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116
“…엑스트라요??”
손감독과 배거형 모두 당황했다.
준주연을 맡은 배우가 엑스트라라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얼굴 윤곽이 잡히는 엑스트라 말고, 떼 씬에서 등장하는 행인 1 같은 걸 말씀드리는 겁니다. 사극에서는 엑스트라가 워낙 많이 필요하니까 괜찮지 않을까 해서.”
“그건…왜요?”
“대사가 없는 연기를 해보다 보면, 말씀하신 부분에 대해 좀 더 감을 잡을 수 있을까 싶어서요.”
손감독은 놀라 그를 다시 쳐다보았다.
대단한 열정과, 기상천외한 연습방식.
“음…그래봐야 엑스트라인데, 그걸로 연습이 될까요?”
“저도 잘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한된 리액션 안에서 존재감을 발산하는 것을 연습해보고 싶습니다.”
“흐음…재밌는 발상이군요.”
“그런데 혹시, 엑스트라가 튀어서 폐를 끼칠까봐 걱정이 되긴 하는데요···”
허허-
손감독이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튀는 액션을 하려는 건 아니지요?”
“네, 그런 건 아닙니다. 동선대로 움직이면서 집중만 해보려고 합니다.”
“튀는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닌데도 떼 씬에서 존재감만으로 튈 정도가 되면, 그건 폐가 아니라 상을 줄 일이지.”
“…그렇겠군요.”
“좋아요, 해봅시다!”
손감독은 연기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찬 배우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았다.
유명이 허락을 받고 사라진 후, 배거형이 스읍 입맛을 다셨다.
“대단한 친구네요, 정말. 우리 훈성이가 좀 보고 배웠으면 좋겠네···”
그의 아들도 얼마 전에 데뷔한 배우였다. 뺀질뺀질한 녀석이 저 배우의 반만 닮았으면 좋겠다 싶다.
“이거, 나보다 연기 욕심이 더한 사람인 모양이야.”
손감독도 훈훈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감독님, 저 방법이 정말 효과가 있을 거 같아서 허락하신 겁니까?”
“솔직히 글쎄 싶긴 한데…배 배우도 알잖아. 본인이 하고 싶은 걸 해 보지 않으면 아쉬움이 남을 테니까.”
“아아…알죠.”
“그리고 저 나이에 저 정도 연기력을 갖추게 된게, 저런 독특한 발상 때문일 수도 있으니까. 기특한 생각이고 손해볼 것도 없는데, 안 들어줄 이유가 없지.”
“그건 그렇습니다.”
배거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열고 나간 문을 쳐다보았다.
발전하는 모습이 기대되는 후배였다.
*
사극에는 준비할 것이 많았다.
유명이 가장 마지막에 합류했을 뿐, 6개월전부터 프리프로덕션은 진행되고 있었다는데도, 크랭크인 날짜는 예정에서 2주를 넘긴 4월 중순으로 픽스되었다.
“팔 들어 보세요. 양 옆으로 90도로 펼쳐서 쭈욱-”
한복을 짓는 것은 처음이었다.
한 벌이 아니라 몇 벌을 짓는다. 관복, 사신복, 일상복에 상복까지.
어색하게 시킨 자세를 취하는 유명을 보고 한성이 웃고 있다. 앞서 끝낸 자의 홀가분한 미소를 지으며.
미술감독은 의상팀장과 부지런히 의논하고 있었다.
“화면에서 색감 대비를 시키려면 계획대로 청/적으로 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냉철한 정몽주는 청색톤, 야심만만한 이방원은 적색톤으로.”
“나도 원래는 그렇게 생각했지. 그런데 감독님이 두 인물을 해석하는 방식이 ‘동류’잖아. 둘다 청색으로 가되, 톤을 좀 더 다르게 하면 어떨까? 이방원은 쨍한 파란색으로, 정몽주는 세련된 인물이니 좀더 퍼플톤이 가미된 파랑으로 가면…?”
“그럼 화면이 너무 파랑파랑하지 않아요?”
“그래서 세트와 소품을 붉은 색으로 가려고. 피가 튄 듯이 불길한 블러디 레드로.”
“음···”
“톤이 다른 두 청색의 팽팽한 대치. 그들을 둘러싼 피가 튄 듯한 적색. 느낌오지 않아?”
“말이야 쉽지만, 머리로 생각한 이미지대로 색상이 잘 안빠질텐데… 이따 감독님과 회의할 때 의논해봐요.”
유명은 스탭들의 열띤 토론을 귀기울여 들었다.
치수를 잰 다음으로 이동한 곳은, 국궁을 가르치는 센터였다.
문인인 동시에 무재가 있었던 이방원과 정몽주가 격궁장에서 활을 쏘는 씬이 있었기 때문이다.
“활쏘는 자세의 원칙을 비정비팔(非丁非八)·흉허복실(胸虛腹實) 이라고 합니다. 발은 정위치와 팔자의 사이에 두고, 가슴을 비우고 배에 힘을 줘야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실제로 활쏘기 실력을 키울 필요는 없지만, 자세만은 원래 무예를 익혀온 듯 자연스러워야 한다.
유명은 주에 2-3회씩 꾸준히 활쏘기 레슨을 받았다. 무거운 활시위를 당기는 팔에 생기는 근육통이 그의 일상이 되었다.
승마하는 법을 처음 배운 날은 선생이 깜짝 놀라기도 했다.
“혹시 부잣집 아들이에요?”
“네?”
“아니 사극 해 본 적 없는 신인배우니 잘 가르쳐달라고 부탁받았는데… 왜 말을 탈 줄 알지?”
‘원생에 사극 엑스트라를 몇 번 했었더라···’
유명이 멋적게 웃었다.
준비된 일정들을 소화하면서도, 그는 남는 시간에 한성과 꾸준히 대본 연습을 했다.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연예학개론에서 윤보형 역으로 스타덤에 올랐던 신인배우가 손치욱 감독의 영화에 합류했다는 기사가 포털을 빠르게 쓸고 지나갔다.
전체 리딩을 순조롭게 마쳤다. 자신의 아역을 맡게 되었다는 6세와 12세의 똘망한 아이들을 보게 된 것도 신기한 경험이었다.
리딩날 찍힌 사진들이 홍보자료로 공개되면서, 주변의 축하와 격려문자가 쏟아졌다.
그리고 4월 중순, 드디어 크랭크인 날이 왔다.
*
“다들 비키세요~ 고사상 들어갑니다.”
“대박 기원. 천만 기원!”
“누구 현금 없어요? 아, 현금 안 뽑아왔는데.”
첫 촬영이 개시되는 곳은 문경새재 오픈세트장.
2000년에 문경에 만들어진 고려시대 오픈세트장은 왕궁 2동, 기와집 42동, 초가 40동, 기타 13동으로 세운 국내 최대 규모의 사극 세트장이었다.
의 촬영은 이곳 문경에서 많은 부분 이루어지며, 국내 방방곡곡의 아름다운 고옥들과 정원들에서도 추가 촬영이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와, 이건 또 새롭네…’
회귀한 이후의 낯선 풍경들-사라졌던 고가도로가 번듯이 서 있거나, 거대한 랜드마크가 아직 들어서지 않은-에 거의 적응한 유명이었지만, 이 세트장의 풍광만큼은 새삼 새로웠다.
08년에 문경새재 오픈세트장은 고려시대 세트를 싹 허물고 조선시대 세트장으로 개축하게 되는데, 유명은 개축한 조선시대 세트장밖에 와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억하고 있는 지형 안에서 시대가 뒤바뀌어 있는 풍경은 묘하게 오싹한 느낌을 주었다. 그래서 미호가 발휘했던, 시간을 되돌린다는 엄청난 이능이 더욱 와닿았달까.
{아, 여깅. 조선시대 세트로 바뀌었었징. 그거 생각하고 있냥.}
‘응···네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는지 알겠네.’
{컁컁.}
미호가 눈을 가늘게 접으며 우쭐한 웃음소리를 내더니, 유명이 입고 있는 엑스트라의 복장을 툭- 잡아챘다.
{그런데 진짜 이걸 할거냥. 의미없는 개고생 같은뎅.}
‘부족한 존재감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는 거잖아. 몰랐음 몰라도 알게 된 이상, 극복하려는 발버둥이라도 쳐봐야지.’
{흠…그냥 ‘거래’라는 쉬운 방법이 있는뎅… 발버둥친다고 존재감이 늘어나지는 않는당.}
‘그건 알아. 있는 존재감을 더 발산시키는 연습이라도 해보려고.’
{발산?}
‘응, 원생에는 주구장창 하던 거니까.’
타인의 존재감에 짓눌리던 시절.
연기를 하며 손발을 움직이는 것조차 무겁던 시절.
그 때 부족한 기운을 최대한 뻗어내던 힘으로, 지금의 기운을 뻗어낸다면, 좀더 확고하게 존재를 과시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이 유명이 생각하는 연습 방향이었다.
{흠, 과연 될깡? 안 되겠다 싶으면 다른 방법이 있는 걸 기억해랑.}
‘…’
미호는 습관처럼 권유를 던진 후, 몸을 흐리며 사라졌다.
유명은 도포를 입고 학당에 앉았다.
첫 촬영 씬은, 정몽주가 성균관 박사로 재직하던 1367년의 성균관 학당.
이방원이 태어난 해였던 이 때, 정몽주는 이미 국내 최고의 성리학자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유명이 받은 역할은 정몽주의 강의를 듣는 학생으로, 정면 카메라와 측면 카메라의 사각에 위치하여 뒷모습만 찍히는 역할.
그 자리에 앉아 유명은 이미지를 그렸다.
‘지금의 나는, 20세 가량의 정몽주를 극히 존경하는 패기 넘치는 젊은 유학자.’
유명은 등허리를 똑바로 펴고 자리에 앉았다. 낯선 꼬부랑 글씨가 쓰인 경서를 그윽히 들여다보며, 최대한 존재감을 내뿜기 위해 노력한다.
{호오···}
미호는 유명의 주위로 일렁이는 생기의 물결을 보고 꽤나 감탄했다.
실제로 연기를 할 때와 비교할 순 없지만, 예전보다는 훨씬 활발히 움직이는 생기의 너울.
‘과연 얼마나 생기를 다룰 수 있을까. 인간 주제에 재밌는 시도를 한단 말이야.’
미호는 오랜만에 팝콘을 꺼내들고 캥- 웃었다.
*
아역마저도 연기를 잘 했다.
깐깐한 손감독의 디렉팅에도, 연기력 구멍이 없는 배우들 덕에 촬영은 착착 진행되었다.
그리고 유명은 단기간 내에 가장 다양한 배역을 소화하는 경험을 하고 있었다.
-궁궐에 엎드려 시위하는 신료 무리의 일원.
-명과 국교를 맺기 위해 상소를 올리는 젊은 유학자 중 하나.
-정몽주가 명나라를 방문했을 때 줄줄히 늘어선 구경꾼 1.
-왜나라에서 정몽주에게 시를 청하는 승려 무리 중 한 명.
오랜만에 겪어보는 군중씬의 기운은 무거웠다.
빽빽하게 밀집된 사람들의 사이에 몸을 섞고 있으면 조금쯤은 옛날 생각이 난다. 타인의 기운에 눌려 팔다리가 무겁게 연기했던 원생의 나날들이.
거대한 집단이 힘있는 장면을 찍을 때면, 특히나 빼곡하게 밀도가 높아지는 기운을 밀어내며, 유명은 존재감을 발산하는 연습을 했다.
집중하며 연기를 끝내고 나면, 매번 땀에 흠뻑 젖어 있을 정도였다.
“신 배우, 이리 와요.”
그 와중에도 손감독과의 독대는 매일 진행되었다.
노감독은 쉬는 시간을 쪼개 유명을 불러, 열정적으로 연기 지도를 했다.
감독은 그의 연기에 대체로 만족했지만, 이방원이 화면의 외곽에 잡히는 컷들에서만큼은 ‘조금 더 강렬하게’라며 그를 닥달하곤 했다.
그렇게 한 달.
미호는 생기의 일렁임이 조금씩 더 커지는 것을 보며 유명에게 제법 감탄하고 있었다.
물론 재롱을 보는 수준의 감탄이었다.
‘그 날’이 오기까지는.
끝
ⓒ 글술술
{오늘은 또 무슨 역이냥.}
미호는 유명이 엑스트라로만 출연하자 보는 재미가 없다고 투덜거리며, 한동안 촬영장에 따라오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은 며칠 만의 동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