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114
“호호 무슨요. 그냥 먹을 만하게 하는 정도지.”
“와아…평소에는 요리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시면서 손님 앞이라고…”
“신유명!”
엄마와 아들이 투닥투닥 하는 것을 보며 그는 한 가득 밥을 떴다.
어째, 조금 목이 메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날 저녁, 집에 돌아온 지연의 턱이 땅에 떨어졌다.
“유…유···..윤한성 배우가 우리집에!!”
*
일부러 파헤치지 않는 상처는 부쩍 빠른 속도로 아물어갔다.
한성은 그 집을 떠나면 보은이가 마음에서 사라질까봐 두려웠었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여전히 하루에도 여러 번씩 그 얼굴이 떠오르지만, 슬픔이 안으로 파고들기 전에 그리움으로 끝낼 수 있었다. 따뜻한 집밥과, 마주치면 웃어주는 얼굴들에는 혼자 안으로 빠져들어가는 것을 막아주는 힘이 있었다.
“형, 간식드세요.”
“어, 유명아 고마워.”
식빵을 달걀물에 포옥 적셔 노릇하게 부치고, 설탕가루를 솔솔 뿌린 프렌치토스트.
유명의 어머니는 정말 그를 살찌우려고 결심한 게 틀림없다.
정몽주는 마르지 않아도 되는 배역인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그들은 유명의 작은 방에 접는 테이블을 펴놓고 앉아 여러 대본을 보았다.
나란히 마스크를 쓰고 집 앞 공원을 조깅하고, 심야 영화를 본 후 연기와 연출에 관해 밤새 토론하기도 했다.
한성의 호칭은 연기 이야기를 할 때를 빼곤 유명아-로 변했다. 어느덧 형제같이 친해진 그들이었다.
“이사…해야겠어.”
일주일이 거의 다 되어가던 날, 한성이 입을 열었다.
연기를 하다보면 어느 새 감정이 슬픔 쪽으로 미끄러지던 버릇이 일주일만에 많이 좋아진 것을 체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보은이가 지금처럼 사는 걸 원하지 않을 거라던 유명의 말이 한 번씩 뇌리를 스쳤다. 한 발짝 떨어져보니, 옳은 말이었다.
“잘 생각하셨어요.”
“과천 집은 두고 방을 하나 따로 얻으려고. 아직 정리할 자신은 없어서.”
“그러시면 되죠. 형 돈 많잖아요.”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하는 유명의 어깨를 주먹으로 가볍게 툭- 쳤다.
“어느 동네로 가시게요?”
“글쎄. 연고있는 동네가 있는 건 아니라서. 그냥 회사 근처로 갈까 싶기도 하고.”
유명이 잠시 생각하다 물었다.
“형, 수원은 먼가요?”
“응?”
“저희 동네 살기 괜찮은데 이 근처로 이사오시면 어때요? 강남 접근성은 좀 떨어지긴 하지만.”
“어…아니…그게···”
한성이 유명의 의도를 눈치채고 대답을 어버버거렸다. 고맙지만 계속 폐를 끼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무의식 중에 바라던 일인지, 대답이 잘 안나오는 게 문제다.
유명이 거절하려던 그보다 선수를 쳐 말을 꺼냈다.
“며칠 보셔서 아시겠지만 엄마가 손이 크셔서 늘 음식이 남아요. 저도 연기 시작하고 나서는 집에 자주 못와서, 해먹일 사람 없다고 아쉬워 하시구요.”
“…”
“아버지는 바둑두는 거 좋아하시는데, 제가 둘 줄 모른다고 늘 구박하셨거든요. 근데 형이 같이 둬주니까 부쩍 신나서 퇴근하세요. 저도 구박 안받아서 좋구요.”
“…”
“지연이도 형 엄청 좋아해요. 오빠라고 불러야 되는 놈이 하필 동갑이라 평생 짜증났는데, 형한테 오빠라고 할때마다 호칭의 올바른 사용법을 실천하며 스트레스가 쫙쫙 풀린다고.”
“…하하.”
지연의 어이없는 멘트를 전해주자 한성이 결국 웃고 말았다.
다정함에 베인듯이 조금 얼굴을 찌푸리며.
“멀리 출퇴근하기 힘들어서 강남으로 가시겠다면 말릴 수 없지만, 그게 아니라면 부탁드려요. 가끔 같이 저녁도 먹고, 놀러오셔서 아버지랑 바둑도 둬 주시면 정말 고마울 것 같아요. 활동 없을 때 형이랑 운동도 같이 다니고 연기 연습도 하면 참 좋을 것 같은
데.”
생글생글 웃으며 그를 꼬드기는, 가끔은 형 같은 어린 동생을 바라보며 한성은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고맙다, 유명아.”
“제가 고맙죠, 형.”
2월 말, 꽃샘추위가 한참이었지만, 집안은 유난히 따뜻했다.
*
“아침, 아침의 컨디션은 하루를 예고한다.”
“침대, 침대에서 나가기 싫다~~”
“대로변, 대로변에서 수상한 여자를 벌써 세 번째 보았다.”
“변기, 변기가 막혔다! 건강한 아침!”
푸흡-
마지막 문장에서 유명의 폭소가 터졌다.
이 곳은 새로 얻은 한성의 집. 그는 이사할 결심을 하자마자 유명의 집 근처에 있는 오피스텔을 빌리는 행동력을 보여주었다.
요즘 그들은 거의 매일같이 보고 있다.
대본을 같이 분석하기도 하고, 연기 훈련을 하기도 한다.
어제도 연습하다가 몇 시인지도 모르고 잠이 들었다. 그리고 깨어난 유명이 졸린 한성에게 기습했다. 끝말을 이어 연기하는 놀이였다.
‘아침’이라는 단어로 간단한 문장을 만들어, 거기에 연기를 불어넣는다.
일부러 딱딱하게, 연극의 서장을 열듯이 나레이션처럼 읊어지는 문장.
한성은 ‘침대’로 그것을 이어받았다.
침대에서 나가기 싫다~~ 피곤한 중년 남성이 인생을 한탄하듯 졸리고 의욕없이.
현재 상태에 걸맞는 진정한 몰입 연기다.
‘대로변’에서 장르는 갑자기 서스펜스로 변화했다.
유명은 의심많고 깐깐한 남자의 경계심 가득한 말투로 의혹을 제기한다.
그리고, 한성이 코믹으로 한 방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형 최고에요.”
“큭큭.”
요즘 그들의 삶은 대략 이러했다.
맛있는 밥과, 마음이 잘 맞는 동료와,
연기, 연기, 연기.
유명의 엄마가 바리바리 싸준 반찬으로 가득한 냉장고에서 든든히 밥을 챙겨먹고 그들은 식탁 앞에 앉아 대본을 꺼냈다.
하지만 펼치지는 않는다. 이미 대본은 머리 속에 들어가 있다. 대본은 이제 연습 중 떠오른 단초들을 기록하는 메모북으로 기능한다.
“씬 48 한 번 해볼까요?”
“좋지.”
유명은 그와의 시간이 무척 즐거웠다.
연기에 인생을 건 동료이자, 따뜻하고 인간적인 형.
살아온 시간만큼은 동일해서, 가끔씩은 친구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수동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밖에 없었던 지난 삶에 비해, 주고 받고, 대립하고 의기투합하는,
‘진짜 친구’를 그는 얻었다.
“
한달 후, 유명은 한성의 차를 타고 영화사로 향하고 있었다.
오늘은 의 주조연급 리딩날이다. 배우들끼리 처음 얼굴을 보는 자리기도 했다.
“감독님이 따로 말씀은 안 하셨지만, 이번 작을 마지막으로 은퇴할 계획이신 것 같아.”
“…그래요?”
손치욱 감독은 원래도 이번 작을 마지막으로 생각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더 꼼꼼하게 배우를 고르고, 몰아치며 촬영을 하다 엎어졌겠지.
은퇴작을 제대로 못찍고 말았으니, 말년에 얼마나 회한이 가득했을까.
“응. 이번에 캐스팅한 배우들이 다 손치욱 사단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거든. 원래 주연급인 선배님들도 조연이나 까메오 출연을 수락한 걸 보니, 다들 예상하고 계신 것 같아.”
손치욱 사단.
지금은 허허거리는 손감독은 젊었을 때 엄청난 호랑이 감독이었다고 했다. 연기가 눈에 차지 않으면 혼내고 울려가며 장면을 만들었지만, 8-90년대의 흔한 감독들처럼 개인감정을 섞거나 인격모독을 하지는 않아서 그를 존경하는 배우들이 많았다고.
그렇게 손감독과 여러 작품을 하며 인연을 이어간 그의 페르소나들을, ‘손치욱 사단’이라고 불렀다.
“그러면 다 아시는 분들이고 저만 뉴페이스인가요?”
이런, 조금 부담스럽네- 라고 생각하는 유명의 마음을 읽은 듯이, 한성이 짓궂게 웃는다.
“가면 관심 엄청 받을 거다. 그래도 다 좋은 사람들이니까 텃세 부리거나 하진 않을거야. 아, 뉴페이스 한 명 더 있다.”
“누구요?”
“비밀로 해 달랬어. 놀래켜 줄거라고. 하하. 가서 봐.”
한성이 의뭉스럽게 말을 흐리고 유명이 궁금하다고 몇 번 더 보채는 동안, 차가 주차장 입구로 들어섰다.
회의실에 들어서면서 유명은 허리를 숙이며 큰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신인배우 신유명입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어어. 반가워요. 나 김진범이에요. 드라마 재밌게 봤어요.”
“감사합니다, 선배님.”
군기가 바짝 든 신인배우를 보고 선배들이 실실 웃는다.
“지금 여기서 제일 핫한 배우 아냐? 이번에 작품 같이 들어간다니까 우리 딸이 난리 났어.”
“어유, 아닙니다. 많이 가르쳐 주십시오.”
“이따 싸인 좀, 응?”
변중량 역의 김진범 배우와, 정도전 역의 민경국 배우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한성은 비슷한 연배의 배우들과 살갑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유명은 자신의 이름이 올려져 있는 자리에 앉아 아직 빈자리들을 눈에 담았다. 이성계 역엔 배거형 배우, 묵직한 풍채와 카리스마 있는 연기로 유명한 분이다. 좋아하는 배우이기에 그가 이성계 역을 맡았다는 얘기를 듣고 설렜었다.
그렇다면 한성이 비밀로 했던 마지막 한 사람은···
유명이 다른 빈자리의 이름표에 시선을 옮기려 할 때, 회의실의 문이 열렸다.
“안녕하세요~~”
안정감을 주는 따스한 웃음.
열린 문 사이로 봄햇살이 비추어 들어올 것 같은 이 온화한 존재감의 주인공은,
“어, 안녕하세요…”
“유명아, 안녕~”
이선하였다.
끝
ⓒ 글술술
“유명아, 안녕~”
이선하는 다른 배우들에게 다시 한 번 자기소개를 했다.
“안녕하세요. 극단 의 연극배우 이선하라고 합니다. 영화는 처음이라 신인의 자세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많이 가르쳐주세요~”
방글거리며 건네는 그녀의 인사에 김진범과 민경국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맞받는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감독님이 신덕왕후 강씨 역할 배우를 기가 막히게 뽑았다고 하시더라구요. 저희가 배워야 할 것 같은데요.”
“팬입니다. 혜성 공연 보러 자주 갔었어요. 무대 위에 계시던 분을 밖에서 보니 연예인 보는 기분이네요, 하하.”
과연, 한성의 말대로 모두 서글서글한 사람들이다.
연기에 들어가면 물론 다르겠지.
인사를 나눈 선하가 한성과 유명의 곁으로 와서 고개를 까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