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281
비롯 연기란, 그 이야기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타인에게 완전히 다른 존재를 이해시키는 도구이다.
유명이 의 아스를 연기하면서, 혜호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했다면,
혜호는 유명이 스스로를 연기한 을 보면서, 처음으로 유명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에게 연기와 인간이란 매우 흥미로운 것들이지만, ‘정보’로만 존재하던 것. 그래서 잘 흉내낼 수는 있어도 온전히 공감할 수는 없었던 것.
그런 그가 유명을 만나게 되면서 인간에게 마음을 주기 시작하고, 그의 열정과 주변인에 대한 애정도 어느정도는 이해하기 시작했지만…그렇다고 해서 인간 신유명의 본질을 온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보는 자를 온전히 빠져들게 하는 훌륭한 연기가 그를 덮쳤다.
그리고 혜호가 깨달은 것은···
‘유성이…나를 말하는 거였어…?!’
이것이 인간들이 말하는, 소름이 돋는다는 걸까.
대본만 봤을 때는 몰랐다.
단순히, 유명의 어디서 왔는지 모를 ‘연기에의 욕망’과 다른 욕망들간의 갈등이라고, 그리고 유명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라도 결국 연기에의 욕망을 택한 것이라고,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함의가 있었다.
자신보다 더욱 거대하고 본질적인 욕망에게 지배되기 위해, 스스로 기꺼이 목을 매단 민성.
살기 위해 투쟁하면서도, 유성의 시간과 자신의 시간 중 무엇이 더 가치있는 것인지를 고민했고, 결국 스러져버린 현성.
그리고 유성의 앞에 자신을 내놓은 은성까지.
그들의 모습이 모두 신유명이라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다른 모든 욕망을 모두 지워버리고 몸을 독차지하게 되는 유성은···
‘내가 네 몸을 쓰는 게 맞다고, 그게 옳다고, 스스로에게 납득시키는 과정이기도 했단 말인가.’
천년을 살아온 귀鬼의 눈꼬리가 잘게 떨렸다. 마치 울음을 참기라도 하듯이.
*
자신에게 몸을 양보하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 양보하려는 마음의 원천은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를 배우로서 살게 해 준 자신에게 보은하고 싶은 마음.
연기에 목마른 자신의 욕망을 이해하는 같은 배우로서의 안타까움.
거기에…자신보다 더 연기를 잘 하는 배우가 몸을 쓰는 것이 맞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있었나 보구나.
욕심을 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혜호는 이미 5년 전 그 날부터, 자신이 유명의 몸을 뺏지 못할 것을 예감했다.
모르고 취한다면 모를까, 알고 무엇을 앗아가기엔 너무 선량하고 가엾은 영혼.
다만 그 아쉬움을 완전히 접어넣기엔 시간이 걸렸을 뿐이다.
-네가 내게 준 15년의 시간 중 절반, 내가 서른이 될 때까지만…연기하게 해 주면 안 될까?
그 날, 유명의 부탁.
약속한 7년의 끝이 코 앞으로 다가오면서, 혜호는 잠시 선계를 유람했다. 떨어져 있으며, 마지막 욕심을 접어넣기 위한 시간이었다.
그 사이에 그는 아득한 고뇌를 했고, 그만큼 아득히 성장해 있었다.
‘인간이란…정말 신기한 존재구나···’
인간이 특별한 것일까, 유명이 특별한 것일까.
혜호는 상영관의 인간들을 따라 다른 상영관으로 이동했다.
블루라벨의 첫 상영은 12시, 옐로라벨의 첫 상영은 2시이다. 2시 상영관의 절반은 블루라벨을 보고 온 사람들로, 나머지 절반은 처음 관람하는 사람들로 채워졌다. 어느 쪽이든 기대가 가득한 표정이다.
‘엔딩이 추가됐다라···’
사실 원래의 혜호는 연기에만 매진하며 살아가는 삶이 새드라는 것을 이해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방금 유명의 연기를 보고 나니, 왜 그것이 새드엔딩인지 납득당해버렸다.
‘그럼 네가 찾은 헤피엔딩은 무엇이냐.’
그는 뚫어질 듯이 스크린을 주시했다.
2번째 영화가 시작되었다.
세 명의 인격이 사는 내면의 집에 태어난 새로운 인격.
민성의 죽음과 다인의 경고.
분배받은 시간을 민성을 흉내내는 데 사용하는 유성.
그에 만족하지 않고 은성의 삶에도 끼어들며, 그들이 협의한 원칙을 깨기 시작하는 유성.
사라진 은성과 감금당하는 현성.
자신의 욕구를 인지하고 연기를 시작하는 유성.
말라붙어 사라진 현성의 모습까지…
‘여기까진 똑같…진 않고 비슷하군.’
똑같다고 들었지만, 초반 110분에도 미묘한 편집의 차이가 있었다. 은성의 눈빛을 조금 더 길게 보여준다든지, 현성과 유성이 대치할 때, 유성의 망설임을 0.2초 정도 늘이는, 그야말로 미묘한 차이.
실로 정성이다. 이걸 알아볼 사람이 누가 있다고···
그리고 분기점.
무의식의 세계 속에서, 자신을 죽여달라며 다가오는 은성을 코 앞에 두고,
푸욱-
유성이 칼을 돌려, 자신의 허벅지를 찔렀고, 그대로 은성을 껴안았다.
‘뭐···?’
“너는 달라, 은성아.”
“너는, 내가 지켜야 하는 존재야. 너 없이는 나도 결국 행복하지 못할 테니까.”
“노력할게. 죽을만큼 노력할거야. 제발, 한 번만 나를 믿어줘.”
그 슬프면서도, 강철같은 의지가 서린 표정.
“너도 포기하지 말고 노력해 줘.”
유성은 은성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
온통 상처입은 은성을 데리고 내면의 집으로 돌아와서, 말없이 그의 상처를 치료하고 그를 도닥인다.
그런 그에게 은성은 제안했다.
“나에겐 세 시간만 줘. 자는 시간은 제외하고.”
“아니, 예전처럼 반반-”
“그러지 마. 우리 서로 할 수 있는만큼 하자. 대신 가끔 가족들과 여행가거나 할 땐 좀 더 양보해 줬으면 해.”
이후, 둘은 함께 살아간다.
유성은 강박적으로 은성의 시간을 지켜주었다.
그리고 은성이 몸을 차지한 동안에는, 무릎을 안고 멍하게 티비만 보고 있었다.
“아무 생각하면 안 돼. 생각만으로도 은성이를 방해할 수 있으니까.”
자칫 연기에 대한 단상이라도 떠올리면, 온 무의식이 그것에 반응한다. 그러면 몸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은성이라 해도, 온전히 그의 삶에 집중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유성은 가엾어 보일 정도로 자신을 내리눌렀다. 말 그대로, ‘노력’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아아···’
생김새는 같지만, 분명히 다른 사람임을 인지할 수 있을 정도로 달랐던 두 사람의 표정.
그 표정이 섞인다.
유성의 하나밖에 모를듯이 집요하고 순수한 눈빛에 은성의 다정한 입매와 서글서글한 이마가 합쳐진 표정은···
‘신유명···’
그건 분명, 지금의 유명의 얼굴과 닮아 있었다.
그 자신도 인지하지 못했겠지만, 그는 이미 그런 삶을 살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
이번에도, 관객들의 홀린듯한 표정은 똑같았다.
블루라벨을 먼저 보러 온 사람들은 상당수가 뒤에 옐로라벨을 볼 계획이 있었던 반면, 옐로라벨을 먼저 본 사람 중에는 이번 한 번만 보려고 했던 사람이 많았다.
그들 대부분은 몸싸움을 하듯이 저돌적으로 예매 창구로 달려갔다.
“브…블루라벨 표 없어요?”
“오늘 표는 전체 매진입니다.”
“히잉···”
혜호는 생각이 많은 듯 느릿느릿하게 허공을 날았다.
‘인간은…유한하기에 발전하는 존재인가?’
자신은 연기의 귀鬼. 연기에 바친 세월만 천 년 이상이다.
아무리 연귀라 한들, 자신이라고 처음부터 이런 연기가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수많은 극을 보았고, 역사에 존재하는 모든 극들의 원형과 변형을 보고 겪어왔다. 뿐만인가, 수많은 희대의 재능들을 만나왔다.
그 오랜 시간에 걸쳐 이룩한 것들을, 신유명은 이렇게나 단시간에 따라잡고 있다.
‘내가 가르쳐 준 것들이 많다고 하지만, 가르쳐 준다고 따라할 수 있는 것들도 아닌데···’
원생에 15년, 현생에 7년.
고작 22년의 세월로, 그는 자신을 많이도 따라왔다. 물론 아직도 자신과 비교하면 멀었지만···그라면 언젠가는 자신을 따라잡을지도.
그가 이렇게 눈부시게 발전한 것은, 인간의 삶이 유한하기 때문일까? 그 중에서도 그에게 주어진 시간이 고작 7년뿐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천천히 날아서 혜호가 도착한 곳은, 오늘 유명의 공연이 개연하는 극장 앞.
‘아직 2시간쯤 남았네.’
리허설 중에 흘러나오는 연기(연기의 기운)도 맛있을 것이다. 하지만 혜호는 극장 밖에 머물렀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온전히 그의 무대를 관람하고 싶다.
‘공연은 또 어떨런지···’
같은 시각, 유명은 공연장 안에서 분장을 하고 있었다.
지난 번 연기콘서트에서 안면을 튼 분장 스탭이 얼굴에 붓터치를 하며 조잘거린다.
“유명씨. 영화 반응 난리났대요!”
“아, 정말요?”
“제 친구도 보고 왔다는데, 입에 거품을 물더라구요. 무조건 같은 날 두 개 다 예매해서 보라던데요?”
“하하, 감사하네요.”
영화는 이미 제 손을 떠난 일이지만, 오늘의 공연은 아직 손 안에 있다.
꿈틀대는 연기에의 욕망을 다섯 손가락 안에 잘 구겨 넣는다.
곧 열어보일 때가 온다. 바깥의 객석을 가득 메운 1700명의 관객들에게, 마법처럼 짠- 하고 손바닥을 펼쳐보일 때가.
준비가 끝났다.
막이 열릴 시간이다.
270 인격살인 stage on
(헐, 데렉 맥커디다!)
(으악…!)
(여기 초대석 근처인가? 왜 여기에…가서 싸인해 달라고 해 볼까?)
(티셔츠에…방해하지 말라고 써 있는데?)
정말이었다.
객석 중에서도 로얄석에 가까운, 무대가 정면으로 보이는 명당 자리. 거기에 팔짱을 끼고 앉아있는 데렉의 티셔츠 등판에는 ‘관람 중 방해금지’라는 글자가 한글로 또박또박 새겨져 있었다.
어찌보면 우스운 장면이었지만, 글자인쇄 티셔츠도 그 훌륭한 골격에 걸치자 명품같이 잘 어울렸고, 이미 무대 쪽으로 고정된 시선은 진지하기 그지없어 도저히 말을 걸 엄두가 나지 않았다.
데렉의 매니저 채드는 바로 옆좌석에 앉아, 주변에 몰린 시선들과 눈을 맞추며 가슴 위에 엑스자를 그려보였다.
데렉이 초회 공연 티켓을 구하라고 주문한 것은 몇 개월 전이었다.
-신유명 성격상 초대석은 좋은 자리로 배정 안 할거야. 일반 관객들이 제일 좋은 자리에서 봐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사람을 수십명을 고용하든, 슈퍼 컴퓨터를 대여하든, 돈은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으니까 최대한 좋은 자리로 구해.
-넵!
근 10년 째 데렉의 매니저로 일해온 채드.
그의 괴팍하고 자기중심적인 성미는 유명하지만, 사실 몇 가지 고집을 빼면 데렉은 별로 까탈스러운 부분이 없는 좋은 상사였다.
몇 가지 고집이란, 바로 이럴 때 발동한다. 연기에 대한 강박이 작용할 때.
이럴 때는 그의 요구를 무조건 따르는 수밖에 없다. 타협이 불가능하니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데렉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무대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오늘 나는 네가 어디로 갔는지 확인하겠다.’
까지만 해도 이 정도로 초조하지는 않았다.
작품이 끝나자마자, 휴가를 내서 신유명의 나라인 한국으로 달려왔고, 함께 연기콘서트에 올랐을 때까지만 해도 역시 신유명은 굉장하구나, 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지켜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의 촬영분을 보고, 연극 연습을 하는 신유명을 보면서…
‘이건 좀 사기에 가까운데…’
충격을 받았다.
그는 그 사이에 또 어느 능선을 넘은 것 같았다.
이전까지는, 매번 혼자 개척하던 연기의 극의를 향한 길에 동반자가 생긴 것이 기꺼웠었다.
그의 등을 바라보며 걷는 길은 더 이상 외롭지도 막막하지도 않았기에.
그런데,
솨아아아-
어느새 앞을 걷던 사람의 등이 보이지 않는다.
따라 걸을 발자국마저 휘몰아친 눈보라에 지워져 버렸다.
어느 방향으로 갔을까. 따라잡을 수는 있을까.
연기에 대한 욕심이라면 누구에게도 질 수 없는 남자는,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당연하다는 듯이 2인자가 될 순 없었다.
아니, 서류신의 성장속도를 볼 때, 머물러 있으면 그조차 지키기 어려울지도.
(시작하나 봐요.)
매니저가 굳은 그의 주의를 환기하듯이 살짝 속삭였지만, 데렉은 미동도 없었다.
그는 오감을 열고, 이 무대의 모든 정보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
둥- 둥- 두둥-
암전 속에서 막이 조용히 열렸다.
아직 눈이 멀어있는 관객들의 귀에 소리가 먼저 흘러 들어왔다. 아니 촉각일까.
심장 소리와 비슷한 북소리는, 귀로 들어오고 진동으로 느껴지며, 몸의 내부와 외부를 함께 떨리게 하고 있다.
둥-
무대를 가로지르며, 한 줄기의 빛이 지나간다.
푸른색의 빛은 무대의 좌측에서 우측으로 쏘아져 나간다.
희미한 빛무리 사이로, 무대의 양 옆에서 제 몸보다 더 큰 북을 두드리고 있는 두 명의 고수(*북치는 사람)가 보인다.
두웅-
다시 한 번 북소리와 함께 노란색의 빛이 쏘아져 나간다.
두웅–
그리고 또 한 가닥. 이번엔 짙은 자주색.
세 개의 빛의 선은, 무대의 정가운데서 정확하게 교체된다.
둥- 둥 소리가 더욱 빠르게 들려오고, 교차된 지점의 천장에서 강렬한 빛 줄기 하나가 다시 떨어졌을 때,
위잉-
교차점의 바로 아래바닥이 열리며, 한 사람이 머리부터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의 표정은 기괴하게 꿈틀거리고 있다.
오른쪽 뺨이 제멋대로 수축했다가, 이마가 일그러지고 턱이 앞으로 빠진다. 울룩불룩한 근육의 변화는 마치 어떤 생명체가 좁은 태로를 비집고 나오는 탄생의 순간을 보는 것처럼 우악스럽다.
어깨.
허리.
다리.
머리부터 빠져나온 것은 드디어 온전히 지상에 모습을 드러냈고,
그 순간 세 개의 색조명이 꺼지며, 표정은 완전히 무로 변했다.
꿀꺽-
누군가의 타는 목에 침이 넘어가고, 북소리가 질주한다.
둥둥둥둥둥둥둥둥-
두둥-
있는 힘을 다해 내려친 마지막 한 번의 북채가, 온 공연장을 쩌렁하게 울렸을 때,
스윽-
감겼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
위에서 흰 탑조명이 내려오고, 백에는 보라빛의 조명이 들어온다.
남자의 흰 옷이 살짝 보라빛으로 물들어 보인다는 생각을 할 때, 남자가 나른한 눈매로 관객들을 훑어보았다.
“흐음…오늘도 이렇게 나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네?”
목덜미를 스쳐 지나가는 뇌쇄적인 음성.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단번에 눈치챌 수 있었을 것이다. 민성이다.
“새로운 인격이라니, 번거롭게. 8시간도 충분히 짧은데, 그냥 지금 죽여버리자.”
자신이 원하는 바에 솔직한, 그래서 아이같이 잔혹한 그의 대사가 끝나자 조명이 짧게 꺼졌다 다시 켜진다.
이번의 백 조명은 노란색.
0.5초 정도 불이 꺼졌던 사이에 유명의 얼굴은 완전히 변해 있었다.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다정이 배인 얼굴, 은성이다.
“안 돼, 민성아. 서로를 동등하게 인정하는 게 우리의 룰이잖아. 조금 시간을 줄이더라도, 우린 잘 지낼 수 있을 거야.”
다시 light off & on.
푸른 백 조명이 들어오자 또 다른 남자의 얼굴.
“글쎄, 은성아. 너도 이성적으로 다시 한 번 생각해 봐. 지금 처리하는 게 나을 수도 있어.”
아주 짧은 사이에, 유명은 민성이 되고, 은성이 되고, 현성이 된다.
이전 표정의 잔상 하나 남기지 않고, 완전히 달라진 목소리와 제스처 때문에, 관객들은 신기한 경험을 한다.
어두운 극장 속에, 스팟 라이트만 켜진 상태에서, 빠르게 세 가지 캐릭터를 왔다갔다하는 유명의 연기에, 마치 세 사람이 저 곳에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 것 같은 기분.
그것을 보고 혜호는 짜릿한 웃음을 지었다.
‘영리해. 정말 영리한 녀석이야.’
지금 혜호의 발밑에서 무대를 관람중인 데렉이 유명의 연기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면, 혜호는 이 도입부의 의미에 더욱 감탄했다.
‘이건, 앞으로의 전개를 설명하는 장면이네.’
땅 속(무의식)에서부터 드러나, 하나의 인격으로 탄생한 원초적 욕망.
그 욕망을 가진 네 명의 존재가 있다.
유명은 그 중 셋의 캐릭터와, 각 캐릭터들이 등장할 때 주로 보조할 색상이 무엇이 될 지를, 첫 장면 하나만으로 관객에게 각인시켰다.
의상과 분장이 변하지 않아도, 저렇게나 선명하게, 아예 다른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을 한 장면으로 미리 설득해버린 것이다.
이제 관객들은 저 냉철한 표정과, 푸른 색의 보조 조명을 볼 때마다 현성을,
온화한 표정과, 노란 색의 보조 조명을 볼 때마다 은성을,
나른한 표정과, 보라 색의 보조 조명을 볼 때마다 민성을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모든 백 조명이 꺼지고, 위에서 강하게 떨어지는 탑 조명 하나만 남았을 때,
유명은 모든 표정을 지우고 다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