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224
살짝 고개를 숙이고 지나가는 유명에게, 데렉은 냉담하게 물었다.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지?] […네?] [더 빛날 수 있었는데, 나탈리한테 힘을 실어줬잖아요. 내 눈은 못 속이니까 아니라곤 하지 말고.] [아닙니다.]부인하지 말라는 말을 바로 부인해 버리자, 데렉이 잡아먹을 듯 유명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유명은 끄떡하지 않고 그 시선을 받아낸 후, 분장실 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바깥에서는 중간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어이쿠, 객석마다 휴지를 비치했어야 했나. 다들 우는 얼굴 클로즈업 되는 거 조심하세요. 평생의 흑역사가 됩니다. 아아, 그런데…감동적이네요. 저도 딸 키우는 입장에서 조금 울 뻔 했습니다. 아빠 말고 딴 놈이랑 결혼한다고?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안 된다!]하하하하-
제리는 금세 분위기를 되돌렸다.
[아이고, 저 아저씨도 눈물이 그렁그렁하네. 조지, 어땠어요?] [또 화가 나네요…왜 저는 여기 나와서, 카일러가 먹을 만찬을 세팅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걸까요.] [하하하. 푸념은 그만하고, 심사위원답게 평가해 줘요~] [지금 현재 시점보다 미래의 사람과, 과거의 사람이 대비되는 것이 좋았어요. 보통의 경우, 아빠와 딸의 세대 차이는 서로에 대한 몰이해를 조장하지만, 이 극에서는 ‘아날로그’ 감성을 매력적으로 그려서, 올드함이 아닌 특별함으로 다가왔기에 아름답게 느껴졌구요. 중반까지 이성에 대한 사랑인지, 가족에 대한 사랑인지를 애매하게 줄타기해낸 유명의 연기력은 언제나처럼 좋았지만, 저는 날카로움이 서서히 무뎌지면서 화사해지던 나탈리의 표현력이 인상에 남네요.]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딱딱한 표정, 낯선 이에게 망설이는 표정, 뭉그러지는 표정, 애태우던 표정, 그리고…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고 아이처럼 울던 표정까지,
나탈리는 이번 무대에서 유난히 생동감넘치고 아름다웠다.
[아, 저도 나탈리의 연기가 참 좋았어요. 역시 탑 배우라는 느낌이었죠. 물론 유명도 무척 좋았구요. 카일러는 어땠어요?] […그렇게 보이죠?]카일러는 애매하게 말을 맺은 후, 다른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아아, 이 대본을 쓴 사람이 한국인 작가라구요?]공연이 시작되기 전, 제리는 이번 생방에 에바와 육미영이 팀으로 작품을 썼음을 고지했었다. 그 중에서도 ‘아날로그 러브’는 육미영이 메인을 잡은 대본, 거기에 카일러가 관심을 드러냈다.
[네. 신유명씨가 스타로 급부상하면서, 그가 한국에서 출연했던 전작들이 꽤나 화제가 되었지 않습니까. 그 중 K.드라마 한 편은 TW에서 수입하기로 결정했다고 하더라구요. 바로 그 드라마를 쓴 작가가 이 대본을 썼다고 합니다.] [어떤 분인지 궁금하군요. 배우였으면 좋았을 텐데.]사람을 보고 영감을 받는다는 카일러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그녀의 색깔에 꽤나 강한 인상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중간평이 끝나고, 다음은 데렉과 마르타의 무대였다.
*
이번도 육미영의 작품.
그녀는 데렉과 마르타를 원래 알기라도 하는 듯, 오만하기 짝이 없는 부자 남자와, 그 오만을 알아듣지도 못하고, 뇌맑은 화법으로 받아쳐 그를 열받게 하는 서민 여자의 코믹 러브스토리를 그렸다.
한국에선 아주 흔한 클리셰.
하지만 여기는 미국이었고, 하필 데렉과 마르타였다.
물론 육작가는 캐스팅보트의 애청자였고, 어느 정도 데렉과 마르타의 캐릭터를 파악하고 썼겠지만, 특히 그들의 실체를 아는 유명의 입장에서는 감탄이 나올 정도로 캐릭터를 정확히 집어낸 대본이었다.
‘역시 데렉 맥커디!’
유명이 감탄한 부분은, 그의 미묘한 연기였다.
평소의 자신과 비슷한 배역이라 연습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연기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소소한 습관 하나하나까지 새로 만들어, 캐릭터를 재창조했다.
과연 연기 강박을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 자부할만한 배우였다.
[오늘 정말 대~단하군요. 제가 이런저런 행사며 프로그램을 천 번도 넘게 진행해 왔는데, 지금 이 현장은 공기의 밀도가 아예 다릅니다. 찌릿찌릿 숨이 막힐 것 같아요!]와아아아–!
[올라오기 전에 들은 바로는, 지금 문자집계도 2차 때의 두 배 이상의 속도로 들어오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인터넷에는, 지금 온 미국이 캐스팅보트를 보고 있는 것처럼, 모든 사람들이 이 얘기만을 떠들고 있습니다-!]우와아아아아-!
[자, 대망의 마지막 무대. 모든 사람들이 학수고대하던 바로 그 무대입니다. 에바 도브란스키 작, 데렉 맥커디와 유명 신이 연기합니다. 모두 박수로 캐스팅보트의 마지막 라이브 무대를 환영해 주세요~~]짝짝짝짝짝짝-
제리가 진행을 하는 사이에도, 옆쪽 스테이지엔 이전의 무대들이 치워지고, 이동형 가벽들이 세워지며, 부지런히 변신을 마쳤다.
그리고 기대에 가득찬, 그야말로 최고의 행복을 누리고 있는 관객들의 얼굴을 카메라가 하나하나 잡는동안, 무대는 점점 어두워져 갔다.
유명은 숨을 가다듬었다.
서로의 에너지를 품어 키우며, 객석까지 쭈욱 밀고나가는 와 다르게,
은 자신의 에너지로 상대를 몰아붙이기 위해 물고 뜯는, 격렬한 전투같은 극이었다.
그리고, 상대는 저 데렉 맥커디.
‘정신차리지 않으면 잡아 먹힌다.’
유명은 아직까지도 사람들이 아득하게 박수를 치고 있는, 저 캄캄한 무대 위로 걸음을 옮겼다.
4개월간의 대장정의 끝을 맺는, 마지막 무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
조명이 내린 무대.
이동 가벽들이 이룬 세트는 가정집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현관문과 이어진 거실. 거실의 뒤쪽 벽에 붙은 가스렌지와 냉장고를 보니 거실부엌이 일체형인 모양. 현관문의 반대쪽에는 침실이 붙어 있고, 침실의 안쪽에 화장실이 붙어 있는, 1.5룸 형태의 집이다.
현관문을 사이에 두고, 두 배우가 대치해 있다.
문 안쪽에 위치한 것은 데렉이다. 그는 파란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는데, 한쪽 무릎을 찍 걷어올리고, 트레이닝복 상의의 지퍼는 목 끝까지 잠근 채이다.
그리고 빗지 않은 듯 까치집이 진 머리. 누가 봐도 날백수이다.
그 모습조차 멋진, 와꾸좋은 날백수인 것이 함정이지만.
문 바깥에는 맞지않는 헐렁한 정장을 입은 유명이 있다.
한 손에는 커다란 가방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핸드폰을 든 그는, 안절부절 초조해하며 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다. 이 극의 제목이 인 것과 상황을 조합해보면, 그는 아마도 방문판매원인 모양이다.
아마도 초짜. 몹시도 절실한. 그는 긴장했는지 흐르는 땀을 소매로 자꾸 훔쳐낸다.
딩동-
그리고 문이 열렸을 때, 상황은 뒤집힌다.
문을 열고 나온 백수와, 그를 3초만에 스캔한 영업사원.
순간 그의 얼굴에 ‘아, 돈이 있을 놈이 아니네’라는 실망이 빠르게 지나간다.
[아…제가 벨을 잘못 누른 것 같-] [어우, 츄리닝 샘플이 영 별로네. 디자이너에게 다시 뽑아보라고 해야 겠네. 쉬는 날인데 사람 쉬지도 못하게 진짜···]허세다.
그걸 알면서도, 후줄근한 차림의 판매원은 그의 허세에 솔깃한다.
그러고 보니 그가 문을 열어주러 나오면서 신은 구두…가 매우 반짝반짝하다.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사장님같은 ‘고급’지신 분에게 정말 잘 어울리는 상품 하나 제가 가지고 왔습니다. 혹시 금쪽같은 시간을 조금만 할애해 주신다면, 제가 후회없는 선택하시도록 최-선을 다해 서포트 하겠습니다!] [흠…그래? 들어와 봐요~]판매원은 굽신굽신 허리를 숙이며 집 안으로 발을 들였다.
백수는 배를 벅벅 긁으며 의자에 앉은 후, 판매원에게 턱짓으로 가리킨다.
[거기 앉아요.] [감사합니다, 사장님! 저는 T 코퍼레이션의 사원 마크 로웬이라고 합니다.] [길리안입니다. 그래, 뭘 팔고 있는 거요?] [저희 회사가 신제품 개발을 하다가 자금줄이 막혀서요~ 그렇지 않으면 절~대 이 가격으로 만나실 수 없는 제품인데-] [아, 나 바쁜 사람입니다. 됐고 본론!] [넵. 프리미엄 칫솔을 판매하고 있습니다!]마크가 부르짖는 말에, 관객들의 웃음이 풉-하고 터진다.
뻔한 허세에 속아서 열심히 영업을 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안타까우려고 하다가, 그도 만만치 않게 풍을 치는 인물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니, 이 두 인물의 대치가 우습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칫솔? 얼만데요?] [여기 이 은나노코팅이 되어 있는 명품 세트는 5개에 10달러, 인체공학적인 설계로 마구 흔들지 않아도 사이까지 닦아주는 제노타입 알파는 7개에 10달러입니다.]큭큭큭-
허무맹랑한 이름들과 그에 못미치는 저렴한 가격들에 관객들이 다시 웃음을 터뜨렸고,
[내 격에 좀 부족한데… 더 좋은 건 없나?]그랬더니 마크는 눈을 반짝반짝 거리며 손바닥만한 박스를 꺼낸다.
[전동 칫솔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저희 회사가 개발한 이 3500달러짜리 초정밀 스크류 칫솔은-] [아니, 그건 너무 과하고.]길리안이 대번에 말을 끊자, 마크는 다시 시무룩해진다.
그런데 그 때였다.
길리안이 조금 위화감이 느껴지는 행동을 했다.
스윽-
그는 테이블 위에 비뚤게 놓여있는 칫솔들을, 손가락으로 슬쩍 밀어 가지런히 맞추었다.
별 거 아닌 행동이었지만,
한쪽 무릎만 걷어붙힌 차림에 배를 벅벅 긁어대던 털털한 백수의 모습과 묘한 위화감이 느껴지는 행동.
관객은, 이유모를 긴장감에 등을 바로 세웠다.
196 최종 우승자
서스펜스.
독자나 관중에게 불안과 긴장을 주어 흥미를 유발시키는 기법 혹은 장르를 말한다.
이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바로, 캐릭터와 관객 사이의 정보의 차이이다.
A가 B를 해코지하려는 것을 B는 모르고 관객만 알고 있다면, B와 A가 가까워질 때마다 관객은 무슨 일이 벌어질까봐 긴장하게 된다. 이것이 서스펜스의 원리.
[저…갑자기 배가 살살 아픈데, 화장실 좀 빌려도 될까요?]마크가 안방 화장실로 들어간 사이, 길리안이 부엌에서 식칼을 꺼낸 지금처럼 말이다.
사아악-
그는 찬장에서 작은 숫돌을 꺼내더니, 빠르고 능숙하게 날을 세운다.
‘왜 하필 지금···?’
관객은 그런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냥 빈 시간을 활용해 칼을 갈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고 하기엔 그는, 칼이 아닌 자신의 눈빛에 날을 세우고 있는 것처럼 예리한 살기를 띤다. 아까의 잉여력 넘치는 백수와 같은 사람인지 의심스러운 모습.
그리고 그는, 한 쪽 의자 위에 올려져 있는 담요 속으로 그 식칼을 감춘다.
지잉-
이번에는 거실 쪽의 조명이 어두워지며, 안방의 조명이 밝아진다.
관객들은 다시 한 번 흠칫 놀란다.
‘뭐 하는 거야, 쟤는?’
배가 아프다며 화장실을 물은 마크는, 화장실엔 들어가지 않고 안방을 뒤지고 있다.
날렵한 발걸음으로 발자국 소리 하나 내지 않으며, 서랍을 열어 보고, 침대 밑을 확인한다.
그리고, 혼잣말로 한 마디를 내뱉는다.
[먼지 한 톨도 없어.]‘아니 얘는 또 뭐 하는 거야?’
도둑인가? 그렇다면 더 위험하다.
바깥의 남자는 칼을 들고 있고, 심지어 칼을 만지는 것이 묘하게 능숙해 보이기까지 했다.
열심히 제품을 팔려던 아까의 모습이 안타까워보여서일까, 수상하기는 마찬가지인데도 관객들은 마크 쪽을 더욱 걱정하게 된다.
‘바깥의 남자는 위험해···얼른 그 집에서 나가!’
마크는 화장실에 들어가더니, 레버를 당겨 물이 내려가는 소리만 내고 빠져나왔다.
[감사합니다!]시치미를 뚝 떼고 살았다는 얼굴로 인사하는 마크.
그런데 길리안이…방금 그가 나온 방 안으로 들어간다.
‘누…눈치챘나?’
스윽-
그는 살짝 주름져 있는 시트를 매섭게 내려다보더니, 엄지와 검지로 시트를 살짝 잡아당겨 다시 팽팽하게 만든다.
관객들의 심장이 덜컹했다.
마크가 방에서 다른 짓을 한 것을 알아챈 것일까.
[사장님?] [아, 나도 화장실 좀 썼습니다. 금방 나가요~]다시 마주앉은 그들의 그림은, 더 이상 우습지 않았다.
*
하하하하–
그들이 어색한 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마주 앉는다.
마크가 다시 칫솔을 집어들려는데, 길리안이 갑자기 다른 얘기를 꺼낸다.
그 말에 다시 관객들이 헷갈리는 표정을 짓는다.
무섭다고 치를 떠는 길리안의 표정이 너무 진심 어려 보였기 때문이다.
‘그럼 혹시, 칼을 꺼내둔 것도, 낯선 사람을 집에 들이니까 불안한 마음에···?’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마크가 연쇄살인범을 옹호한다.
[하여간 이 사회가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이라고 뭐 처음부터 그랬을까요. 뭔가 어린 시절에 학대나 소외받은 경험이 있으니까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설마…마크인가?
저렇게나 어리숙해 보이는, 칫솔을 팔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는 방문판매원의 정체가…연쇄살인마?
다시 보니, 그의 눈빛이 조금 이상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 놈들은 타고날 때부터 문제가 있는 겁니다. 그 새끼 강박증도 있다면서요? 살해한 시체를 아주 깔끔하게 토막내서 줄을 맞춰 전시해 놓고 다리 한 쪽만 가져간다고요? 그런 건 그냥 미친 또라이지 그걸 왜 사회 문제로 돌립니까.]다시 길리안의 말이 섬뜩하다.
‘강박증’이라는 단어에 칫솔의 줄을 맞추던 그의 모습과,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던 침대의 모습이 떠오른다.
도대체…살인마가 누구일까,
혹은 둘 다 아닌가···?
마크가 빙긋 웃으며 화제를 돌린다.
[들어보니 사장님 말이 맞는 것 같군요. 사장님 근데 밖이 너무 더워서 목이 마른데, 얼음물 한 잔만 주실 수 있겠습니까?] […얼음물…요? 어쩌죠? 집에 얼음이 없는데.]그 요청에 길리안의 표정이 살짝 굳는다.
냉동실에…뭔가 있나?
[저…그럼 죄송한데, 나가기 전까지 제 물 좀 냉동실에 보관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제가 찬 물 아니면 잘 못 먹는데, 미지근해져 버렸네요.]마크가 가방에서 생수병을 하나 꺼내 내민다.
길리안은 잠시 그것을 받지 않고, 마크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 본다. 무언가를 읽는 것처럼.
[사장…님? 안 되나요?] [됩니다. 주세요.]그는 생수병을 받아든 후, 커다란 냉장고의 손잡이를 유난히 힘주어 꽈악 잡고 열었다.
그리고 관객들은 흠칫 놀란다.
냉동실 안에는, 신문지로 둘둘 말린 커다란 덩어리들이 가득했다.
설마…저것은···?
[어휴, 냉동실 안에 뭐가 꽉 찼네요?] [아 아버지가 정육점을 하셔서 고기를 벌크로 가져다 주시거든요.] [어우 부럽습니다. 그럼 좋은 고기 많이 드시겠네요?] [특상이죠. 보통 사람은 구경도 못하는 고기입니다. 때깔 한 번 구경해 보실래요?]길리안이 갑작스러운 제안을 했고,
보는 사람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
에바는 오늘, 객석에서 극을 관람하고 있었다.
자신이 쓴 대본을 보면서 걱정했던 부분.
10분이라는 제한 시간 동안, 집안이라는 한정된 공간 내에서 불안감을 중첩해 나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데렉과 유명.
한 명은 자기 작품을 선택하도록 꼬시고 싶어서, 캐스팅보트 출연을 결정할만큼 최고의 배우.
또 한 명은 자신이 꿈꾸던 세계를 언어로 표현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늘 절감해 왔는데, 글로 표현하지 못했던 부분까지 읽어내어 연기해 주는 기적같은 배우.
그 두 배우가 자신의 이야기 속의 인물이 되어 있음에 그녀는 거대한 희열을 느꼈다.
‘팽팽해.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그의 나라에서 이미 최고라 인정받았다 하더라도, 아직 너무 젊은 배우이다.
20대 초반부터 10년 이상 헐리우드의 탑배우 반열에 속해 있었던 데렉과, 저렇게 팽팽하게 무대 위를 양분하는 게 가능한 일일까.
그녀는 무대에 시선을 두는 내내 수 초 간격으로 팔을 훑고 지나가는 소름을 쓰다듬으며, 이 무대의 한 순간도 놓치지 않기 위해 집중했다.
탕-
신문지로 싸인 커다란 덩어리가 하나 꺼내어진다.
길리안은 그것을 싱크대 앞에 놓고, 커다란 식칼 하나를 꺼내 들었다. 신문지를 펼치자 드러난 것은, 잘 손질되어 있는 고기 한 덩이.
마크가 길리안의 옆에 붙어서 들여다보자, 관객들의 불안함이 더욱 커진다.
[이건 무슨 고긴가요? 돼지고기나 소고기랑은 좀 달라보이는데.] [아…겉이 좀 산화되어서 그렇지 돼지고기 맞습니다.] [에이 아닌거 같은데요?]둘의 분위기는 그 새 좀 바뀌었다.
아까와 달리, 신중하고 집요한 시선으로 고기를 내려다보는 길리안.
굽신거리는 태도를 슬쩍 버리고 능글거리며 그의 말을 반박하는 마크.
두근-
도발하지 말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는다.
[맞다니까요. 보세요, 산화된 부위를 좀 잘라내면···]그 때였다.
길리안이 식칼을 왼손에 꼬옥 쥐더니, 오른손으로 스위치를 확 내리며 칼을 뒤쪽으로 강하게 휘둘렀다.
갑자기 정전이 되며, 마지막으로 칼을 휘두르던 길리안의 무시무시한 표정만이 잔상으로 남는다.
(꺄악!)
어떤 여성관객이 작게 비명을 지른다.
투닥- 닥- 콰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