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80
“일단 ‘진짜’로 해보세요. 준비 많이 해왔네요.”
이런 반응을 계산한 것 한 가지.
오디션장에서 공손하게 연출 의도를 물어보는 것은 이미지에 플러스를 주는 행동이다.
그 의도에 맞추어 두 버전을 다 준비해간다면야 말할 것도 없이, 성실성과 열의까지 어필할 수 있고.
“시작하겠습니다.”
유명이 후우- 숨을 고르더니, 풀썩 주저앉아 무릎을 두 팔로 안는다.
어느 담벼락에 주저앉은 고양이마냥 애처로운 포즈.
어디서 쫒겨난 것 마냥 옷가지가 너덜너덜한데, 무릎을 감싼 손목에는 비싼 시계가 번쩍이는 모습이 우습다.
“하나야.”
“어? 보형아. 뭐야 너 옷이 왜 이래?”
조연출이 여주 하나의 목소리를 대신한다.
“우리 집 망했어···”
“뭐?”
“입을 옷도 없고…오늘 잘 데도 없어···”
“어떡해! 너 괜찮아? 부모님은?”
“도망…가셨어. 나만 두고. 고양이는 데려가셨는데…내가 고양이보다 밥을 더 많이 먹어서 두고 가셨나봐…허어엉.”
무릎을 더 꼭 끌어안고, 보형이 훌쩍거린다.
“혹시 너희 집에 신문지 있어? 신문지가 보온이 잘 된대. 노숙자 아저씨들이 괜히 신문지 덮고 자는 게 아니라더라. 박스가 있으면 좋은데…박스는 너무 사치겠지? 내가 너한테 너무 많은 걸 바랬지… 나는 아직 젊으니까 신문지로도 괜찮을거야···”
대사는 코믹한데, 어째 애가 참 불쌍하다.
육미영 작가는 이 파트를 사실 ‘하나가 들으라는 듯이’ 썼다.
하나와 보형은 고양이 산책 중에 몇 번 마주쳐 친구가 된 사이. 사실 보형은 재벌집 아들이고, 가출 후 들키지 않기 위해 전혀 가족이 모를만한 지인인 하나에게 빌붙으려는 속셈이다.
그게 이 의상컨셉의 연유이다. 당연한 듯이 걸치고 있는 비싼 소품들과, 불쌍한 척 하기 위해 의류수거함에서 꺼내입은 옷들의 미스매치.
하지만 하나는 명품 브랜드같은 건 전혀 모르는 흙수저이기 때문에 이 연기가 통한다는 설정.
그런데,
하나 뿐 아니라 보는 사람에게도 통할 것 같다. 극 중 보형이가 이 정도로 리얼하게 불쌍한 연기를 할 수 있으면, 아예 연예계로 진출시켜야 하지 않을까 싶은 연기.
불쌍한 척을 해야할 대사를 아예 불쌍하게 치는 배우를 보니 의외로 마음이 훅 끌려간다.
병신미가 돋보인달까.
“나 할머니랑 둘이 사는데…어디 아르바이트 해서 방 구할 돈이라도 벌때까지, 우리 집에 잠시 있을래?”
“저…정말? 하나야 고마워. 내가 이 은혜 꼭 갚을게. 고마워!!”
얼굴이 반들반들, 순진무구하다.
이 녀석 마음에 드는데 어쩌지…육작가는 감독의 표정을 슥- 훑었다.
*
이어진 몇 씬의 지정연기 장면들도 유명은 역에 쫙쫙 달라붙게 연기해냈다.
“연기 경력 짧은 거 맞나?”
“엄청 능청스럽네요. 감초 역할인 보형이 매력이 잘 묻어나는데요?”
“글쎄…괜찮긴한데 내가 생각하는 보형이랑은 이미지가 좀 다른데···”
좌우의 탄성에 감독이 슬쩍 반박하며 시선을 돌린다.
그 시선의 끝에 있는 것은…문유석 실장.
하지만 그의 시선은 유명에게 고정되어 있다.
‘흠…기획사 오디션을 보러 왔어도, 저 정도면 바로 합격.’
역시 빛 좋은 개살구는 아니었군. 유석이 입맛을 다셨다.
“그럼 자유연기 준비해온 것 볼까요?”
캐스팅 디렉터가 다음 운을 띄웠고,
유명이 아 네…하고 대답하더니 뜬금없이 심사위원들에게 말을 건다.
“그런데 오늘 계속 오디션 보시느라 뉴스 못보셨죠?”
“어…네, 그런데요.”
“지금 밖에 난리가 났거든요.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테러가 났어요.”
“네? 무슨 테러요?!”
점심 직후부터 저녁이 다 되어가는 이 시간까지 방을 한 번도 나서지 못하고 일만 하고 있던 사람들이 화들짝 놀랐다.
테러라니…왜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지. 가족들한텐 이상없나?
“아 큰 규모는 아니고, 인명 피해는 없었대요. 신림 쪽에 작은 영화관에서 터진 테러라나···”
신림에 집이 있는 조연출이 흠칫 놀란다.
“그게 전쟁 영화였다네요? 수류탄 쾅쾅 터지고 총 팡팡 쏘고 그런 영화를 신나서 보고 있는 사람들이 실제로 뭐가 펑- 터지면 어떻게 반응할까 싶어서···”
묘하게 어조가 느릿느릿하다.
“수제로 만든 폭탄을 한 번 휙- 던져봤다는데···”
눈썹이 살짝 올라간다.
눈빛이 잠시 뭔가를 생각하다가 떨쳐냈다. 그리고 입꼬리가 아주 약간 올라가다가 멈칫 내려온다.
“범인이 잡혔대요? 범인 인터뷰 들은 거에요? 그거 미친놈 아니야?”
조연출이 흥분해서 언성을 높였고,
작가와 캐스팅매니저는 슬슬 감을 잡고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었다.
“미친 건 아니고요. 남의 불행은 즐겁게 관람하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같은 불행이 닥치면 어떻게 반응하나 궁금해서요.”
“예??”
“그래서 던졌다구요.”
이제는 입꼬리가 완전히 올라갔다.
“뭐? 이사람 뭐라는 거…어…이거 연기···?”
한박자 뜸을 들인 후,
“네. 자유연기였습니다. 감사합니다.”
흥분해서 벌떡 일어섰던 조연출이 힘이 풀려서 주저앉았다.
“어…진짜로 신림에 테러난 건 아니란 거죠?”
“네. 아닙니다.”
“어우씨 깜짝이야.”
긴장을 놓은 조연출이 저도 모르게 쌍시옷 발음을 뱉어냈다.
작가 육미영이 흥분해서 질문을 쏟아낸다.
“이건 즉흥연기? 아니면 준비해 온 거?”
“준비해 온 자유연기입니다.”
“와…뒤통수 제대로 맞았네. 이게 연습해서 나오는 연기라는 거에요? 너무 자연스러워서 깜빡 진짜인 줄 알았네. 이런 거 준비한 이유가 있어요?”
“…자유연기는 보통 울고 화내고 이런 센 감정들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은데, 드라마 오디션이다 보니 자연스러운 연기를 잘 해내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감정의 폭이 크지 않은데도 임팩트있는 연기를 고민하다 보니 속이는 형태가 되어서 죄송합니다.”
그의 말에 미영이 박수를 쳤다.
“아니에요. 너무 재밌었어. 저도 그래서 가끔 자유연기는 안 시킬까 싶다니까요. 다들 너무 오버해.”
작가는 얼굴이 환해졌고, 감독은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문유석 실장은, 보물을 발견했다.
*
유레카-
눈 앞에 그가 찾던 두 번째의 보물이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이 방의 누구보다도 그가 연기하고 있다는 것을 빨리 알았다. 정확히는 두 번째 문장, ‘지금 밖에 난리가 났거든요.’ 부터.
그가 유독 눈치가 빠른 편이기도 했지만, 바로 직전에 그와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눠보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말투가 다르다. 분위기도 아예 사람이 바뀐 듯 하다.
감정의 폭이 격한 연기가 아니었음에도, 캐릭터가 다르다는 것을 저 정도로 표현하다니, 저 배우는 자신이 찾던 ‘천재’가 틀림없었다.
그리고 ‘첫 번째 보물’에게 부족한 것, 연기에의 열정이 있지 않나.
직접 캐스팅매니저의 연락처를 알아내서 캐스팅 요청메일을 보내고, 배역 이미지에 맞는 의상을 준비해 입고 오고, 해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연기의 버전을 나누어 준비해 오다니.
심지어 머리도 좋다.
짜온 대사가 [한참 오디션을 보느라 하루 종일 밖에 나가보지 못한 상황]을 노리고 있다. 마지막이라 무뎌져 있는 심사위원들에게 제대로 한 방을 먹였다.
연기력, 성실함, 요령까지.
평생 그의 눈에 차는 배우를 몇 번 만나지 못할 정도로 눈이 높은 유석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물고기가 주인없이 유영하고 있다.
물고기를 잡을 것인가,
혹은···
유석이 그의 품 안에 있는 명함 한 장을 만지작거렸다.
*
“오늘 수고했어요. 결과 나오면 바로 알려줄게요.”
“아, 2차는 없나요?”
“지금 우리 본부 난리거든. 올해 히트작이 제대로 없었는데 S사에서 대홈런을 쳐버렸잖아. 내년 예정이던 기대작을 급하게 당겨서 편성한 거라, 제작시한이 촉박해서 그럴 시간도 없어요. 며칠 안에 결과 날거에요.”
“아, 넵.”
지난 번에도 느꼈지만, 참 가감없이 얘기하는 사람이다. 저래도 되나···
그렇게 민정이 인사하고, 유명도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회의실에는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문 실장님. 육작가가 꼭 그 친구여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는데···”
“오디션은 그냥 보여주기식이라고, 보형이 역은 저희 회사 배우한테 꼭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만.”
“그건 그렇죠…하아…그런데 갑자기 그런 친구가 툭 튀어나올 줄 알았나요. 이민정씨도 상황 알면서 다른 배역으로 좀 돌리지 않고···”
상황이 복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