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113
〈 113화 〉 인간의 집념(2)
* * *
흑색 마탑주, 예투알.
오랜 시간, 마학에 종사해온 마법사는 불현듯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예투알은 자신이 약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수많은 마법사와 경쟁했다.’
천재라 불린 마법사들이 있었다. 산더미만큼 있었다. 그런 마법사들과 경쟁한 끝에 예투알은 흑색 마탑주의 자리를 차지했다.
재능에 취하지 않았다.
가진 재능만큼이나 노력을 했다.
천재라 불린 이가 남들보다 더욱 노력했다. 그렇게 예투알이 한평생 걸어온 마도(??)는 아름답다. 완벽하다고 부를만하다. 예투알은 그 사실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무력감을 느낀다.
한평생 느껴보지 못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
“······.”
그 시선은 성벽을 향한다.
마나가 휘몰아친다. 섬광이 번뜩이고, 굉음이 연달아 울려 퍼진다. 그곳은 이미 별세상이었다.
‘끼어들 수 없다.’
보는 것만으로도 죽음이 느껴진다.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예투알은 공포를 느낀다. 한낱 인간이 꿈꿀 수 없는 경지가 그곳에 있었다.
‘아니, 불가능하지는 않다.’
목숨을 버릴 각오를 다진다면. 쌓아 올린 모든 것을 한순간에 바칠 각오를 한다면. 잠깐이나마 저 경지에 발을 들일 수는 있다.
그러나, 예투알은 그리하지 않는다.
그럴 이유도, 용기도 없다.
“···대단하군.”
그렇기에, 그저 감탄할 뿐이다.
그 마도구들 말입니다, 좀 빌려주십시오.
한낱 인간의 몸으로 저곳에 끼어든 인물을 향해 에투알은 찬사를 보낸다. 경외심을 표한다.
부탁드립니다.
그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 맴돈다. 각오를 다진 강렬한 눈동자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예투알은 그에게 선뜻 빌려줬던 마도구들을 떠올려봤다.
흑색 마탑의 정수.
수십 가지의 주문을 각인해둔 마도구들.
그 마도구들이 가지는 가치는 천문학적이다.
부르는 게 곧 값이다. 예투알이 한평생에 걸쳐 만들어낸 걸작들이다. 결코 외부인에게 빌려줄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째서일까.
가져가게.
예투알은 사냥개에게 그것을 내주었다.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은 채.
매사에 냉철하고, 계산적이고, 손해 득실을 따지는 예투알로서는··· 자신이 했다곤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잠깐 미쳤나 보군.”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예투알의 표정은 썩 나쁘지 않다. 오히려 속이 후련했다.
‘어쩔 수 없었다.’
예투알은 그렇게 생각하고 만다.
하나의 인간이 목숨을 거는 장면을 보았다. 제 삶을 불태울 각오를 다진 눈동자를 보았다. 인간의 집념을 목격했다.
그것은 찬란한 빛과도 같다.
찬란한 빛에 인간은 이끌린다. 매료된다. 때로는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처리해야 할 일이 많겠어.”
예투알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밤의 끝이 찾아온다.
성벽의 너머로 해가 떠오르려 하고 있었다.
2.
차르르르륵!
칼트는 사슬 검을 쥔 손을 휘둘렀다. 사슬이 크게 출렁였다. 사슬에 묶인 쿤텔의 몸도 덩달아 흔들렸다. 칼트는 눈을 부릅떴다.
‘이미 성벽은 넘겼다.’
틈을 파고들어 함께 성벽을 뛰어내리는 것까진 성공했다. 남은 건 최대한 멀리 던지는 것뿐이다. 성벽을 오르지 못하게 해야 했다.
스릉.
그러나, 상대는 소드 마스터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검을 휘두를 수 있기에, 그들은 검의 초인이라 불린다.
서걱!
예리한 검격이 사슬을 끊어낸다.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쿤텔이 허공에서 몸을 비틀며 칼을 휘둘렀다. 제대로 된 자세도 잡지 않았거늘, 참격은 더없이 날카롭다.
핏.
“읏!”
칼트는 반사적으로 몸을 틀었다.
귓가에 칼바람이 스쳤다. 핏물이 튀었다. 어느새 땅은 다가오고 있었다. 칼트는 아슬아슬하게 낙법을 펼쳐 착지했다.
쿵!
칼트의 뒤를 이어 쿤텔이 착지한다.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성벽의 잔해들이 쌓인 평야에서, 칼트는 이를 까득 깨물었다.
‘···계획대로 될 리가 없지.’
이미 예상한 문제였다.
칼트는 입에 문 마도구의 상태를 확인했다. 마기를 정화하는 필터는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다.
‘···성능은 확실하다.’
팔과 다리를 움직여 본다. 육체를 보조하는 마도구들 역시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
“···후우.”
짧게 숨을 뱉으며 칼트는 흙먼지의 너머를 살폈다. 흙먼지 속에서 쿤텔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소드 마스터, 쿤텔.
그의 시체로 만들어진 사역마.
그것을 한눈에 알아본 칼트는, 이를 악물곤 쿤텔의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도,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군.’
그것은 외눈이다.
파여버린 눈동자에선 진물이 흘러내린다. 양팔은 부러져 너덜거리고, 검을 붙잡은 손도 성치 않다. 엄지와 검지가 뜯어질 듯 하다.
그에 비해 자신은 어떤가?
흑탑주의 온갖 마도구 덕에 몸에는 활기가 넘친다. 모든 감각이 잘 벼려진 칼날처럼 날카롭다. 가히 최상이라 부를만한 상태다.
그러나.
‘이길 수 없다.’
칼트는 확신한다.
칼트 또한 검(?)을 쓴다. 검을 수행했다. 그렇기에, 소드 마스터 쿤텔의 이름이 가지는 무게를 잘 알고 있다.
최강의 소드 마스터.
죽음의 칼과 검을 맞댄 전설적인 검사. 그 긍지 높은 검사에게 칼트 또한 지도를 받은 적이 있었다.
‘···무척이나, 훌륭하신 분이었다.’
긍지 높은 검사.
숭고한 이상을 가진 검의 초인.
무릇 검을 다루는 이들에게 있어, 소드 마스터 쿤텔은 이상과도 같은 존재였다.
용사와는 다르다.
기사들은 용사를 선망할지언정, 용사처럼 되고 싶단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용사는 별에게 선택받은 기적과도 같은 존재다.
그에 비해, 쿤텔은 어떠한가.
그 누구도 그를 선택하지 않았다.
그는 끝없는 노력의 끝에 초인의 반열에 들었다. 하나의 목적을 위해 삶을 갈고 닦았다. 그 삶의 끝에 쿤텔은 위업을 이루었다.
인간으로서 이루어낸 업적이다.
그렇기에 더욱더 빛나는 위업이다.
그처럼 되고 싶다 생각한 이들이 많았다. 칼트 또한 그들 중 하나였다. 칼트는 쿤텔을 존경했다.
그렇기에.
눈앞의 사역마에게 칼트는 분노를 느낀다. 긍지 높았던 검사의 시체가 능욕 받는 이 상황을 견딜 수가 없다. 그러나, 분노를 드러내진 않는다.
가라앉힌다.
차분히 숨을 내쉬곤, 칼트는 검을 고쳐 잡았다.
‘죄송합니다, 쿤텔 님.’
당신을 이기지 못하기에.
그러나, 당신을 막아야만 하기에.
당신이 이 성벽을 오르지 못하게 해야만 하기에.
‘저는, 당신을 필사적으로 막을 것입니다.’
칼트는 속으로 사죄를 올린다.
그것이 최소한의 예의임을 알기에.
‘부디, 이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쿤텔이 검을 낮게 끈다.
몇 번이고 보았던 동작이다. 땅을 끌며 다가오는 검격은 날카롭다. 흙먼지를 가르며 검이 솟구친다.
채엥.
칼트는 그에 응수한다.
칼과 칼이 맞부딪쳤다. 밀리는 것은 칼트다. 그러나, 칼트는 밀릴지언정 물러서진 않는다.
‘막아야 한다.’
하나의 목적을 위해 칼트는 목숨을 건다.
성벽 위의 라니엘이 그러하듯이.
3.
콰직.
손을 뻗어 글레투스의 팔을 움켜쥔다. 수십 겹의 마수를 벗겨낸 끝에 닿은 맨살이다. 라니엘은 온 힘을 다해 배교자의 팔을 뜯어냈다.
뚜둑, 뚜두두둑!
살을 뜯는 감각이 아니다. 누더기를 잡아 뜯는 느낌이다. 소름 끼치는 감각과 함께 배교자의 팔이 뜯어진다.
‘드디어 닿았다.’
뜯어진 팔을 보며 라니엘은 승리를 직감한다. 그러나, 방심하진 않는다. 라니엘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
‘내겐 성검이 없다.’
완벽하게 끊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니나 다를까 뜯어낸 팔의 단면에서 검은 구정물이 끈적하게 늘어졌다. 그것은 배교자와 연결되어 있다.
“너로는 안 돼.”
배교자가 속삭인다.
라니엘은 구정물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끊어지지 않았다. 구정물에선 계속해서 마수들이 쏟아져 나왔다.
“너는 별의 선택을 받지 못했으니까. 너는 용사가 아니니까. 너는 안돼. 끊을 수 없어.”
배교자가 말한다.
그 말에 라니엘은 귀 기울이지 않는다.
‘질리도록 들은 말이다.’
많은 사람이 라니엘에게 말했다.
너는 용사가 아니라고. 네가 발버둥 쳐 보아야, 재앙에게 닿을 수 없다고. 그러나 라니엘은 언제나 답을 찾아왔다.
재는 재로(Ashes to Ashes).
재가 불로 사윈다.
마수들이 타들어 가는 악취가 코끝을 찌른다.
탁.
라니엘은 타오르는 불길의 너머로 나아간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상처가 벌어졌다. 피가 쏟아져 나왔다.
‘몸은 이미 한계다.’
알고 있다.
‘수명을 더 바칠 수도 없다.’
그 또한 알고 있다.
영혼은 마모되어 있다. 라니엘 자신이 그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수명을 간다고 해도, 옛날처럼 수십 년 단위로 갈아 버릴 수 없게 됐으니까.’
마왕의 앞에서 수명의 절반을 바친 날.
수십 년만큼의 삶을 태웠던 그 날, 라니엘의 영혼과 육체는 이미 망가졌다. 허용량을 넘은 힘을 감당한 대가로 영혼은 마모되고 말았다.
육체가 바뀌었다 한들.
영혼이 변질됐다 한들··· 한번 마모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평소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그러나, 지금처럼 감당할 수 없는 것에 손을 뻗어야 할 순간마다 라니엘은 싫어도 깨닫게 된다.
‘여기가 마지막 선임을.’
넘으면 죽는다.
그리고 아직 죽을 수는 없다. 해야 할 일이 많기에 죽지 못한다. 궁지에 몰린 인간은 궁리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라니엘의 눈이 번뜩인다. 푸른 눈동자에 이채가 깃든다. 가늘게 뜬 눈은 승기를 붙잡는다.
쿠웅!
집념이 몸을 움직인다.
강타(Smite).
섬광이 쏟아진다. 화염을 빠져나오는 마수들이 강타에 꿰뚫려 사라진다. 라니엘은 한 걸음 앞으로 향한다. 피가 튀었다.
분쇄(Smash).
몰아치는 마수들의 파도에 구멍이 뚫린다. 출렁이며 무리가 흩어진다. 한걸음 다시 내디딘다.
키에에에에엑!
갑각룡이 입을 벌리며 돌진한다. 그 속으로 라니엘은 들어간다. 내부서부터 박살 내며 빠져나온다. 용사, 카일이 그러했던 것처럼.
턱.
걸음걸이는 느리다.
느리지만 확실하게 한 걸음씩 내디딘다. 피를 게워내면서도 그 걸음걸이는 흐트러지지 않는다.
무엇으로도 라니엘을 막지 못한다.
수백의 마수가 물결치나 라니엘은 그마저도 뚫어낸다. 몸은 굼뜨다. 육체는 한계에 맞이했다. 그렇기에, 라니엘은 효율을 추구한다.
“···그렇구나.”
배교자가 웃음을 흘린다.
과거를 추억하는 아련한 웃음이다.
“이런 것 마저 닮았구나.”
그 몸을 움직이는 건 집념이다.
쿠웅!
결국 라니엘은 글레투스의 앞까지 도달한다.
그녀의 시선은 배교자의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구정물에 고정되어 있다.
번쩍.
라니엘의 손안에 별빛이 뭉친다. 삶을 태우고 남은 잔재다. 별빛의 찌꺼기를 그러모아 라니엘은 한 줄기의 빛을 만들어낸다.
마지막 일격이다.
라니엘은 눈을 부릅뜬다.
‘목적은 베는 것.’
구정물을 끊어내야 한다.
그것을 위한 가장 적합한 형태는 무엇인가? 라니엘은 자신이 보았던 것들에서 답을 찾는다.
성검(??).
어렴풋이나마 그 형태를 그린다.
라니엘의 손안에 뭉친 빛줄기가 날카롭게 벼려진다. 라니엘은 가볍게 팔을 휘둘렀다. 백금색 빛무리가 일었다.
서걱.
빛줄기가 구정물을 베고 지나간다. 빛은 허공으로 흩어진다. 베였다는 결과만이 남는다. 배교자는 흩어지는 빛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정말이지······.”
그녀가 눈을 감았다 떴다.
황홀한 표정을 지은 그녀가 입을 열었다.
“네 승리구나.”
모든 사역마가 사라졌다.
배교자의 몸이 바스러진다. 그녀를 현실에 붙잡아 두던 연결점이 끊어졌다.
“아아, 정말 안타까워.”
배교자가 하나 남은 손을 뻗는다. 그 손이 라니엘의 볼을 매만진다. 라니엘은 그것을 쳐내지 못한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남지 않았기에.
“한 걸음만 더 왔다면 나를 죽일 수 있었을 텐데. 아이야, 한걸음이 모자랐구나.”
그녀가 달뜬 목소리로 라니엘의 귓가에 속삭였다.
“하지만 실패는 아니지.”
글레투스의 심장이 두근, 하고 뛴다.
심장에서 한 줄기의 빛이 뽑혀 나왔다. 그것을 거둬 가는 것은 천칭이다.
“내게 마지막 남은 기회가 사라지고 말았어. 그래서, 나를 닮은 아이가 필요했던 건데··· 그마저도 실패하고 말았네.”
그녀가 아쉽다는 듯 제 입술을 핥았다.
“잿빛.”
글레투스의 녹빛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다음엔, 네가 날 찾아와야 해?”
“반드시.”
속삭임에 라니엘이 답한다.
“넌, 내가 반드시 죽인다.”
“기대하고 있을게.”
이윽고 배교자의 몸이 흩어진다.
······한 명의 인간에 배교자는 패배했다. 인간은 영원을 살아온 재앙에게서 단신으로 승리했다. 도시를 지켜냈으며, 재앙의 목적을 저지했다.
위업이다.
위업이라 부를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빠득.
인간은 그에 만족하지 못한다.
만족하지 못하기에 분함을 느낀다. 그녀는 눈을 부릅뜬 채 배교자가 사라진 곳을 한동안 바라봤다.
* * *
끝났다.
나는 짧게 숨을 토했다. 한 번에 몰아쉰 숨과 함께 다리에 힘이 풀렸다. 성벽의 난간 위에 털썩, 하고 나는 주저앉았다.
“쿨럭, 퉷.”
입에 씹히는 뼛조각을 뱉었다.
두어 번 목구멍에 걸린 핏덩이를 뱉어내고 나니 그제야 숨이 좀 쉬어지는 느낌이었다.
‘더럽게 아프네.’
망루의 잔해에 머리를 기댔다.
또 수명을 끌어다 썼다. 많이 태우지는 않았지만, 그 뒷감당을 할 생각을 하니까 골이 땅겼다.
“···좆같네.”
결국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건 언제나와 같은 욕지거리다.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배교자를 죽이지 못했다.
딱 한걸음이 모자랐다.
‘···그래도, 수확이 없는 건 아니야.’
나는 천천히 팔을 들어 올렸다.
내 손에는 뜯어낸 글레투스의 팔이 쥐어져 있었다. 어째서인지, 이것만큼은 배교자와 함께 사라지지 않았다.
‘팔을 자른 건 이걸로 두 번.’
그러나, 첫 번째와는 다르다.
그때는 죽음의 칼이 글레투스의 팔을 회수해 갔다. 이번에는 아니었다.
‘무언가 이유가 있다.’
연구 해 볼 가치가 있었다.
나는 글레투스의 팔을 쥔 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반파된 성벽에 서서 내려다본 건 성벽의 바깥이다.
‘칼트.’
마지막 순간에 칼트가 개입했다. 성벽 바깥으로 사역마를 끌고 떨어졌다. 칼트가 아니었더라면, 승리를 점칠 수 없었을 것이다.
‘무사하면 좋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걸음을 옮겼다.
성벽의 잔해를 밟으며 성벽의 아래로 내려왔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탁 트인 초원이다.
터벅.
그리 멀리 갈 필요는 없었다.
칼로 벤 듯한 흔적이 길게 남은 곳이 있었다. 땅이 파이고, 갈라진 곳으로 걸어갔다.
“아, 오셨습니까.”
그곳에는 칼트가 있었다.
쪼개진 성벽의 잔해에 등을 기댄 채 칼트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
나는 말없이 칼트를 바라봤다.
칼트의 턱밑에서 눈가까지 길게 흉터가 남아있다. 부서진 마도구의 잔해가 바닥에 나뒹굴고 있다.
“켁, 쿨럭.”
칼트가 헛기침과 함께 핏덩이를 뱉었다.
나 못지않게 칼트도 중상이었다. 나는 부러진 발을 질질 끌며 칼트에게로 걸어갔다.
“오우. 완전 좀비가 따로 없습니다.”
“넌 어떻고 임마.”
“이정도야 멀쩡합니다.”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칼트가 팔을 휘두르는 시늉을 했다. 멀쩡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나 본데, 팔을 휘두르자마자 칼트의 표정이 확 구겨졌다.
“윽.”
“에휴.”
나는 한숨을 쉬며 칼트의 곁에 앉았다. 칼트와 같은 벽에 기댄 채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고맙다.”
“오래 살고 볼 일이네요. 선배님께 감사 인사도 다 들어보고.”
“뭐래, 자주 고맙다고 했거든?”
칼트가 쿡쿡 웃음을 흘렸다.
나는 그런 칼트에게 물었다.
“왜 달려들었냐?”
“예?”
“죽을 수도 있었잖아. 아니, 오히려 살아남은 게 기적이지. 상대는 소드 마스터였잖아.”
“그렇죠. 이야, 역시 쿤텔 님 답더군요. 진짜 죽는 줄 알았습니다.”
“진짜 죽을 뻔 한 거겠지.”
“······.”
“왜 그랬냐?”
네게 그럴 이유는 없을 텐데.
나는 칼트를 보았다. 칼트는 나를 보지 않았다. 녀석은 먼 하늘을 바라본 채 말했다.
“그야, 뭐.”
칼트가 어깨를 으쓱였다.
“선배님이목숨을 거셨지 않습니까.”
“······.”
“수명을 갈으신 거 아닙니까. 선배님 성격이면 분명 그랬을 테죠.”
칼트가 장난스레 웃었다.
“선배님이 수명까지 갈아가며 앞장서시는데, 제가 어떻게 가만히 있겠습니까? 뭐라도 해야죠.”
“너 은퇴했잖아, 임마.”
“선배님도 은퇴하셨잖습니까.”
“···그렇게 말하니까 또 할 말이 없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뭐, 그래도 어떻게든 됐잖습니까.”
“그러게 말이다.”
칼트가 내게 주먹을 내밀었다.
나는 툭, 하고 그 주먹에 내 주먹을 맞부딪쳤다.
“악.”
“윽.”
가볍게 맞부딪친 거지만, 나나 칼트나 반병신이나 다름없었기에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것이 우스워서, 우린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수고했다, 칼트.”
“선배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우리는 성벽의 잔해에 등을 기댄 채 초원의 너머를 보았다. 지평선 너머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해가 떠오른다.
길었던 밤이 가고 아침이 온다.
밤의 도시 카디낙에서 맞이하는 아침은 무언가 묘한 기분이 들게 한다.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나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더 열심히 키워야겠네. 더 굴려야겠어.”
“예?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그냥, 그런게 있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