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124
〈 124화 〉 북방으로 향하는 길(2)
* * *
집사장 세바스.
이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초로의 노인은 오랫동안 그레이스 가문의 집사로 일해왔다. 일생의 태반을 그레이스 가(家)를 위해 바친 것이다.
‘오랜 세월이었지.’
지금에야 짤막한 감상을 곱씹을 뿐이지만··· 그는 고작 한 줄의 문장으론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숱한 고난과 역경을 넘어왔다.
북방의 주인.
그렇게 불리는 그레이스 가문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평범이란 단어와는 거리가 멀다.
‘일반적인 귀족과는 다르다.’
사치와 허영을 즐기지 않는다. 자신을 꾸미려 들지도 않는다. 날것 그대로의 삶을 살아가는 그들은 귀족이라기보단··· 차라리 전사에 가깝다. 다른 귀족들이 차를 홀짝이며 사교회나 무도회 따위를 개최할 때, 그레이스 가문은 설산의 오크 한 마리를 더 사냥한다.
요컨대, 사고방식 자체가 다르단 것이다.
무척이나 평범한 사고방식을 가진 세바스였기에, 그레이스 가문에 적응하는 데는 오랜 시간을 필요로 했다. 떠올려보면 참으로 지난한 세월이었다.
‘직설적이고, 꾸밈이 없고, 경의를 표하는 방식도 다르고, 사고방식이 단순해 자칫했다간 모자란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름의 신념이 있는 훌륭한 가문이다.
그렇기에, 세바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인 ‘라크 반 그레이스의 보필’에 최선을 다했다. 최소한 어디 가서 무례한 행동은 안 하게끔 예의를 가르쳤으며, 숙녀에 대한 배려를 학습시켰다.
‘분명, 그랬을 텐데.’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세바스는 조금 전 들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너 나한테 도끼도 집어던졌잖아.
그랬었죠.
발길질도 하고 막 그랬고.
···? 예, 그랬긴 했죠.
북방에선 착하고 순했던 도련님이 왕도에 가더니, 고삐 풀린 망나니가 되어있었다.
‘재교육이 필요하겠군···.’
세바스는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곤 살짝 고개를 돌려 주인이 타고 있는 마차의 객실을 흘겨보았다. 주인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누군가의 말을 경청하고 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주인의 곁에 앉은 여인이 하나 있다.
흘러내린 잿빛 머리칼과, 푸르른 눈동자는 그녀의 상징과도 같다. 그녀에 대한 소문은 세바스도 잘 알고 있었다.
라니아 반 트리아스.
왕도 최대 규모의 마학 아카데미, 아플리아에 혜성같이 등장한 교수. 그녀의 수준 높은 수업과, 독특한 외모 탓에 귀족의 사교회에도 종종 그 이름이 올라오곤 했다.
잿빛 머리칼을 가진 아름다운 영애.
그 이름 높은 아플리아의 교수.
트리아스의 잿빛 백합.
사실, 그녀에 대한 소문이 돌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무려 잿빛 마법사를 키워낸 트리아스 가문의 외동딸이다.
독특한 외모는 물론이요, 아플리아의 교수직을 맡음으로써 그 마학적 지식도 검증된 셈이다. 귀족가의 자제들이 흥미를 느낄만한 요소란 요소는 전부 가지고 있는 여인이다.
‘사교회에 나온다면, 분명 중심이 되겠지.’
그러나, 그녀는 그 어떤 사교회에도 나오지 않았다. 아플리아의 관계자가 아니라면, 그녀의 얼굴을 본 귀족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베일에 싸인 여인.
신비로움을 간직한 인물.
세바스는 그녀의 모습을 흘겨봤다.
확실히, 귀족가의 자제들이 환장할 만도 하다. 작은 움직임에도 찰랑이는 잿빛 머리칼과 단아한 인상이 맞물리니, 어째서 그녀에게 ‘잿빛 백합’이란 별명이 붙었는지 이해가 간다.
‘···잘 어울리는군.’
세바스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인다.
라크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제법 그림이 된다. 난동을 피우는 제 주인에게 억지로나마 격식있는 옷을 입혀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응, 그러니까 ···할 때는······.
그나저나, 무엇을 저리 즐겁게 이야기 하는 걸까.
“흠.”
세바스는 살짝 귀를 가져다 댔다.
집사로서 할만한 행동은 아니었으나, 혹시나 제 주인이 실수를 할까 싶은 걱정이 든 까닭이다. 귀를 가까이하니 말소리가 선명히 들렸다.
예, 그래서 이런 식으로···.
그래, 그렇지.
교수와 학생답게 무언갈 가르치는 걸까?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세바스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도 잠시다.
트롤의 목은 두껍거든. 그걸 꺾을 때는 이렇게, 손가락을 목뼈 틈새에 꽂아넣고···.
이어진 말에 세바스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아하, 그럼 관절을 끊을 때는···.
그것도 비슷해. 너 도끼 두 자루 쓰잖아? 내가 아는 사람한테 들은 건데, 한 번에 못 끊겠으면 못하고 망치를 쓰듯이 도끼를 써봐.
예?
도끼 하나를 박아놓고, 끊어질 때까지 두들기는 거지. 뒤져라 두들기면 끊어질걸? 야, 열 번 찍어서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잖아.
가르침은 맞다.
맞긴 한데··· 예상했던 것관 전혀 다른 쪽의 가르침이다. 세바스는 파르르, 떨리는 눈동자로 마차의 내부를 들여다봤다.
계속 찍어. 뒤질 때까지.
과연···.
어깨를 으쓱이는 교수와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주인의 모습이 보인다. 얼핏 보면 가르침을 주는 선생과 깨달음을 얻은 학생의 모습처럼 보이지만···.
‘이게··· 맞나?’
오가는 말의 내용이 심히 과격하다. 세바스는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역시, 도련님이 추천하신 분 답군.”
잿빛 백합.
트리아스의 꽃.
그렇게 불리는 트리아스가의 영애의 정체를 조금이나마 맛본 기분이다. 입안 가득 맴도는 매콤함에 세바스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2.
북방은 사시사철 몰아치는 눈 폭풍 탓에 마나의 흐름이 수시로 흐트러진다. 그게 무슨 소리냐면, 전이 장치를 사용할 수 없다는 뜻이다.
‘사실, 전이 장치를 쓸 수 있는 데가 드물지.’
단거리가 아닌 장거리라면 더더욱 말이야.
텔레포트라는 주문 자체가 실전에서 이용하기가 불가능에 가까운 주문이다. 좌표로 지정한 위치에 아주 작은 이변이라도 발생하면, 텔레포트는 시전자를 죽이는 주문으로 탈바꿈하곤 했으니까.
하물며, 눈보라가 몰아치는 북방으로 장거리 텔레포트를 한다는 건··· 자살행위에 가깝다.
그 탓에 마차(??)를 타고 이동하고 있었지만··· 딱히 불편함이 느껴지진 않았다. 마차의 크기도 크기지만, 운용되는 마나가 어찌나 매끄러운지 흔들림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이 내겐 마냥 낯설기만 했다.
“···마차가 편하긴 하네.”
“예?”
“아무것도 아냐.”
나는 턱을 괸 채 창밖을 흘겨봤다.
빠른 속도로 풍경이 휙휙 지나갔다. 마차를 타고 이동한다는 것 자체가 내겐 좀 낯설었다.
‘그야, 전선 돌 때는 다 뛰어다녔으니까.’
마기가 흘러넘치는 마경(??)이다.
그런 곳에선 마차(馬?)는 물론이고, 마나로 움직이는 마차(??)도 사용할 수 없었다.
‘날밤을 새서 걸었지. 몰려드는 마수랑 싸우는 건 기본에, 마경은 함정투성이였으니까···.’
밟는 곳마다 함정이다.
지랄맞은 해골바가지가 심어둔 주문 지뢰를 해체하고, 결계를 박살 내며 강행하는 게 일상이었다.
‘마차를 타고 편하게 이동?’
나는 피식, 하고 웃음을 흘렸다.
이런 부분에서 내가 전장에서 은퇴했음을 체감하곤 한다. 뜬금없는 부분에서 느끼는 이런 낯섦이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끼익.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마차가 멈춰 섰다.
똑똑, 하고 문을 두들긴 집사가 말했다.
“마차의 마나 보충 겸 잠시 쉬어갔다 할까 합니다. 식사를 준비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식사를 준비해준다고?
나는 로브 안에 우겨 넣어둔 식량들을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라크.”
“예, 교수님.”
“···요즘은 여행하면서 밥도 차려 줘?”
“예?”
라크가 무슨 소릴 햐나는 듯 날 바라봤다.
“어··· 요즘이 아니라 원래 주지 않습니까?”
“그런가···?”
조리도구까지 챙겨왔는데, 아무래도 필요가 없을듯싶었다.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마차에서 잠시 내렸다. 잠깐 공기라도 쐴 생각이었다.
“끄응···.”
늘어져라 기지개를 켰다.
해가 저물어 주변이 어둑어둑했다. 원래대로라면 야영을 준비할만한 시간이었다. 나는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숲, 공터, 확 트인 곳. 모닥불은 대충 잔가지들 꺾어다가 지피면 될 거고···.’
시선은 자연스레 숲으로 향한다.
천막을 칠만한 장소와 몸을 숨길만 한 곳이 자연스레 눈에 들어왔다. 버릇처럼 숲 주변을 서성이다 말고, 나는 잠시 멈춰 섰다.
“···이것도 병이네.”
그리곤 피식, 하고 웃음을 흘렸다.
애초에 야영할 필요가 없었다. 마차는 정해진 길을 따라 달린다. 밤낮을 가리지 않는단 소리다. 만에 하나 야영을 하게 되더라도··· 호위병들 사이에서 편하게 야영하게 되겠지.
불침번을 정할 필요도.
방음 주문을 펼 필요도.
주문 사이로 새어 나오는 씨팔년들의 신음에 잠을 뒤척일 일도 없다는 것이다.
“하여간···.”
내가 정말 은퇴를 하긴 했구나.
이번 여정은 정말 마음 편하게, 여행 가는 기분으로 다녀오면 그만일 텐데··· 자꾸만 옛날 버릇대로 움직이고 있다.
‘그만큼, 5년의 간격이 크다는 거겠지.’
전장에서의 5년.
수많은 것을 보았고, 수많은 것을 경험하고, 수많은 것을 배워야만 했던 5년.
극한의 상황 속에서 만들어진 버릇이란 생각보다 쉽게 잊히지 않는 것이다. 머릿속으로는 이곳이 전장이 아님을 이해하고 있지만, 몸은 자꾸만 버릇대로 움직이려 한다.
“묘한 기분이네.”
그렇게 중얼거리며 난 발걸음을 돌렸다.
어느새 식사 준비를 마친 집사가 나를 부르러 오고 있었다. 나는 화려한 마차를 향해 걸음을 옮기다 말고 잠깐 뒤를 돌아봤다.
어둠이 내려앉은 숲.
마경에서의 야경을 떠올리게 하는 숲을 보고 있자니, 머릿속에 떠오르는 인물이 있는 법이다.
‘카일 그 새끼는 뭐 하고 있으려나.’
뭐, 알아서 잘 먹고 잘살고 있을 테지.
그 개새끼가 할 일이야 뻔했다.
“보나 마나 떡이나 쳐대고 있겠지.”
안 봐도 뻔했다.
오히려 그렇지 않은 모습이 상상이 가질 않았다.
“아가씨, 식사 준비가 다 되어···.”
“예, 지금 갑니다.”
나는 집사의 안내를 받으며 걸음을 옮긴다.
전장에 있을 때와는 걸음걸이도, 신고 있는 신발도 다르다. 반질반질 광이 나는 단화를 보며 나는 엷은 웃음을 흘렸다.
이번 여정은 조금 가볍게 가볼까 싶다.
마음 편하게 휴가라도 가는 기분으로 말야.
3.
용사 카일 토벤.
그는 성검을 고쳐 잡았다. 은은하게 흐르는 별빛이 전신을 감싼다. 확 트인 시야에 잡힌 것은 어둠이다. 깊고 깊은 어둠.
끼긱, 끼기긱.
어둠 너머에서 무언가 굴러다니는 소리가 들린다. 뼈다귀가 굴러다니는 소리다. 뼈와 뼈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나지막이 울린다.
따각, 따가각.
뼈와 뼈가 맞물린다.
기이한 소리가 검은 평야에 울려 퍼진다. 카일의 뒤에 선 기사들이 마른침을 삼킨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은 어둠 속에서 소리만이 울린다.
꿀꺽.
목울대가 넘어가는 소리가 울릴 무렵.
“준비해라.”
카일이 말했다.
“온다.”
그가 말함과 동시에 어둠 속에서 빛이 떠올랐다. 카일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별빛과는 다르다. 닮았지만 다르다. 그것은 이질적인 빛이다.
고대의 문자.
고대의 주문 회로.
한낱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고대의 주문이 어둠 속에서 은은히 빛난다. 빛과 빛이 마치 별자리를 그리듯이 이어진다. 이윽고, 그것이 모습을 드러낸다.
『아아.』
인간의 얼굴 가죽을 이어 만든 로브.
기이한 골격 틈새에서 새어 나오는 짙은 마기.
『아아, 아아아.』
그것이 따각, 소리를 내며 입을 벌릴 때마다 검은 숨결이 새어 나온다. 턱이 움직일 때마다 기이한 소음이 울린다. 소음은 웃음소리가 된다.
『아, 아아아아, 아아아아.』
그것이 웃음을 흘린다.
뼈를 긁는듯한 비웃음이 전장에 울려 퍼진다.
『그늘을 두려워하라.』
수백 년을 살아온 재앙.
고대 리치, 스케발.
재앙이 용사의 앞에 제 모습을 드러냈다.
『오라, 별의 아이야.』
짙은 어둠이 초원에 내려 앉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