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112
“그래서 도 망했지. 코미디어야 하는데 묘하게 슬퍼서 웃기질 않는다고.”
원래 하던 대로, 본인이 가진 ‘웃긴 기억’이나 ‘재미있는 주변인’을 카피해서 연기하려고 했다면 중간 이상은 갔을 것이다. 비극적인 연기보다는 못했겠지만.
하지만 그 배역 자체를 제 몸에 입력시켜 오리지널리티를 연기하려다 보니, 한성의 인생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해 온 ‘무거움’과 ‘슬픔’이 자꾸 배어나오는 것이다.
“다른 대본은 뭔가요?”
“의 그레미오 독백이야.”
“아···”
한성이 A4 한장을 내민다.
그 위에 10줄 정도의 독백이 인쇄되어 있다.
세익스피어의 작품.
파도바의 갑부 밥티스타 미놀라의 두 딸의 결혼에 관한 이야기로, 그레미오는 둘째딸 비앙카에게 청혼하는 인물 중 하나로 등장하는 단역이다.
A4용지를 끌어당겨 읽어보니 부유하고 나이든 남자가 어리고 예쁜 여자에게 청혼하기 위해 자신의 부를 과시하는 대사로, 어느모로 보나 ‘슬픔’의 지분은 전혀 없다.
“연기 해볼게.”
“네, 선배님.”
종이는 유명을 위해 건네준 것인 듯, 한성은 아무것도 쥐지 않은 손을 한 번 꾸욱 쥐었다 펴고 입술을 혀로 한 번 적셨다.
그리고 대사를 시작한다.
“우선 아시다시피 이 고장에 있는 나의 저택에는 금은 식기와 황금으로 만든 물건이 가득차있고, 비앙카가 귀여운 손을 씻을 대야요, 물 항아리도 있습니다. 방장은 모두 타이야 직조요, 상아로 만든 돈 궤짝 속에는 금화가 하나 가득 차 있죠.”
배를 슬쩍 내밀고 거들먹거리는 몸짓에는 탐욕과 오만이 가득 배어있다.
소탈한 한성의 성품이야 말할 바도 없으니, 스스로가 가진 오만에서 빌려온 감정이 아닌, 그레미오라는 인간을 만들고 그 속으로 들어간 연기이다.
‘잘 하고 계신 듯한데···?’
예전 한성의 연기와는 입구와 출구가 다른 감정표현.
단기간에 놀라울 정도로 달라진 연기의 방식은, 아직 완벽하다 할 순 없었지만 충분 이상의 성취로 보였다.
뭐가 문제인 걸까.
“삼나무로 만든 농속에는 아라스 무늬의 덧이불이며, 값진 의복, 천막, 극상의 린넬과 진주로 장식된 터키의 쿠션이며, 금실로 수놓은 베니스의 벽걸이며 없는 것 없이 다 있습니다. 그리고 농장에는 언제든지 젖을 짤 수 있는 젖소가 백 필, 외양간에 백 이십 마
리의 살찐 황소가 서성거리고 있습니다. 밖에도 이 계약에 응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있습니다.”
듣는 사람을 약 올리듯이 매끄럽게 이어지는 자랑.
하지만 조금 나이가 들었다.
속이 텅 비었기에 겉을 과시하지 못해 안달이 난 중년 남자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좋은 연기이다.
그런데 마지막 문장에서 유명의 이마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나는 나이를 많이 먹었습니다. 자백합니다. 그러니 만약에 내가 내일이라도 죽으면 이것이 모두 따님의 것이 됩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비앙카가 나 혼자만의 것이 된다면 말입니다.”
순식간에 감정이 비애로 기운다.
죽음을 언급하고 딸을 언급한 순간부터.
많은 나이라는 약점을 되려 무기로 삼으며,
재산을 미끼로 어린 처녀를 낚으려는 그레미오의 유들유들해야할 연기에,
결국 슬픔이 묻어 버린다.
‘아···’
유명은 한성의 고민을 이해했다.
많이 떨쳐냈을 것이다.
발가벗은 자신과 새로운 캐릭터를 정면으로 충돌시킬때, 항상 묻어나고야 마는 비애의 편린들을 하나하나 보풀을 제거하듯 떼내어 왔겠지만,
어떤 어쩔 수 없는 단어에서,
때로는 직접적이지 않은, ‘연상’만 시키는 장면에서도,
순식간에 비애로 빠져든다.
구멍난 풍선에 바람을 아무리 세게 불어도, 구멍쪽으로 공기가 새어 버리듯이.
이런 감정의 편재는 자신은 겪어본 적이 없는 것이라, 무슨 조언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귓가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저 친구, 사는 집에 가봐랑.}
끝
ⓒ 글술술
‘집??’
며칠간 서먹했던 것에 화해라도 요청하듯, 미호가 솔깃한 말을 건넨다.
“신배우 어때? 뭘 어떻게 해보면 좋을지 혹시 아이디어 있어?”
“음…고민하시는 부분이 뭔지는 알겠는데 해결책은 아직…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저 잠시 화장실 좀 다녀와도 될까요?”
“어, 그럼. 다녀와.”
유명이 빠져나와 화장실로 들어갔다.
개인실 형태로 된 화장실은 문을 잠글 수 있었다. 달칵- 문을 걸어 잠그자 거울 앞 선반에 몽글몽글 현신하는 은색 털뭉치, 미호이다.
‘집에 가보란 게 무슨 뜻이야?’
{저 친구, 몸 안에서 연기(*演氣: 연기의 기운)가 흐르는 통로가 한 쪽으로 치우쳐 있당.}
‘…그래? 한쪽 감정만 너무 많이 써오셔서 그런가.’
{그걸 고치려고 하던 방식을 버리고 기운을 골고루 퍼뜨리는 연습을 해온 것 같넹. 무척 노력한 흔적이 보인당. 지금쯤이면 다 고쳐졌어야 할 정도인뎅.}
‘그런데?’
{계속 원래대로 돌아가는 건, 돌아가게 하는 기전이 있다는 얘기징. 나는 사는 곳이 의심이 되넹.}
덤덤하게 풀어놓는 얘기들이 의미심장하다.
흘려 넘길 수 없다.
연기에 관해서는 아마도 누구보다 영민할 존재. 유명이 고비를 겪을 때마다 그의 지적이나 조언들이 유효하지 않았는가.
‘사는 곳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는 모르겠고?’
{연기 외적인 부분은 나도 전문분야가 아니라… 어차피 가봐야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것 같은뎅.}
‘음···알겠어. 고마워.’
유명은 일단 호철에게 연락했다.
“호철아, 나 오늘 숙소 못들어갈 것 같아.”
[어? 형 무슨 일 있어요?]“윤한성 선배님과 연기 연습 중인데, 끝나고 한 잔 하고 아마 선배님 댁에서 잘 것 같아.”
[윤한성 배우님요? 우와.]“응, 연락 안 돼도 걱정하지 마.”
[예. 무슨 일 있으시면 아무리 사소한 거라도 연락 주세요.]“알겠어.”
그리고 다시 한성이 있는 연습실로 향했다.
“선배님, 같이 연습하면서 떠오르는 게 있으면 얘기할게요.”
“어어, 부탁해.”
그리고 둘은 연습을 지속했다.
여러 개의 연습용 독백 대사들을 놓고 캐릭터를 분석했으며, 어투와 습관을 함께 만들어가 보았다.
함께 정한 한 가지의 캐릭터를 두 사람이 연기할 때, 결국 조금쯤은 달라지고 마는 ‘저마다의 색깔’을 관찰하는 것도 서로에게 유용한 작업이었다.
그리고 그 날 연습이 끝난 후, 유명은 한성에게 요청했다.
“선배님, 술 한 잔 사주실래요?”
*
“어, 좋지. 어디로 갈까?”
“혹시…선배님 댁은 어디세요? 놀러가도 돼요?”
“아…집이 멀기도 하고 사람을 잘 안 데려가는 편이라…지난 번에 거기 어때?”
역시나, 한성은 슬쩍 밀어냈다.
집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이유가 있는 걸까.
본인이 싫다는데 억지로 가겠다고 할 수는 없다. 혹시 통할지 모를 한 가지 방법을 시도해보는 수 밖에.
그들은 지난 번 그 술집에 도착했다.
쏟아지는 야경을 배경으로, 둘은 조개찜과 소주를 앞에 놓았다.
“신배우, 술 잘해?”
“음…글쎄요.”
스물다섯 때의 주량이 기억나지 않는다.
원생에서 유명은 술을 많이 마셨었다.
하지만 이번 생에선 술을 마시는 걸 자제하고 있다.
간암 진단을 받았던 충격도 있을 뿐더러, 이번 삶은 술로 달랠만큼 갑갑한 상황이 없었기 때문.
연기를 하면서 받는 압박감은 있었지만, 그것은 유명에게 스트레스인 동시에 희열이었다.
챙-
소주잔이 부딪힌다.
유명은 오늘만큼은 취할 생각이었다. 한성이 취한 자신을 집에 데려가기를 바라는 것이 그가 시도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었다.
한 잔을 벌컥 들이키자, 오랜만에 마시는 술에 금세 취기가 오른다.
한성이 걱정된다는 듯이 물었다.
“천천히 마셔. 술 잘 못하나 보네.”
“…아닙니다.”
“지난 번에 같이 마실 때도 술은 거의 입에 안 대더니.”
한성이 잔을 반만 채워주곤 자기 잔에는 가득 따른다.
“페이스 조절해가며 마셔. 그런 걸로 선배질하진 않으니까.”
“하하, 네 선배님.”
한성과의 대화는 편안했다. 둘 다 무리해서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타입이 아니라 간간이 침묵이 자리를 채웠지만, 어색할 것 없이 조용히 사색하다 다시 드문드문 얘기가 이어지곤 했다.
“갑자기 술을 사달라니, 뭐 걱정이라도 있어?”
“…네.”
정확히는 자신의 걱정이 아닌, 상대방의 걱정이었지만.
유명은 다른 얘기를 꺼냈다.
“감독님이 저한테 잠시 보셨다는 게 뭘까요?”
“음…나도 봤어. 그 때의 신배우를 보고 나니까 감독님 말씀이 이해가 가긴 하더라고.”
“어땠는데요?”
“신배우 연기는 아주 멋지지. 시선을 쥐락펴락한다고 해야 할까. 거미가 기하학적인 모양으로 실을 짜 가는 걸 눈을 떼지 못하고 지켜보듯이, 마술을 보고 있는 듯한 흡입력이 있어.”
“…그렇습니까.”
한성이 다시 한 잔을 꿀꺽 넘겼다.
“응 그런데 그 때 잠깐 동안은, 가만히 숨죽여 있어도 거기 있다는 것을 알 것 같은 묵직한 존재감이 느껴졌어. 진짜 업계 탑이라고 불리는 배우들 중에 그런 사람들이 간혹 있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아우라를 뿜어내는 것 같은.”
“…있죠, 그런 사람들.”
유명이 떠올린 것은 한 연극배우였다.
원생에서 연극제를 보러 간 적이 있다.
단막극 경쟁부문에 등장한 그 배우는 대사를 할 때는 물론, 무대 위에서 걷는 것만으로도 수천 명이 수용가능한 노천극장을 쥐락펴락했다.
그 때만은 공기의 밀도가 아예 달랐다.
짧은 생을 불태운 듯, 젊은 나이에 사고사하지 않았더라면 분명 최고의 자리에 올랐을 배우.
“제가 해낼 수 있겠죠···”
“답지 않게 약한 소리야. 당연히 잘 해낼거야. 자- 짠하자. 아, 마시지는 않아도 돼.”
유명은 한성의 만류에도 한 잔을 꿀꺽 넘겼다.
알콜 기운이 훅- 들어찼다.
*
“선…배님.”
“아이고 이 사람 취했네. 어떡하지.”
유명은 술이 취하면 자는 타입이었다.
“매니저한테 연락해야겠네. 핸드폰이 어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