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stand again RAW novel - chapter 28
“얘. 나 최나영이야, 최나영. 이 드라마 작가. 내가 아무나니? 한 시간 전에 말해 주는 걸 감지덕지 여겨야지.”
그렇게 말하며 나영은 꼼꼼히 세안을 마쳤다.
배우들이 반짝이는 장소를 추레한 꼴로 갈 순 없었으니까.
-······네, 선생님. 그럼 조심해서 오세요.
더 이상 말릴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인지 건너편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던 보조 작가가 작게 답했다.
깔끔하게 빼어 입은 나영은 노트북과 차 키를 챙겼다.
두 눈으로 현장을 담을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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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이란
작가가 온다는 말이 퍼지자 촬영장은 개장이 얼마 남지 않은 가게처럼 분주해졌다.
혹시나 있을지 모를 트집에 대비한 것이리라.
고작 한 장면만 남았음에도 준비하는 이들의 태도는 더없이 진지했다.
‘지금은 별로 마주치고 싶지 않은데.’
승우는 슬쩍 자신의 얼굴을 쓸었다.
태화를 상대하면서 ‘성격 좋은 배우’라는 가면에 살짝 틈이 생겼다.
이런 상태로 만나게 된다면 눈 좋은 최 작가가 무언가를 알아챌지 몰랐다.
‘그럼 도망가야지.’
더 이상 찍을 것도 없었기에 그는 망설임 없이 도주를 택했다.
“PD님, 전 이만 가 볼게요.”
“승우 씨, 벌써?”
“예. 다음 일정이 조금 앞당겨져서요.”
승우의 말에 창식은 아쉬운 눈빛을 보냈다.
주인공인 그가 한 장면 정도 더 촬영해 주길 바랐던 것이리라.
승우는 웃는 낯으로 그의 시선을 끊어 냈다.
회당 출연료를 받으니 미리 찍어도 상관없지만 지금 작가 앞에서 강태양을 연기하는 건 사양이었다.
“그럼 난 가 볼게. 태화는 수고해.”
“······안녕히 가세요, 선배님.”
마지막까지 태화의 신경을 긁으며 그는 유유히 위험 장소를 벗어났다.
‘이제야 평화롭겠네.’
승우가 사라지고 태화는 촬영장을 바라봤다.
화면 안에선 끈질기게 몰아붙일 생각이었으나 밖에서 상대하긴 짜증 났다.
‘일단 매니저나 말려 줬으면 좋겠는데.’
조급해진 그의 매니저는 점차 주변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컵이 떨어지는 사고도 다른 사람과 동행 중이었다면, 혹은 누군가 빠르게 지나가던 중이었다면 상당히 위험했으리라.
‘진짜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이야.’
그가 태화를 이해할 수 없듯 태화도 승우를 이해할 수 없었다.
“······뭐, 연기만 잘하면야 호인이든 악인이든 상관없지.”
“태화 씨? 뭐라고 했어요?”
“역시 전 연기가 좋구나, 해서요.”
다리를 잃었을 땐 어차피 갈 수 있는 한계를 알았기에 그 이상 욕심내지 않았다.
오디션에 합격했을 땐 그저 마음껏 연기를 할 수 있다는 게 즐거웠다.
그러나 현실에 익숙해지자 억눌려 있던 욕구가 슬금슬금 기어 나왔다.
그 누구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연기를 펼치고 싶다.
좀 더 완벽한 작품을, 누구나 감탄할 수밖에 없는 발자취를 찍고 싶다.
승우에게 도전 비슷한 말을 꺼낸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확실히 옆에서 보면 반짝반짝한 게 보여요.”
유라는 조용히 그의 말에 동의했다.
뮤직 비디오를 찍을 당시 멤버들에겐 편하게 행동하라 말했으면서 그는 완벽한 모습을 보였다.
덕분에 유라도 본인을 잊은 채 청년 A를 만나기 위해 인간으로 변한 요정 B가 될 수 있었다.
‘가르치는 건 엄했지.’
식사를 대접할 겸 함께 호흡을 맞췄을 때, 태화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태도로 부족한 부분을 짚어 주고 고쳐 줬다.
대본 리딩만 몇 번 할 생각이었던 자리가 어느 순간 4시간의 하드 트레이닝으로 바뀌었다.
‘주아가 술로 꼬시지 않았으면 더 늘어났을지도······.’
‘오오’거리며 보고 있던 멤버들은 지칠 줄 모르는 그의 열정에 점점 눈알을 굴리더니 슬쩍 팬에게서 선물 받은 전통주를 들고 왔다.
넉살 좋은 그녀들의 말에 태화의 관심은 술로 향했고, 덕분에 유라도 라면이 소화되어 빈 배를 안주로 채울 수 있었다.
‘천재들은 가르치는 건 못한다던데 진짜 만능이야.’
그것이 5년간의 결실임을 모르는 그녀는 다방면으로 뛰어난 그를 부러워했다.
“반짝인다니, 제 얼굴에 개기름 흘렀어요?”
“그 농담 재미없어요.”
“······죄송합니다.”
싸늘하게 식은 유라의 눈을 보고 태화는 시무룩한 얼굴로 사과를 건넸다. 그리고 다시 한번 로키를 향해 투덜거렸다.
이런 농담 하나 재밌게 못해서 분위기를 싸하게 만드는 자신인데 신이 너무 과한 걸 바랐다.
“근데 작가님은 왜 갑자기 오시는 걸까요?”
잠시 차가운 시선을 보내던 그녀는 여전히 분주한 촬영장을 보고 흘리듯 물었다.
작가와 주연 배우의 관계지만 동시에 아이돌과 팬 사이이기도 하다.
그렇다 보니 아직 확정되지 않은 정보들을 유라에게 미리 알려 주는 경우도 있었고, 이번 티저가 너무 완벽했다는 둥 사적인 문자를 보내는 일도 있었다.
“최 작가님은 유라 씨를 보러 오는 걸 거예요.”
“저를요?”
“네.”
태화는 가타부타 설명하는 대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유라의 재능을 볼 수 있다면 분명 ‘노력’이라는 재능이 적혀 있으리라.
그녀는 단 한 번도 연습을,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니까.
‘1집 때 동영상하고 저번 노래를 비교하면 모를 수가 없지.’
오디션 당시 들고 왔던 대본만이 아니다.
숙소에서 보았던 많은 대본, 그리고 가사가 적힌 악보까지. 전부 이런저런 메모들이 꼼꼼히 적혀 원래의 모습을 찾기 어려웠다.
‘문제는 혼자해서 안 되는 부분도 있다는 거지.’
그녀가 배우 일을 시작한 것은 새턴이 인기 그룹의 반열에 든 이후였다.
당연히 행사와 음악 방송으로 그녀의 스케줄은 바빠졌고, 연습 시간은 그룹의 안무와 보컬 트레이닝을 받는 것만으로도 꽉 찼다.
붙여 준 연기 선생과 삼 일에 한 시간 만나기도 벅찬 일정.
게다가 그녀의 기획사는 배우 일을 한철 장사로 여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회사가 참······.’
최대한 인기에 기대어 빼먹을 궁리만 할 뿐, 새턴의 소속사는 형식적으로 선생을 붙이는 것 이상의 투자는 하지 않았다.
틈틈이 연습하고 대본을 외워도 혼자 하는 것과 옆에서 지도자가 붙어 가르치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다.
2년 동안 유라의 연기력이 답보 상태였던 건 미리 한계를 정해 둔 회사의 잘못이 컸다.
‘촬영장에서 틈틈이 도와주는 걸로도 이 정도니 한지아가 위기감 느끼는 것도 이해돼.’
노력하는 후배가 가상하다며 끌어 주는 건 드라마 속에서나 있는 일이다.
저 살기도 바쁜 연예계에서 적을 제 손으로 키우는 멍청이는 없었으니까.
여유가 있어도 하지 않을 일.
미래시로 동질감을 느끼지 않았다면 태화도 관여하지 않았으리라.
“후아, 후-.”
“······유라 씨?”
“저 생방으로 콘서트 찍을 때도 긴장 안 했는데, 작가님이 제 연기 보러 온다니까 엄청 긴장돼요.”
유라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누군가 자신의 연기를 직접 보기 위해 찾아온다.
항상 배우인 척하는 아이돌 소리를 들었던 자신에게 이런 날이 올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둘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준비가 끝났다는 말과 함께 배우를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후우······ 끝이 안 보이네.”
바다는 어깨를 풀며 모니터의 화면을 응시했다.
전등은 꺼져 빛이라곤 비상등으로 보이는 반짝임과 화면에서 나오는 불빛이 전부.
새로운 본부장이 취임하고 그와 묘한 계약을 한 뒤, 바다의 생활은 순탄치 않게 흘러갔다.
사내에선 은근한 따돌림이 자행됐으며 이런 식으로 홀로 남아 잔업을 하는 일도 발생했다.
“속이라는 것만 아니었으면······.”
“뭘 속여?”
“으아! 깜짝이야!”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그녀는 기겁하며 뒤를 돌아봤다.
검은색 장갑에 검은 캡.
누가 봐도 도둑처럼 보이는 남자, 가람이 삐딱한 눈으로 바다를 응시했다.
“전화는 왜 안 받아?”
“어, 어? 전화? ······왔었네?”
부재중인 전화 개수를 확인하고 그녀는 맹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왔었네? 왔었네에? 이 맹꽁이가, 어? 밤에 늦게 오면, 좀, 연락을, 받아야······!”
“아파! 그만해!”
어절을 끊을 때마다 가해지는 딱밤에 바다는 화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리부리하게 뜬 눈을 보고 잠시 놀라던 가람은 이내 비웃음을 띠며 다시 한번 그녀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이게 잘못은 지가 하고 큰소리도 지가 치지?”
“아아······.”
바다의 얼굴이 불만스레 찌그러진 뒤에야 가해지던 폭력은 멎었다.
잠시 그녀에게서 시선을 땐 그는 어두워진 사무실과 홀로 환한 모니터를 훑어보고 미간을 좁혔다.
“다른 사람들은 다 어디 가고 대리인 너 혼자 이러고 있어?”
“······어, 그게. 할 일을 다 못 마쳐서.”
“너 따돌림당하냐?”
“아, 아니야! ······근데 너 어떻게 들어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