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165
〈 165화 〉 가을, 신학기(8)
* * *
결투는 끝났고 승자는 결정됐다.
매 순간 매 순간이 손에 땀을 쥐던 결투다. 무심코 참고 있던 숨을 몰아쉬며 관객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결투의 열기에 취한 관객이 많았다. 그들이 내는 소음이 콜로세움에 메아리쳤다.
와아아아아아!
환호성과 박수 소리.
결투의 주인공들에게 찬사가 쏟아진다.
“그거죠, 라크! 여러분, 저 아이가 바로 백색 마탑의 수제자랍니다!”
“백색, 제발···.”
“하하! 흑색보다 백색이 우월한 게 이렇게 ‘다시 한번’ 증명됐네요? 패배자는 패배자답게 짜져 있으시지!”
“···환장하겠군.”
개중에 유난히 소란스러운 관객이 하나 있긴 하나, 그 목소리 또한 환호성에 묻힐 뿐이다. 그렇게 객석이 소란스러운 가운데··· 경기장에 선 벨노아는 멍하니 객석을 바라봤다.
신기한 기분이었다.
이토록 상쾌한 기분은 처음이었다.
쏟아지는 환호성이 옛날처럼 마냥 시끄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소음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낯설지만, 기분 좋은 낯섦이었다.
“기분 좋지 않나?”
들려온 목소리에 벨노아가 고개를 돌렸다.
시원스레 웃는 라크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제 입가에 묻은 피를 쓱, 닦아내며 말을 마저 이었다.
“결투의 즐거움을 알게 됐다니, 너도 이젠 어엿한 전사···.”
“뭐라는 거야.”
쓰게 웃으며 말을 끊어내긴 했지만, 벨노아도 딱히 부정하진 않았다. 어엿한 전사이니 뭐니, 그런 건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결투의 즐거움이란 건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하다.
만신창이인 몸.
한계까지 마나를 쥐어짜 내 몰려오는 탈진감.
라크나 벨노아나, 당장 서 있는 것 조차 고단하다. 둘은 서로의 어깨를 빌린 채 비틀거리며 대기실로 향한다. 방금까지 죽도록 싸워댔으면서, 결투가 끝난 지금은 어깨동무를 한 채 걷고 있다.
결투는 끝이 났다.
감정의 골 같은 잡다한 것이 남을 만큼 찝찝한 결투가 아니었다. 서로가 다만 최선을 다했다. 그 과정이 깔끔했기에, 결과 또한 깔끔했다.
결투는 끝이 났고, 승자는 정해졌다.
언제나 수석의 자리를 지키던 벨노아는 차석으로 물러섰다. 새롭게 수석의 자리에 오른 라크의 이름이 관중들의 입을 통해 울려 퍼졌다.
라크 반 그레이스
북방의 공자는 승리의 달콤함에 미소 지었다.
2.
아플리아를 뜨겁게 달궜던 결투도 끝이 났다. 학생들은 학사진의 안내를 받으며 콜로세움에서 퇴장한다. 콜로세움에서 한발 먼저 퇴장한 벨노아는 복도의 창문으로 그 행렬을 흘겨봤다.
참 많이도 왔다.
그런 생각을 하며 벨노아는 복도를 따라 걸었다. 소란스러운 바깥과 달리 복도는 한산했다. 썰렁한 복도를 걷다 보면, 알싸한 약품의 냄새와 함께 양호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탁, 하고 벨노아는 양호실의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진통제와 붕대라도 빌려 쓸 생각이었다. 하도 자주 꺾어대는 탓에 이젠 금방금방 회복되기는 하나··· 그래도 아픈 건 아픈 거였으니까.
“······.”
양호실 문 앞에서 손을 뻗다 말고, 벨노아는 제 손가락을 보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섯 손가락 중 성한 손가락이 없다. 한창 싸울 때는 열이 올라 몰랐지만··· 결투가 끝나고 나니 욱신거리는 느낌이다.
‘···잡으면 꽤 아프겠네.’
잠깐 고민하다 말고, 벨노아는 발끝으로 양호실의 문을 비집어 열었다. 그렇게 한걸음, 양호실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이다.
사락.
문이 열려있던 걸까. 양호실 안쪽에서 불어온 바람에 벨노아의 앞머리가 흔들렸다. 눈을 감았다 뜨며 벨노아는 양호실 안쪽을 바라봤다.
“오.”
누군가 양호실 안에 앉아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윤기 있는 잿빛 머리칼이 흔들렸다. 그녀가 벨노아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빨리 왔네.”
“···라니아 교수님?”
교수님이 왜 여기에 계십니까.
그렇게 물으려던 찰나다. 라니아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녀의 앞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잠깐 빌렸지. 잔말 말고 오기나 해.”
“예?”
“와서 앉아 보라고.”
벨노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순순히 그 말에 따라 자리에 앉았다. 라니아가 선반에 손을 뻗어 능숙히 약품을 꺼내 들었다.
“내가 좀 많이 부러져봐서 아는데, 저번에 너 붕대 묶는 게 너무 조잡하더라.”
“네? 조잡하다니···.”
“뼈도 제대로 안 맞추고 저 알아서 붙으라고 내버려 두니까 손가락이 그 모양 그 꼴이지.”
그녀가 벨노아의 손가락을 가리켰다.
확실히, 가장 많이 꺾어댄 검지가 휘어있긴 했다. 벨노아가 제 손을 바라보고 있자니 라니아가 손짓했다.
“팔 쭉 뻗어봐.”
시키는 대로 했다.
라니아는 벨노아의 손목을 잡은 채, 팔을 이리저리 돌려봤다. 그녀가 쯧쯧 혀를 찼다.
“거 봐.주술사들 손가락이 다 이렇다니까. 마법사한테는 회로를 그리는 손가락이 생명인데, 손을 이렇게 조져두면 쓰냐?”
그녀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이참에 뼈 좀 다시 맞추자.”
“···예?”
‘뼈를 다시 맞춘다니?’
그게 그렇게 쉽게 되는 일이던가.
벨노아는 눈을 깜빡이며 눈앞의 라니아를 봤다. 그녀가 고개를 살짝 숙인다. 잿빛 머리칼이 흘러내리고, 둥근 정수리가 벨노아의 눈에 들어왔다.
꾸욱.
그녀가 한 손으로 벨노아의 손목을 꽉 움켜쥔 채, 다른 손으로는 부러진 벨노아의 손가락을 매만졌다. 근질거리는 감촉, 간간이 느껴지는 따끔함에 벨노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뭔가 묘한 기분이었다.
눈앞에 고개 숙인 여인의 정체를 이제는 벨노아도 안다. 그 전설적인 잿빛 마법사다. 그런 인물이 지금 부러진 제 뼈를 고쳐주겠답시고 손가락을 매만지고 있다.
‘사실, 아직도 잘 믿기지는 않지만···.’
그 인상이 도저히 겹치지 않는 탓이다.
기록상으로 남은 잿빛 마법사는 대체로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 객관적으로 미남의 축에 들기는 하나, 그 인상은 부드럽다기보단 찔러 죽일듯한 날카로움에 가깝다.
그에 비해, 눈앞의 여인은 어떠한가?
날카롭기보단 부드럽다. 그 실체를 모르고 마주한다면 무릇 수많은 사람이 착각에 빠질 만도 하다. 부드럽고, 선하며, 순수해 보이는 인상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제 손가락을 매만지는 라니아의 모습에, 벨노아는 살짝 고개를 돌렸다. 뭔가 속이 근질거리는 느낌이 든 탓이었다.
“그, 교수님 언제 끝···.”
“기다려 봐. 이제 얼추 골격이 보이거든?”
···골격이 보인다니?
“예?”
“내가 사라 그년한테 어깨 너머로 좀 배우긴 했단 말이야? 그래도 걔가 꼴에 성녀라서 뼈 하나는 기깔나게 맞췄거든.”
좀 아프긴 했지만 말야.
라니아가 그리 중얼거리더니 콱, 하고 강하게 벨노아의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벨노아의 눈이 크게 떠졌다. 끄읍, 하고 벨노아의 입가에서 비명이 새어 나왔다.
“하나, 둘.”
뚝, 뚜둑.
“셋.”
뚜두두두둑!
벨노아의 눈앞에 불똥이 튀었다.
“크아아아아아악!”
차마 참지 못한 비명을 내질렀다. 벨노아가 몸을 부르르 떨며 도망치려 하지만, 손목을 단단히 붙잡은 라니아는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 좀 가만히 있어 봐!”
근질거림은 날아간 지 오래다.
근질거림을 대신하는 건 고통이다. 문자 그대로 뼈를 꺾는듯한 고통이다. 눈앞에 불똥이 연달아 튀는 고통에 벨노아는 몸을 비틀었다.
“이쪽으로? 아니, 이쪽이 더···.”
라니아는 중얼거리며 벨노아의 손가락을 이리저리 흔들어댄다. 벨노아가 날뛰는 탓에 치료하기가 쉽지 않았다.
“좀 참아봐.”
뒤늦게 진통 주문을 걸어보긴 하지만, 진통이 고통을 완전히 지워주는 것은 아니다. 결국 라니아는 몇 겹으로 주문을 때려 박았다.
‘아, 이제야 좀 얌전하네.’
축, 하고 벨노아의 몸이 늘어졌다.
침묵 속에서 뚝, 뚜둑 하고 섬뜩한 소리가 연달아 울려 퍼졌다. 그 소리가 멈춘 것은 십분 남짓이 흐른 뒤였다.
“아, 됐다.”
어찌저찌 하니까 됐다.
라니아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벨노아의 손가락을 바라봤다. 그녀는 붕대로 손가락을 감아주고선,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렸다.
“···뭐야? 왜 그러고 있어?”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는 벨노아가 보인다. 그 입가에 침이 흐르는 것 같기도 하지만··· 라니아는 사소한 것에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야, 끝났어.”
“스읍, 예, 예?”
벨노아가 몽롱한 눈동자로 눈을 떴다.
그는 멍하니 제 손가락을 바라봤다. 말끔하게 붙은 손가락을 보는 벨노아의 눈동자는 공허했다.
“벨노아, 여기 있어?”
그때였다. 드르륵, 하고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벨노아는 공허한 눈동자로 양호실에 들어온 손님을 바라봤다.
“한참 찾았네. 응? 라니아 교수님도 계시네?”
클로에였다. 그녀가 별생각 없이 다가오더니, 벨노아의 손가락을 보고선 감탄을 뱉었다.
“오, 뭐야? 너 붕대 항상 이상하게 묶어서 내가 묶어주려고 왔는데··· 이미 다 했네?”
너 이렇게 깔끔하게 묶을 수 있었어?
그리 중얼거리며 신기하다는 듯이 자신을 바라보는 소꿉친구에게··· 벨노아는 힘없이 답했다.
“···내가 한 거 아니야.”
“그럼?”
“내가 묶어줬지.”
클로에가 고개를 돌려 라니아를 보았다.
맞은편에 앉은 라니아가 별것 아니라는 양 어깨를 으쓱이고 있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괜찮게 묶었지?”
“네! 되게 깔끔해요! 교수님 이런 쪽 지식도 가지고 계신가 봐요?”
“내가 아는 게 좀 많아.”
대단하시다!
내가 좀.
그런 선문답을 주고받는 라니아와 클로에를 벨노아는 차게 식은 눈동자로 바라봤다. 언제나 환한 빛처럼 느껴지던 소꿉친구가, 지금만큼은 빛이 나지 않았다. 이곳에는 어둠뿐이었다.
3.
외부 방문자들의 대기실.
그중에서도 따로 마련된 귀빈용 대기실에서 자신들의 제자를 기다리며, 흑색과 백색 마탑주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거봐요, 흑색. 내가 뭐랬어요? 백색이 흑색보다 우월함을 우리 라크가 증명···.”
일방적인 대화를 말이다.
‘똑같은 말을 몇 번이나 할 셈인가.’
예투알이 인상을 찌푸렸다. 옆에서 떠들어대는 백색 마탑주 탓에, 그는 제 귀를 틀어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시끄러웠다. 몹시.
“알았다, 알았다고 하지 않았나.”
“하하! 패배자는 언제나 굴욕을 감내해야 하는 법 몰라요? 잠자코 승자의 자랑이나 들으시지!”
끝도 없이 자랑을 늘어놓은 셀리의 말이 이어지는 가운데, 예투알은 이제 측은함 마저 느낀다.
‘도대체 북부에서 얼마나 자존심의 상처를 입었으면··· 이렇게까지 자존심을 회복하려 드는가?’
백색 마탑주, 셀리 드벨라.
예투알이 기억하는 그녀는···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을 때, 그를 회복하기 위해 이런 식으로 행동하곤 했다.
‘자랑을 늘어놓는다. 도를 넘을 정도로.’
그리고, 예투알이 보기에 지금 셀리의 모습은 도를 넘었다. 같은 이야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얼추 감이 잡혔다.
“···백색이 흑색보다, 그러니까 내가 당신보다···.”
예투알은 측은한 시선으로 셀리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 라니아 교수를 백색 마탑으로 끌어들일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했던가.’
그런 말을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 백색의 모습으로 보아하건대··· 그 계획은 처참히 실패했으리라. 그것도 백색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는 방향으로.
“···뭐에요? 왜 그런 눈으로 봐요?”
“아무것도 아니다. 마저 말이나 해라.”
“···그렇게 말 안 해도 할거거든요?”
예투알은 한숨을 내쉬며 셀리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도대체 언제 온단 말인가.’
그 잘난 백색 마탑주의 제자나 한번 보겠다고 이곳에 앉아 있거늘, 그 소년은 대기실로 찾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백색, 네 제자 오기는 하는 건가?”
“···금방 올걸요?”
“미리 말은 해뒀고?”
“아뇨?”
“뭐?”
예투알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야기도 안 했는데 그 아이가 어찌 알고 이곳을 찾아와?”
“제가 스승이잖아요.”
그게 무슨 연관성이 있단 말인가?
“라크는 결투에서 이기면 언제나 스승님을 가장 먼저 찾아왔다구요. 이번에도 제가 방문한 건 알고 있으니··· 금방 찾아올걸요?”
우리 라크가 얼마나 착한데요.
그렇게 말하며 셀리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의 어깨에 제법 힘이 들어가 있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곧 올 거예요! 누구네 제자랑은 달리, 우리 라크는 스승님을 존경할 줄 아는 아이라서!”
30분이 더 흘렀다.
라크는 오지 않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