신은 그의 수치심이 더 깊어지길 원했다.
‘덕분에 시선 처리가 Ⅱ단계로 올랐지만 전혀 기쁘지가 않아······.’
종류에 관계없이 올릴 수 있는 덕에, 그는 회귀 전부터 가지고 있었으나 여전히 Ⅰ단계에 머무르고 있는 시선 처리에 특전을 투자했다.
전보다 나아지긴 했어도 과연 이것이 평생 쫒아올 쪽팔림보다 나은지는 확신이 안 갔다.
“태화 씨 장난 때문에 머릿속에 있던 게 깨끗이 날아가 버렸어요.”
“······죄송해요.”
“고맙다는 뜻이에요.”
유라는 달달한 카푸치노에 입술을 댔다.
지아의 행동을 저지하겠다고 잘하지도 못하는 애드리브를 강행했다.
선배한테 대든 것 같아 불안하고, 잘 짜인 대본을 함부로 어긴 것도 마음에 걸렸다.
그런 어두운 감정들이 쓴 커피와 함께 사라졌다.
“······저, 지지 않을 거예요.”
루머에 시달리고 패널로 갔던 방송에서 ‘듣보’라 불리던 때에 비하면 이런 수모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견제하는 것뿐이야.’
4년 동안 연예계를 살아온 만큼 그녀도 선후배 관계를 빙자해 일어나는 일들을 잘 알았다.
인기가 전부인 세계이기에 비슷한 급의 ‘후배’들이 등장하면 어떻게든 군기를 잡겠다며 난리를 치는 곳이었으니까.
이런 취급을 받았다는 건, 자신이 위협이 되었다는 증거였다.
“힘내요.”
대략적인 뜻을 알아듣고 태화는 담담하게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유라는 유라 나름대로, 자신은 자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야 했다.
***
“뭐? 유라 씨가?”
작업실에서 타이핑 중이던 나영은 보조 작가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받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물을 맞아야 하는 장면에서 유라가 애드리브로 다른 행동을 보였다는 것.
사정까지 듣고 그녀는 삐뚜름하게 입술을 올렸다.
유라의 행동이 이해되면서 반대로 지아가 괘씸하게 느껴졌다.
‘한지아, 그 계집애가 내 대본을 지 군기 잡는 데 써?’
배우들 사이에 기 싸움이 심한 건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의도한 장면을 도구로 쓴다는 건 일종의 도전이었다.
‘연기나 할 것이지, 감히.’
“······그나저나 임팩트가 부족할 거 같은데.”
나영은 현장 관리 하나 제대로 못하는 PD를 욕했다.
싸우는 건 말리지 못했으면서 화면은 적당히 넘어가다니, 이러니 신입은 글렀다.
‘바다’가 유라를 생각하며 만든 캐릭터인 만큼 자연스러운 건 당연하다.
그러나 그 외의 부분에서 나영은 유라의 연기력을 그다지 믿지 않았다.
‘연기력이 부족하면 행동으로 시선을 끌어야 하는데, 여기서 이렇게 되면 볼거리가······.’
-촬영한 동영상 보내 드릴게요.
그녀가 어떻게 해야 할지 고심하고 있을 때, 눈치를 보던 보조 작가 김민혜가 냉큼 말을 뱉으며 영상 하나를 보냈다.
영상을 재생한 나영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발음도 발음이지만, 표정 연기도 전에 없이 좋았다.
“······유라 씨, 안 본 사이에 연기력이 많이 늘었네?”
-그쵸? 특히 태화 씨랑 연기할 때 케미가 장난 없어요. 보는 사람이 다 안타까우면서 진짜······.
“넌 그런 영상을 혼자 보고 나한텐 안 보내? 너 거기 왜 있니?”
-······죄송합니다.
민혜에게 화를 낸 그녀는 다시 한번 영상을 재생시켰다.
자신이 쓴 바다의 대사와 행동은 과거 유라의 연기력을 기준으로 작성됐다.
그녀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그 캐릭터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도록 작성됐다.
‘그럼 지금이랑은 안 맞지.’
이미 찍은 부분까지 바꿀 순 없어도 앞으로 찍게 될 장면엔 현재의 실력이 고려돼야 한다.
결심을 마친 그녀는 폰을 스피커로 바꾼 뒤 화장실로 향했다.
“나 지금 촬영장 갈 거니까, 박 PD에게 말해 놔.”
-어, 이렇게 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