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160
〈 160화 〉 가을, 신학기(3)
* * *
“어서 오세요, 클로에 아가씨.”
“안, 안녕하세요!”
“편하게 말씀 하셔도 괜찮습니다, 클로에 아가씨. 중앙학관에서의 생활에 불편한 점이 있으시다면 언제든 편하게 호출해주세요.”
메이드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물러선다.
절제된 동작은 흡사 정교한 인형을 보는 듯 하다.
“잠시 산책이라도 하고 오시는 게 어떠신지요? 그간 짐 정리는 깔끔하게 해놓도록 하겠습니다.”
“제, 제가 해도 괜찮은걸요···.”
“저희 업무의 일환입니다. 짐 정리는 저희에게 맡기시고, 부디 편하게 학사 내를 둘러보고 와주시길.”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차마 거절하기도 그렇다.
클로에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선 발걸음을 옮겼다. 넋이 나간 얼굴로 클로에는 중앙학관의 복도를 걷는다. 뭔가, 뭔가··· 굉장히 신기한 기분이다.
메이드들의 보조를 받으며 생활?
이런 휘황찬란한 곳에서?
‘이거 완전 귀족가 아가씨···.’
즐겨 읽던 소설에서나 보던 것들이다. 언제나 근사한 사용인들의 도움을 받으며 생활하는 귀족가 영애들. 꼭 자신이 그런 소설 속 등장인물이 된 듯한 기분이 든다.
“···꿀꺽.”
클로에는 괜스레 마른침을 삼켰다.
흥분하면 안 되는데. 차분하고, 얌전한 모범생처럼 생활해야 하는데···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아까 메이드들 사이로 슬쩍 훔쳐본 방안의 풍경을 떠올리면 발걸음이 경쾌해지고 만다.
‘미쳤어, 미쳤어···!’
그 어느 때보다 즐겁다.
뒷골목에서 전전긍긍하며 살아오길 십여 년, 칙칙한 흑색 마탑에 처박혀 살기를 다시 일, 이년··· 기나긴 겨울을 감내한 자신의 인생에도 드디어 봄이 찾아왔다.
꿈과 희망의 땅, 아플리아.
클로에는 아플리아에 제 뼈를 묻기로 결정한다. 불행히도, 그것이 매우 어리석은 선택임을 지적해줄 사람이 클로에의 곁에는 없었다.
* * *
“어, 벨노아.”
중앙학관의 로비.
짐 정리를 메이드들에게 맡겨두고선, 소파에 앉아 시간을 때우던 벨노아는 의외의 인물의 등장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라니아 교수님? 여긴 어쩐 일로···.”
잿빛 머리칼을 늘어트린 여인.
얼핏 보기엔 학생처럼 보이는 그녀가, 바지춤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비스듬히 시선을 내려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
“아니, 뭐 별건 아니고.”
그 말에 벨노아의 등줄기가 곤두섰다.
‘별건 아니고, 별건 아닙니다만···.’
라니아 교수님의 입에서 저것과 같은 문장이 나올 때마다, 벨노아는 악몽을 경험했어야만 했다. 범인과는 그 사고방식부터가 다른 교수님이시다. 그녀가 말하는 ‘별것 아닌 일’은 대체로 별것일 확률이 무척 높았다.
‘이번엔 또 무슨 일로.’
그렇게 벨노아가 잔뜩 긴장한 가운데··· 라니아가 뒷말을 이었다.
“네 소꿉친구, 클로에.”
“···예?”
“그 애 어디 있는 줄 알아?”
“아, 클로에 말입니까.”
벨노아는 별 생각 없이 질문에 답했다.
“짐 정리하는 동안 잠시 아플리아를 둘러보고 온다고 했습니다. 아마 근처에 있지 않을까요.”
“흐음.”
라니아가 제 입가를 매만졌다.
“뭐, 돌아다니다 보면 어련히 만나겠지. 알려줘서 고맙다.”
“···그런데, 클로에는 왜 찾으십니까?”
“수업 관련해서 확인할 게 좀 있어서.”
확인할 것.
그 단어에 왠지 모를 섬뜩함을 느끼며, 벨노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라니아는 손을 휘휘 흔들며 걸음을 돌렸다.
“너도 곧 보자, 벨노아.”
“예, 교수님.”
벨노아는 중앙학관을 떠나는 라니아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뭐, 둘이 마주한다 해서 별일이야 있겠는가.
‘교수하고 학생인데.’
어차피 만나게 될 운명이다.
그게 하루 이틀 빨라진다 해서 무슨 거창한 일이라도 벌어지겠는가. 애초에, 라니아 교수님도 정도를 아시는 분이다. 이제 막 아플리아에 입학한 클로에에게 과도한 요구를 할 리가 없을···.
“······.”
벨노아가 잠시 침묵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지난 한 학기 동안 자신이 경험했던 온갖 역경과 고난, 그리고 시련들이다. 그것들을 떠올려보자면··· 무척이나 당연한 의문이 들고 만다.
“음···.”
벨노아는 공허한 눈동자로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정도를··· 아시던가?”
너무나도 늦은 의문이다.
이미 물은 엎질러진 뒤였다.
2.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새하얀 머리칼이 나부낀다. 날씨는 적당히 선선하고, 늘어지게 내리쬐는 햇살은 더할 나위 없이 기분 좋다.
“흥, 흐응.”
클로에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학사 내를 거닌다. 가볍게, 춤을 추듯이. 그 발걸음이 경쾌하기 그지없다. 클로에는 걸음을 옮기며 주변을 휙휙 둘러봤다.
‘중앙 도서관!’
모범생은 자고로 도서관과 친하게 지내야 한다고 들었다. 학생증 발급은 빨라도 삼일은 걸릴 테니··· 당장은 도서관 내부를 구경할 수는 없을 테지만, 외관을 보며 그 안을 그려보는 것 정도는 할 수 있다.
빼곡히 들어찬 마학 서적.
테이블에 앉아 학구열을 불태우는 학생들.
자신 또한 머지않아 그들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테지. 클로에는 소설에서 보았던 명문 아카데미를 다니던 영애들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똑똑하고, 기품있고··· 누구보다 학업에 진심인 사람들. 그렇기에 아름다운 영애들!’
자신도 그들처럼 될 수 있을 것이다.
클로에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며, 학사 내를 이곳저곳 쏘다닌다. 중간중간 아플리아의 학생들과 마주할 때마다 눈을 빛내고 그들을 바라보다, 의문 어린 시선을 받기도 한다.
그래도 좋다.
사소한 건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히야아···.”
클로에는 감탄을 내지르며 걸음을 옮긴다.
신문에 실린 줄글 따위를 통해 그려보았던 모습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곳에서라면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든다.
완벽한 생활을.
꿈에 그리던 아카데미 생활을.
그야말로 꿈과 희망이 가득한 아카데미다. 클로에의 입가에 미소가 지워지지 않는다. 그렇게 이번에는 어디로 가볼까, 하고 클로에가 행복한 고민을 하던 찰나다.
또각.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또각, 구두 굽이 블럭을 때리는 소리가 나지막이 울려 퍼진다. 또각, 그 소리는 점차 가까워진다. 또각, 클로에의 신경이 곤두섰다.
별이 노래한다.
직감이 경고한다.
뒤를 돌아보지 말고 뛰어라. 도망쳐라. 그것만이 살아남을 길이다. 그러나, 아직 별의 직감에 익숙하지 않은 클로에다. 클로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무심코 뒤를 돌아보고 만다. 도대체 뭐가 있길래?
“아.”
그리고, 클로에는 곧장 깨닫는다.
어째서 별이 절망을 노래했는지.
“오.”
누군가 자신을 향해 감탄을 내뱉는다.
그녀가 미소를 짓는다. 한없이 아름답고, 또 한없이 섬뜩한 미소를. 그녀가 천천히 입술을 움직인다.
“찾았다.”
세 음절로 이루어진 한마디.
그 한마디가 귓가에 맴도는 찰나다.
“···흡!”
클로에가 숨을 헛삼킨다.
반사적으로 그녀는 몸을 빙글, 돌렸다.
클로에의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하나뿐이다.
‘도망쳐!’
어차피 학교 안이고, 도망쳐봐야 언젠가 마주해야 한다는 당연한 추론 따위 하지 않는다. 일단 지금 이 상황을 벗어나야 한다. 클로에는 그리 결심하곤 곧장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다.
뒷골목을 전전긍긍하며 살아온 삶이다.
벨노아의 보호를 받기야 했다마는, 그래도 도망치는 기술 하나만큼은 늘 수밖에 없던 환경이었다. 그리고, 지금이야말로 그 도주 기술을 십분 활용할 때였다.
탁.
그렇게 클로에가 뜀박질을 선보이려는 순간이다.
“안녕.”
턱, 하고 어깨가 붙들렸다.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
귓가에 누군가 속삭인다.
그건 무척이나 친절한 목소리다. 부드럽고 감미로워서, 듣는 이의 경계를 허무는 미성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어째서일까.
클로에는 그 목소리에서 섬뜩함을 느낀다.
“어, 어어어···.”
클로에가 삐걱거리는 고개를 돌려뒤를 바라봤다.
‘분명 거리가 제법 있었을 텐데···?’
도대체 어떻게? 알 수 없다.
눈 깜짝할 새에 수십 걸음의 거리를 좁힌 여인을, 클로에는 떨리는 눈동자로 바라본다. 첫 만남과도 같다. 마치 바람과도 같이 찾아온 인물이다.
“음.”
그녀가 클로에를 향해 미소 지었다.
“두 번째네.”
흘러내리는 잿빛 머리칼.
반개(半?)한 푸르스름한 눈동자.
무척이나 흥미로운 생명체를··· 마치 실험체를 보는듯한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여인.
라니아 반 트리아스.
그녀가 클로에의 어깨를 꾹, 붙잡은 채 말했다.
“우리 잠깐 이야기 좀 할까?”
꿈과 희망으로 가득한 아카데미 생활.
그것을 꿈꾸었을 어린 소녀의 귓가에 재앙이 속삭인다. 그런 건 없다고. 번지수를 잘못 찾아왔다고.
“네, 네에···.”
클로에는 딸꾹질을 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아플리아에 발을 들인 첫날, 무언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클로에는 직감한다.
3.
2학기의 개학이 일주일 남짓 남은 지금, 아플리아는 그 어느 때보다 소란스럽다. 아플리아에 편입한 정체 모를 소녀에 대한 소문도 한몫하겠지만··· 그보다 더 이목을 끄는 사건이 하나 있었다.
「전투 마학과 결투(쟁탈전) 일정.」
학사 공지에 붙은 종이 한 장 때문이다.
전투 마학과는 유난히도 실전을 중시하는 학과 적 특성 탓에, 결투라는 독특한 시스템이 존재한다.
‘결투.’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1:1 싸움.
다른 학과와 달리, 전투 마학과는 수석을 정함에 있어··· 결투에서 얻는 점수를 높게 매긴다. 일종의 순위 쟁탈전과도 같다.
수석에게 결투를 건다.
그리고, 승리한다.
그것만으로 수석의 자리를 빼앗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론보다 실전의 강함을 중시하는 곳. 실용적인 클래스 배틀 메이지(Battlemage)를 길러내는 학과답게 꽤나 파격적인 조건이다.
그러나, 일 년의 절반이 지나간 지금.
기껏 마련된 제도를 사용한 학생은 없었다.
자잘한 대련은 있었으나, 결투가 벌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다는 뜻이다. 그 이유야 단순하다. 대련만으로도 그 순위가 얼추 보일 뿐더러··· 수석의 자리를 꿰찬 인물이 워낙에 남다르기 때문이다.
전투 마학과의 수석은 벨노아다.
그 누구도 그를 꺾지 못했다.
벨노아의 강함은 이미 학생의 수준을 넘었다.
그렇기에, 결투에서 패배하면 받는 페널티를 감수하면서까지··· 승산 없는 싸움에 끼어드는 학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최소한, 어제까진 그랬다.
「도전자.」
오늘, 길고 긴 정적을 깨고 누군가 결투장을 던졌다. 학생들은 학사 공지에 적힌 도전자의 이름을 바라본다. 이미, 어느 정도 예상한 인물의 이름이 그곳에 적혀있다.
「라크 반 그레이스.」
전투 마학과의 차석.
북부의 대공자가 어스름의 악몽에게 결투를 걸었다. 학생들의 이목이 쏠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웅성거리는 학생들 사이로, 누군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 됐다.”
학사 공지를 툭, 건드리며 라크가 말했다.
“이번에는 만만치 않을 거다, 벨노아.”
수석 자리를 빼앗겠다.
그렇게 선언하는 라크에게, 벨노아는 고개를 까딱였다. 꼭 할 수 있으면 해보라는 듯한 제스쳐다. 그 도발에 가까운 제스쳐에··· 학생들의 웅성거림이 조금 더 커진다.
결투장은 던져졌다.
남은 건 승자와 패자를 가리는 일뿐이다.
2학기 개학을 앞둔 일주일, 아플리아 아카데미는 본래의 열기를 되찾아 가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