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223
다시 빗소리가 거세진다.
소피아는 손목의 버튼을 삑- 하고 눌렀다. 그러자 보라빛의 폭이 좁은 조명이 그녀의 머리 위에 덧입혀졌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우산을 펼치는 남성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우산? 이제 거의 사라지지 않았어? 비바람엔 커버 실드를 켜면 되잖아?
-그러니까 말야. 아주 오랜만에 보는 커다란 우산이었어. 그런데 그 남자가…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말을 걸지 뭐야.
그 음향이 인도하기라도 하듯이, 남자는 소피아에게 다가왔다.
햇살을 닮은 색깔의 머리카락이 살짝 젖어 곱슬거리는 남자는 아주 부드럽고 다정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모르는 남자가 자상하게 기울이는 눈빛에, 조금 덜컹한 표정을 짓는다.
[안녕하세요, 아가씨. 제 이름은 밀턴이라고 합니다.]그 말에 소피아도, 보고 있던 관객도 웃음을 터트릴 뻔 한다.
‘아가씨’라니.
2020년이 아니라, 2007년 현재라 해도, 평소에 쓰기엔 너무 고전적인 단어.
이상한 남자를 빤히 보는 소피아의 시선에 몰입하듯, 관객도 그를 차근차근 훑어본다.
그는 톡톡한 소재의, 고풍스러운 느낌의 정장을 입고 있다.
낡아 보이지만 깨끗하게 손질된 헤이즐넛색의 정장은 조금 의아할 정도로 올드해 보이지만, 그의 밀빛 머리와 온화한 얼굴에는 잘 어울린다.
단추가 끝까지 채워져 있고, 넥타이핀과 커프스핀까지 세트로 단정하게 자리잡은 그의 옷차림은, 어느 유행이 지난 신사복 잡지의 한페이지를 그대로 가져다 놓은 듯이 클래식하다.
[…그런데요?]그녀는 의아함을 달아 말꼬리를 올린다.
이 남자는 왜 자신에게 말을 건 걸까.
[실례지만…머리가 젖으신 것 같아서요.]남자는 조금 난감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 무언가를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깨끗하게 다려 끝을 맞춰 고이 접은 손수건이었다.
다시, 음향이 들려온다.
-손수건? 요즘도 그런 걸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있어?
-그러게 말야. 그런데 그 사람은…그런 단정함이 습관처럼 잘 어울렸어.
그녀는 그 손수건을 받아 들어, 젖은 머리를 톡톡 닦아낸 후 그에게 돌려주었다.
그걸 받아든 남자가 그녀에게 정중히 제안한다.
[우산…같이 쓰실래요?]그녀는 자신의 머리 위로 빛을 드리우고 있는 ‘커버 실드’를 한 번 올려다본다.
우산이라··· 무척 비효율적인 제안이기는 하지만···
[…고마워요.]그녀는 남자의 우산 속으로 들어간다.
손목을 다시 한 번 톡 건드리자 보라빛 조명이 꺼진다.
남자의 우산은 크다. 아주 커서…비가 많이 오는데도 한쪽 어깨가 젖지 않는다.
아니, 우산이 그녀의 쪽으로 훨씬 많이 기울어져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제 이름은…소피아에요.]그녀가 그를 마주보고 웃었다. 그들의 첫 만남이었다.
*
암전.
막간의 어둠 속에서, 다시 통화 소리가 들려왔다.
호들갑스러운 목소리가 미카, 조금 예리한 듯 맑은 목소리가 소피아다.
-소피아! 오랜만이야~
-미카, 그 나이스 가이는 어떻게 됐어?
-나이스는 개뿔…으, 최악이었어. 너는? 그 때 그 이상한 남자, 알파챗 아이디는 따 갔어?
-아니…그 사람 그런 걸 모르는 것 같아···
-뭐? 말도 안돼. 요즘 알파챗 안하는 사람이 어딨어? 그럼 어떻게 연락해? 설마…연락도 옛날사람처럼 문자로 하는 거야?
-아니…그게···
흐려지는 소피아의 말과 함께 조명이 켜졌다.
소피아는 시계를 본다.
1시 58분.
남자와의 약속은 이런 식이었다. 날씨가 파랗게 맑아진 날 오후 2시에 시계탑 앞에서, 다음번 비가 오는 날 오후 4시에 정류장에서.
남자는 알파챗 아이디를 묻는 소피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고, 그녀는 더는 물어보지 않았다. 왠지 물어서는 안될 것 같았던 것이다.
[소피아~~!]깔끔한 폴로 셔츠에 니트를 덧 입은 밀턴이 무대의 끝에서 등장한다.
밀턴은 소피아를 보고 세상이 밝아진 듯 환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마구 흔든다.
그 모습에, 소피아의 날카로운 인상도, 날이 뭉그러진 듯이 조금 따스해진다.
[소피아, 잘 있었어요? 보고 싶었어요.] […네.]그의 가감없이 솔직한 표현에, 그녀는 조금 붉어진 얼굴로, 겨우 태연한 척 말을 돌린다.
[그…그런 옷은 어디에서 사요?] [어…왜요, 이상해요?] [이상하긴 한데…당신에겐 잘 어울려요.]그녀의 대답에, 남자는 아주 기쁜듯한 눈웃음을 짓는다.
두근- 그 웃음을 본 모든 여성 관객과 여성 시청자들의 가슴이 크게 뛰었다.
그것은, 무언가가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를 때 나오는 미소.
다들 그 표정을 보고, 모든 과거의 연인 중 자신을 가장 뜨겁게 사랑해주었던, 그래서 아주 오-래 기억에 남았던 사람의 눈빛을 떠올린다.
[오늘은 도시락을 싸 왔어요.]남자는 3단 찬합을 손에 들고 달랑달랑 흔들어 보인다.
이 남자에게 꽤 익숙해진 소피아였지만, 이번에는 소녀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시락…이라니···!
[직접…싼 거예요?] [네. 날씨가 좋은데 같이 소풍가고 싶어서요.]‘요술상자같은 남자야.’
그가 부드럽게 웃으며, 에스코트하듯 한쪽 팔을 내밀자, 소피아는 자연스럽게 그 팔짱을 낀다.
무대를 반 바퀴 돌아, 남자는 돗자리를 펼치고 3단 찬합을 펼쳐 놓는다.
알록달록 예쁜 도시락. 하지만, 계란말이 하나를 집어넣은 소피아의 인상이 우그러진다.
[짜요···] [어…짜요?] [으앗. 방금 계란 껍질 씹었어요!] [앗, 어떡해. 여기…여기다 뱉어요.]허둥지둥대는 남자,
껍질을 뱉어낸 후 뭐가 웃긴지 빵- 하고 웃음보가 터진 여자.
그들은 한참이나 같이 웃었고, 그녀의 표정은 조금 더 날이 무뎌졌다.
그러면서 관객들은 이상한 느낌을 받는다.
현대적이고 도회적인 여자와 고풍스럽고 온화한 남자. 처음에 그들은 분명 양극단의 인종인 것처럼 분위기가 무척 달랐다.
하지만 그들이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날선 무장을 해제하고 우러나오는 여자의 본 표정은, 남자와 아주 닮아 있었다.
오래된 연인, 혹은 가족이 그렇듯이.
[다음 주 생일이죠?] [?? 어떻게 알았어요?!] [다 아는 수가 있죠. 생일…나랑 보내줄 수 있어요? 꼭…나랑 보내줬으면 좋겠는데···]왠지 간절한 남자의 말투에, 소피아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요~] [그 날, 꼭 할 말이 있어요.]밀턴의 말에, 소피아는 그가 그 날 고백할 것을 예감했다.
그런데, 그녀의 표정이 조금 떨떠름하게 변한다.
이상하다.
분명 그를 좋아하는데, 만날 날을 언제나 손꼽아 기다리는데,
왜 그가 고백할 것이…설레지 않는 걸까···?
*
-너무 특이한 남자라서 재미있어서 좋아한다고 착각한 거 아냐? 정말 좋아한다면, 어떻게 고백 예고에 설레지 않을 수가 있어?
-다음 번이 벌써 열 번째 만남인걸?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어떻게 열 번이나 만났겠어···
-심심하면 그럴 수도 있지. 하여간, 나라면 안 설레는 사람과는 못 만나.
-……
쏴아아아–
비가 왔다.
밀턴은 이번에도 그 커다란 우산을 쓰고 나타났다.
소피아는 조금 복잡한 얼굴을 한 채로, 그의 우산을 함께 썼다.
[소피아, 생일 축하해요! 얼굴이 안 좋은데 어디 아파요?] [아니에요···] [소피아는 웃는 게 예뻐요. 예쁜 것만 보고, 행복한 생각만 하면 좋겠는데.] [하하···]그 날도 그는 언제나와 같이 다정다감했다.
멋진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딱 한 입 크기로 가지런히 잘라서 그녀의 앞에 놓아 주었다.
그녀는 그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했다. 정말 자상한 남자라고.
이렇게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에게 가는 것이…맞지 않을까?
[소피아. 오늘이 서른 살 생일이죠?] […네? 네, 맞아요.] [이렇게 예쁘게 태어나고, 잘 커줘서…정말 고마워요.]고전적인 남자는, 그렇게 고전적인 서두를 꺼냈다.
이렇게 예쁜 너를 낳아준 네 부모님께 감사해- 로 시작하는 고백멘트라니, 정말…끝까지 클래식하다.
이어지는 그의 고백.
[소피아…나의 소피아. 사랑해요.]넘쳐 흐를 정도로 진심이 가득한 그의 말에, 그녀는 두 눈을 질끈 감는다.
아니다. 이 정도로 솔직하게 내 보이는 진심을 어중간한 마음으로 받아서는 안 된다.
거절해야…한다.
그런데 왜, 그의 고백은 가슴을 뛰게 하지는 않는데도…가슴을 이토록 따뜻하게 적시는가.
[밀턴. 당신의 마음은 고마운데…전…으음…미안해요. 당신과 사귈 수는 없을 것 같아요.] [……] [한참 만나놓고 이렇게 얘기하니까 어이없으시죠? 정말…미안해요. 당신을 정말 좋아하는데, 왠지 사귈 마음은···]미안한 마음에 횡설수설하며 그녀는 상대의 눈치를 본다.
그 때, 건너편의 남자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방금 거절당한 남자가 내기에는 너무 맑고 즐거운 웃음 소리.
[밀턴···?] [하하, 미안. 너무 귀여워서요. 그럼요. 소피아는 나보다 훨씬 좋은 남자를 만나야죠.] […?]당황해서 얼음이 된 그녀의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며, 밀턴은 다정하게 눈을 맞춘다.
[물론, 소피아가 다른 남자를 사랑하더라도, 저는 소피아만 사랑할 거지만요.]그녀의 마음이 무척 혼란스러워진다.
화를 안 내는 것은 다행이지만, 저 말은…설마 자신의 스토커가 되겠다는 의미인가?
아니 우리는 연락처도 모르는데, 이렇게 거절해 버렸으니 앞으로 그를 다시 볼 수는 있나?
못 보면? 못 보면…왠지 무척 서운할 것 같은데···
어떻게 먹었는지 모를 식사를 마치고, 두 사람은 다시 우산을 쓰고 걷는다.
헤어지기 직전, 그는 그녀에게 한 통의 편지를 내민다.
[뭐…예요?] [생일 선물. 손편지예요. 집에 가서 읽어 주겠어요?] […네.]그리고 청한다.
[소피아. 마지막으로 한 번만 안아볼 수 있을까요?]이상하다. 그의 눈빛은 한 점 사심없이 깨끗해 보인다.
그녀가 망설이다가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
그가 팔을 넓게 벌려 그녀를 꼬옥 안았다. 우산과 남자의 등에 가려, 그녀는 파묻힌 것처럼 작아 보인다. 마치 아이처럼.
안은 팔을 힘겹게 거둔 후, 그녀를 마지막으로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에, 관객들의 숨이 멈추었다.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절절한 애틋함, 알 수 없는 벅참, 커다란 사랑.
그는 우산을 그녀의 손에 꼬옥 쥐어준 후, 마지막으로 녹아 없어질듯이 다정하게 웃어 준다.
그리고 빗 속으로 뛰어간다.
[저기···!]그녀는 자신의 손에 남은 우산과 한 장의 편지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깨닫는다.
그는, 가버렸다.
195 방문판매원
무대가 다시 어두워졌다 밝아진다.
그녀의 집이다.
한 쪽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소피아는, 지친 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한 마디 독백을 내뱉는다.
[내가…잘못한 걸까? 다시 그를 못 본다고 생각하니 왜…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지···]그녀는 밀턴이 남긴 편지를 펼친다.
바스락-
‘milton’이라고 적혀 있던 겉봉이 찢겨져 나가고, 속에 있는 것은 낡고 꼬질꼬질한 종이다.
그녀는 갸우뚱하며 그 종이를 펼쳤고,
헉-
눈이 편지지에 붙박힌 채로 얼어붙었다.
관객들은, 그녀의 하얗게 질린 표정에, 무슨 일인지 불안해 하며 무대만을 쳐다본다.
사이클로라마(*무대의 흰색 배경막)에 빔이 쏘아지며, 편지의 글씨가 드러난다.
철자가 군데군데 틀린 어린아이의 글씨.
[아빠, 소피아는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소피아가 서른 살이 되었을 때, 소피아랑 결혼해 주세요~
인형보다 예쁜 옷보다 아빠가 좋아요. 아빠랑 평생 사는 게 소원이에요!]
그건 다섯 살, 그녀가 처음으로 아빠에게 썼던 편지.
유달리 글을 익히는 것이 빨랐던 딸의 첫 편지를 보고, 아빠는 정말 행복하게 웃었다.
어린 그녀의 눈에, 아빠가 녹아 없어질까봐 불안할 정도로 다정하게.
-소피아. 아빠는…하늘 나라로 가셨단다.
그리고 아빠는 얼마 후, 진짜로 사라졌다.
정말 녹아서 사라진 것일지도 모른다.
[아…빠···?]왜 깨닫지 못했을까.
흐릿한 기억 속, 어린아이의 눈에는 너무 커다랗고 높이 있었던 아빠의 얼굴과, 밀턴의 얼굴이 너무나 닮아 있었다는 걸.
그녀의 커다란 눈에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투명한 액체가 고여 간다.
그리고 주르르 흐른다.
넋을 잃은 그녀의 둘레로, 음향이 하나씩 내려와 쌓인다.
-나의 소피아, 내 예쁜 아기.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
-아빠가 평생 우리 딸의 우산이 되어서, 나쁜 것들로부터 지켜줄 거야.
-예쁜 것만 보고, 행복한 생각만 하며 자라길···
-아빠랑 결혼할 거라고? 하하, 아빠보다 훨씬 좋은 남자를 만나야지.
-다른 놈이 좋다고 가버린다고 해도, 아빠는 소피아만 평생 사랑할거야.
-아아, 귀여워…너무 귀여워서 심장에 나빠.
-날이 좋을 때 아빠랑 도시락 싸서 소풍가자~!
-소피아, 아빠랑 한 번 안아볼까?
잊고 있었던, 다정한 목소리.
한 때는 그녀의 모든 것이었던 존재를 어떻게 잊고 있었을까.
주룩주룩, 소피아의 눈물샘이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펑펑 흘러내렸다.
다정한 밀턴의 목소리가 딸에 대한 사랑을 얘기할수록, 장내의 모든 관중들의 눈에서도 눈물이 맺혀 흘렀다.
지금의 시대와 무척 어울리지 않는 아날로그한 남자, 편리하지 않지만 따뜻하기 그지없는 시간들을 그녀에게 선물해 준 사람은,
25년 전 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온 그녀의 아빠였다.
그녀는 비틀비틀 현관으로 다가가, 젖은 우산을 끌어 안았다.
딸의 우산이 되어 주고 싶었던 아빠가 남겨두고 간, 우산 한 자루.
[저는 웃는 게 예쁘…군요.]그녀는 아직도 눈물이 흐르는 채로, 입꼬리를 위로 끌어올렸다.
그것은 처음 그녀의 차가워 보이는 미소가 아닌, 밀턴을 무척 닮은 다정한 미소였다.
서서히 밝기가 줄어드는 조명이 그녀의 오묘한 표정을 잔상처럼 남기고, 스륵 꺼졌다.
그리고 불이 다시 켜졌을 때,
관객들은 젖은 눈으로 벌떡 일어나 한참동안 기립박수를 보냈다.
*
유명이 포켓으로 걸어들어왔을 때, 그 곳에는 데렉이 있었다.
바로 다음인 마르타와의 공연에 스탠바이 상태인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