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199
〈 199화 〉 막이 내린 다음(5)
* * *
벽에 새겨진 핏빛의 회로.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그것은 마치 수십 마리의 벌레가 벽을 타고 기어 다니는 것만 같다. 빈말로도 깔끔함과는 거리가 먼 회로였다.
‘깔끔한 선이 아닌, 난잡한 선의 집합체.’
뭉친 실뭉텅어리를 보는 것 같기도, 어린아이가 그려놓은 낙서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이것이 고대 왕국에서 만들어진 회로의 특징이었다.
규칙성이 없다.
정제된 것이 아닌 날 것 그대로의 회로다.
현시대에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회로가 정교함과 균형을 추구한다면, 고대 왕국의 회로는 난잡함과 불균형함을 추구한다. 대칭을 이루지 않는 회로를 바라보며 내가 중얼거렸다.
“···복잡하네.”
복잡했다.
비단 눈앞의 회로만을 보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다.’
시체의 발견과 정체불명의 회로.
그리고 스케발의 잔향.
주어진 정보들에서 내가 예상한 최악은, 고작 해봐야 왕성에 제단이 나타난 상황 정도였다.
‘하지만, 이건···.’
내가 상상한 최악을 아득히 넘어서는 무언가였다.
『혈육을 강탈함으로써 삶을 잇는다.』
그런 의미를 가진 회로.
그리고, 눈앞의 회로는 무척이나 낡아 있었다. 희미해진 선에 몇 번이고 핏물을 덧칠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일, 이년 된 회로가 아니라는 뜻이다. 최소 백년 단위의 흔적이 느껴졌다.
‘수백 년의 세월.’
나는 머릿속으로 이 나라의 역사에 대해 떠올려보았다. 스승님께서 교양이라며 내 머릿속에 때려 박았던 것. 그 정보들을 차례로 나열해봤다.
“···682년.”
이 나라가 세워진 시기.
“가장 먼저 지어진 궁은, 적색궁.”
노후화된 적색궁 대신, 새롭게 만들어진 백색궁에 옥좌가 이전됐지만··· 가장 먼저 만들어진 궁은 적색궁이었다.
그것들을 떠올리며.
“······.”
나는 고개를 들어 회로를 바라본다.
수백 년은 된 듯한 낡음과 몇 번이고 사용된 흔적을 간직한 회로. 그것을 보고 있자니 떠오르는 단어가 하나 있었다.
‘흑막(??).’
오랜 세월 동안 왕가에 드리운 흑막(??).
몸을 갈아타며 이 나라의 가장 깊은 곳에서 암약하고 있었을 무언가. 그것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왕궁에 드리운 어둠이 있다는 것.
깊게 뿌리내린 어둠은 하루 이틀 사이에 완성된 게 아니라는 것.
“이걸, 왜 이제 와서?”
그렇기에 의문이 든다.
“더 숨길 수 있었을 텐데.”
고대의 회로를 ‘이 정도’의 규모로 그릴 수 있는 존재다. 내가 보았던 고대 회로들은 대부분이 파편의 형식으로 나뉘어 있었다.
잘게 쪼개진 낱말, 혹은 글자의 파편.
‘그러나 이건 완성된 문장이다.’
이만한 회로를 새길 수 있는 존재가.
최소 수백 년의 세월을 암약한 존재가.
“어째서, 지금 모습을 드러냈는가.”
내가 눈을 가늘게 떴다.
막의 너머에 자신이란 존재가 있음을, 더욱 오랫동안 숨길 수 있음에도 구태여 자기 자신을 드러냈다. 그 이유를 나는 한번 생각해본다.
“···드러내도 잡히지 않을 자신이 있던가.”
그게 아니라면.
“알고 있다 한들, 막을 수 없다고 확신했던가.”
적색궁 곳곳에 놓인 촛불이 불현듯 흔들렸다.
덩달아 바닥에 깔린 불그림자도 출렁였다.
일렁이는 그림자는 사람의 얼굴을 닮아 있었다.
깔깔깔.
얼굴을 닮은 그림자는 웃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를 비웃듯이.
2.
“추적이 안 됩니다.”
“···추적이 안 된다고?”
더 조사할 것이 없기에 나는 제 1 왕자의 거처에서 빠져나왔고, 근처를 조사하던 칼트와 합류했다.
「칼트 경, 조사에 진척은 있습니까?」
「있다면 부디 상황의 공유를······.」
왕성의 복도를 거니는 동안 헐레벌떡 달려온 근위대가 칼트에게 질문을 던지곤 했는데, 지금의 상황을 보면 썩 이해가 안 가는 일은 아니었다.
제 1 왕자의 실종.
그리고, 내 옆에 나란히 걷고 있는 칼트의 전문 분야가 바로 ‘누군가를 찾는’ 일이었다.
‘트래커(Traker).’
누군가를 추적하고, 흔적을 뒤쫓는 데 최적화 된 특수한 클래스. 그리고 칼트는 트래커라는 클래스를 논할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기사였다.
변절자 색출, 마기의 역추적을 통한 주요 거점의 파괴 등등··· 전장에서부터 혁혁한 공을 세워 온 데다가, 하운드(Hound)로서의 활약도 꽤 잘 알려져 있었으니까.
가장 뛰어난 트래커(Tracker).
작은 흔적도 놓치지 않는 사냥개.
“이것저것 다 해봤는데 말입니다.”
그런 칼트가 지금, 내 앞에서 단언하고 있었다.
“못 찾습니다, 이거.”
제 1 왕자, 이자크.
왕자의 실종을 조사하던 칼트가 내놓은 결론은 ‘찾을 수가 없다’ 였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기에 내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뭔 소리야?”
“정말로, 흔적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칼트가 말했다.
“제 1 왕자, 이자크는 오랜 세월 왕성에서 머물렀습니다. 왕성을 뜬 적이 단 한 번도 없고요. 즉, 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줄곧 적색궁에 머물렀다는 이야기인데···.”
이상할 정도로 깔끔합니다.
그렇게 칼트가 중얼거렸다.
“인간이라면 남아야 할 작은 흔적부터 시작해, 그 흔한 잔향조차 남지 않았습니다. 그냥, 아무것도 없습니다. 마치 유령이라도 머물다 간 것처럼 말입니다.”
“그게 말이 돼?”
“인간이라면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그 신출귀몰하다는 배교자(?者)조차 흔적은 짙게 남는 편인데··· 이거야 원.”
흔적이 없으니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다.
그렇게 말하는 칼트를 앞에 두고, 나는 잠시 턱을 매만졌다. 걸음을 내딛는 속도가 천천히 느려졌고, 얼마 안 가 나는 제자리에 멈추어 섰다.
“야, 칼트.”
“예, 선배님. 왜 그러십니까?”
뒤를 돌아본 칼트에게 나는 말했다.
“인간이 아니라면 어때?”
“인간이 아니라면? 글쎄요···.”
칼트가 팔짱을 낀 채 툭툭, 제 팔꿈치를 건드렸다.
“아예 불태우지라도 않는 이상, 실체를 가진 존재라면 어떠한 식으로든 흔적은 남기는 법입니다. 인간이 아니라 가정한다 치더라도, 말이 안 되는 일인 건 똑같습니다.”
“그게 가능하다면, 어떤 형태일 것 같냐?”
“아마도.”
내 질문에 칼트는 내 발밑을 가리켰다.
나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내 발밑에는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그림자나 빛 같은, 그런 계통의 존재겠죠.”
그리 말하며 칼트는 쓰게 웃었다.
일단 답하긴 하지만, 썩 영양가 있는 말은 아니라는 듯한 태도였다.
“저는 조금 더 조사를 해볼 생각입니다. 그래서, 회로의 정체는 파악하셨습니까?”
“···일단은, 파악했지.”
“어떤 내용이었습니까?”
나는 한 줄의 문장을 종이에 적어 칼트에게 건넸다. 문장을 본 칼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궁중 마법사들이 못 알아본 게 다행이군요.”
칼트는 말없이 종이를 꾹 쥐었다.
“어쩌실 생각입니까?”
“원래대로라면, 네가 찾아낸 다음 내가 조져버릴까 싶었는데··· 그건 불가능할 것 같고.”
칼트가 ‘할 수 없다’라고 단언했다면, 당장 제 1 왕자를 추적하는 건 불가능하단 소리다. 아예 적색궁을 통째로 박살 내버린다면 또 모를까.
‘그 방법도 확실하진 않아.’
인간의 육신과 육신을 옮겨 타는 존재다.
어중간한 방법으로 잡으려 들어봐야, 꼬리를 자르고 도망칠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고, 당장 연관이 있을 법한 국왕을 치러 가자니···.’
그건 그리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결정을 내리기 전에, 아무래도 누군가를 만나봐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일단은, 만나봐야겠지.”
“누굴 말씀이십니까?”
내가 말했다.
“제 1 왕녀, 르뤼엘.”
3.
제 1 왕녀, 르뤼엘의 집무실.
굳게 닫힌 문의 앞에는 어느 때와 같이 귀족들이 목놓아 르뤼엘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부디 기회를······.』
『한 번 이라도 좋으니, 저희의 이야기를···.』
갈라지기 시작한 목소리다.
그들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닫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방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어우.”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들의 뒤다.
퀭한 눈동자로 귀족들은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검은 로브를 깊게 눌러쓴 여인이 서 있었다. 로브 속에서 얼핏 비춰 보이는 피부는 새하얗다.
“길은 좀터놔야 할 거 아닙니까.”
들려오는 목소리는 미성이다.
경멸이 담긴 목소리에 움찔, 하고 귀족들이 어깨를 얕게 떨었다. 무례하기 짝이 없는 태도이나, 왠지 모를 위압감에 눌려 귀족들은 말 한마디 제대로 꺼내지 못한 채 슬그머니 뒤로 물러섰다.
물러선 귀족들의 사이로 그녀가 지나간다.
그리하여 문 앞에 선 그녀가 가볍게 노크를 한다. 귀족들이 부르짖던 소리에 비하면 한없이 작은 소리다.
끼이익.
그러나, 문은 그 소리에 반응한다.
지난 몇 시간 동안 미동도 하지 않던 문이 천천히 열린다. 귀족들의 눈동자가 부릅떠지는 가운데, 여인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쿵.
도로 닫힌 문을 귀족들은 멍한 눈동자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의 눈에는 허무함이 가득했다.
* * *
가벼운 잠옷 차림의 르뤼엘은 차를 홀짝이며 눈앞에 놓인 종이를 보았다. 종이에는 한 줄의 문장이 적혀있다. 그 문장을 르뤼엘은 소리 내어 말했다.
“혈육을 강탈함으로써, 삶을 잇는다.”
끔찍한 문장이로군.
르뤼엘이 눈살을 찌푸린 채 고개를 들었다.
“이게, 그곳에 새겨진 회로가 가진 의미인가. 교수.”
맞은편에 앉은 라니아가 고개를 끄덕인다.
르뤼엘은 제 눈가를 꾸욱, 눌렀다.
“회로는 얼마나 사용됐지?”
“그것까진 모르겠네요. 확실한 건, 한두 번은 아닐 겁니다. 새겨진 지도 꽤 오래됐고요.”
“···몇 대에 걸쳐 드리운 뿌리라는 소리인가.”
르뤼엘은 머리가 지끈거려옴을 느꼈다.
‘단순한 음모론으로 치부하고 싶은 이야기로군.’
하지만 그럴 수 없음을 르뤼엘은 알고 있다.
“믿기 힘든 건 알겠지만···.”
“아니, 믿는다.”
르뤼엘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대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또한, 이 문장이 사실이라 가정했을 때··· 상황이 얼추 들어맞거든.”
자리에서 일어선 르뤼엘은 집무실의 한편을 채운 책장에서 책 몇 권을 꺼내 들었다. 그녀가 꺼내 든 것은 왕국의 역사서였다.
“보아라.”
테이블에 올려둔 역사서를 가리키며 그녀가 말했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지. 왕가는 대대로 자녀가 제법 많은 편이었다. 그리고 그 수는 언제나 유지됐지. 누가 그리 시킨 것도 아닌데 말이다.”
다섯에서 여섯.
그렇게 유지되어 온 후계자의 수.
“솔직히 말하자면, 이건 이상한 일이다 교수.”
“···번거로울 테니까요.”
“그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왕위 계승자를 정하는 과정에서 말이 많아지는 법이다. 귀족들에게 파벌을 가를 명분만을 던져줄 뿐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력 투쟁으로 수많은 왕가의 일원이 이 왕성의 앞마당에 묻혀 있음에도.
“그런 권력 투쟁의 장을 겪은 이들··· 그러니까, 혈육의 시체를 밟고 왕위에 오른 이들조차도 왕위에 오른 순간 귀신같이 종마로 전락하고 말더군.”
르뤼엘은 툭툭, 역사서를 건드리며 눈앞의 교수를 바라보았다.
“이 이야기는, 예전에도 한 적이 있을 테지.”
『아비는 정치질은 그럭저럭 유능할지는 모르겠으나, 좆을 좆대로 놀린다는 점이 단점이다. 그 단점의 결정체가 내 오라비다.』
라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르뤼엘은 제 미간을 꾸욱, 누르며 말을 이었다.
“왕위에 오르기 전, 역사서에 새길 일화를 남긴 이들 모두가··· 왕위에 오르는 순간 돌변하고 만다. 그것을 왕가의 저주라 부르는 이들이 있었고, 그런 뜬소문을 퍼뜨리다 처형당한 이들이 한가득하였지.”
그러나, 지금에 와서 보자니.
“그들의 말이 틀린 게 아니었군.”
그리 중얼거린 르뤼엘이 한숨을 내뱉었다.
“자식이 많은 것도, 전부 옮겨 탈 육체를 만들기 위해서였나? 나도, 아일라 그 아이도, 내 누이, 혹은 오라비와 동생 모두가···.”
금빛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식는다.
자신이 인형이 되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는 걸 알게 된 르뤼엘의 입술이 살짝 벌어진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건 헛웃음이다.
“지랄 같군. 정말로.”
“······.”
“그렇게 볼 필요 없다, 교수. 안 그래도 좆같았던 세상살이가, 조금 더 좆같아 졌을 뿐이니까.”
르뤼엘이 찻잔에 손을 뻗었다.
남은 차로 목을 축인 그녀는 잠시 눈을 감는다. 잠깐의 침묵을 라니아는 말없이 기다렸다. 침묵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래서, 교수.”
감았던 눈을 뜨며 르뤼엘이 말한다.
“그대는 나를 의심하지 않나?”
“···예?”
“오래전부터 왕가에 암약한 존재가 있다. 그는 왕가의 핏줄을 타고난 이들의 몸을 빼앗음으로써 제 삶을 이어왔다.”
그렇다면, 하고 르뤼엘이 묻는다.
“나 또한 그 범주 안에 들 수 있는 것 아닌가?”
“···그건.”
“아일라 그 아이야 타고난 별빛으로 다가오는 것들을 거부하나··· 나는 어디까지나 범인에 불과하니 말이다. 내 오라비가 사라진 지금, 가장 의심스러운 건 본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
잡아먹힐 뿐인 인간.
상식을 벗어난 존재에 저항할 수 없는, 한낱 인간.
“그대는.”
르뤼엘이 조금 슬픈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대는, 지금의 나를 어떻게 생각하나.”
어쩌면 지금의 이 얼굴조차 상대에게는 단순한 연기로 비춰 보일지도 모른단 사실에, 르뤼엘은 숨이 막혀옴을 느꼈다.
자신이 쌓아온 모든 것.
이제껏 발버둥 쳐온 모든 삶.
그것이 다만 무의미해짐을 느끼며, 르뤼엘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비어버린 찻잔이 마치 자신의 삶을 닮은 듯 하여, 르뤼엘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대가 나를 의심해도 어쩔 수 없는···.”
“아니, 딱히 그런 생각은 안 했는데요.”
“···뭐라?”
르뤼엘이 고개를 들었다.
눈앞을 바라보니, 라니아는 푸른 눈동자를 깜빡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 시선은 처음 마주했을 때와 한치의 변함도 없었다.
“애초에 말입니다.”
라니아가 쓰게 웃었다.
“왕녀님의 그 성격은, 연기하려 해도 못 할 것 같은···.”
제법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듯한 말투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