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by Tyrant RAW novel - Chapter 156
156화. 에밀리 하비에르 공작
엔리케가 정신을 잃어서 다행이다. 에이단에게 고이 안긴 채 이동되었다는 사실을 모를 수 있었으니까.
저택 근처로 갔다가 마침 지나던 집사장을 만나 엔리케의 침실로 안내받았다.
가문의 주치의를 부른 그는 엔리케를 대신해서 우리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두 분 덕분에 도련님께 별 탈이 생기지 않고 무사히 돌아오실 수 있었습니다. 정말이지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일찍 발견해서 다행이에요.”
나는 신분을 감추고 방문한 만큼 집사장에게 하대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의 신분이 궁금한 듯하지만 먼저 묻지는 않았다.
“그런데 하비에르 공자께서는 몸이 좋지 않은데도 어째서 훈련을 하고 계셨던 건가요?”
“아, 그건 말입니다. 몇 달 후에 열릴 검술 대회에 출전하실 모양이라 그럴 겁니다. 기사 서임을 받은 후 검술 대회에서 우승하시는 게 목표일 테지요.”
정식 기사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하는 건 알았는데 검술 대회 우승까지 노리는 건 처음 알았다.
‘오스카도 올해는 자기가 우승할 거라며 잔뜩 벼르고 있던데.’
무슨 소원이 있어서 그렇게 열심히 훈련하냐고 물어도 웃기만 할 뿐 대답해 주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면 작년 대회의 유력 우승 후보였던 에이단도 이번에 참가하는 걸까?
‘다들 혈기왕성하다니까.’
속으로 혀를 쯧쯧 찬 나는 편안한 얼굴로 잠든 엔리케를 한 번 본 후 침실을 돌아 나왔다.
집사장이 우리를 따라나서며 넌지시 물었다.
“한데, 도련님께는 어떤 분께서 도와주셨는지 전하면 좋을는지요.”
“그냥 함구해주세요.”
오스카를 오빠로 두고 있으므로 잘 알았다. 저 또래의 소년들은 대개 약한 모습을 보이면 자존심 상해하기 마련이었다.
거기다 지금 나는 신분을 위장하고 하비에르 저택에 들르기도 했고.
“그리고 너무 무리하지 않도록 집사장이 신경 써주시고요.”
“예, 알겠습니다.”
나는 망토를 꾹 눌러쓰며 저택을 나섰다.
***
엔리케는 눈을 떴다.
‘……이상하다.’
머리가 쪼개질 것처럼 두통이 엄습하던 것이 바로 전인데, 어째서인지 개운했다.
마치 오랜만에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돌이켜 생각해보니, 최근 들어 깊게 잔 적이 거의 없었다.
르네즈미 공주가 에르마노에 있을 때는 호위에 상단 일까지 겹쳐서 제대로 수면을 취하지 못했고, 가주 경쟁을 포기한 지금은 매일 훈련장에서 시간을 보내느라 쉬지 못했다.
‘기분 좋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서서히 잠에서 깨어나자 현실감이 들었다.
분명 훈련을 하던 중이었는데 눈을 뜨니 침대 위에 누워 있다니.
“쓰러진 건가…….”
엔리케가 자조적으로 중얼거릴 그때, 문이 열리고 집사장이 들어왔다.
“깨셨습니까, 도련님.”
“언제 정신을 잃은 건지 모르겠어. 우선은 씻고-.”
엔리케가 다리를 내리자 화들짝 놀란 집사장이 얼른 달려와 행동을 만류했다.
“아이고, 도련님. 쉬시지요. 무리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누가? 주치의는 아닐 테고.”
하비에르 가문의 주치의는 이미 엔리케에게 질릴 대로 질려 의사 특유의 잔소리를 집어치운 지 오래였다.
말실수를 해 버린 집사장은 헛기침하며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엔리케의 시선은 생각보다 집요했다.
“크흠. 도련님을 침실까지 옮겨 주신 분께서 그러셨습니다.”
“침실까지 옮겨줘?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가문 사람은 아니군.”
“크흐흠.”
대충 둘러대려다 엔리케의 예리한 지적에 정보까지 흘려버린 집사장은 결국 비밀을 지키는 것을 포기했다.
“누군지 말해 줘. 감사 인사를 해야 할 테니.”
하지만 집사장은 한참 잘못 짚고 말았다.
“검은 머리에…… 붉은 눈동자의 소년이었습니다.”
하필 메이블이 망토를 눌러쓰고 있던 탓에 얼굴을 본 건 에이단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뭐?”
엔리케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건 어째서일까.
아니, 그는 그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아세라드 백작이……?’
바야흐로 오해의 시작이었다.
***
“정말 끈기가 대단하시지 않습니까, 우리 아가씨. 허허허.”
“그런 면도 아주 어여쁘지 않나요. 어릴 때부터 고집스러운 면이 있다는 것을 일찍이 알아보았지요.”
홀홀홀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이들은 바로 하비에르 가문의 가신들이었다.
가문을 장악하던 키에트로 하비에르가 축출당한 후, 가주의 자리가 빈 하비에르 저택에서 그들의 기세는 가히 날개를 단 듯했다.
어쩌면 하비에르 공작가의 핵심을 흡수할 수 있다.
그 사실에 가신들은 웃는 얼굴로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사실 가주로 누가 되어도 상관없었다.
엔리케가 가주가 된다면 입맛대로 주무를 수 있으니 좋았고, 에밀리가 가주가 된다면 아들과 결혼시켜 가문을 장악할 수 있으니 좋았다.
하지만 역시 엔리케가 가주가 되는 게 편했다.
‘아무래도 어린 여자애가 다스리는 가문이라니, 놀림감이 되기 쉬우니.’
가신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했다.
머지않아 오늘의 회의를 주최한 주최자 에밀리 하비에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옆에는 엔리케도 함께였다.
가주 후보가 주최한 회의에 빠질 명분은 없기에 가신들은 비위를 맞출 겸 자리를 채웠다.
회의장의 모든 이들이 착석하자, 에밀리가 여유롭게 웃으며 인사치레를 건넸다.
“다들 식사는 하셨나요?”
“물론입니다, 아가씨. 저택 주방장 실력이 워낙 훌륭하잖습니까.”
“다행이네요. 긴 회의가 될 텐데 잘 먹어야죠.”
에밀리는 싱긋 웃으며 테이블 위에 두꺼운 서류를 올려놓았다.
가신들은 허허롭게 웃으며 서류를 흘긋 본 후 금세 관심을 껐다.
‘오늘도 시간 낭비를 하겠군.’
‘언제쯤 아가씨께서 포기하시려나.’
시작부터 가신들은 지루한 회의를 예견하며 에밀리의 비위를 맞추리라 생각했다.
“오늘 회의 주제도 이전 회의와 같습니다. 하비에르 가의 직계인 나, 에밀리 하비에르는 가주가 되고자 합니다.”
“이전에도 말했든 가주란 것은 하고 싶다고 되는 자리가 아닙니다, 아가씨. 알고 계시지요?”
제리보 남작이 아이를 타이르는 듯한 어조로 말하자 에밀리가 장부를 펼쳤다.
“가주 자리는 외롭고 고독하다는 것 충분히 압니다. 그런데 제리보 남작. 3년 전 우리 가문에서 받았던 광장 공사 대금은 어디다 쓰셨나요?”
지루한 분위기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에밀리가 시작부터 강한 한 방을 터트렸기 때문에.
“……예?”
“저번에 영지 시찰할 때 보니 남작가의 저택이 화려해졌던데, 거기에 쓰셨으려나……. 광장 보수 공사는 부실 공사 때문에 지나가다 다친 사람들이 수십인데.”
상냥하게 웃고 있는 얼굴이었지만, 내용은 전혀 상냥하지 않았다.
그제야 가신들은 에밀리가 펼친 장부의 존재를 의식했다.
장부라고 읽고, 치부책이라고 쓰는 그 물건을.
이 자리에 있는 자 중 에밀리와 엔리케를 제하고 그곳에 적힌 내용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제리보 남작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했다. 그 외에도 켕기는 게 많았기 때문에 함부로 반박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에밀리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짐작도 할 수 없었으므로.
정적이 내려앉은 틈을 타 엔리케는 질리도록 했던 가주직 포기 선언을 또 했다.
“이전에도 말했지만, 저는 가주 후보에서 사퇴합니다. 더불어 에밀리 하비에르가 가주가 되는 것을 지지합니다.”
지지 선언까지 덧붙여서.
에밀리는 보란 듯 장부를 덮으며 가신들을 둘러보았다.
“반대하실 분 있나요?”
“비열하게 얻은 권력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아가씨.”
에밀리는 그 말을 고스란히 돌려주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이 상황에 놓이게 된 건가 봐요, 안타깝게도.”
당신들이 비열하기에 권력을 내려놓게 될 거라는 일종의 예언 같은 경고였다.
가신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먼저 입을 여는 것을 피했다. 섣불리 나섰다가 피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에밀리가 자신들을 위협할 패를 꺼내 들었다는 것 자체가 충격이었다.
언제나 그들에게 에밀리는 하비에르 가문의 귀여운 아가씨였다.
결국 책임을 등에 업고 반대에 나선 것은 러셀리 자작이었다.
“그렇군요.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에밀리 아가씨께서 이 대가문을 잘 이끌어나갈 수 있을지 의문스럽습니다. 그도 그럴 게 자고로 여성이란 감정적이기에 일을 그르치기 마련이지 않습니까? 지도자로서 알맞지 않다고-.”
그때였다.
“그 말, 나를 향한 것으로 들리는군.”
회의장 문을 열고,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게 아니라면 혹, 황제 폐하를 모독하는가. 러셀리 자작?”
“도, 도노반 공작?!”
“레이디 하비에르와 약속이 있어서 잠깐 들렸네만.”
도노반 공작. 에르마노 제국의 한 축을 짊어진 도노반 가문 가주의 등장이었다.
졸지에 황제를 음해하려 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쓴 러셀리 자작의 얼굴은 시퍼레졌다.
놀란 건 에밀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순간 머릿속에 메이블이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조만간 선물 보낼게.”
“선물? 이번 여행 다녀와서 산 거야?”
“다르긴 한데, 비슷해!”
선물이 도노반 공작이었다니.
‘비슷하긴 뭐가 비슷해?!’
어찌 되었든 공작의 등장에 판세는 완전히 뒤바뀌었다.
***
하비에르 가문의 새로운 가주 등극에 대한 소문은 금세 퍼져나갔다.
어찌나 빠른지 당사자인 에밀리에게 편지를 받았을 때, 내가 이미 알고 있을 정도였다.
당연히 다음 가주가 되리라 생각했던 엔리케 하비에르를 제치고 어린 나이에 가주 자리를 꿰차게 된 소녀 가주, 에밀리 하비에르는 엄청난 화젯거리였다.
[메이블. 드디어 내가 가주가 되었어!]평소 유려하던 글씨체와 달리 잔뜩 흥분한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글씨체였다.
그 밑으로 가주가 되어 막막하지만 기쁘다는 심경이 두서없이 적혀 있었다. 흐뭇하게 웃으며 편지를 읽던 내 눈이 한 문장에서 딱 멈췄다.
[그런데 도노반 공작을 보내주겠다는 말은 안 했잖아!]“그거야 미리 알려주면 재미없으니까.”
그리고 나 또한 공작이 이렇게 흔쾌히 내 부탁을 들어줄 거라고 생각 못 했다.
나는 곧바로 도노반 공작을 만나기 위해 도노반 수도 저택으로 향했다. 나의 만남 요청에 공작은 곧바로 응해 주었다.
“짐의 부탁을 들어주어 고맙습니다, 공. 번거로웠을 텐데.”
“신하로서 군주의 명에 응하는 것은 무엇보다 큰 영예입니다.”
“하지만 도노반 공은 에밀리와 엔리케를 껄끄러워하였으니, 사실 부탁하기 조금 저어됐어요.”
“그건 오해십니다.”
공작이 담담한 어조로 반박했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하지만 공께서 그러지 않았나요. 하비에르 가문은 조심하는 게 좋겠다고.”
물론 그 말을 듣고 에밀리와 엔리케와의 교류를 끊지는 않았지만 늘 마음에 걸리긴 했다.
“제가 염려했던 것은 가문의 자제들이 아니라 키에트로 하비에르와 하비에르 가문의 가풍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자제들을 피하는 게 좋겠다는 의미로 들리셨다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찻잔을 내려놓은 공작이 말을 이었다.
“하면 송구하오나 정정하겠습니다. 하비에르 공작과 엔리케 하비에르는 폐하의 날개가 될 것입니다.”
“그런가요?”
“그들은 이미 폐하를 진심으로 섬기고 있지 않습니까?”
공작은 이미 확신한 듯했다.
엔리케와 에밀리를 더 이상 껄끄럽게 여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좋은 한편으로 옅은 한숨이 나왔다.
‘나, 황제가 체질인가?’
의도치 못하게 충성스러운 신하를 얻어 버렸다. 게다가 황제 자리에서 물러난다고 생각하니 제국의 안녕이 걱정되어 미칠 게 분명했다.
나의 미래에 대한 걱정은 우선 접어두고 눈앞의 도노반 공작에게 집중했다.
“바쁜데도 시간을 내어 짐의 부탁을 들어주어 고맙습니다. 사적인 부탁이니 감사 인사를 받을 만해요. 혹시 짐이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말하세요, 공.”
“있습니다.”
곧바로 나온 대답에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뭔가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도와줄 생각이 있었다.
공작이 입을 열기 전까지는.
“오스카를 설득해주십시오.”
“오스카요?”
“이제 그만 오스카가 황성에서 나와 도노반 가문의 후계자로서 경험을 익히기를 바랍니다.”
도노반 공작이 내게 부탁한 것은, ……오스카의 독립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내게 오스카를 황성에서 내보내라고?’
이보다 더 잔인한 부탁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