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174
“눈도 제대로 안 보이면서 무슨 공연이냐고 생각하실 수 있지만…제가 눈이 잘 안 보이는 대신 다른 감각들이 꽤 발달한 편입니다, 하하. 피부가 에일듯한 공연장의 분위기가 참 좋아서 웬만한 공연은 다 찾아다녔어요. 그래도 혼자 다닐 수 있을만큼은 보여서 다행이에요.”
자신의 상태를 감추는 열등감도, 일부러 상태를 과장하는 자기연민도 없이, 솔직하게 꺼내는 담담한 이야기.
그 익숙한 말투에 그리움이 훅- 솟구친다.
“정말…공연을 좋아하시나 보네요.”
“그럼요. 특히 오늘은 최고로 좋았습니다!”
밝게 웃음짓는 그를 보며 유명의 표정이 한껏 애틋해졌다.
*
{원생의 팬이었다공?}
‘응..’
{어떻게? 원생의 넌 존재감이 너무 적어서 인지하기도 힘들었을텐뎅?}
‘서른 즈음이었나, 대학로의 소극장 무대에 섰던 날이었어.’
유명은 무대 위의 단상에 걸터앉아 객석을 바라보며, 미호에게 그와의 인연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때 대사가 일곱 줄이었나? 3개 장 정도에만 등장하는 이름없는 단역이었지.’
당시 8년차 배우였던 유명은 큰 슬럼프에 빠져 있었다.
연기는 보여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행위.
아무리 ‘좋아서’ 하는 일이라고 해도 자기 만족만으로 연기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이 길이 맞나, 정말 자신에겐 재능이 눈꼽만큼도 없는 건가, 더 늦기 전에 접고 다른 일을 해야 하는 걸까.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 고민하던 어느 날이었다.
-신유명…배우님?
-…저를 부르신 건가요?”
-네.
포토타임.
공연이 끝나고, 출연 배우들이 무대에 재등장해 관객들과 만나는 포토타임은 유명에겐 하등 의미없는 시간이었다.
자주 찾아오는 골수 팬 몇 명은 주연 배우들에게 케잌이며 꽃다발을 안겼다. 일반 관객들은 조심스럽게 다가와 얼굴을 붉히며 마음에 든 배우들에게 사진 촬영을 부탁했다.
하지만 아무도 찾는 사람이 없는 유명은, 벌써 목장갑을 끼고 무대에 지저분하게 널린 꽃종이를 줍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방해되지 않게 무대 가장자리부터.
그런 그를 부른 것은, 중년의 신사였다.
-싸인 한 장 부탁해도 될까요? 팬입니다.
-제…팬이시라구요?
-의 관수 역, 의 심부름꾼 역, 그리고 이번 에서 전령 역을 맡으셨지요?
그의 말에 유명의 눈빛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흔들렸다.
모두 비중없는 단역. 누군가가 기억할만한 배역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남자는 자신의 역할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정말…정말 팬이란 말인가? 나 따위에게…팬이 있다고?
-싸인이 없는데···
-하하, 그냥 이름을 써주시면 됩니다.
유명이 그가 내민 종이에 서툴게 이름을 적었다.
그 사이에 그가 차분히 꺼낸 어떤 말을 듣고, 유명은 펜을 떨어뜨릴 뻔 했다.
-배우님. 제가 사실 앞이 잘 안보입니다. 아예 안 보이는 건 아니지만요.
-어…얼마나···
-지금 이 정도 거리에서는 얼굴 표정이 보이네요. 객석과 무대 정도의 거리가 되면 윤곽과 색깔만 어른어른하고 형체의 구별은 안 됩니다.
-그럼 공연은···
-괜찮아요. 목소리와 에너지만으로도 대충 구별이 가거든요. 얼마나 열정적인, 혼신의 힘을 쏟는 연기를 하는지는 아주 잘 느껴지구요. 배우님 연기는 아주 아름다워요.
유명은 미호에게 부끄럽게 고백했다. 그 때 자신은 조금 실망했다고.
‘눈이 잘 안 보이는 사람이 어떻게 공연을···?’ 이라는 생각과 함께, 자신의 연기를 제대로 보고 팬이 된 게 아니구나 싶었다고 했다.
{그런데, 뭘 계기로 그 생각이 바뀌었냥?}
‘그건···’
흥미로운 이야기에, 미호가 말을 재촉했고, 유명이 다시 말을 이었다.
*
그 날 이후로 유명은 무의식적으로 그의 모습을 찾게 되었다.
그는 상당히 자주 보였다.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모습을 드러냈는데, 왜 여태까지는 이런 단골 관객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는지가 의아할 정도였다.
낡았지만 깨끗한 정장을 말쑥하게 차려입고 공연을 조용히 관람한 후, 다른 관객들이 우르르 빠져나가고 난 뒤에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선다.
‘왜 같은 공연을 여러 번 보러오실까···?’
그와 별개로 유명의 고민은 계속되고 있었다.
배우의 꿈을 계속 꾸어야 하나, 그만둬야 하나. 결론이 나지 않는 고민은, 어떤 힘든 연습보다도 진을 빼놓았다.
예전만큼 집중하지 못했지만, 단역이 좀 덜 열심히 한다고 공연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배우님, 시간 되시면 제가 술 한 잔 사도 되겠습니까.
-어어…그럴까요?
공연 후에 극장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남자가, 극장을 나오는 유명에게 한 잔 하자는 요청을 했다.
안 그래도 기운이 빠지는 날이었고, 몹시 술이 땡겼던 유명은 쉬이 그를 따라나섰다. 그리고 놀라운 얘기를 듣게 된다.
-제가 눈이 잘 안 보여서 그런지…사람의 기라고 해야 하나, 그런 걸 잘 느낍니다.
-기요?
사이비 종교같은 말.
이 사람이 나에게 뭔가 영업을 하려고 하나…그런 경계심이 올라오던 찰나에, 그가 놀라운 말을 던졌다.
-지난 수요일 공연부터 영 집중을 못하시는 것 같은데요…
소름이 오싹 돋았다.
그 날, 엄마에게 전화가 왔었다. 예술계 쪽 일은 대단한 재능이 없으면 너무 힘든 일이라던데 그냥 취미로만 하면 안 되냐며 눈물을 꾹 참는 목소리로 애원하셨다.
불안정한 마음이 무대 위까지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이 딱 그 날부터였다.
찍어보는 것이라기에는 너무 정확한 날짜.
유명의 놀라움을 알고있는 것처럼 그가 설명했다.
-제가 기감이 좋다고 했잖아요. 눈은 잘 보이지 않아도, 배우들의 기운을 제법 디테일하게 느낍니다. 중사 역할의 배우는 기운이 크고 거칠죠. 적의 수장 역할의 배우는 날카롭고 예리하고요. 그리고 배우님은…기운이 어렴풋해서 매우 집중해야 느낄 수 있지만, 놀랍도록 정교하고 아름다워요. 그래서 제가 배우님의 팬이 된 거지요.
유명이 거기까지 얘기했을 때 미호가 신음을 토했다.
{컁…생기를 육감으로 인지하는 타입이냥···}
‘나도 네 덕에 생기의 존재를 알고 나서야 그런 추측을 했어. 그 때는 그냥 특이한 사람이구나…하고만 생각했지. 하지만, 부끄러웠어. 연기를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는 걸 처음으로 들켰으니까.’
유명이 이야기를 이었다.
-본인도 확신하지 못하시겠지만, 배우님은 연기에 무척 대단한 재능이 있습니다. 그걸 기운이 약해서 발휘를 못하시고 있는 게 참 안타깝지만…배우님.
-네?
-요즘, 힘드시죠?
-……
-예전처럼 연기할 때 즐거움이 느껴지지 않아서 무척 걱정이 돼요. 사실 저는 배우님께 용기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가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았다.
-저라고 왜 남들처럼 세상을 선명하게 보고 싶지 않겠습니까. 특히 제가 좋아하는 공연을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래도, 남들보다 조금밖에 느끼지 못한다고 해도 아예 못느끼는 것보단 훨씬 좋다. 나는 남들 한 번 보는 공연을 열 번 보면 된다. 그런 마음으로 열심히 공연장을 찾습니다.
-그러시군요···
-그리고 배우님을 볼 때마다, 갸냘픈 기운을 가지고도 정말 멋지고 아름다운 연기를 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큰 용기를 얻었어요.
-…..
-힘내세요. 먹고사는 문제도 있을테고 무조건 연기를 계속해달라는 부탁은 아닙니다만…배우님의 연기의 가치를 알고 있는 팬도 있다는 걸 꼭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당시 유명은 그의 말을 온전히 이해하진 못했다. 자신이 스스로의 연기의 가치를 몰랐기 때문이다.
다만 그의 진심은 확실히 느껴졌고, 단 한 명이라도 자신의 팬이 있다는 생각은 지쳐있던 유명에게 큰 힘을 주었다.
유명은 슬럼프를 극복하고 다시 연기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그는 공연마다 유명에게 한 송이의 꽃을 전해주는, 그의 유일한 팬이었다.
{감동적인 이야기넹. 피터팬 공연은 저 사람에게 상당히 와 닿았겠넹. 이 정도로 연기(*연기의 기운)가 강렬하니까 기감이 강한 사람에겐 더욱 선명했을 거당.}
미호가 공연장에 남아있는 잔존기운을 슈크림처럼 베어 물며 말했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
{뭔뎅?}
‘나에게 연기를 온전히 발휘할 기회가 왔듯이, 그 분도 최대한 느껴볼 수 있게 해드리고 싶어. 단 한 번이라도.’
{어떻겡?}
‘그건···’
유명이 미호에게 방법을 설명하자, 미호가 눈을 반짝이며 꼬리를 팽글팽글 돌렸다.
{그거 재밌겠당. 나도 보고싶컁!}
*
다음날 연습이 시작되기 전, 유명은 배우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공연, 특히 연극을 무척 좋아하시는 팬이신데, 눈이 잘 안보이세요. 그런데 저는 우리 공연을 좀 더 제대로 느끼게 해드리고 싶어서요.”
“눈이요? 헐…얼마나요?”
“5미터 이내는 대략 표정이 보이지만, 그 이상 벌어지면 실루엣만 겨우 구분하는 정도?”
“안경쓰면 안 돼요?”
“교정한 시력이 그렇대. 유전성 초고도근시에 심한 난시인데 병원에서도 두 손 든 특이 케이스라나봐.”
사정을 듣자마자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마음아파한 것은 수연.
“헉…그럼 객석에서 무대는 거의 안 보이는 거 아니야?”
“그렇죠. 감각이 예민하신 분이라 배우들의 에너지를 느끼기는 하지만, 주로 목소리나 실루엣 위주로 감상하시는 것 같아요.”
“갑갑하실텐데…정말 공연을 좋아하시나 보네. 맨 앞자리 좌석이라도 한 번 빼드릴 방법이 없나?”
실질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세미.
“맨 앞자리라고 해도 무대 전면으로 나와있을 때가 아니면 표정 구분은 어렵겠군요. 그런데, 어떻게 아는 사이에요?”
“제가 마음의 빚이 있는 분이에요. 자세한 사정은 설명하기가 조금···”
“흠…유명씨가 그렇게 신경을 쓸 정도라… 그럼 좀 더 적극적인 대안이 필요할 것 같은데···”
유명의 마음을 읽고 냉철하게 상황을 파악하는 것은 류신.
유명은 자신의 이야기에 함께 진지하게 고민해주는 동료들을 고맙게 바라보며, 준비해 온 방법을 꺼냈다.
“정말 미안한 부탁인데, 이분을 위해 공연을 한 번 추가할 수 있을까요?”
“한 사람을 위한 공연요?”
“네. 관객을 무대 가운데에 앉히고, 그 분도 보실 수 있을만큼 가까운 무대를 선물해드리고 싶어요. 한 번만이라도 ‘눈으로 볼 수 있는 공연’이 될 수 있게요.”
유명의 파격적인 제안에 모두의 말문이 턱 막혔다.
130 VIP: Very Important Person
‘그’ 공연일은 4일 후의 월요일로 정해졌다.
원래 매주 월요일은 휴연일.
단 한 명의 관객을 위해, 배우들은 기꺼이 휴일을 반납했다. 그 관객이 유명에게 어떤 의미인지 설명도 요구하지 않고, 기꺼이 그의 뜻에 따라주었다.
그것은 유명에게 큰 감동이었다.
‘내 사람들.’
유명은 찡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새로 얻은 생에 ‘연기’만큼이나 크게 얻은 것은 ‘가족’과 신뢰할 수 있는 ‘동료’라는 것을 절감하면서.
“…단 한 분을 위해 그렇게까지 하겠다니.”
추가 공연의 결정과 내막을 알리자, 백이신과 줄라이 관계자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않으며 모든 지원을 약속했다. 그들의 결정에 감동한 듯 했다.
그리고 그 지원에 힘입어, 일이 조금 조금 커졌다.
“무대 배치부터 다시 구상해보죠.”
원래도 단순히 객석을 앞으로 당겨올 생각은 아니었다.
팬을 중심에 두고 둘러싸듯이 배우들을 배치할 생각이었다. 배우들의 에너지들이 교집합되는 중간점이라면, 무대의 기운을 피부에 와닿을 정도로 생생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배우들의 동선을 조정할 생각을 했을 뿐, 무대 배치나 조명을 바꿀 엄두는 내지 못했었다. 전날도 다음날도 정식 공연이 있으니까.
하지만 줄라이의 단장은 유명의 계획을 듣고, 무대와 조명도 함께 조정하자고 했다.
“어차피 무대 구조도 간단한데요 뭘. 가운데에 회전 의자를 하나 설치하고, 세 캐릭터의 단상을 삼각형으로 배치하면 되겠네. 조명들의 위치를 조정했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리는 게 조금 번거롭긴 하겠지만, 그 정도는 우리가 충분히 도울 수 있어요.”
“…감사합니다, 단장님.”
“내가 고맙지 뭘. 안그래도 갚을 빚이 많은데, 심지어 이렇게 좋은 의도로 하는 일을 어떻게 안 도울 수가 있겠어요. 근데 아크릴 케이스가 좀 문제네. 삼각형으로 배치하면 무대 바에 걸어서 조정하기가 어려울 텐데.”
“그건 건드리지 말아야죠. 걱정 마세요.”
그렇게 3일이 정신없이 흘러갔다.
유명과 류신은 틈만 나면 붙어서 동선을 새로 짰다.
정식공연처럼 딱딱 들어맞게 짜는 동선은 아니었다. 관객을 사이에 두고 움직인다는 특별한 상황이기에, 공연 중 여러가지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할 수 있었다. 그걸 방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동선.
“A병동은 vip 좌측에, B 병동은 우측에 두고, A동에서 B병동으로 넘어갈 때는 vip를 거의 스치듯이 지나가는 걸로 하죠.”
“네버랜드 겸 CR(*격리실)은 무대 북쪽에, 상담실은 무대 남쪽에 두는 것이 좋겠어요. 어른의 영역과 아이의 영역을 대비시키는 의미로요. 그럼 CR에서 상담실로 이동할 때 vip를 지나게 될 테고, 좀 더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있을테죠.”
VIP.
월요일의 무대에 초대받은 단 한 명의 관객을 그들은 그렇게 불렀다.
그 vip를 부러워하는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다.
“세상에서 가장 호사스런 무대가 되겠군요···”
“하하, 그 정도까진···”
“정말입니다. 그 공연을 그렇게 볼 수 있다면 몇 억 정도는 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유석의 진심이 가득한 어조에 유명이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농담입니다. 그런데…그 공연을 객석에서라도 구경하는 건 안 되겠죠···?”
그렇게, 한 사람만을 위한 무대가 준비되어 갔다.
*
일요일 저녁, 8회차 공연이 끝난 직후부터 줄라이 극장은 부산해졌다.
쿵- 쿵-
스텝들이며 배우들이 한 마음으로 무대를 뜯어내고 옮긴다. 천장 위에서 나는 커다란 소리에 움찔 놀라서 올려다보면 조명스텝이 실링(*조명기를 설치하는 천정)을 기어다니고 있다.
그렇게 하룻밤만에 무대가 새롭게 조율되었다.
그리고 월요일 오후 7시, vip가 도착했다.
“저…오늘은 휴연일 아닌가요? 초대받고 감사한 마음으로 오긴 했는데,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게 아닌지···”
“저, 선생님. 사실 저희가 오늘 선생님을 위한 공연을 준비했는데요.”
“…네?”
오늘 초대받은 vip, 전병우는 유명이 조심스레 꺼내는 얘기에 귀를 의심했다.
지난주에 본 공연은 정말 좋았다.
잘 보이지 않음에도 배우들의 숨소리까지 느껴질 듯 짜릿짜릿한 공기가 놀랍도록 생생한 공연이었다. 그 여운을 간직하고 일어날 때쯤, 갑자기 주연 배우가 뛰쳐나와 자신에게 말을 걸어온 것도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그 배우는 오늘 자신을 초대했다.
‘나를 위해 공연을 준비했다고? 왜···?’
“대학로에서 연기하는 친구에게 선생님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공연을 정말 좋아하시는 분이라고. 같은 공연도 반복해서 자주 보신다구요.”
“…네, 그렇긴 합니다. 피터팬도 표를 더 구하고 싶었는데 한 장이 한계였죠. 그런데 그 친구분이 누군가요?”
“…저와 무척 가까운 친구입니다. 선생님은 자신을 모르실 거라고 했습니다. 선생님같이 연극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분이 계셔서 많은 용기를 얻었다고, 저한테 조금이라도 은혜를 갚아달라더군요.”
그는 어리둥절해하며 유명의 뒤를 따랐고, 그가 무대 위로 올라가자 당황했다.
“어…여기는 무대 위···”
“오늘 선생님의 객석은 무대 위에 준비되어 있습니다.”
“아니 어떻게···”
“이 자리에 앉으셔서 보시면 됩니다. 배우들이 여러 방향에서 등장할 예정이니 보고 싶은 방향으로 의자를 돌려가며 보시면 됩니다.”
“어어···”
“좋은 무대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즐거운 시간 되시길.”
그가 허리를 깊이 숙이고 사라졌다.
전병우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자리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마치 꿈이라도 꾸는 기분이다.
[곧 공연이 시작되겠습니다. 관객 여러분께서는 착석하여 주시기 바랍니다.]익숙한 안내멘트가 들리더니, 불이 꺼졌다.
공연이 시작되었다.
조금씩 bgm이 커지면서, 무대가 서서히 밝아진다.
‘우와···’
전병우는 두근대는 마음으로 불이 켜진 무대를 눈에 담았다.
객석에선 흐릿하던 무대 대도구들이 훨씬 선명하게 보인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 개의 단상이 무척 가깝다.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조명의 온도가 뜨겁다.
설렌다.
휘릭~
왼쪽 포켓에서 실루엣이 하나 등장했다.
처음에는 뿌옇던 실루엣은, 펄쩍펄쩍 재주를 넘어 자신의 코 앞까지 다가오자 뚜렷해진다.
그가 자신의 앞으로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안녕- 나는 피터팬. 아름답고 멋진 생각을 하면서 날아야 떨어지지 않아!”
보인다.
장난스럽고 천진난만한 피터팬의 얼굴이 선명하게.
처음에는 놀랐고, 곧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렇게 공연을 좋아하고 많이 보아왔지만, 배우의 얼굴이 눈에 박히는 것은 처음이다.
그는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있다.
보이지 않을 걸 알면서도 좋은 대사를 들을 때마다, 마음에 드는 배우가 나올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뜨고 집중한다. 조금 더, 조금이라도 더 선명하게 보고 싶어서.
그럼에도 단 한 번도 배우의 얼굴이 시원하게 보인 적은 없었는데…
휙- 휙-
자신의 바로 옆에서 화려한 덤블링을 하며 객석 방향의 단상 위에 착지한 피터팬이 소리높여 웬디를 부른다.
“웬디- 이 쪽이라구- 이 쪽–”
그리고 등장하는 웬디 또한, 그의 주위를 비틀비틀 한 바퀴 돈다.
‘무척 아름다운 배우구나.’
그가 처음으로 느껴보는 류의 감상.
그는 빠져들 듯한 눈망울을 가진 새하얀 소녀를 보며 전율했다.
이번에는 반대편에서 후크가 등장한다.
자신을 사이에 두고 피터팬과 후크가 대치한다. 그가 갈고리 손을 위협적으로 휘두르며 피터팬에게 으름장을 놓자, 그의 매력적인 탁성이 자신의 가슴을 관통하여 피터팬에게 전달된다. 짜릿하다.
이제 세 명의 배우가 자신을 둘러싸고 있다.
의자를 어느 쪽으로 돌려보아도, 역에 완전히 몰입한 진짜 배우의 얼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