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stand again RAW novel - chapter 70
그가 블랙라벨과 라나커스의 의류 모델을 하긴 했지만 블랙라벨은 해외 판매망을 갖추지 못한 중소 쇼핑몰이었으며 라나커스의 경우 남성 양복과 관련 소품만을 판매하는 브랜드였다.
결국 중국에선 ‘박가람’의 수요가 공급을 월등히 앞질렀고 돈 냄새를 맡은 기업들은 태화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오디션 일정도 촬영 일정도 없는 그 틈을 차지한 것은 한 맥주 회사와 라면 브랜드.
둘 다 ‘역시 중국 자본’소리가 나오는 금액을 3개월 광고비용으로 제시했고 BGA의 연락을 받은 태화는 한국어로 번역된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오늘 촬영하는 것은 그 중 하나인 맥주 광고로, 현재 중국 업계에서 압도적으로 1위를 하고 있는 회사의 제품이었다.
‘통통이 덕분에 살았네.’
중국 베이징 출신인 통통은 괜찮은 집안 출신으로 방언이 섞인 북경어가 아닌 표준어를 사용했다.
그런 그녀에게서 중국어를 배운지라, 태화의 발음 또한 깔끔한 보통화였다.
「잘 부탁드려요. 리두이화 선생.」
「네, 저도 잘 부탁합니다. 란웨이 선생.」
태화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란웨이를 응시했다.
언뜻 보면 유라와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비슷하게 생긴 여성.
그러나 대면하고 느껴지는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그것이 조금 신기해, 태화는 슬쩍 입 꼬리를 올렸다.
시선을 마주하고 있던 란웨이는 그가 인기에 비해 콧대 높은 배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입술을 오물거렸다.
감독에게 호통을 들을까 말을 걸지 못하고 있었으나, 그녀도 박가람, 아니 태화의 팬이었다.
「······이따 사인 부탁드려도 괜찮을까요?」
「물론이죠.」
별거 아닌 허락인데도 그녀는 기쁘단 얼굴로 웃었다.
「그럼 준비해주세요!」
그들 사이에서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흐르기 무섭게, 날카롭게 부르는 스텝의 음성이 들려왔다.
보조에 불과한 란웨이는 또 다른 불호령이 떨어지기 전에 크게 답하며 현장으로 달려갔다.
“······이탈리아노 가르칠 때도 느낀 건데 너 언어적 재능이 엄청 뛰어나네.”
마지막으로 화장을 고쳐주기 위해 다가왔던 나래가 살짝 혀를 차며 말했다.
어릴 적부터 외국어를 배우지 않은 이상 다른 나라의 말을 본토 발음으로 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그 나라에서 태어나고 살았다 해도 3세대까진 외국인 특유의 발음이 남는다.
그것이 일반적인 통설인데, 태화는 외국어를 배우고 이해하는 능력이 ‘상당히’ 뛰어났다.
특히 발음의 경우 외국인들 특유의 모국어 억양이나 강조, 어조가 전혀 없었다.
‘아니, 그걸 의식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는 게 대단한 거지.’
그녀와 대화할 때, 태화는 한국인 특유의 악센트가 섞인 발음을 구사했다. 나래가 사용하는 억양이었고 의사소통하는데 문제가 되지 않는 습관이었다.
그러나 이탈리아어로 이뤄진 뉴스를 따라할 땐 앵커의 발음을 그대로 따라했다.
한두 문장도 아닌 30분 가까이 되는 긴 스크랩을 말이다.
‘저 정도 실력이면······. BGA가 미치지 않은 이상 해외로 돌릴 텐데. 일단 중국어랑 일본어 정돈 해야 하나? 니 시팔놈아가 중국어라 들은 거 같은데.’
주변과 소통해야할 매니저면 몰라도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언어문제로 갈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특히 나래처럼 영어가 된다면 더더욱.
그러니 해외여행이 필요한 회화 위주로 공부해야겠다 생각하며 그녀는 홀로 남아 교두문고 사이트를 뒤적였다.
* * *
「어휴, 넌 어떻게 변화가 없니? 그렇게 왈가닥처럼 구니까, 아니다. 야야, 울지 마. 마시고 쭉―. 그래, 마시고 내일도 힘내야지, 어이구 예쁘다.」
‘······이게 왜 좋지?’
중국 팬들이 느낀 박가람의 매력은 심하고 주옥같은 팩트폭력을 휘두르다가도 바다의 표정이 조금이라도 안 좋아지면 허둥대며 풀어주려고 한다는 점―, 이라고 한다.
그런 만큼 광고의 방향도 가람의 까칠한 성격을 드러내기 쉬운 세미 드라마 형식이었으며 태화가 해야 할 일은 박가람의 얼굴과 목소리를 가지고 수려하게 중국어를 내뱉는 게 다였다.
그 사이 삽입될 내레이션은 다른 성우가 맡을 예정이었으니까.
사실 대사도 한국어로 할 예정이었으나 태화가 생각보다 중국어를 잘 하는 것을 확인하고 제작진 측에서 급하게 대본을 다시 만들었다.
‘중국어를 잘한다’라는 수준이 뻔했기 때문에 일어난 해프닝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리두이화 선생께서 실수 없이 진행해준 덕분에 촬영이 빨리 끝났습니다. 좋은 곳에서 술 한 잔 대접할까하는데 어떻습니까?」
각기 다른 버전의 대사 촬영까지 마치고 촬영팀이 철수를 준비하는 사이 감독이 다가와 은은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은근한 권유 속에서 그가 말하는 술이 단순히 술이 아님을 깨닫고 태화는 쓴 웃음을 삼켰다.
그런 자리를 이리도 공공연히 권한다는 게 신선했다.
「내일 촬영이 있어서 조금, 죄송합니다.」
「허허! 남자잖습니까. 저희 대표님도 오시는 자리입니다.」
「큼! 저우제 감독. 저희 배우가 오늘 저녁에 이미 다른 약속이 잡혔습니다.」
감독이 말한 대표는 지금 찍은 광고 회사, 즉 주류 업계 1위인 회사의 높으신 분이리라.
그가 거절이 힘들겠다 생각하며 체념하려던 찰나 갑자기 끼어든 현규가 둘 사이를 막아섰다.
「······다른 약속이요?」
설마 이런 날 약속을 잡았냐는 타박에 매니저는 미안함과 곤란함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
「아시다시피 태화가 높으신 분들에게도 인기가 있어서. 이리 갑자기 들어온다고 하니 그 분들도······. 감독도 아시지 않습니까?」
「으음. 저도 그 이야긴 들었습니다만. 자리가······.」
「자자, 그러지 마시고······.」
모호한 단어에도 뜻을 이해하고 표정을 흐리는 감독을 구석으로 잡아끌며 현규는 태화에게 눈짓했다.
이 틈에 차에 가있으라는 눈빛이었다.
매니저의 희생 아닌 희생 속에서 태화는 조용히 자리를 벗어났다.
혹시라도 다른 사람이 잡을까, 부러 모자까지 푹 눌러 쓴 채 스텝에 동화되어 움직였다.
‘······현규형은 중국어로 말하면 성격이 변하네.’
주차장으로 향하던 도중 태화는 능청스러워진 현규를 떠올렸다.
가끔 모국어로는 말을 더듬거나 소극적으로 말하는 사람이 외국어를 사용할 땐 평소보다 내지르고 자신감 있게 말하는 경우가 있다.
원래부터 외부인 다루기에 능숙한 현규였으나 중국어를 사용하고 있는 그는 좀 더 천연덕스럽고 과장된 모습을 보였다.
‘나야 일을 잘해주면 고맙지만······.’
한국에서도 일을 못하던 사람이 아니었지만 중국에 온 다음부터 매니저는 더욱 적극적으로 변했다.
스트레스로 쓰러지는 쪽보다 훨씬 나았기에 태화는 좋은 게 좋은 거라 발걸음을 옮겼다.
아니 옮기려고 했다.
「리두이화······. 아니, 이태화 선생 맞습니까?」
「······맞습니다만 누구시죠?」
중국어 속에 기묘하게 섞인 자신의 이름을 듣고 태화는 발걸음을 멈췄다.
「반갑습니다. 전······.」
그의 이름을 정확하게 발음한 남자는 웃는 얼굴로 자신을 소개했다.
* * *
감독을 보내고 차로 돌아온 현규는 운전석 문을 연 뒤 의아한 눈으로 차 안을 훑었다.
보낸지 한참 되어 뒷좌석에서 기다리고 있어야 할 태화가 보이지 않았다.
“어? 어. 나래야 태화 안 왔어?”
“아니? 계속 나 혼자였는데?”
몸을 구긴 채 조수석에 앉아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던 나래는 그의 물음에 눈썹을 추켜세웠다.
무언가가 어긋났음을 느낀 것이리라.
그녀는 신발을 신으며 나갈 준비를 했다.
한국이면 모를까, 이런 해외에서 배우를 잃어버리는 것은 상당한 문제였다.
그것이 안전할 거라 생각했던 회사 건물 안 일지라도, 인구수 만큼이나 미친놈들이 어디에 있을지 몰랐으니까.
“어? 형 벌써 왔네요?”
두 사람이 얼굴을 굳힌 채 태화를 찾으러 움직이려는 그 순간, 한 손에 붉은 쇼핑백을 든 태화가 현규를 발견하고 미소 띠었다.
태연한 표정 위에는 어떠한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태화야, 보낸 지 한참이었던 것 같은데 왜······, 아니지. 일단 무사해서 다행인데······. 하아, 순간적으로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더니 위가 아파.”
“죄송해요. 요 앞에서 대화가 길어져서.”
주저앉은 매니저를 보며 태화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계속 거절하는데도 문자 의미 그대로 바지 자락을 잡고 사정하는 통에 대화에 시간을 소비하고 원치 않게 많은 ‘책’들을 받아버렸다.
물론 그런다고 다 받아주는 성격이 아니었으나 상대가 나빴다.
“무슨 일 있었어? 그 봉투는 뭐고?”
“이야기가 좀 긴데······.”
태화는 잠시 자신의 손에 들린 종이봉투를 힐끔거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스무 권에 달하는 한글 번역 무협지.
‘그’ 감독의 명함.
이것들을 받기 전까지 있던 대화들.
이렇게 서서 이야기하기엔 사정이 좀 길었다.
“다 자르고 알맹이만 말하자면······. 캐스팅 제의 받았어요.”
갑작스럽고 당황스런 태화의 말에 매니저는 멍청한 눈을 한 채 눈꺼풀을 껌벅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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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탁의 이유
캐스팅 권유를 받았다는 말이 정확히 이해되지 않았으나 현규는 먼저 태화의 손에 들린 무거운 책들을 받아들어 뒷좌석 아래쪽에 내려놨다.
“캐스팅이라니 무슨 소리야?”
“정확히 말하면, 카메오를 제안 받았어요.”
“카메오?”
현대에선 카메오를 우정 출연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비싼 배우에게 걸 맞는 비용을 지불 할 여력은 없으나 따로 친분이 있어 배우가 잠시 출연하고 밥이나 커피로 때우는 방식이란 뜻으로 말이다.
그러나 카메오의 정확한 의미는 특별 출연에 가깝다.
정식 캐스팅 된 인물은 아니나, 흥행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감독이 강력히 원해서, 어른들의 사정으로 잠시 출연하는 이들.
그들은 짧은 순간 영화나 드라마에 조미료를 치고 사라진다.
가끔은 톡 쏘는 후춧가루를, 가끔은 달달한 설탕가루를 말이다.
“왕차오웨이 감독이 자신의 무협 드라마에 참여해주길 바라더라고요.”
“왕차오웨이? ······그게 누구야?”
“한국어로는 왕초위감독인데······.”
한국식 이름을 말해도 아는 기색이 없자 태화는 잠시 말을 줄였다.
2년 후부터 매년 국제적 대박을 터뜨리며 중국 영화계의 붉은 별이라 불리는 감독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으니까.
“······지금 200편이 넘는 장편 드라마를 찍고 있는 감독이에요.”
결국 태화는 초위 감독이 자신을 소개할 때 쓴 내용을 그대로 매니저에게 말했다.
“그런 초 장편이면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을 텐데, 잘 아네?”
“······어쩌다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