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112
〈 112화 〉 인간의 집념(1)
* * *
배교자, 글레투스.
그녀는 오래전의 일을 떠올린다. 지금에 와선 고대라 불리우는 까마득한 과거의 일이다.
글레리아.
‘글레리아, 벨 아르미아스.’
그런 이름으로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
많은 이들의 기도를 받았다. 드높은 존재의 뜻을 대행했다. 지루한 삶이었지만 지금에 와선 추억이 된 시간이다.
글레리아.
그 시기에는, 언제나 자신의 곁을 함께했던 마법사가 있었다. 그는 현명했다. 잿빛 머리칼이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또 지랄을 쳐놨더군, 글레리아.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
네 지랄이 하루 이틀이어야지. 너, 내가 준 의학 서적을 읽기는 한 거냐? 치유 마법을 쓸 때는 우선 뼈를 맞추고 써야 한다니까?
그치만, 어렵단 말이에요.
돌겠군. 따라와라. 차라리 내가 가르치는 게 빠르겠군.
투덜대면서도 자신을 챙겨주는 남자였다.
고마워요, 아르미엘.
이름으로 불러라. 썩 좋아하는 세례명은 아니니.
난 이쪽이 더 마음에 드는걸요?
모두가 자신을 다른 존재로 볼 때, 그만큼은 자신을 동등한 인간으로 보았다. 글레리아는 그 시선이 좋았다. 그가 툭툭 던지는 무심한 말이 좋았다.
좋았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간다.
수많은 일이 있었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으리라 여긴 빛이 사라졌다. 별은 침묵했다. 알고 있던 것들이 무너졌다. 마법사는 모든 것을 포기했고, 검사는 제 긍지를 버렸다.
파멸의 끝에 글레리아는 글레투스가 됐다.
배교자가 된 여인은 눈을 깜빡인다. 흐르고 흐른 시간은 다시금 현재로 돌아온다. 누군가의 이를 가는듯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너, 지금···.”
눈앞에서 잿빛 머리칼이 흔들렸다.
흔들리는 머리칼 너머로 푸르른 눈동자가 번뜩인다. 눈동자 속에서 요동치는 감정이 보인다.
‘아아.’
글레투스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어떻게 할 거야, 잿빛?”
과거를 떠올리며 현재를 본다.
최초의 잿빛을 닮은 아이는 사랑스럽다. 사랑스러워서, 당장이라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다.
“나를.”
손을 뻗어 아이의 볼을 매만진다.
“나를, 어떻게 해 줄 거니?”
잿빛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그 표정마저도 기억 속의 남자를 닮아있어, 글레투스는 그만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파삭.
맺어진 계약이 자기 몸을 옭아맨다. 몸에 금이 간다. 주어진 시간은 길지 않다.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글레투스는 팔을 뻗었다.
아아.
부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과거를 추억할 수 있기를.
2.
차세대 용사, 클로에.
그녀의 구출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지하수로에서 그들이 이동한 흔적을 찾았다. 자그마한 흔적이라도 발견됐다면 칼트의 추적을 피해 가진 못한다.
‘흑색 마탑주의 도움 덕분이다.’
자발적으로 조사를 하던 흑마탑주가 흔적을 찾아낸 덕분이다. 지하수로에서 그와 마주친 칼트는 함께 임무를 수행했다.
흑마탑주는 유능한 마법사였다.
일은 순식간에 처리됐다. 클로에의 신원을 보호하는데 까진 그리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왕도로 호위하도록.”
남은 하운드들에게 지시를 내린 뒤, 칼트는 곧장 발걸음을 틀었다. 그는 다른 하운드들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어서 돌아가야 한다.’
괜히 마음이 급했다.
불길한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카디낙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었기에, 칼트는 금방 카디낙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카디낙에 돌아온 순간.
칼트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
창칼을 들고 경계를 서야 할 기사들은, 멍하니 어느 곳을 바라보고 있다. 칼트는 기사들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보았다.
쿵, 쿠웅.
그 시선이 향한 곳은 성벽이다.
콰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성벽이 무너지고 있다. 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카디낙을 수호했던 벽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돌무더기가 떨어진다.
쿵.
땅이 흔들린다.
먼지가 피어오른다.
“···아.”
“아아···.”
기사들은 힘없이 탄식을 내뱉는다. 자신들이 지켜야 할 도시의 성벽이 무너져 내리고 있음에도,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
칼트 또한 침묵한다.
다른 기사들은 보지 못한다. 그러나, 초인의 반열에 약간이나마 발을 담그고 있는 칼트의 눈에는 보인다.
날뛰는 잿빛 마법사의 모습이.
그녀와 마주하고 있는 재앙의 모습이.
칼트의 눈은 빠르게 전황을 읽는다. 가까이에서 라니엘을 보조한 칼트는 그녀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전황을 분석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안된다.’
결론을 내린다.
‘이대로는, 선배님이 진다.’
배교자 하나뿐이라면 괜찮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대는 배교자 하나가 아니다. 배교자의 곁을 지키는 영문 모를 무언가가 있다. 그것이 라니엘을 궁지로 내몰고 있다.
빠득.
칼트는 이를 악물었다.
자신은 저곳으로 가지 못한다. 가보아야 도움이 되리란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아득히 먼 경지에서 이루어지는 싸움이다.
그때였다.
“하운드. 내 말이 안 들리나?”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칼트는 휙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봤다.
“···흑색 마탑주?”
“이제야 말을 좀 들어주는군. 어찌나 급하게 달려가는지··· 쫓느라고 진땀을 빼야 했다네.”
흑색 마탑주, 예투알.
그가 숨을 몰아쉬며 말을 이었다.
“벨노아가 이곳에 있다고 들었다. 그래서, 구출에 함께하겠다고 말을 하러 왔더니만······.”
그가 헛웃음을 흘리며 성벽을 흘겨봤다.
“아무래도, 그럴 상황은 아닌 것 같군.”
성벽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예투알은 마법사다. 마법사이기에, 그는 성벽에서 범람하는 마나의 흐름을 볼 수 있었다.
예투알은 눈을 가늘게 떴다.
시야를 넓혀 성벽의 상황을 살폈다.
‘······미쳤군.’
예투알은 헛숨을 삼켰다.
‘도대체 저것이 뭐란 말인가?’
그리고, 왜 저곳에 라니아 교수가 있단 말인가. 그녀가 상대하고 있는 존재는··· 저 불길한 존재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무엇인지 알고는 있다.’
알고는 있으나,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예투알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라니아 반 트리아스.”
예투알의 시선이 칼트에게 향했다.
“그녀가 상대하고 있는 것이, 내 눈이 잘못된 건 아니라면 말일세······.”
그가 말했다.
“배교자, 글레투스가 아닌가?”
강한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배교자를 단신으로 상대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강하다는 단어만으로는 표현이 되질 않는다.
“설마.”
예투알은 떠오른 추측을, 어쩌면 몇 번이고 생각해본 가능성을 입에 담았다.
“저 소녀가 잿빛······.”
“흑색 마탑주.”
칼트의 목소리가 예투알의 뒷말을 끊는다. 칼트의 눈동자가 똑바로 예투알을 향한다. 그 눈동자는, 먼 곳에서 싸우고 있는 라니엘의 것과 닮아있다.
“하나, 부탁 좀 하겠습니다.”
가능성을 잡은 눈동자.
잿빛 마법사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좌해왔던 기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와 닮게 되었다.
붙잡은 가능성을 놓치지 않는다.
제 몸을 불사르는 한이 있더라도.
“그거, 제게 빌려주십시오.”
칼트가 무언가를 가리켰다.
예투알이 눈을 깜빡였다. 그가 그 말을 이해하는데 까진 그리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진심인가?”
“예.”
“어디에 쓸지는··· 뻔하겠군. 자네, 저곳에 끼어들 생각인가?”
“그렇습니다.”
“별로 추천하진 않네만.”
칼트가 칼자루를 매만지며 말했다.
“그래도,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3.
쩌억!
충격과 함께 몸이 붕 떴다. 망루를 무너트리며 글레투스의 몸이 멈췄다. 고통은 없다. 피해도 없다. 글레투스는 고개를 들었다.
탁.
라니엘이 땅을 박찬다.
코앞까지 다가오는 주먹을 보며 글레투스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았다. 미소 지을 뿐이다.
서걱.
쿤텔이 검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검격이 튀어 오르는 돌무더기를 부드럽게 벤다. 칼끝이 향하는 곳은 라니엘의 목덜미다.
핏.
라니엘이 몸을 비틀며 검을 막는다.
완전히 막아내진 못한다. 라니엘의 팔뚝에서 핏물이 튀어 올랐다. 상처가 늘어난다.
줄곧 그런 식이었다.
글레투스의 몸에는 상처 하나 남지 않았다. 그에 비해, 라니엘의 몸에는 상처만이 늘어간다.
베이고, 물리고, 부러진다.
그러나, 멈춰 서지는 않는다. 그 눈동자가 흔들리는 일도 없다. 의지를 품은 눈동자는 결연하다.
‘계속해서 달려드는구나.’
글레투스는 라니엘을 바라봤다.
천년에 가까운 시간을 살아온 그녀의 눈에, 소녀의 삶은 찰나에 불과하다.
인간의 삶은 짧다.
덧없이 짧은 삶은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가고 만다.
짧디짧은 시간에 무엇을 남길 것인가?
찰나에 불과한 삶이 의미가 있는가?
예로부터 수많은 종족은 인간을 보며 그렇게 생각해 왔다. 영원에 가까운 세월을 사는 엘프는 인간을 비웃었다. 마인들은 인간의 약함을 조롱했다.
인간은 비웃음과 조롱 속에 살아갔다.
그러나, 글레투스는 알고 있다.
‘언제나, 별에게 선택받는 것은 인간이다.’
짧은 삶을 불 사지르는 이들이 있다.
대의를 위해 제 삶을 기꺼이 바치는 이들이 있다. 하나의 목적을 위해 삶을 갈고닦는 이들이 있다.
찰나를 살아가는 그들의 삶은 찬란히 빛난다.
“아아.”
찬란함 앞에 빛을 잃은 여인은 신음한다.
“아름답구나.”
피를 토하며 소녀가 도약한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사방으로 핏물이 튀었다. 그녀는 끊임없이 저항한다. 제 몸을 움직인다. 그 모든 게 무의미하지는 않다.
퍼석!
라니엘의 주먹이 쿤텔의 팔을 후려쳤다. 썩어 문드러진 팔은 쉽게 바스러졌다.
파바바바박!
수십 발의 강타가 쏟아진다. 그녀의 팔뚝이 환히 타오른다. 섬광과 함께 밀려드는 주문 다발에 쿤텔의 몸이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철퍽.
기어코 쿤텔은 한쪽 눈을 잃고 만다.
쏟아지는 마수들과 쿤텔을 동시에 상대하면서도, 라니엘은 조금도 밀리지 않는다. 오히려 압도한다.
‘아무리 약화되었다곤 한들······.’
배교자가 만들어낸 쿤텔은 걸작이다.
그것을, 라니엘은 압도하고 있다.
촤악.
피가 흩뿌려졌다.
시뻘겋게 충혈된 라니엘의 눈동자가 글레투스를 향한다. 글레투스는 그 눈을 마주했다.
강렬한 시선.
집념이 느껴지는 눈동자.
그리고, 기억 속의 그와 닮은 눈동자.
“···아하.”
글레투스는 황홀한 미소를 지었다.
라니엘의 몸은 별빛으로 빛나고 있다. 그것은 축복받은 이들의 별빛과는 다르다.
‘삶을 태워 만들어낸 별빛.’
가진 것을 태워 만들어낸 빛.
짧은 삶이 타오르며 번쩍이는 찰나의 빛.
한순간에 불과하기에 아름다운 빛.
투둑, 투두두두둑!
라니엘이 쿤텔의 팔을 잡아 뜯는다.
칼을 쥔 손가락을 부러트리고, 그 몸을 걷어차 날려 보낸다. 그렇게 만들어진 틈을 향해 그녀가 발을 밀어 넣었다.
쿠웅!
땅을 찍음과 동시에 벽돌이 튀어 올랐다.
그녀가 힘을 주어 발을 내딛자, 그녀의 몸에 난 상처들에서 피가 쏟아진다.
후두둑.
쏟아지는 건 피뿐이 아니다.
사방에 흩날리는 잿더미가 한순간에 타오른다. 섬광과 함께 몰아치는 열기가 마수들을 지운다.
“아.”
글레투스가 탄성을 내질렀다.
열기를 뚫고 소녀가 손을 뻗는다. 그 손이 향한 곳은 이계와 연결된 글레투스의 팔이다.
정말로 닿는다.
몸을 보호하는 마수는 불타 없어졌다.
순간이지만, 글레투스는 최후를 직감한다.
그러나.
‘아직 안 돼.’
그녀의 시선은 라니엘의 너머를 향한다.
어느새 몸을 추스르고 달려든 쿤텔이 칼을 휘두르고 있다. 가니칼트의 칼에 몸이 베이면서도 칼을 휘둘렀던 집념을 가진 인물이다.
시체가 되어서도 그 집념은 사라지지 않는다.
더없이 날카로운 검격이 라니엘의 목을 노린다.
스릉.
라니엘의 주먹보다 쿤텔의 칼이 조금 더 빠르다. 곧이어 다가올 미래에 배교자는 미소 지었다.
‘스승의 검에 베여 죽는 최후.’
다가올 비극적인 결말.
잿빛의 목을 거둬 갈 생각에 배교자의 녹 빛 눈동자가 번들거린다. 다가올 승리를 확신한 그녀의 시야가 좁아진다.
그렇기에.
글레투스는 이변을 놓치고 만다.
탁, 하고.
누군가 성벽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검은 로브가 펄럭였다. 배교자가 눈을 깜빡인다. 생각지 못한 존재가 전황에 껴들었다.
차르르륵!
그가 사슬이 매달린 검을 휘둘렀다. 사슬의 끝이 검을 휘두르려던 쿤텔의 몸에 감긴다. 한 쪽 눈을 잃은 쿤텔은 그것을 곧장 알아차리지 못한다.
한쪽 눈을 잃었기에.
지속된 싸움으로 움직임이 둔해져 있기에.
승리를 확신하여, 시야가 좁아졌기에.
한낱 인간이 휘두른 사슬에 쿤텔은 반응하지 못했다. 그의 자세가 흐트러진다. 그리고, 인간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쿤텔에게 달려들었다.
차라락!
쿤텔을 붙잡은 채 그가 성벽의 너머로 뛰어내린다. 뛰어내리기 직전 그가 말했다.
“가십시오, 선배님.”
추적자, 칼트.
그가 목숨을 걸고 전황에 변수를 만들어낸다. 만들어진 변수를 라니엘은 놓치지 않는다.
콰직.
라니엘의 손아귀가 글레투스의 팔을 움켜쥐었다.
한 인간의 집념이 영원을 살아온 재앙에게 닿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