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164
〈 164화 〉 가을, 신학기(7)
* * *
그림자가 벨노아의 몸을 뒤덮었다. 꾸물거리는 그림자는 갑주가 되어 벨노아의 몸을 지킨다. 벨노아는 짧게 숨을 뱉었다.
그림자 갑주.
현재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한 주술이다. 손가락 네 개를 공양(Offering)함으로써 발현할 수 있는 주문. 그림자 갑주가 가져오는 효과는 어지간한 강화 계열 주문의 효과를 아득히 상회한다.
감각의 확장.
육체 능력의 증강.
육체에 부하가 걸리긴 하나, 이 정도 수는 꺼내 쓸 필요가 있었다. 벨노아는 눈앞을 바라본다. 자세를 낮춘 채 이쪽을 바라보는 라크가 있다. 그 눈동자가 짐승의 것처럼 붉었다.
치이이익.
라크의 몸 위로 증기가 피어오른다. 핏줄이 도드라진 팔뚝. 이 정도 거리에서도 크게 울리는 심장 소리는 마치 경고와도 같다.
‘온다.’
벨노아가 그리 생각한 순간이다.
라크의 신형이 흔들린다. 그가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내디딘 건 한 걸음이나 결과는 한걸음이 아니다.
콰앙!
한걸음에 열 걸음의 거리를 좁혀진다.
벨노아의 눈앞에서 라크의 붉은 동공이 번들거렸다. 마주침은 한순간이다. 코앞까지 짓쳐든 라크가 도끼를 휘둘렀다.
후웅!
은백색의 섬광이 벨노아의 목을 노렸다. 그림자 갑주로 육체 능력이 강화됐기에, 벨노아는 그 공격에 겨우 반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반응했다 하여 완전히 막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쩌억!
몸이 붕 뜬다.
도끼를 막은 팔뚝이 얼얼하다. 그림자가 흩어졌다 뭉쳐진다. 한순간이지만 갑주가 뚫렸다.
“···하.”
벨노아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말도 안 된다. 육체에 걸리는 부하를 감수하면서까지 육체 능력을 끌어올렸거늘··· 간신히 반응하는 게 고작이다. 정면에서 치고받는 건 여전히 불가능하다.
그러나, 벨노아는 주술사다.
그는 자신의 본질을 잊지 않았다. 공중에 몸이 붕 뜬 채로, 벨노아는 손가락을 까딱였다. 장전된 말뚝들이 일제히 사출된다.
쉭!
그림자 말뚝은 위력도, 그 속도도 그림자 비수에 비교할 바가 못 된다. 회전하는 말뚝이 라크를 노린다. 그 수가 열에 육박한다. 단 한발로 흑기사의 투구를 박살 냈던 말뚝이다.
그 위력은 증명됐다.
쉽게 피하지도, 부수지도 못할 것이다.
벨노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음 주술을 짜낸다. 말뚝을 막기 위해 시선을 돌린 라크에게 접근한다. 그리고, 그 순간 벨노아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쩌적.
라크의 도끼가 말뚝을 박살 낸다.
너무나도 쉽게.
‘···어떻게?’
벨노아의 낯빛에 당혹이 스친다. 그러나, 그 또한 잠시다. 벨노아는 곧장 상황을 이해한다. 라크는 초감각을 지니고 있다. 벨노아의 모든 수를 읽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무엇이, 어떻게 다가오는지 전부 알고 있다.
심지어 라크는 그림자 말뚝을 초견(??)하는 것이 아니다. 일전에 말뚝을 보았다. 말뚝의 약점 또한 정확하게 알고 있다.
‘약점을··· 알고 있다.’
그림자 말뚝은 위력과 속도에 집중된 주문이다.
회전을 통해 관통력을 올렸을 뿐, 그 내구성은 그림자 비수와 별반 다를 게 없다는 뜻이다.
‘정면이 아닌 측면.’
라크는 집요하게 측면에서 말뚝을 박살 내고 있었다. 초감각이 가능케 한 기교다. 도끼날이 은백색의 섬광을 그린다. 백색의 섬광이 그림자를 가른다.
공격과 회피가 이어진다.
그리고, 회피는 다시 반격과 이어진다.
“···!”
라크의 등을 노리던 벨노아가 황급히 자세를 낮췄다. 머리 위로 도끼날이 스쳐 지나갔다. 라크는 뒤를 보지도 않은 채, 팔을 뒤로 쭉 뻗었을 뿐이다. 기예에 가까운 동작에 벨노아는 혀를 내두른다.
말뚝을 전부 박살 냈다.
잠시 수세를 취했던 라크가 공세로 전환한다.
동작과 동작이 이어진다. 빙글, 제자리에서 회전하며 라크가 다리를 쭉 뻗는다. 벨노아의 복부를 후려친다. 그림자가 막았다곤 하나, 충격을 완전히 지우진 못한다.
치이이익.
발을 끌며 벨노아가 물러선다.
라크의 공격은 이어졌고, 벨노아는 계속해서 뒤로 물러선다.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반격의 틈이 보이질 않았다.
‘어렵다.’
어려웠다.
눈앞에서 휘둘러지는 도끼의 궤적을 읽으며, 몸을 보호하는 게 고작이었다. 벨노아의 온 신경은 라크의 도끼에 쏠려 있었다.
그리고, 상대의 무기는 도끼뿐만이 아니다.
“커헉!”
무릎이, 다리가, 때로는 팔꿈치가 벨노아의 몸을 두들긴다. 가속되고 강화된 육체는 그 자체로 흉기다. 벨노아는 신음을 흘리며 뒤로 물러섰다.
턱.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궁지에 몰려있다.
콜로세움의 벽이 등에 닿음을 느낀다. 벨노아는 눈앞을 바라본다. 흉흉한 붉은빛이 감도는 눈동자는 여전히 멈출 기세가 없다.
벨노아가 고개를 틀었다. 콰직! 도끼가 벨노아의 귓가를 스치며 벽에 처박힌다. 벨노아가 옆으로 몸을 날렸다. 콱, 콰직! 도끼가 연달아 벽을 난도질한다.
카가가가각!
벽을 긁으며 도끼가 계속해서 벨노아를 노린다. 벨노아는 궁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도망치기에 바쁘다. 끊임없이 수세를 강요받는다.
주문을 쓸 기회가 없다.
그림자를 다루고자 손을 뻗기보다, 눈앞의 도끼를 막기 위해 팔을 뻗어야 했다.
‘이건, 반칙 수준 아니야?’
불평이 새어 나오려 한다.
상대는 아주 작은 행동에서 미래를 읽는다. 도끼를 막고자 팔을 뻗으면, 도끼의 궤도가 휘어 다른 곳을 후려친다.
작은 움직임.
근육의 수축, 시선의 처리.
그 모든 게 상대에겐 ‘정보’로 받아들여진다. 정보에서 미래를 끌어낸다. 모든 수가 읽히니 상대의 손안에서 놀아나는 느낌 마저 든다.
‘언제나 한 걸음 앞서 있는 적.’
습관에서 다음 수를 읽고 행동한다. 상대는 미래에서 싸우고 있다. 현재를 감당하기에 바빠서는 이대로 결판이 날 뿐이다.
궁지에 몰렸다.
계속해서 몰리고 있다.
벗어날 수를 강구해야 했다. 상대가 예측하지 못할 수를 써야 한다. 그것이 무엇이 있는가? 벨노아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린다.
‘새로운 수.’
그러니까.
‘예측할 수 없는 수.’
그것을 끊임없이 갈구하는 순간이다.
문득 벨노아의 시선에 제 팔뚝이 들어온다. 흩어지고 붙기를 반복한 그림자가 핏물처럼 바닥에 떨어지고 있었다. 벽에 몰린 채 도망치던 벨노아의 발걸음을 따라 그림자가 이어져 있다.
이어진 그림자.
바닥에 남은 마나의 잔재.
머릿속에 무언가 번뜩인다. 벨노아는 사고를 전환한다. 상대는 미세한 움직임에서도 미래를 읽는다. 그것을 봉쇄할 순 없다. 그렇다면, 아예 방식을 바꿔버리면 그만이다.
‘알고도 당해야 하는 것.’
상대에게 수를 강요한다.
벨노아는 머릿속에 떠오른 것을 실행에 옮긴다.
뿌득.
벨노아가 손가락 하나를 공양한다. 꿀렁, 하고 바닥에 떨어진 그림자들이 출렁였다. 그 순간, 잠시나마 라크의 도끼가 멈춰섰다.
라크가 뒤를돌아본다.
벨노아는 입가를 틀어 올렸다.
흩어진 그림자가 전부 주인에게로 돌아온다. 바닥에 흩어진 그림자들이 벨노아를 향해 모여든다. 벨노아에게 있어, 그건 갑주를 강화할 재료다. 그러나 라크에겐 아니다.
하나하나가 비수다.
수백 발의 비수가 날아들고 있다.
‘피하기야 간단하다.’
하지만, 피할 수는 없다.
저걸 피한다면, 벨노아가 저것을 흡수하게 내버려 둔다면··· 벨노아의 갑주가 강화되고 만다. 그 강화는 지금까지의 것과 비교가 안 될 것이다.
‘피하지 않고, 부숴야 한다. 전부.’
라크 또한 수를 강요받는다.
‘하지만, 뒤를 내줘야 할 테지.’
라크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강해진 건 자신만이 아니다. 상대 또한 강해졌다. 그리고, 계속해서 강해지고 있다. 서로 경쟁하며 성장할 상대란 전사에게 있어 그 무엇보다 값진 것이다. 라크는 자신에게 찾아온 행운에 미소 짓는다.
더.
조금 더.
자신과 벨노아 사이에 벌어진 격차, 그것을 벨노아가 따라잡기를 고대하며··· 그럼에도, 끝내 자신이 승리를 따내기를 바라며 라크는 도끼를 휘두른다.
도끼가 그림자를 가른다.
그림자가 은백색의 섬광을 덮는다.
흑과 백이 끊임없이 뒤얽힌다.
2.
싸움은 계속해서 과열된다. 더 이상 관중들은 환호성조차 내뱉지 못한다. 그들은 숨을 죽인 채 결투를 눈에 담았다. 매 순간 매 순간이 극의 절정과도 같다. 관중의 시선을 휘어잡는다.
그림자가 솟구치고, 폭발하고, 뒤덮는다.
도끼는 가르고, 찢어발기고, 박살 낸다.
가장 원초적인 싸움이 그곳에 있었다. 서로가 서로의 수를 읽는다. 서로의 시선을 교란한다. 학생의 수준을 아득히 넘은 싸움에··· 관중들은 더 이상 그 결과를 예측하기를 포기한다.
그저 놀라움과 걱정을 표할 뿐이다.
서로가 서로를 죽이기 위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최선을 다한 공격은 언제나 살초에 가까운 법이다. 살초가 오가는 결투는 몹시도 살벌하다. 이러다 하나가 죽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렇기에, 관중들은 깨닫지 못한다.
저 살벌한 결투의 당사자들이, 지금 이 결투를 진심으로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 * *
벨노아는 수를 강요하는 방법을 찾았다.
미래를 보고 움직이는 상대를, 현실에 묶어둘 방법을 찾았다. 본래대로라면 막 찾은 방법을 실전에서 도입하기란 몹시 어려운 법이다.
벨노아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죽음을 느끼며 살아왔다. 무언가에 익숙해질 시간적 여유는 없었다. 모든 깨달음을 곧장 실전으로 옮겨야 했다. 그것에 익숙해진 벨노아에게 막 깨달은 개념의 활용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모든 공격에 두 가지 수를 담는다.
상대에게 선택을 강요한다.
상대가 하나를 고른 순간, 자신은 다음 수를 짜낼 시간을 번다. 벨노아는 그를 반복했다.
투확!
그림자가 끊임없이 요동쳤다. 이제는 라크 또한 미래를 보고 싸울 여유가 없다. 수세와 공세가 몇 번이고 뒤바뀐다. 둘 사이에 벌어졌던 격차가 조금씩 좁혀져 간다.
“···하!”
라크가웃음을 터뜨리며 도끼를 휘두른다.
결투에서 깨달음을 얻는 것은 벨노아 뿐이 아니다. 라크 또한 깨달음을 얻는다. 강해진 육체를 조금 더 능숙하게 다룬다.
동작이 간결해진다.
속도의 가감을 두며 상대를 교란한다.
벨노아의 단검술을 흉내 내듯··· 그 간격을 자유자재로 좁혔다 늘리기를 반복하며 라크는 벨노아를 압박했다.
“······.”
벨노아는 말없이 미소 짓는다.
그는 어째서인지 이 상황이 즐겁다. 전투광은 아니다. 이런 결투를 좋아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즐겁다. 즐거워서 웃음이 맺힌다.
목숨을 걸지 않고 싸우는 상황.
최선을 다해도 막아줄 누군가가 있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자신과 비등비등한, 혹은 상위의 존재와 대련한다. 대결 속에서 깨달음을 얻고 성장한다. 성장은 누구에게나 기쁨을 준다. 벨노아라 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즐거웠다.
이런 경험이 없는 벨노아에겐, 이 상황이 너무나도 즐거웠다. 뒷골목에서 자라온 소년에겐 자신과 함께 성장해나갈 존재가 부재했다. 그런 존재를 가질 수 있는 건 극히 소수에게만 주어진 행운이다.
행운을 바라기엔 척박한 삶이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클로에라는 빛을 지키기에 급급한 삶이었다. 그렇기에, 여유가 생긴 지금 벨노아는 자신에게 주어진 행운에 감사한다.
뚜둑.
손가락을 꺾으며 주술을 발현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인다. 더 이상 수를 숨길 생각도 하지 않는다. 벨노아는 제 전부를 상대에게 보였다.
투캉, 카가가각!
상대 또한 마찬가지다.
언제나 전력을 다해, 올곧고도 무식하게 들이박는 라크답게 그는 정면으로 모든 것을 뚫어낸다.
캉, 카강!
공격이 오간다.
수와 계산이 오간다.
오고 가는 것들에 둘은 즐거움을 느낀다.
그러나, 그 또한 끝이 온다.
고착되는 전황 속에서 둘은 전황을 뒤엎을 수단을 찾고자 사고를 가속한다.
‘더.’
서로가 최선의 수단을 갈구한다.
‘더, 조금 더.’
서로가 하나의 완벽한 수를 좇는다. 둘 사이의 간극이 좁아진 가운데, 그 둘은 거의 동시에 최적의 결론에 도달한다.
멈칫.
둘은 동시에 움직임을 멈췄다.
둘의 생각이 겹친다.
‘찾았다.’
라크의 도끼가 멈춰선다.
동공이 수축하여 붉은 점이 된다. 라크의 몸 위로 증기가 피어올랐다. 도끼날에 스톡(Stock)된 주문이 빛을 뿜는다.
벨노아의 그림자가 잔잔해진다.
그림자 갑주가 벨노아의 한 손으로 모여든다. 한껏 압축된 그림자를 두른 채 벨노아가 눈을 부릅떴다.
탁.
동시에 멈춘 둘이 동시에 움직인다.
일점 돌파(pointBreakThrough).
방어를 포기한다. 공격에 전념한 라크가 한줄기의 섬광이 되어 쏘아진다. 도끼날이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빛난다.
일점 폭발(PointExplosion).
손을 쭉 뻗은 벨노아가 손아귀를 콱, 하고 움켜쥔다. 한계까지 수축된 그림자가 폭발한다. 정면에서 라크를 집어삼킨다.
그림자가 집어삼키는 게 먼저인가.
도끼날이 찢어발기는 게 먼저인가.
투확!
폭발하는 그림자를 찢어발기며 라크가 튀어나온다. 벨노아의 수를 읽고 충격(Shock)으로 틈을 만들어낸 덕분이다.
‘내 승리다!’
그러나, 승리를 확신한 순간 라크는 깨닫는다.
벨노아는 이미 자신의 수를 읽히는 것을 알고 있다. 알고 있음에도 주문을 발현했다. 그 이유를 유추해 보는 건 어렵지 않다.
‘다른 수가 있으니까.’
그림자를 뚫고 나온 라크에게 벨노아가 손을 뻗는다. 라크가 해치고 나온 그림자가, 다시 한번 라크에게로 모여든다. 마치 파도처럼.
‘내 도끼보다 빠르다.’
미래가 읽힌다. 돌아오는 그림자에 찢어발겨지는 미래가 눈앞에 그려진다. 확정된 미래가 다가온다. 그것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더.’
언제나 그렇듯이.
‘더, 빠르게.’
라크는 정면으로 돌파하는 것을 선택한다.
한걸음에 좁히려던 거리를, 라크는 구태여 한 번의 걸음을 더 사이에 끼워 넣었다. 뿌득, 발가락이 요란스런 소리를 낸다. 그렇게 라크는 제 몸을 한 번 더 가속했다. 가속에 가속이 더해진다.
푹.
등줄기가 돌아오는 그림자에 찔렸지만, 잠깐일 뿐이다. 한순간 가속한 라크의 움직임을 그림자가 뒤쫓지 못한다. 벨노아의 동공이 커진다.
막을 방법은 없다.
없기에, 승패가 갈린다.
그리고.
“그만.”
언젠가 들었던 목소리가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3.
“거기까지.”
울려 퍼진 건 목소리뿐만이 아니다.
챠캉, 하는 소리와 함께 어디서 나타난 줄도 모를 사슬이 대련장 위의 모든 것을 옭아맸다. 단순히 육체뿐만이 아닌 그곳에 퍼진 현상마저도 대상에 포함된다.
라크와 벨노아는 움직임을 멈췄다.
돌아오던 그림자마저 그곳에 정지돼 있다.
또각.
모든 것이 정지한 가운데, 누군가 대련장 위로 걸어왔다. 구두 굽이 바닥을 울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 걸음 소리에 벨노아와 라크는 헛웃음을 흘리고 만다.
데자뷰마저 느껴지는 상황이다.
처음으로 맞부딪쳤던 그 날의 상황과 같다.
그러나, 달라진 것 또한 분명 있다.
“경기는 여기서 끝.”
라크와 벨노아는 시선만을 돌려 옆을 보았다.
그곳에는 라니아가 서 있다. 반 배정 시험 때와는 달리,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그녀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승자는 라크 반 그레이스.”
수고했다는 듯이 그녀가 그리 말한다.
그리곤 휘적휘적 대충 손을 휘둘러 그림자를 치운다. 몸을 묶은 사슬이 풀어지자, 벨노아는 힘없이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한계까지 주술을 짜낸 탓이다.
“···후우.”
거의 다 왔지만, 마지막의 마지막에 와서 계산을 실수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바닥에도 그림자를 뿌려둘걸. 그런 생각을 하며 벨노아는 고개를 든다.
승패가 갈렸다.
결과를 인정할 차례였다.
“내가 졌어.”
반 배정 시험 당시, 라크가 자신의 입으로 말했던 것. 그것이 이번에는 벨노아의 입을 통해 발음된다.
자신이 졌다.
처음으로 시인한 패배다.
그러나, 패배를 인정하는 벨노아의 표정은 숫제 시원하기까지 하다.
“그런가.”
라크는 후우, 짧게 숨을 내뱉으며 도끼를 바닥에 내려두었다. 무기를 놓아 빈손이 된 라크가 벨노아에게 손을 쭉 뻗었다.
“좋은 승부였다, 벨노아.”
벨노아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라크의 손을 붙잡고 일어섰다. 둘은 서로를 마주 본 채 웃음을 터뜨린다. 그 모습에 숨을 죽였던 관중들이, 뒤늦게 환호성을 터뜨린다.
와아아아아아아아!
전투 마학과의 수석이 교체되는 순간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