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115
“잘 부탁드립니다, 선배님들?”
“아, 선배님…그러지 마세요.”
“그래요. 열심히 하세요 이선하씨.”
선하의 목례에 유명은 난처해하며 함께 고개를 숙였고, 한성은 싱글싱글 웃으며 그녀의 장난을 받아쳤다.
“어떻게 된 거에요?”
“감독님이 신덕왕후 강씨 역할에 추천할 배우가 없냐고 물어보셔서 선배가 떠올랐지. 역시나 보자마자 만족하시더라고.”
“신덕왕후요…”
신덕왕후 강씨. 이성계의 둘째 부인.
태조가 즉위하기 전에 사망한 첫째부인 대신 왕후의 자리에 올랐으며, 이성계와 21세가 차이나지만 평생 그의 총애를 받았다.
우물가를 지나가던 이성계가 동네 처녀에게 물 한바가지를 요청하는데, 찬물을 급히 먹다 체하지 않도록 버드나무잎을 띄워 주었다는 고사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현명하고 매력적인 인물이었을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태조 즉위 후 첫째 부인의 아들 다섯을 제치고 자신의 아들을 세자에 앉히는 것에 성공하여, 책략가이자 수완가로 평가받기도 하는 여성.
이 시나리오에서도 그녀를 양의 탈을 쓴 늑대로 해석한다.
마주보는 사람을 말랑하게 만드는 따스한 분위기의 인간이, 뒤돌아서 야심과 계략을 드러낼 때의 갭이 무척이나 기대되었다.
“잘 어울리실 거 같아요. 무척 기대되네요.”
“그런데, 선배 지금 나이가 얼마더라…30대는 몰라도 20대를 연기하기는 어후···”
“윤한성… 20대 때는 뒷모습만 나오거든?! 맞은지 오래돼서 까먹었지?”
작중 정몽주보다 17살이나 어린 신덕왕후 강씨.
이선하가 워낙 동안이고, 그녀의 등장은 대부분 30대 초반에서 후반까지이긴 하지만, 16세의 이방원과 27세의 신덕 강씨의 조우 장면도 존재한다.
그것을 짚으며, 한성이 장난을 쳤다.
“안녕하십니까.”
이윽고, 배거형 배우까지 등장했다. 유명은 좋아하던 배우의 등장에 무척 설레며 꾸벅 인사를 했다.
“네가 내 아들이구나. 잘 지내보자.”
그가 묵직한 인사와 함께 내민 손을 유명은 마주잡았고,
마지막으로, 손감독이 입장했다.
*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감독님!” “안녕하십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손감독이 들어오자, 배우들 모두 벌떡 일어나서 인사했다. 익숙한 면면들과 인사하며 한 명 한 명 악수를 하던 감독은 유명의 손도 꽉 쥐고 흔든 후 상석에 앉았다.
“오늘은 캐주얼한 자리니까, 편하게들 하자구요.”
오늘은 전체 출연진이 모이는 정식 리딩이 아닌, 주연급 배우들이 인사를 하고 한 번 합을 맞춰보는 가리딩날이다.
감독은 그가 아끼는 배우들이 가득 모여있는 것이 흡족한 듯, 눈꼬리가 깊이 패이는 미소를 지었다.
“뭐 다들 알만한 사람들이고 인사들은 이미 하신 거 같으니 생략하고, 대본 얘기나 좀 해볼까요.”
배우들이 의자를 끌어당겨 바르게 앉았다.
“시나리오를 보셔서 아시겠지만, 이 이야기의 핵심은 ‘정몽주’입니다. 그리고 ‘이방원’은 정몽주의 제자이자 동류, 정적으로서 이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어요.”
“네, 감독님.”
“이성계, 정도전 등은 원래 려말선초 역사의 주인공들이죠.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주요 서사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출연을 승낙해 준 배 배우, 민 배우에게 고맙게 생각해요.”
두 배우가 겸양어린 표정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간단히 이 시나리오의 배경이 되는 역사를 짚어보겠습니다. 고려 말, 동북부에 터전을 둔 장수로서 불패신화를 자랑하던 강력한 무인 이성계와, 이미 고려에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새로운 왕조에서 성리학적 이상세계를 만드려는 정도전은 힘을 합쳐 조선
의 건국을 도모합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정몽주는 그들과 달리, 고려왕조 내에서 성리학적 세계를 실현하고 싶어하죠. 위화도 회군 이후 우왕이 폐위되고, 창왕, 공양왕으로 이어가는 고려말의 난세에서 이성계는 ‘왕위를 양보받는 보기좋은 모양새’를 위해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데, 정몽주는
끝까지 그의 편에 서지 않습니다.”
“이성계와 정몽주는 젊은 시절 전쟁터를 함께 누빈 사이이며, 이성계는 정몽주의 학자적, 정치가적, 외교관적 능력을 누구보다도 높이 평가해요. 그래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그를 회유하려 애쓰지만, 정몽주는 오히려 이성계 일파를 몰아내는 것을 꿈꾸죠.”
“그리고 미련을 못 버리는 제 아비와 달리, 정몽주를 회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그를 척살하는 인물이 바로 이방원입니다. 고작 26세의 젊은이죠.”
정몽주 역의 한성과 이방원 역의 유명이 잠시 눈을 마주쳤다.
“저는 두 가지에 주목했습니다. 일단 이 두 인물의 행태가 닮았어요. 지극히 유려하고 세련된 인물이지만, 필요할 때 서슴치않고 행동하는 결단력.”
감독은 그가 바라보는 두 인물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정몽주는 이 땅의 모든 역사에서 가히 최고로 꼽힐 정도로 뛰어난 외교관입니다. 죽이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극악한 상황의 사신 파견에서도 매번 엄청난 성과를 거두고 돌아와요. 본인과 정치적으로 반대편에 선 권문세족들과도 자주 연회를 열
고, 부정행위를 눈감아준 흔적이 발견되기도 하지요. 즉, 단심가 때문에 꼿꼿한 충신의 이미지가 박혀 있지만, 실제로는 세련된 외교관이며 목적을 위해 타협을 서슴지 않는 정치가였다고 생각합니다.”
정몽주는 정도전과 동문수학한 친우 사이.
하지만 정치적으로 대립하게 되면서, 정몽주는 정도전의 컴플렉스인 출신성분, 즉 외조모가 노비라는 점을 들어 공격한다.
필요하다면 더러운 수단을 사용하는 것도 망설이지 않는 수완가.
“이방원 또한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의 나이 17세, 과거 시험에 그 해 최연소로 합격합니다. 변방의 무인 출신이었던 이성계가 아들의 급제 소식에 얼마나 기뻐했는지가 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어요. 또한 젊을 때부터 처세술이 대단합니다. 사람들을 어르고 달
래며 필요할 땐 죽여버리는 그의 수완과 행동력은 유명하지요. 태종실록에는 거의 신하들을 갖고 놀다시피하는 태종의 언행들이 왕왕 기록되어 있어요.”
역대 가장 강력한 군주 중 한명인 태종.
불패신화의 이성계가 단 한 번 진 전투가 아들과의 전투라고도 한다. (*조사의의 난이 사실 이성계가 주도한 것이며, 아들 이방원에게 패배했다는 해석이 있음.)
“이런 두 사람의 기질적 유사성, 그리고 불과 26세에 거인 정몽주를 제거하겠다는 결론을 내렸던 이방원의 빠른 정세분석과 과감한 판단력. 여기에서 저는 그런 가정을 해보았습니다. 만약 두 사람이 ‘사제관계’였다면, 저 이방원의 통찰력과 결단력을 키워낸
것이 정몽주였다면, 얼마나 드라마틱한 일일까.”
그것이 라는 시나리오의 시작이었다.
*
“자, 리딩을 한 번 해볼까요. 빠진 배역은 조연출이 좀 읽어주고.”
“네, 감독님.”
흠-흠 소리가 들린다.
쟁쟁한 배우들이 대본을 슥슥 넘기며 목을 가다듬는 광경을 보고, 유명은 마음이 설렜다.
발레리나 하이는 복작복작 식구들 같았고, 연예학개론은 청춘스타들이 모인 트렌디한 느낌이었지만,
이 작품의 배우들은 하나같이 쟁쟁한 대선배들.
이런 무거운 자리에서 두 번째의 비중을 가진 준주연으로 앉아있다는 게 이제서야 조금 실감이 났다.
“긴장하지 마. 평소대로만 하면 다들 깜짝 놀라실 거다.”
옆자리의 한성이 쿡- 옆구리를 찌르며 귓속말을 한다.
한 자리 건너의 이선하도 눈을 마주치며 생긋 웃는다.
유명은 한 번 심호흡을 하며 자신을 가다듬었다.
“1392년 3월, 초봄. 편전 뜰에서 엎드려 시위하는 신료들. 가장 앞 열에 정몽주가 앉아있다. 죽여야 하옵니다- 신료들의 세 번 합창 후, 부복한 정몽주가 고개를 들고 끓는 목소리로 부르짖는다.”
나직하게 귀에 꽂히는 조연출의 지문 리딩이 그들을 613년 전의 개경으로 인도했다.
흐읍- 하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던 한성이 첫 대사의 운을 떼었다.
쩌렁, 하고 울리는 목소리.
“정도전은 미천한 출신으로 나라를 혼란시킨 죄가 크므로 징치하옵소서. 그의 일당으로 권세를 휘두른 조준과 남은, 윤소종, 남재, 조박 등도 모두 처형하셔야 하옵니다.”
평소의 윤한성보다 조금 나이먹은 목소리로 내지르는 압력높은 음성이 공간을 가득 메운다.
감독이 마음에 드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인다.
“죽여야 하옵니다-”
조연출이 반복되는 신료들의 외침을 한 번으로 압축하여 읽은 후 다음 신으로 넘어갔다.
“상복을 입은 채로 말을 달려 벽란도로 달려가는 이방원의 모습 인서트. 이성계가 몸져누운 방 안으로 화면 스킵. 방원, 이성계가 누워있는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제 아비를 설득한다.”
이방원과 이성계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씬.
유명은 배거형 배우를 건너 보았다. 장대한 체구와 깊은 눈매가 과연 이성계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상황을 머리 속에 그리고 마음 속에 새겨본다.
자신은 몸져 누운 아비를 설득하여 개경으로 끌고 가야 한다. 여기서 시간을 지체하면 자신들의 세력은 모두 제거될 것이고, 대업은 실패로 돌아갈 것이다.
무력은 뛰어나나 조금은 우유부단한 아버지를 설득하기 위해, 그가 취해야 할 태도.
“아버님.”
“방원이 왔느냐. 왜 네 어미의 묘소를 비웠느냐. 나는 괜찮느니.”
“이렇게 누워계실 때가 아닙니다. 아버님의 지지자들이 모두 유배에 처해지고, 참수하라는 상소가 연일 올라오고 있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다친 것을 어쩌란 말이냐. 바로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포은(*정몽주의 호)은 삼봉(*정도전의 호)과도, 나와도 절친한 사이가 아니더냐. 이것은 그저 정치야.”
“…제가 어릴 적 아버님의 배려로 포은공에게 개인적인 사사를 받은 것을 기억하십니까.”
“물론이다. 그가 어려운 청을 들어주었지.”
유명이 눈에 힘을 주고, 대사에 무게를 실었다.
“그 때 스승님이 제게 처음 가르치신 것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무엇이었더냐.”
살짝 뜸을 들이고, 할 말을 화살처럼 재어, 쏜다.
“손자병법 제 5계, 진화타겁(趁火打劫).”
“…”
“상대의 위기를 틈타 공격하며, 기회가 왔을 때 벌떼처럼 공격하라.”
무장인 이성계이기에 더욱 묵직하게 와닿는 병가兵家의 명언.
“그리고 한 번의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 평소에는 전혀 그럴 인물이 아닌 것처럼 우아하게 처신하는 것을…”
배우 배거형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옭아매듯이 한 마디 한 마디를 꽂아넣는 젊은 배우의 눈을 마주했다.
불이 얼음으로 감싸인 듯, 이성적이고 냉철한 어조 아래 이글거리는 야심.
수십년의 연기 이력을 가진 자신이 밀릴 듯이 들이쳐 오는 기백.
“…’정치’라 한다.”
퉁- 하고 심장이 떨어졌다.
설마하며 불안해진 이성계의 마음처럼.
끝
ⓒ 글술술
“감독님, 우려하시던 부분이 저는 뭔지 잘 모르겠던데요.”
그 날, 리딩이 끝난 후의 회의실에서 손감독과 배거형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배거형은 40대 중반의 배우로 손감독과 오랜 사제관계. 그는 이방원 역의 신인배우를 보고 상당히 감탄하고 있었다.
“리딩하는 동안 텐션이 한 번도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촬영장 연기는 또 다르다지만 그 정도 집중력과 연기력이 있는데 뭐가 걱정이신 건지···”
“그러게. 오늘 보니 내가 과민했나 싶기도 하네. 그만한 적임자도 드물텐데, 마지막 작품이라고 생각하니 괜한 과욕을 부렸나···”
“…정말로 이번 작으로 은퇴하실 계획입니까.”
“허허. 알고 캐스팅 수락해놓고 딴청은- 이쯤 빠져줘야 후배들 자리가 늘어나지.”
“그래도 감독님 영화는 감독님만 찍으실 수 있으신데···”
손감독은 그의 반박에 허허로이 웃었다.
그 때,
똑똑-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요- 손감독이 응답하자 문고리가 돌아가며 문틈으로 보이는 얼굴은, 조금 전 그들이 화제로 일삼던 주인공이다.
“신 배우? 아직 안 갔어요? 무슨 일인가요.”
“감독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뭔가요?”
“저…초반 1개월 정도는 제 촬영이 별로 없는 것 맞는지요?”
“그렇지요. 정몽주의 젊은 시절에 이방원은 아역을 써야 하고, 정몽주와 이방원의 다담(*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눔)은 러닝타임 전체에 걸쳐있지만 후반부에 몰아찍을 거니까요.”
“네, 그 때 제 촬영분 없을 때도 촬영장에 나오라셨는데-”
“아, 꼭 안 그래도 돼요. 다른 스케줄 있으면 잡아요. 오늘 리딩하는 거 보니까 내가 너무 과민했나 싶기도 합니다.”
“아 그게 아니고, 혹시 제 촬영이 없는 동안 엑스트라를 시켜주실 수 없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