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161
끝
ⓒ 글술술
수연이 종이를 하나씩 펼쳤다.
팔락-
그리고 안색이 밝아졌다.
“유명 오빠가 피터팬, 류신 오빠가 후크네요!”
“그럼 결정됐네요.”
“그러네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배역은 겹치지 않았다.
그리고 류신이 물었다.
“피터팬을 선택한 이유가 뭐에요?”
“창작극이니만큼, 캐릭터에 공감을 많이 할 수록 좋은 대사들이 나오리라 생각했어요. 그리고 둘 중에서라면, 저는 피터팬이 더 공감이 가구요. 형은요?”
“…저는 후크 쪽에 더 공감이 갑니다.”
한 사람이 아닌, 세 명의 배우가 함께 만들어 가는 창작극.
수연이 웬디라는 배역에서 자신을 발견했듯이, 자신과 닮은 캐릭터일 수록 와 닿는 대사를 뽑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한 생각과 동일했다.
그리고 궁금했다.
제멋대로이고 산만한 피터팬. 그냥 보기엔 신유명과 반대인 듯한 캐릭터. 거기서 그가 어떤 부분을 공감한 것인지
그것은 연습을 하면서 차차 알아가게 되겠지.
경합을 않게 된 것은 약간의 아쉬움도 남았지만, 류신은 같은 배역을 쟁탈하는 것만이 경쟁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반드시···’
두 사람의 뜻 모를 눈빛이 교차하며, 그렇게 창작극 의 배역이 결정되었다.
그 뒤로 이어진, 배역에 관한 회의.
의외로 수연이 큰 도움이 되었다. 일종의 전문분야였다.
“사실 의존성 인격장애만으로 정신병원 수용은 어려워요.”
“흠…그래?”
“네. 자해, 타해의 위험이 있거나 일상생활에 어려움이 있지 않으면 입원 치료까지 가기 어렵거든요. 어차피 픽션이긴 하지만, 설득력은 중요하니까요.”
“…그러게.”
“그래서 생각해 봤는데 웬디의 병명을 가면성 우울증으로 하면 어떨까요.”
“가면성 우울증···?”
“네. 제가 그 진단을 받았었거든요.”
수연의 설명에 따르면, 가면성 우울증(*Masked depression)이란 우울한 기분이 마치 가면을 쓰고 있는 것처럼 겉으로 별로 드러나지 않는 우울증을 말한다고 했다.
“남들에게 티는 안 나도 심리적으론 우울증 상태라, 식욕 부진, 피로감 등이 나타나기도 하고, 약물, 알콜중독 같이 다른 것에 의존하기도 한대요. 웬디는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착한 아이의 가면을 쓰고 있기 때문에 정상적인 인물로 보이지만, 사실 가면성 우울증이 있어서 알콜중독이나 거식증 등으로 입원한 걸로 하면 어떨까요.”
유명은 그녀의 해박한 지식에 감탄했다.
그녀는 엄마가 입원한 후 자신도 정신과 상담을 받았기도 하고, 혈육이 오래 입원해 있다보니 이것저것 주워듣고 찾아본 얄팍한 지식이라며 민망해했다.
그런 그녀의 지식은 피터팬과 후크를 분석할 때도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럼 피터팬도 문제네. 이 친구 나르시즘을 동반한 ADHD(*주의력 결핍 및 과잉 행동 장애)라고 생각했는데, 이것도 입원 치료까지 하긴 애매한 거 아니야?”
“네. 자발적 입원이라면 가능할 지도 모르겠지만, 자유를 갈구하는 피터팬의 성격에 자의 입원일 것 같지는 않은데요···”
“그렇겠지···”
한참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다, 수연이 말했다.
“소시오패스 특성을 넣으면 어때요?”
“어…소시오패스?”
“네. 실제로도 피터팬이 관심이 없는 일에 상당히 잔혹한 성향을 보이니까요.”
피터팬은 웬디의 동생들을 데리고 네버랜드로 날아가던 중, 아이들이 졸려서 바닥으로 곤두박질쳐도 재미있다는 듯 가만히 보고만 있다.
그러다가 바다에 빠지기 직전에 쏜살같이 내려가 다시 안고 올라오는 것으로 재주를 뽐낸다.
그런 부분을 나르시즘적 욕구 이상의,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소시오패스 특성으로 해석한다면.
“하기야, 후크의 왼 팔도 피터팬이 잘랐는데, 거기에 죄책감도 없지.”
“그러게. 그걸 직접적인 수용 원인으로 봐도 될 것 같네. 타인을 상해했는데 죄의식이 없어서 정신적 결함을 진단받고 수용되었다, 어때?”
“와- 그렇게 발전시키니까 더 좋네요.”
그리고 후크 역시, 수연이 독특한 아이디어를 내 놓았다.
“후크는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면 될까? 피터팬에게 팔을 잘리고, 그 팔을 악어가 먹은 후에, 악어의 뱃속에 있는 시계 소리만 들어도 오들오들 떨잖아.”
“그 ‘시계 소리’라는 부분에서 생각해 봤는데요. ‘시계’하면 정신과적으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강박’이잖아요.”
“어…시간 강박같은거?”
“네. 동화에서는 ‘시계소리’라는 게 악어가 접근하는 신호로만 보여졌지만, 이게 사실 시간 강박의 은유이고, 후크에게 그런 강박이 있는 걸로 하면.”
“…그러면 규칙을 강박적으로 따르는 후크의 입장에선, 자유의 화신같은 피터팬이 짜증나겠네.”
“네, 그러면서도 부러울 거구요.”
세 명의 눈이 마주쳤다.
조금씩, 주인공들의 형체가 드러나고 있었다.
*
“충원을 하겠다고?”
“네. 세 명 모두와 얽히는 중요한 조연이 하나 필요해요.”
“어떤 인물이야? 혹시 팅커벨?”
“아니요. 닥터요.”
“아···”
이신은 ‘조연출’의 자격으로 오늘 그들의 회의에 참여하고 있었다.
조연출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 연출적 권한을 주장하긴 어려웠다.
배우들이 연출을 분담하는 격인데다, 워낙 연기력과 안목이 뛰어난 인물들이라 자신이 끼어들 계제가 없어 보였다.
자신이 해줘야 할 몫은 지금같은 줄라이와 관련된 일들의 처리, 그리고 만들어져가는 그림에 문제가 없는지 체크하는 스크립터 정도의 일이겠지.
그럼에도, 그들이 만들어가는 연극의 중간 과정을 겪을 수 있는 것에, 자다가도 설렐 지경이다.
“한 명 뿐이야? 다른 단역이나 엑스트라는 필요없고?”
“현실극이 아니라서 엑스트라나 단역들은 쓰지 않으려구요. 연출보다는 연기에 집중하고 싶어요. 그러려면 소수정예인 게 좋구요.”
줄라이의 캐스팅 매니저로서, 조금 아쉽다.
그들의 공연에 참가하는 줄라이의 멤버들은 연기적으로도 발전하고, 미디어의 관심도 받을 텐데. 그것은 줄라이의 부흥기를 선도할지도 모르는데.
“그래. 어떻게 뽑을 건데? 생각해 둔 후보는 있어?”
“몇 명 있긴 한데…공개모집을 하려구요.”
“아, 그래?”
이신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리고,
“월세값은 해야죠.”
유명이 던진 말에 뜨끔해서 입꼬리를 다시 내렸다.
“와…너는 진짜.”
백이신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제 스물여섯이 된 녀석이 아주 자신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 있다.
유명의 팀을 줄라이로 끌어들이면서 기대했던 효과는 두 가지. 극단 줄라이의 위상을 드높이는 것과…극단의 젊은 배우들이 그의 팀에서 자극을 받아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길 바랬던 것.
그는 그것을 읽고, ‘공개모집’을 일부러 제안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굳이 경합에 참가해 준 것도 그런 이유였었나 보다. 단원들의 도발에 넘어간 것은 ‘척’이었을 뿐.
나이에 맞지 않게 넓은 시야, 백이신은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뭐, 저희도 무료 봉사할 생각은 아니구요, 공개모집에서 얻을 게 있어서요.”
“뭔데···?”
“수연이 연습 좀 시키려구요.”
“아…설수연씨. 아직 아마추어같이 보이던데…프로 배우들 상대로 괜찮겠어?”
“하하, 긴장하셔야 할 걸요.”
이신은 잘 이해할 수 없는 유명의 말에 어리둥절해 했다.
그리고 곧, 오디션 공고가 게시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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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트리플 배역 공개모집]
창작극 을 준비중인 팀 트리플에서 배역을 공개모집합니다.
배역: 닥터(조연)
배역설명: 창작극 은 정신병동에 수용된 피터팬, 후크, 웬디의 이야기입니다. 이들을 담당하는 의사 배역으로 캐릭터와 대사는 현재 미정입니다.
오디션 형태: 웬디와 의사의 에뛰드(즉흥연기)
지원자는 의 조연출을 담당하는 백이신 캐스팅디렉터에게 필요 양식을 요청하시기 바랍니다. 많은 지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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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트리플은 유명, 류신, 수연의 프로젝트 팀명이었다.
줄라이가 한 순간에 시끌벅적해졌다.
“그거 봤어? 지원할 거야?”
“당연하지. 지금 다음공연 주조연으로 들어가있는 배우들 말곤 거의 다 지원할걸? 조연 확정된 창훈이도 엄청 아쉬워하던데.”
“좀 존심 상하지 않아? 새파란 애들 공연에 한 자리 얻어 보겠다고 다들 와글와글.”
“야, 새파란 애들이라니. 지금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 나가는 신인배우들인데. 나는 뽑아만 준다면 걔네한테 형님이라고도 부르겠다.”
“하기야…돈 많고 능력 있으면 형이지. 그런데 웬디와 에뛰드라면 그 얼굴만 예쁜 여자애랑 하는 건가? 그건 할 만하겠다.”
“뭘 해도 걔보단 나을테니 최소한 쪽팔리지는 않겠다, 그치?”
여기서도, 저기서도 공개모집 이야기 뿐이었다.
세미는 공고를 보고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내가, 꼭 내가 따내야해.’
그녀는 키가 크고 서구적인 인상을 가졌다.
미인이라고도 할 수 있었지만, 연극 배우로서는 유리한 조건이 아니었다. 수많은 고전극들은 ‘청순가련’한 여주인공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극단의 젊은 여배우들 중 연기력이 좋은 편인데도 번번히 주인공 자리를 뺏기곤 했다.
닥터.
얼마나 설레는 역할인가. 더구나, 그 팀엔 어마어마한 인간들이 있다.
그들과 함께라면 연기도, 명성도 성장하겠지.
‘이름이 설수연…이라고 했나.’
그녀는 그 팀의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 한 명을 생각했다.
경합 때 홈즈의 상대역으로 잠시 무대에 올랐던 ‘남작’. 전혀 인상적인 연기가 아니었다.
연습생인 줄 알았는데, 함께 공연을 준비하는 모양.
‘그런 상대에게 질 수는 없지. 최고의 닥터를 보여주겠어.’
그녀는 누구보다도 먼저 양식을 받아서, 본인의 프로필을 첨부한 지원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정신과 닥터를 상정하며 연습을 시작했다.
지원 마지막 날,
백이신의 책상에는 20여 장의 지원서가 쌓였다.
그 중에서 추린 5명의 인원이 최종심사 대상으로 선정되었고, 오디션 날이 다가왔다.
*
“안녕하세요, 오늘 오디션 진행을 맡은 백이신입니다.”
장소는 줄라이 극장. 형태는 공개 오디션.
경합 때 못지않게 많은 사람들이 이 자리에 참석해 있었다.
반쯤은 호기심, 반쯤은 서류에서 떨어진 자들의 오기.
도대체 어떤 오디션을 진행할 건지, 그 결과는 공정할지, 다들 팔짱을 끼고 띄엄띄엄 좌석들에 앉아 있었다.
“공지한대로, 오디션 방식은 에뛰드(*즉흥 연기)입니다. 후보들은 정신과 의사가 되어 웬디와 상담을 합니다. 병명은 의존성 인격장애와 가면성 우울증입니다. 후보들은 해당 질병에 대한 써머리를 미리 받으셨을 겁니다.”
후보석에 앉아있는 다섯 명의 배우들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