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24
“오케이. 다 끄고 이번엔 27, 28번.”
빈 무대에 떨어지는 조명은 경이롭다.
단독일 떈 노란색, 파란색, 빨간색이던 불빛들은 합쳐지자 하나의 빛으로 화하며 무대에 분위기를 삽입한다.
같은 공간을 비추더라도 탑에서 때리면 강렬하게, 백에서 때리면 스산하게.
같은 공간을 비춰도 파랑을 약간 섞으면 우울하게, 강하게 섞으면 기괴하게.
그리고 혜전당 출신의 기사답게, 그 실력은 진짜였다.
“이제 다시 내려서 각도 수정하자.”
“네!”
그들의 작업은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
대학로 앞의 한 맥주집.
유명은 성진과 마주앉아 있었다. 공연장에서 몇 시간 동안 먼지를 먹은 후 마시는 생맥주는 꿀맛이었다.
“너 일 잘하더라. 웬만한 보조 기사들보다 낫던데?”
“저야말로 많이 배웠어요. 형같은 프로가 작업하시는 건 거의 예술이더라구요. 진짜 멋있어요!”
그 말은 진심이었다.
유명도 연극판 밥을 먹으며 수많은 극장 상주기사들이며 외주 기사들과 만나왔지만, 성진처럼 단시간에 고퀄리티의 작업을 해내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그 말에 잠시 생각을 하던 성진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너, 졸업하고 내 밑으로 올래?”
“…네?”
성진은 현재 혜전당의 막내 조명기사다.
한국 최고의 극장. 대우도 최고인만큼 혜전당 조명팀에 들어가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다.
몇 년에 한 번 정도 어떻게 T/o가 난다해도 화려한 경력자나 해외 석박사 출신들이 줄줄이 몰려들 것이다.
하지만, 성진은 일하는 데 있어 경력보다는 센스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부족한 지식은 자신이 가르치면 된다.
“방학마다 와서 인턴해서 나한테 좀 배우고 선배들한테 눈도장 찍으면 졸업할 때쯤 무리없이 채용될 거 같은데. 공연판은 아직은 인맥이 더 중요하거든.”
물론 이것은 성진이 유명의 ‘관심이 있어서’라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생긴 오해였다.
유명은 속으로 땀을 흘렸다.
너무 과한 호의에, 자칫하면 되려 사이가 서먹해지게 생겼다.
이럴 때일수록 정면으로 돌파하기로 했다.
“형. 진짜 다른 사람들이 들었으면 엎드려 절이라도 할만한 제안인 거 알아요. 좋게 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한테는 다른 꿈이 있거든요.”
“뭔데?”
“혜전당 수전당에 주연으로 설 만한 배우요.”
성진이 쿨럭 기침을 토했다.
‘이 자식 배우 지망이었군. 그런데 데뷔도 안한 아마추어의 포부가 무슨···’
혜전당에 주연으로 설 만한 배우.
이건 꽤 쟁쟁한 극단의 주연감이나 되어서야 슬며시 꺼내는 포부이다. 심지어 혜전당의 여러 극장들 중 3500석 규모의 대극장 ‘수秀’에 서겠다는 말은 입 밖으로 꺼내는 사람도 없다. 주로 오페라나 콘서트에 사용되기 때문.
하지만 이녀석이 꺼내는 말이 웃기지 않은 건,
아직 세상물정을 모르는 것이 귀엽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만큼 진지하기 때문일까.
“배우 지망이면 조명은 어떻게 이 정도 아는거야? 따로 공부라도 했어?”
“네.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해서 조명을 잘 아는 것도 중요하니까요.”
“어째서?”
“연기, 무대, 음향 그 모든 극적 요소들을 아우르며 분위기를 조성하는 건 조명 아니겠어요. 뭐 사실 조명 뿐 아니라 연극과 관련된 건 뭐든 기본 정도는 알고 싶지만요.”
이건 평소 유명이 가지고 있던 생각이다.
극의 다른 구성요소를 이해하는 것은 분명 연기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단역만 했기에 시간이 남아도니까 다른 것도 눈에 보였던 거라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이 녀석···’
그 말에 성진은 작은 감동을 느꼈다.
화려한 무대 뒤에서 얼마나 많은 인력과 장치가 극을 만들어가는지에 관심을 두는 배우는 찾기 힘들다. 수고한다고 인사나 할 줄 알면 다행이다.
게다가 자신이 평생을 바치기로 한 극 조명의 가치를 이해하는 녀석이라니···
“혜전당, 구경시켜줄까?”
성진의 제안에, 유명은 속으로 아싸-를 부르짖으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처음부터 노린 바였다.
*
금요일 저녁 연습.
철주는 연습 전에 잠시 유명을 따로 불렀다.
“네 선배님?”
“어제 견학가서 한 건 했다며?”
내용은 칭찬인데 말투가 영 껄적지근하다.
“곤란하신 것 같아서 조금 도와드렸습니다.”
“유명아.”
갑자기 친근하게 이름을 부르는 철주.
“너 재능도 있고, 열심히 하는 것도 알고, 이번에도 좋은 뜻으로 선배님 도와드린 것도 알아. 그래서 나를 포함해서 너한테 기대하는 선배들도 많고.”
“…”
“그런데 세상살이란 게 말야, 너무 튀면 시기질투하는 사람들이 생겨. 뭐든 적당히 남들보다 조금 더 잘하는 정도가 좋아. 그러면서 겸손하고 배려하고. 그래야 적이 안 생기고 꼭대기로 가는 길이 순탄하다.”
그럴까?
예전의 유명이라면 동의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주변과 맞춰가며 도달한 꼭대기가, 진짜 꼭대기일까?
무리하지 않고 꾸준히 등반해 한라산 정상에 다다랐을 때, 처음부터 달리고 쓰러지며 폐활량을 길렀던 사람은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지 않을까?
딱히 튀고 싶어서 했던 짓은 없다.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을 뿐.
그에겐 기적처럼 다시 주어진 기회. 낭비하고 싶지 않다. 최대한 기회를 만들고 역량을 펼쳐 한계를 넘고 말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아무 의미도 없는 사람을 굳이 설득할 이유는 없었다.
“네. 조언 감사합니다 선배님.”
“잘못했다는 건 아니야. 그냥 네가 나랑 닮은 거 같아서 얘기해주고 싶었다.”
그 딴엔 칭찬으로 한 말이었지만, 유명은 비소를 지었다.
제 나름대로 걱정해 준 것은 맞을 것이다.
단, 세상을 보는 시야의 크기는 다 다른 법이다.
*
“야, 꿇려.”
“어디서 노가다 인부하던 새끼가, 확-”
“형님 저거 어디 새우잡이 배에 실어버릴까요?”
남사장 부하팀. 무릎꿇은 김철수를 갈구고 있다.
“주선호. 좀더 대사 야비하게 못쳐?”
“초보가 다 그렇지. 한상아. 선호 연습 좀 제대로 시켜라.”
“네! 선배님.”
남사장 부하1역의 박한상이 이 팀의 왕고이다.
그는 부하2와 부하3을 데리고 따로 리저브된 옆 강의실로 옮겼다.
“선호야. 임마. 남자답게 딱! 내가 저 새끼를 갈아마셔야지 이런 기백으로 못해?”
“네 죄송합니다···”
“니가 열심히 하는 건 알아. 하지만 연기라는 건 좀더, 그 인물에 씌인 듯이 자연스럽게 응? 나 하는 거 보고 참고해도 좋고.”
“…네. 더 노력해보겠습니다.”
주선호. 경제학과 02학번.
대학교 연극부에 로망이 있었던 그는 입학하자마자 창천을 찾았다. 2학년이 되고 연기에 첫 도전, 경쟁률이 높았던 이번 캐스팅에서 배역을 받는데 성공했다.
뛸듯이 기뻤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리 생각해도 미스 캐스팅이었던 것 같다.
165cm의 키. 마른 몸. 순둥한 얼굴.
그런데 그가 받은 역은 중소연예기획사 남사장의 2번째 부하역(a.k.a. 양아치)
가는 목소리로 무슨 협박을 읊어도 웃기게 들릴 뿐이다.
일부러 목소리를 낮추거나 쉬게 해 보기도 했지만, ‘선호 감기걸렸어?’ 라는 반응 뿐.
“선호. 나좀 보자.”
오늘도 한 선배가 불러낸다.
“너 그 역 하고 싶었던 사람이 몇 명인 줄 알아? 제대로 안 하면 너때문에 떨어진 사람들에게 민폐다?”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선배는 쯧쯧 소리를 내며 못마땅한 얼굴로 자리를 뜬다. 선호의 눈이 축축해진다.
‘하아. 지금이라도 역을 사퇴해야 하나···’
우울하게 그 날의 연습이 끝났다.
배우 중 막내라 마지막까지 연습장을 정리한 선호는, 바닥에 떨어진 대본 하나를 보았다.
‘어, 이거 유명 선배 대본···’
신유명.
자신과 다르게 첫 연기에 대단한 연기력을 보여주고 있는 선배. 스타일도 멋지고 연기는 그야말로 넘사벽인, 선호에겐 닿을 수 없는 동경의 대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