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162
“그 병명과 피터팬이라는 소설의 배경 스토리 외에, 다른 제한 조건은 없습니다. 의사로서의 캐릭터, 이 환자의 닫힌 마음을 열어 상담을 이끌어내는 과정, 그리고 그 과정의 연기로서의 설득력이 심사 항목이 될 것입니다.”
그 말이 끝나자, 무대 위로 한 명이 얌전히 걸어나와, 가운데 놓인 의자에 앉았다.
수연이었다.
“상대 배역인 웬디는, 설수연씨입니다.”
‘정말 쟤였군.’
‘초보같던데 에뛰드가 가능할까.’
‘그래도 최소한 연기력이 떨어져 보이진 않겠네, 다른 후보들보다 잘 해내는 게 관건.’
“정신호씨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첫 번째 배우가 무대 위로 성큼성큼 올라왔다.
30대 초반의 남자 배우. 타 극단에 있다가 작년에 줄라이로 이적했으며, 작년 가을 정기 공연에서 비중 조연을 맡았었다. 서글서글한 마스크가 무난한 인상을 자아냈지만, 사실 상당히 자존심이 강한 사람.
그는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어린 여배우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하필 상대가…신유명이나 서류신이 나올 것이지.’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탐나는 배역을 위해 최선을 다할 예정이다.
자신이 준비해 온 닥터는, 전문적이고 유능한 캐릭터. 그는 상대역의 앞에 섰다.
“조명 껐다가 fade in(*서서히 밝아짐)되면 시작하겠습니다. 의미없는 상황이 5분이상 지속되면 종료되는 점 유의해 주세요. 준비되면 말씀하세요.”
“바로 시작하셔도 됩니다.”
팟-
조명이 꺼지고,
지이잉-
조도가 서서히 올라가, 이윽고 환하게 켜졌다.
그리고 정신호는, 수연의 얼굴을 보았다.
‘헛···’
석고로 빚은 인형처럼 하얗고 아름다운 형체.
입 끝을 올리고 있지만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 텅 빈 동공.
가슴이 철렁- 흔들렸다.
끝
ⓒ 글술술
“안녕, 나는 닥터 케빈이라고 해.”
“안녕하세요.”
정신호는 그녀의 분위기에 놀란 마음을 추스리며, 준비해 온 자기소개를 했다. 그녀가 입꼬리를 올린 그대로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너는 지금 우울증으로 병원에 들어왔단다. 알고 있니?”
“그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저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아무렇지도 않다기엔 이렇게 말랐잖니? 이건 우울증으로 인한 거식증이야.”
“저는 다른 애들처럼 좀 더 예뻐지고 싶었을 뿐이에요. 다른 문제는 없어요.”
얌전해 보이는 아이가 의외로 꼬박꼬박 말대답을 하는데다, 그 내용이 자못 논리적이다. 그는 당혹해 하며 그녀의 얘기를 반박했다.
“아니, 너는 가면성 우울증이야. 그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우울증이란 의미이지.”
“그걸 어떻게 확신하시나요? 저는 일상 생활도 잘 하고, 울거나 처져 있지도 않는데요?”
“선생님은 전문가니까, 네가 숨겨도 읽을 수 있어. 감정 기복이 없는 척 하지만, 사실 혼자 있으면 우울하고 아무 것에도 의욕이 없지? 선생님과 함께 치료해 보자. 빨리 나으려면 네가 더 솔직해져야 해.”
“저는 솔직해요. 지금 선생님의 말씀은 이미 정해놓은 진단에 저를 끼워맞추려는 것 같으신데요.”
술렁-
객석이 반응했다.
의존성 인격장애와 우울증을 가진 아이.
이런 정보만 가지고서 심약할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웬디가 의외로 논리적이고 차분하다.
정신호가 준비한 ‘엘리트적인 의사’의 캐릭터는 이미 무너지고, 그는 환자의 말에 허점을 찔려 당혹해하는 의사가 되어 있었다.
“그게 아니야! 너는 지금 네가 문제가 있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방어적으로 반응하는 거야, 모르겠니!”
“제가 무슨 말을 하든, 선생님은 본인 생각대로 판단하실 거잖아요. 그런 건 대화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는 더 이상의 대화를 거부하겠어요.”
“아니 너-”
정신호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졌다. 그리고 웬디는 정말로 입을 닫았다.
그렇게 묵묵부답인 웬디와 어버버하며 그녀에게 말을 주워섬기는 정신호의 모습이 지속되다가, 5분이 흐른 후 끝이 났다.
“여기까지입니다.”
“아니, 이거 문제 있는 것 아닌가요? 상대 배우가 리액션을 안 하는데 어떻게 액션을 합니까.”
“배우 설수연씨가 아니라 극 속의 ‘웬디’로서 입을 닫은 거잖아요.”
“의존성 인격장애라면서요. 그런 아이가 꼬박꼬박 말대답을 하는 건 캐릭터에 안 맞잖아요.”
그 말에 수연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특정 병명이 있다고 해서 그 환자가 병명상의 전형적인 행동만 취하는 것은 아니에요. 웬디는 낯선 환경에서 겁을 먹고 있고,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죠. ‘착한 아이’로 보이고 싶기 때문에 얌전히 행동하기는 하지만, ‘거부 의사’를 표현할 정도로는 방어적인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그녀의 조용한 설명에는, 신뢰할 만한 무게감이 있었다.
“여기 계신 다른 관객들에게 물어볼까요. 웬디가 입을 다문 게 억지로 보였는지.”
정신호가 억울하다는 듯이 동료 배우들을 둘러보았지만, 자신을 편들어주지 않는 눈빛을 보고 당황했다.
“억지쓰지 마. 누가봐도 준비가 부족했어. 즉흥연기라면 상대가 대화를 거부하는 것조차 연기의 일부 아니야? 적어도 보는 입장에선 너보다 ‘저쪽 배우’의 연기가 훨씬 설득력 있었어.”
객석에 앉아있던 줄라이의 원로배우인 김흥수가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고, 정신호는 씩씩거리며 그 곳을 빠져나가 버렸다.
그리고 잠시 긴장된 침묵이 흘렀다.
*
‘경합 때는 몸이 안 좋았던 거였나? 상당한 수준의 연기인데.’
‘즉흥연기인데도 상대 말에 망설임 없이 받아치는 순발력이···’
‘무엇보다도, 진짜 ‘환자’같아.’
말투는 차분, 얼굴에는 미소.
표현의 범주는 정상에 머물러 있다.
그런데도 하얗게 번지는 공허함. 꺼질까 애처로운 무엇인가가 자꾸만 시선을 당긴다.
“다음, 윤정군씨입니다.”
정군이 올라왔다. 추세미와 함께 를 준비하다 탈락한 남자 배우이다. 덩치가 크고 조금 둔한 곰과의 남자는, 인간미있고 따뜻한 닥터를 준비해왔다.
“웬디. 선생님은 다 알고 있단다.”
“뭘요?”
“선생님도 어릴 때, 엄마를 무척 좋아했거든. 그래서 아빠와 엄마가 손을 잡는 것도 싫었어.”
“헉…정말요. 선생님은 다른 형제가 있어요?”
“응. 형이 있어. 그래서 엄마가 형을 칭찬하면 엄청 질투가 났지.”
“우와, 그래서요? 아빠, 형, 선생님 중에 엄마는 누구를 제일 좋아했어요?”
“음…형이었던 거 같아. 형이 참 똑똑했거든. 그래서 형을 이겨보겠다고 그렇게 악을 쓰며 공부를 해서 겨우 의사가 되었는데, 사실 형은 더 좋은 대학의 교수가 되었어.”
“선생님 어떡해…마음이 너무 아팠겠어요···”
“응…사실 그 때 나는…어?”
장단을 맞추는 그녀의 말에 한참을 지껄이고 나서야 윤정군은 깨달았다.
자신이 상담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 ‘받고’ 있다는 것을.
‘착한 아이’ 웬디의 공감 가득한 추임새에 그는 자신의 상처를 털어놓고 있었다. 그리고 웬디는…착하고 친절했지만, 마음을 열어주지는 않았다.
실패.
그는 거구를 이끌고 시무룩하게 제 자리로 돌아갔다.
다음 사람.
그 다음 사람.
네 사람의 연기가 끝난 후에야, 관객들은 그녀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깨닫고 경악했다.
미러링(*mirroring)
타인의 행위를 똑같이 따라하는 것.
하지만 여기서 수연은 타인의 성격을 따라하고 있다.
분석하려는 의사에겐 분석적으로,
공감하려는 의사에겐 공감을,
즐겁게 북돋으려는 의사에겐 더 환한 미소를 지으며 호응해주고,
의사다운 딱딱함을 유지하는 의사에겐 환자다운 거리를 둔다.
상대마다 조금씩 바뀌는 캐릭터지만, ‘웬디’라는 커다란 틀은 벗어나지 않는다.
엄마에게 착한아이로 보이고 싶어서 과도하게 노력하다가 우울증에 걸린 아이. 그 안에서 이렇게 여러 가지의 웬디를 연기하고 있다.
‘천재의 무리에 섞여있는 것은 결국 천재라는 말인가···’
지켜보는 줄라이 단원들의 눈빛이 바뀌었다.
섣불렀던 판단이 머리 속에서 달아나고, ‘또 다른 천재의 싹’을 보는 눈으로 바뀌었다.
그 시선의 변화를 유명이 확인했고, 미호가 귓가에서 쑥덕였다.
{이제는 안 무시하겠당, 그칭?}
‘그렇겠지?’
{너도 가만 보면 머리가 좀 돌아간단 말이당. 나만은 못하지만, 캬컁.}
유명이 이번 공개 오디션을 계획한 이유는, 줄라이의 분위기 진작과 수연의 연습 기회 외에도 한 가지가 더 있었다.
-쟤는 무슨 자격으로 저 사이에 있는 걸까- 그런 시선을 매일같이 느끼지만…
수연이 자신의 과거를 고백할 때, 설핏 흘린 한 마디가 계속 마음에 남았었다.
‘너는 무슨 자격으로 거기 있어?’
그녀는 여태 계속 그런 시선을 받으면서 연습실에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자격을 증명해 보이자.
유명의 마지막 의도는 줄라이 단원들이 수연을 무시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
지금 모두가 수연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진 것을 보고, 그 의도가 성공했음을 알 수 있었다.
*
마지막 지원자는 추세미였다.
방심했던 수연의 활약에 그녀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알고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빠른 시간 내에 그녀는 생각하던 버전을 던져 버리고 다른 버전을 꺼내들었다.
“팀 트리플에 지원하는 추세미입니다. 제가 영입되는 순간 전력이 무시무시하게 오를거에요. 트리플이 포카가 될 거거든요.”
극단 의상팀에서 빌려온 의사 가운을 입고, 무대 위에 오른 그녀는 눈을 찡긋거리며 자기 소개를 했다.
괜한 자존심을 부리지 않고 제대로 준비했다. 그것만으로도 가산점이었다.
“시작할게요.”
지잉-
불이 밝았다.
세미는 수연의 앞에 가서 서서는 수상쩍은 미소를 생긋 지었다.
그리고 충격적인 첫 마디를 던졌다.
“안녕 웬디. 그거 알아? 네 엄마는 너를 싫어해.”
모두가 놀랐다.
무슨 저런 정신나간 의사가 있는가. 환자에게 상처가 될 만한 말을 다이렉트로 던지다니.
그런데 다음 말은 더 했다.
“그래서 웬디 너만 여기 버린거야. 엄마랑 아빠랑 존, 마이클, 이렇게 넷이 살고 싶어서.”
“아니야!!!”
그녀의 심술궂은 말에 웬디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앞의 네 번에서 침착하기만 했던 그녀에게서 ‘감정’이 돌출되었다.
“웬디는 착한 아이야! 존과 마이클을 잘 돌보는 누나야. 편식도 안 하고 거짓말도 안해. 엄마가 나를 싫어할 리가 없어!”
가장 깊숙한 상처를 방어할 틈도 헤집힌 그녀가 고개를 발작적으로 흔들어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