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166
〈 166화 〉 가을, 신학기(9)
* * *
라크는 지금 몹시 기분이 좋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숨기려 하지도 않은 채, 라크는 싱글벙글 웃음을 흘리며 들뜬 걸음으로 학사 내를 거닐고 있었다. 그 걸음이 어찌나 가벼운지 꼭 뛰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
“라크, 멋지더라!”
“혹시 시간 나면 나중에 나랑 훈련 한 번만···.”
“축하해, 라크!”
한걸음 내디딜 때 마다, 자신을 알아본 동기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라크는 우렁찬 목소리로 그들의 웅성거림에 답했다.
“음, 좋다!”
승리는 달콤하다.
그것이 반년 가까이 이어진 패배 끝에 따낸, 역전의 승리라면 더욱더 달콤한 것이다. 라크는 승리의 달콤함에 취했다.
‘승리를 즐길 줄 아는 것도 전사의 덕목.’
‘자만하지 않을 정도’라는 문장이 딸려오긴 하지만··· 승리의 기쁨에 취하고, 승리를 갈구하는 것 또한 좋은 전사의 덕목이다. 라크는 어렸을 적 전사들에게 배운 가르침을 충실히 이행하는 중이었다.
‘날씨가 좋군! 바람이 시원하다!’
라크는 초가을의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계속해서 걷는다. 그렇게 걸음을 옮기다, 조교나 교수들을 만나면 가벼운 이야기를 나눈 뒤 라크는 그들에게 한가지 질문을 던졌다.
자신의 스승.
자신을 승리로 이끈 스승.
그 스승님의 행방을 라크는 묻는다.
“아, ···님이라면 분명.”
수소문 하다 보니 행방을 아는 이가 나타났다.
라크는 그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곤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탁.
서늘한 바람이 감도는 복도를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한다. 라크는 자신의 스승이 기다리고 있을 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문고리에 손을 걸고, 힘차게 열어젖혔다.
드르륵, 탁!
문이 열리자 바람이 분다. 불어온 바람에 스승님의 머리칼이 나부낀다. 비단결 같은 머리칼이 나른한 햇살에 반짝였다. 그 머리칼은 백색···.
“라니아 교수님!”
···을 닮은 잿빛이다.
“오, 라크.”
양호실에 홀로 앉아있던 라니아가 손을 흔들며 라크를 반겼다. 그녀가 미소 지었다.
“전투 마학과 수석, 축하해.”
“감사합니다!”
라크는 꾸벅 고개를 숙여 스승에게 예()를 표한다. 좋은 전사란, 자신을 가르쳐 준 스승을 잊지 않는 법이다. 승리의 달콤함에 취한 와중에도 라크는 그것을 잊지 않았다.
“라니아 교수님 덕분입니다!”
“내가 뭘. 네가 잘 따라와 준 덕분이지.”
서로가 서로를 치켜세운다.
스승과 제자가 서로의 노력을 인정한다. 몹시도 보기 좋은 장면이 형성되는 가운데··· 라크는 아주 약간의 위화감을 느낀다.
‘뭔가를 잊은 듯한 느낌···?’
꼭 무언가를 잊은 듯한 느낌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그다지 중요한 문제는 아닌 듯 싶었다. 아마도.
2.
“난 가봐야겠군.”
“···네? 벌써요?”
“백색, 우린 마탑주다. 너나 나나, 그렇게 여유로운 사람은 아니지 않나. 나는 이 뒤에도 약속이 꽤 잡혀있다.”
“아니, 그래도 우리 라크 얼굴은···.”
“후우···.”
“뭐, 뭐에요? 왜 한숨을 내쉬어요?”
“백색···.”
예투알이 시계를 가리켰다.
“벌써 한 시간이 지났다.”
“한, 한 시간 쯤은···.”
“한 시간을 기다려서 안 오는 사람은, 두 시간을 기다려도, 하루를 기다려도 안 오는 법이다. 너도 그만 기다리고 직접 찾으러 가보는 편이 더 좋지 않겠나? 나는 이만 가보도록 하지.”
끼이익, 쿵.
그 말을 마지막으로 흑색이 대기실을 나갔다.
귀빈을 위해 준비된 대기실이다. 지나치리 넓은 방 안에 홀로 남겨진 셀리는 시계를 바라봤다. 시간이 제법 흘러 있었다.
훌쩍.
셀리는 조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 * *
벨노아와 클로에가 떠나고, 얼마 안 가 새로운 손님이 찾아왔다. 나는 맞은편에 앉은 손님을 흘겨보았다.
“초인과 마주한 게 도움이 된 것 같긴 합니다. 확실히 감각도 더 날카로워졌고··· 어떤 식으로 몸을 움직여야 할지 깨달은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쉬지도 않고 말한다.
할 말이 꽤 많은 모양이었다.
“응, 그렇구나.”
주절주절 떠도는 라크에게 나는 적당히 맞장구를 쳐줬다. 결투에서 승리를 따낸 게 그리도 자랑스러운 모양인데··· 라크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과연 그럴 만도 했다.
‘반년 만에 거둔 승리일 테니까.’
여러 번의 결투와, 여러 번의 패배.
한 번의 패배는 승리욕을 자극하지만, 그것이 두 번, 세 번, 그렇게 여러 번 이어지다 보면 의욕이 꺾이기 마련이다.
‘물론, 라크의 성격상 포기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승리의 갈망은 커져만 갔겠지.
그런 상황에서 따낸 승리다. 기쁘지 않다면 그게 이상한 거겠지. 나는 신나서 떠드는 라크의 말을 한동안 들어주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라크.”
하나 궁금한 점이 있는 까닭이었다.
“너, 백색마탑주한테는 뭘 배운 거야?”
“예?”
라크가 눈을 깜빡였다.
생각지 못한 질문을 받았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아니, 생각해보니까 좀 궁금해서.”
지난 반년간 라크를 봐오며 느낀 의문이다.
라크는 백색 마탑주의 수제자다. 그리고, 내가 기억하기로··· 백색 마탑은 ‘원소 마법학’을 전문으로 다루는 마탑이었을텐데.
‘그러니까, 위자드(Wizard)를 양성하는 마탑.’
그런데 라크를 보아라.
정작 그 마탑의 수장되는, 백색 마탑주의 제자인 라크는 위자드가 아니었다.
“너, 원소 주문 안 쓰잖아.”
심지어 원소 주문을 쓰는 것 같지도 않았다.
내가 봐온 라크는 도끼를 사용한 백병전을 핵심으로 삼고, 간단한 타격계 주문과··· 육체 강화 주문으로 백병전을 보강하는 느낌이었다.
배틀 메이지 클래스.
내가 개발해낸 클래스에 속해있긴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전사에 더 가까운 이미지다. 그렇기에 나는 의문을 느꼈다. 내가 미심쩍은 눈길로 라크를 바라보고 있자니··· 라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원소 주문이야 배우기는 했지만, 솔직히 적성에는 잘 안 맞았습니다. 제 마나가 원소 주문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말씀하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확실히 그렇긴 하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라크의 마나는 거칠다. 위자드 클래스에 속한 내가 확신하건대, 라크에겐 위자드로서의 재능이 없었다. 괜히 클래스가 분류되어 있는 게 아니다.
‘위자드는 마나가 좀 유들유들 해야 하니까.’
라크의 마나는 거칠다.
위자드의 재능을 타고난 클로에의 마나가 잘 다져진 수로 위를 흐르는 물길이라면··· 라크의 마나는 겨울날의 얼어붙은 수도와도 같다. 마나와 통로가 구분되지 않고 얼어붙어 있다.
육체, 혹은 마나의 통로를 강화.
즉, 자신이 가진 것을 강화하는데 최적화된 형태다. 별에게서 무언가를 ‘빌려’오는 위자드에게 어울리는 마나는 아니었다.
“그럼 원소 주문을 전문으로 배운 건 아니라고?”
“예, 그렇습니다.”
“백색 마탑주한테 원소 주문을 빼면 남는 게 있던가···?”
없을 텐데.
내가 진지하게 백색 마탑주의 쓸모를 고민하고 있자니, 라크가 입을 열었다.
“마나의 운용법을 주로 배웠던 것 같습니다.”
“마나의 운용?”
“예, 주문에 마나를 담는 법이나, 회로의 기초와 같은··· 마법사로서 갖춰야 할 기본에 대해 알려주셨습니다.”
라크가 손가락을 허공에 움직였다. 회로를 새기는듯한 시늉을 했다. 자세히 살펴보면, 회로를 새기는 버릇이 잘 들어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건 괜찮네.’
나는 오, 하고 짧게 감탄을 뱉었다.
백마탑주가 기본(??)이라며 라크에게 알려주었을 마나의 운용법의 태반은, 얼마 전 북부의 성지에서 내가 직접 때려 부수긴 했지만···.
‘회로학의 기본은 잘 가르쳤네.’
이거 하나는 쓸만했다.
물론, 이것도 실전에 맞춰 뜯어고칠 필요가 있었지만··· 그건 2학년 커리큘럼이다. 조금 나중의 일이 될 테지.
음, 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필기시험도 점수가 높더라니.’
요령이 없어서 그렇지, 가진 마학적 지식만 따지자면 라크는 아플리아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혔다. 확실히, 백마탑주가 이론 쪽으로는 잘 가르쳤는 듯 싶었다.
“괜찮은 스승이네.”
“예, 백색 마탑주님은 좋은 스승···.”
라크가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스승, 스승님. 그 단어를 중얼거리던 라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라크가 경악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뭐냐? 왜 그래?”
“까먹었습니다!”
까먹어?
내가 뭘, 이라고 물어보려는 순간이다.
“스승님이 와 계셨던 걸 잊어먹고 있었습니다···!”
“오···.”
“지금 당장 찾아뵈러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라크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라크?”
“예?”
까먹을 게 따로 있지 않니?
그렇게 핀잔을 주려다가, 나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콜로세움에서 백색 마탑주의 얼굴을 보긴 했지만, 나도 라크가 말하기 전까지 그 존재를 잊어먹고 있었으니까.
‘뭔가, 잊어버려도 별 탈이 없을 것 같은 인물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다음에 또 보자.”
3.
셀리는 차갑게 식은 차를 홀짝인다.
시계를 바라보면, 어느새 두 시간이 흘러 있다. 라크가 자신을 잊어버린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셀리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
스승을 잊어버릴 만한 아이가 아니다.
분명 사정이 있어서 늦는 거겠지.
‘결투에서 피곤해서 기절하듯 곯아떨어졌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게 아니면···.’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기도 두 시간째다.
셀리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나, 마탑주인데.”
그녀가 멍하니 중얼거린다.
“색을 받은 마탑의 주인인데. 왕도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마법사인데. 나, 대단한 사람인데.”
사실이긴 했다.
“나, 나는 상아탑에서도 인정받는 마법사인데.”
상아탑에서 꼽은 다섯의 마법사.
그 까다로운 학자들의 인정을 받은 마법사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화려한 명성들을 차례로 되새김질 해보지만, 셀리의 어깨는 축 처져만 간다. 제자가 자신의 존재를 잊어버린 마당에, 그런것들이 다 무슨 소용인가?
“후우···.”
진짜 그냥 나가볼까.
내가 찾으러 가는 게 맞겠지?
기나긴 고민 끝에, 그녀가 드디어 몸을 움직였다. 터덜터덜 힘없이 걸음을 옮긴 셀리가 문고리에 손을 걸었다. 천천히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드르륵.
불어오는 바람이 제법 차다.
그 바람이 셀리에게는 유난히도 차갑게 느껴졌다. 뼈에 사무친다는 게 이럴 때 쓰는 표현일까. 그녀가 우울한 얼굴로 복도를 향해 걸음을 옮긴 순간이다.
“어머, 백색 마탑주님 아니신가요?”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드러우나, 그 속에 굵직한 뼈대를 간직한 목소리다. 흔히들 권력자의 목소리라 부르는, 그런 목소리에 셀리가 고개를 돌렸다.
“역시 백색 마탑주님이시군요.”
복도의 맞은편에 서 있는 인물.
백금색의 머리칼과 금색의 눈동자.
왕가를 상징하는 그 특징적인 외모에 셀리는 곧장 그 인물의 정체를 깨닫는다.
제 4 왕녀, 아일라.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일라 왕녀님.”
셀리는 예법을 갖춰 고개를 숙였다. 이곳이 아플리아라 한들, 외부인에 속하는 자신은 이런 존경을 표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결투를 보러 오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직 아플리아에 계셨군요?”
“그게, 제자가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
말하는 와중에도 셀리는 수치심을 느낀다.
그녀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 모습에 아일라는 얼추 상황을 이해했다는 듯 쓰게 웃었다.
“라크 공자라면 양호실에 가 있을 거예요. 조금 전에 양호실로 향하는 모습을 봤답니다.”
“···아!”
셀리의 낯빛에 안도가 스친다. 그녀는 무심코 탄식을 뱉고선, 황급히 제 입가를 가렸다. 과연, 라크가 자신을 까먹었을 리가 없다.
‘그럼 그렇지!’
결투에서 부상을 입었고, 양호실에서 안정을 취한 게 분명했다. 그거라면 두 시간 동안 라크가 자신을 찾아오지 않은 이유도 설명이 됐다. 셀리의 안색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아하하.”
그 진상을 알고 있는 아일라는 어색한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아일라는 입꼬리를 가린채 마저 말을 이었다.
“같이 갈까요? 저도 양호실에 들르려는 참이라.”
셀리가 눈을 깜빡였다.
“동행해도··· 괜찮을까요?”
“그럼요. 들리는 길인걸요. 그럼 갈까요?”
아일라가 부드러운 미소를 흘렸다.
셀리는 감격에 겨워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앞장서는 아일라의 뒤를 셀리는 조심스레 따라 걸었다.
제 4 왕녀, 아일라.
아플리아에서도 보기 힘든 귀인.
이곳이 아니라면, 왕궁에 입성하여··· 무척이나 번거롭고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만 알현할 수 있는 귀인 중의 귀인이다.
‘자애로운 분이시구나···!’
그만한 인물이, 자신을 알아보고 동행을 요청하는 이 상황에 셀리는 감격을 느낀다. 꼭, 지난 두 시간의 기다림을 보상받는 듯 하다. 그녀는 제 4 왕녀에게 무척이나 큰 호감을 느낀다.
셀리는 아일라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걸었다.
“그런데, 왕녀님은 무슨 일로 양호실에···.”
“만나야 할 사람이 있거든요.”
아일라가 엷은 미소를 흘렸다.
그녀의 손에는 편지지 한 장이 들려 있었다. 편지에 찍힌 문양이 셀리의 시선을 끌었다.
‘저건.’
왕족 중에서도 단 한 사람만이 사용하는 문양이다. 셀리는 저 문양이 찍힌 편지를 받아본 적이 없지만··· 전장 인근에 세워진 중소규모 마탑의 마탑주들에게서 들은 적이 있는 문양이다.
「백색 마탑주님도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 문양이 찍힌 편지는, 마탑의 재정을 쪽쪽 빨아먹습니다···!」
악명.
「갑작스레 전장으로 지원 발령이 떨어지지 뭡니까. 마탑은 연구시설이지, 전쟁을 위한 시설이 아니라고 답장을 보냈더니 ‘계속 해 보아라.’ 라는 한 줄의 편지가 돌아왔을 때는 어찌나 기겁했는지···!」
악명이 자자한 문양.
「누구를 상징하는 문양이냐구요?」
「보시면 아실 겁니다.」
백금색 금화 가루가 흩뿌려진, 붉은 장미.
「흘린 피에 마땅한 대가를 매기리라.」
그런 문구를 담은 문양.
‘제 1 왕녀, 르뤼엘.’
미친개라 불리는 왕녀를 상징하는 문양.
그 문양이 찍힌 편지를 보며, 셀리는 무심코 어깨를 떨었다. 미친개라 불리는 왕녀의 편지임이 분명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