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ocalypse all-purpose machine RAW novel - Chapter 88
90화
‘김훈이라…’
쉘터E의 리더였던 윤에게 쉘터E에 들어왔던 초능력자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적이 있다.
여자들을 희롱하던 그는, 쉘터에서 강제로 내쫓겼다고 했었다. 공교롭 게도 그날 밤, 쉘터E의 문이 허물 어졌고 헤아릴 수 없는 좀비들이 쉘터 내로 들어왔다고.
정황상, 나는 그것이 김훈의 소행 일 것이고 추측했다. 싸이코의 초능력을 사용한다면 문을 허물어트리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니까.
만약 그게 맞다면, 그는 더 이상 정상적인 플레이어가 아닌 고일과 마찬가지의 트롤러가 될 가능성이 크다. 아니, 이미 트롤러다.
더 성장해서, 더 큰 변수로 변하기 전에 모종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 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내게 거래 요청을했다. 어째서? 그런 의문을 떠올 리면서도, 나는 그의 거래 계약 요청을 받아들였다.
「거래 계약을 수락했습니다. 앞으로 지속적인 거래가 가능해집니다.」
잠시 후, 그가 거래를 먼저 요청해 왔다.
「김훈이 거래를 요청했습니다.」
「김훈이 올려놓은 물품 : 찢어진 종잇조각 x1」
찢어진 종잇조각.
아마 그는 내게 전할 메시지가 있는 듯하다. 나는 쯔쉬안과 거주민들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바깥으로 나와 거래소로 향했다.
거래를 수락하고, 찢어진 종잇조각을 얻을 수 있었다.
#먹을 게 없어. 우리 좀 도와주셈. 우리 같은 한국인이잖아. 도와주면 사례하겠음.
#그런데 이렇게 쓰는 거 맞나?
#엄청나게 많은 식량이 필요해.
식량이 없다고? 이그드라실의 소행 인가?
‘아니 그보다도…’ 나는 ‘우리’라는 호칭에 주목했다.
보통 나 혼자를 지칭할 때에 우리 라는 호칭을 쓰지는 않는다. 우리라는 호칭은 사람’들’을 가리킬 때 쓰니까. 즉 김훈이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쉘터 알파벳은 대부분 멸망하거나, 병합됐다.
따라서 그가 갈 수 있는 세력은 시나리오 1,2의 지역을 통틀어서 고작 둘 뿐이다. 하나는 존슨이 있는 쉘터C, 하나는 구원교 잔당들.
‘쉘터C로 들어간 건가?’
그런데 왜 식량이 부족하다 그러는 거지? 혹시 존슨이 이그드라실을 못 잡은 건가? 아니, 그럴 확률은 적을 것 같다. 존슨의 레벨이 30이 넘은 걸로 안다.
거기다가 다른 파티원들의 존재까지 감안한다면 잡아도 수십 번은 잡았을 것이다.
‘아니, 만약 김훈이 구원교로 들어 간 거라면.’
구원교는 좀비를 조종하지만, 버니 처럼 완전한 동족으로 인식되는 건 아니다. 그들은 엄연한 인간이고, 좀비의 공격을 받을 수 있다.
다만, 주교의 권능으로 좀비들을 지배해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뿐이지. 어쨌거나, 이그드라실이 구원교 역시 공격할 수 있다는 의미다.
게임에서는 그 확률이 드물긴 했지만, 가능성은 있는 일이었다.
사실 이렇게 생각할 필요도 없이, 존슨에게 물어보면 간단할 일이다.
나는 존슨에게 거래 요청을 걸었다. MJ머신건의 탄약을 몇십 발 넣은 후, 혹시 김훈이 쉘터C로 들어갔냐, 이그드라실은 어떻게 됐냐는 메시지를 함께 동봉해서 그에게 보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존슨에게 거래 요청이 왔다. 하지만 나는 그 의 거래 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일일 거래 횟수가 두 번으로 제한돼 있기 때문이다.
그의 답장은 내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메시지를 닫고 다시 바하라 광산으로 돌아갔다.
쉘터E에서 깽판을 친 김훈은 도시를 돌아다녔다. 스마트워치로 쉘터들을 찾아다녔지만, 쉘터들은 대부분 폐허로 변해 있었다.
결국 그는 머물 쉘터를 찾지 못하고, 아무 건물이나 들어가서 노숙하며 도시를 떠돌아다니는 스캐빈저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던 그가 구원교 주교인 블라디 미르와 마주친 건 그야말로 우연이었다.
김훈이 아무리 일반인이라고 말하 기에는 한참이나 어긋난 또라이이긴 하지만, 사람을 먹는 구원교에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기에 그는 처음에는 그들을 경계했다.
하지만 블라디미르는 김훈을 공격 하는 대신, 그에게 손을 건넸다. 보아하니, 쉘터에 버림받은 거 같은데 자신과 함께하자고.
자신과 함께한다면 교주님의 무한 한 은총을 주겠노라고.
그의 제안을 들은 김훈은 망설였다. 생각해보니, 어차피 갈만한 쉘터 도 없는 마당에 일단 구원교에라도 머무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는 합류를 결정했고, 구원교 예배당 내에서 구원교 신도들의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블라디미르는 그가 원하는 일이라면 뭐든 하도록 해줬다.
여신도와 잠자리를 가지거나, 여신 도들과 난교를 즐기거나… 쉘터A에 있던 시절부터 욕구불만에 시달 리던 그는 성욕을 원 없이 해소할 수 있었다.
그의 생각도 점차 바뀌었다.
처음에는 인육을 먹는 또라이들에서, 이제는 자신을 제대로 대접해주는 NPC들로. 그래, 어쩌면 자신은 처음부터 노선을 잘못 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제대로 대접해주지도 않는 생존자 들의 쉘터보다 구원교 쪽이 훨씬 낫다고.
김훈이 그런 생각을 품었다는 걸 눈치 챈 블라디미르는 그에게 쉘터C 정복을 도와달라고 말했고, 일종의 채무의식 같은 걸 느끼고 있던 그는 그 도움 요청을 승낙했다.
그리고 다음날도 향락의 삶은 계속됐다.
하루, 이틀, 삼일.
하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사 일째에 사건이 터졌기 때문이다. 구원교 예배당, 지하 창고에 저장해둔 식량의 일부가 사라진 것이다. 말이 일부지, 상당량이었다.
블라디미르는 누군가 외부에서 침 입해서 자신들의 식량을 도둑질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감시카메라를 통해 본 영상 속에서 식량은 자연 증발했다.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김훈은 별일 아니 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그 다음 날도, 그 다음 날의 다음날도 식량 은 계속 증발했다.
그리고 식량이 없어지기 시작한 지 사 일째 되는 날, 구원교의 식량은 대부분 증발했다. 가득 차있던 식량 창고를 메운 건 먼지가 전부였다.
블라디미르 주교는 원인 파악을 하기 위해 주변을 싹 다 뒤졌지만, 원인 파악은커녕 좀비들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구원교 신도들은 졸지에 쫄쫄 굶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건 김훈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더 이상향 락의 삶을 즐길 수 없었다.
아니, 즐기기는커녕 오히려 의심을 받고 있었다. 그가 식량 증발의 범인이 아닌가 하는.
김훈으로서는 억울한 일이었지만, 그들의 의심이 타당하다 생각하고 그 나름대로 해결책을 찾고자했다.
그가 고심 끝에 떠올린 해결책 중 하나가 바로, 박시현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소문으로 듣기로 그의 쉘터는 풍족하다 했었다.
그에게 식량을 요청한다는 계획이었다.
김훈은 박시현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지금은 그것을 접 어둬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그의 도움이 절실했으니까.
그는 박시현이 자신을 도와줄 거라고 생각했다.
같은 플레이어기도 하고, 무엇보다 같은 한국인 아닌가? 한국인의 정이 라는 게 있는데, 그는 그가 자신의 도움 요청을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박시현이 거래 계약을 수락하자, 김훈은 AP의 20%와 구원교 예배당에 있던 돈을 통해, 그에게 쪽지를 전송했다.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거래소를 통해 쪽지를 보낼 수 있다는 생각은 아마 나만 했겠지? 나 존나 천재인 듯.’
그렇게 자화자찬하며 그는 박시현에게 올 쪽지를 기다렸다. 하지만 몇 시간이 지나도 그에게 답장은 오 지 않았다.
‘한국인의 정은 개뿔.’
역시 그 새끼는 개새끼였다. 그는 자신의 도움 요청을 무시한 박시현을 대차게 욕하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배가 굶주려서, 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날 밤, 그는 에밀리와 박시현이 서로 벌거벗고 뒹구는 꿈을 꿨다.
하지만 그의 분노는 한 잠 자고 일어나자 사그라들었다.
대신 그의 머릿속을 채운 건, 미칠 듯한 허기였다. 그는 구원교 신도들과 떠돌아다니면서 찾은 통조림으로 허기를 채웠다.
그의 허기를 채우기에는 한없이 부족한 양이었지만 그나마 어느 정도 허기를 채울 수 있었다. 물론 밤에는 다시 허기에 시달려야 했지만.
박시현에게 메시지가 도착한 건 바로 그때였다.
#식량? 얼마든지 줄 수 있지. 어디 로 가면 되냐?
#아니다, 네가 강변으로 와. 식량을 가지고 대기할 테니까.
‘그래, 그럴 줄 알았다.’
모든 것이 자신의 생각 대로 됐다고 생각한 그는 블라디미르에게 이 사실을 전했고, 그는 구원교 신도들과 함께 식량을 받기 위해 강변으로 향했다.
비단 식량을 받는 것뿐만 아니라 아예 쉘터를 공격하고, 그 물자 전체를 가로챌 계획이었다. 조금 양심 이 찔리긴 했지만,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쉘터의 여자들과 나만을 위한 하렘 왕국을 세우는 거다.’
에밀리에게 달콤한 복수를 할 시간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꿈에도 상상치 못했다.
이 모든 것이 박시현이 그를 자신의 그라운드(ground)로 불러내기 위한 계략이었다는 것을. 사실 그들 중 누군가가 이성적인 사고를 했다면, 이상함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허기가 그들의 이성적인 사고를 가로막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계획이 성공할 거라고만 생각했다.
마침내 그들은 강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들은 박시현을 기다렸고… 곧 박시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로봇 위에 탑승한 채로.
“그, 그건 뭐야?”
앞장 선 김훈이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박시현이 무표정하게대꾸했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잠시 말을 멈추고 그를 응시하던, 그가 재차 말을 이었다.
“왜, 네가 구원교와 함께 있는 거지?”
“너는..”
블라디미르는 박시현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그놈이다. 그놈. 쉘터C 와의 전쟁에서 쉘터C를 도와 구원교가 패배하는데 결정적인 요인이 됐던 그놈.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마주쳤기 때문에 알고 있었다.
그는 총을 들고 그를 향해 발사했다. 하지만 그의 탄환이 닿기도 전 에, 거대한 안드로이드 로봇이 대응 사격을했다.
양 어깨에 달려있는 천벌이 불을 뿜었다. 융단 포격을 받은 그는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잿더미로 변했다.
“주교님!”
구원교 신도들이 무기를 꺼내 들었다. 어차피 전투를 벌일 생각으로 왔기 때문에 그들의 행동은 신속했다. 하지만 그들보다 빠른 건 센트리건들이었다.
도시 곳곳에 설치된 센트리건들이 그들에게 포화를 퍼부었다. 그들은 대응사격을 했지만 애초에 적은, 인간이 아닌 기계.
제대로 된 대응사격을 하지 못하며, 그들은 하나하나 스러졌다. 애초에 그들의 정신적 지주인 블라디미 르가 죽은 판국에 그들의 패배는 이미 확정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박시현! 너 나한테 왜 그러는 거 그는 악귀와 같이 소리쳤다.
박시현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그에게 강 산탄총을 겨누며 말했다.
“몰라서 묻냐? 구원교에 들어갔으면서 뭐 그리, 당연한 걸 물어보고 있어?”
김훈은 입술을 꽉 깨물고 몸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는 저 안드로이드 로봇과, 저 수많은 센트리 건들과 정면 대결을 벌인다는 생각 은 차마 할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생각했는지, 구원교 신 도들도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쉘터 아포칼립스의 거주민들이 그들을 가로막았다.
“우리 구면이지?”
평소의 얼굴이 아닌 악귀와 같은 얼굴을 한 윤이 김훈을 향해 들고 있는 기관단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탕. 하지만 그녀의 탄환은 염동력 막에 의해 전부 튕겨져 나갔다.
“어디 씨발, NPC 따위가!”
그는 오히려 염동력으로 윤을 공격했다. 그러나 렙틸리안 파워 슈트를 걸치고 있는데다, 쯔쉬안의 보호막까지 받고 있는 그녀에게는 무의미했다.
허기 때문에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못해, AP71- 제대로 회복되지 않은 그의 AP가 바닥나는 건 금방이었다. 결국 그는 몸에 탄환 세례를 받아, 바닥에 엎어지고 말았다.
플레이어 특유의 끈질긴 생명력으로 목숨은 유지하고 있었지만, 살아 도 산 상태가 아니었다.
한편 김훈이 시간을 버는 사이에 도망친 구원교 신도들은 새로운 생존자들과 맞닥뜨렸다.
미리 예정했던 대로 퇴로를 차단한 존슨의 파티원들, 그리고 쉘터C의 거주민들이었다.
자신들이 궁지에 몰렸다는 것을 깨달은 그들은 최후의 발악을 펼쳤지만, 무의미한 발악에 지나지 않았고 끝내 그들은 모두 목숨을 잃고 말았아포칼립스 만능기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