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198
〈 198화 〉 막이 내린 다음(4)
* * *
몇 달 만에 방문한 왕실은 혼란스러웠다.
제 1 왕자, 이자크의 실종.
왕위 계승자인 이자크의 실종이 불러온 여파는 컸다. 이자크의 파벌에 속한 수많은 귀족이 왕실에 방문 의사를 밝혔고, 개중에는 제 1 왕녀인 르뤼엘에게 접촉하려는 이들 또한 셀 수 없이 많았다.
“쥐새끼 같은 작자들이지.”
그들에 대해 르뤼엘은 이렇게 말했다.
“내 오라비가 실종됐다. 남은 왕가의 핏줄은 이제 셋뿐인데, 그중 하나는 전장에, 다른 하나는 아플리아에 재학 중이니··· 현재 왕성에 남은 건 본녀뿐이다.”
지겹다는 듯이, 혹은 같잖다는 듯이.
“그래서일까.”
다리를 꼬고 앉은 그녀가 비웃음을 흘렸다.
“그럴싸한 핑계를 대며 내게 줄을 서려 하더군. 온갖 아부를 늘어놓으며 말이야. 하루아침에 손바닥 뒤집듯이 제 주인을 버리고, 내 앞에서 꼬리를 흔들어 대는 꼴이라니···.”
하, 하고 그녀가 짧게 숨을 뱉었다.
“절조와 기개라곤 엿 바꿔 먹은, 발정 난 짐승 새끼들의 모습이 따로 없더군. 그닥 눈에 담고 싶은 모습은 아니었어.”
“그렇습니까?”
“그렇다, 교수. 오랜만이군.”
제 1 왕녀, 르뤼엘의 집무실.
그곳에서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는 르뤼엘을 마주하고 있었다. 조금 피곤해 보이는 그녀는 백금발의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제 관자놀이를 짚었다.
“혼란스러운 상황이지만, 그대의 방문만큼은 환영할만한 일이야. 그리고···.”
르뤼엘의 입술이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했다.
그녀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약간의 기간을 두고 그녀가 힘겹게 다음 말을 이었다.
“···아플리아를 덮친 사건에 대해선, 칼트 경을 통해 보고를 들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졌다.
“사건 해결에 있어, 핵심적인 임무를 수행했다고 들었다. 또한, 큰 부상을 입었다는 것까지도.”
“큰 부상까진 아닙니다.”
내가 어깨를 으쓱였다.
“몸 상태는 호전되고 있고, 영구적으로 남을 부상은 딱히 없습니다. 요즘 포션들이 워낙에 잘 나와서.”
“···목숨이 위중했다던데.”
“결국엔 살았으니까 괜찮은 것 아니겠습니까.”
여전히 걸린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르뤼엘에게, 나는 쓰게 웃으며 답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부탁받지 않았더라도 했을 일이고요.”
“···그대에겐 언제나 신세만 지는군.”
누그러진 시선, 누그러진 목소리.
르뤼엘은 엷은 웃음을 머금은 채 그리 말했다.
“그대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조금 놓이는 느낌이야. 나도 제법 몰려있었던 모양이군.”
언제나 눈매에 힘을 주고, 날이 선 목소리로 지시를 내리는 모습에 익숙해진 탓일까. 부드러운 미소를 흘리는 그녀의 모습은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몰려있다니요? 저것 때문에?”
내가 집무실의 바깥을 가리켰다. 굳게 닫힌 문의 틈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제법 컸다.
『르뤼엘 왕녀님, 제발 저희에게 기회를···!』
『한 번만, 한 번이라도 좋으니···!』
『현재 이자크 왕자님의 실종과 국왕께서 침묵하신 가운데 왕녀님께서 무언가 행동을···.』
귀족들의 커다란 목소리.
저마다의 사정을 가진 채 떠들어대는 목소리는, 솔직히 말하자면 좀 시끄러웠다.
‘···어째 좀 익숙한데.’
몇 달 전에도 이곳에서 비슷한 장면을 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혹시, 이것이 그녀가 피곤해 보이는 이유인가 싶어 질문을 던졌지만···.
“저런 소음은 아무래도 좋다.”
르뤼엘은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짐승들이 짖어대는 소리는 본녀가 태어났을 때부터, 혹은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시절부터 들어온 소리이므로 익숙하다고 할 수 있지. 익숙한 것에 짜증을 느낄지언정 불안에 떨지는 않는다.”
그녀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새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테이블에 놓인 찻잔을 감싼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녀의 손가락을 보았다.
파르르.
그녀의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추위에 떤다 치기에는 방안은 따뜻했다. 나는 시선을 올려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복도에서 오라비를 마주쳤다.”
불안에 떠는 금빛 눈동자.
흔들리는 시선으로, 약간의 떨림을 간직한 목소리로 그녀가 말을 늘어놓았다.
“분명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들은 오라비가, 맞은편에서 태연히 걸어오더군. 그림자를 끌면서 말야.”
“···그림자, 라고요?”
“그래, 그림자. 대낮임에도 복도는 어두웠고, 오라비의 걸음을 따라 그림자가 출렁였다.”
고개를 숙인 채 찻잔을 바라보며, 그녀는 말했다.
“그건 내 오라비와 닮았지만, 오라비는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인간인지가 의심스럽더군. 그것은 무언가, 무언가 이상했다. 이질적이었다.”
‘그것.’
인간이 아닌 무언가를 가리키는 듯한 말.
“그것이 그림자를 끌고 내게 다가올 때, 나는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 발걸음 소리가 아예 들려오지 않을 때까지··· 숨조차 쉬지 못했다.”
그녀가 제 목덜미를 매만졌다.
“나는 여태까지 내 오라비를 정신병자라고 생각했다. 무언가 비틀렸을지언정, 인간의 범주 안에 들은 존재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그건 아니었다.
르뤼엘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건, 그건···.”
그녀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그 어느 때보다 그녀의 눈동자는 떨리고 있었다.
“인간이 아닌 그것은, 도대체 무엇이지?”
“그건 지금부터 알아봐야겠죠.”
나는 그렇게 답하며 손을 뻗었다.
그녀가 쥔 찻잔의 위에 내 손을 덮었다.
가열(Heating).
차게 식은 찻잔이 적당한 온기를 품는다. 찻잔에서 전해지는 열기에 찻잔을 말아쥔 르뤼엘의 손가락에 일던 떨림도 천천히 잦아들었다.
“···고맙군.”
르뤼엘이 찻잔을 들어 올렸다.
미지근한 차로 목을 축이고, 몇 번의 심호흡을 한 뒤 그녀가 다시 찻잔을 내려놓았다.
“좀 괜찮으십니까?”
“덕분에.”
그녀가 엷은 미소를 흘렸다.
“그래, 내게 묻고 싶은 게 있을 테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내주신 편지에 적힌 문장, 그 문장에 대해 자세히 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2.
「내 오라비가 실종된 직후, 적색궁에서 악취가 진동했다. 악취를 쫓아 기사들이 적색궁을 뒤지다 보니 대량의 시체들이 발견됐다더군.」
「평범한 시체는 아니었다.」
「그들의 얼굴 가죽이 전부 벗겨져 있었으니까.」
내가 그녀에게 받은 편지.
「시체와 함께 붉은 회로도 발견됐다. 다만, 일반적인 회로는 아니었다. 나로서는 그 용도를 알 수 없더군. 처음 보는 종류의 회로였다.」
그 편지의 다음 이야기를, 나는 르뤼엘의 입을 통해 전해 들었다. 들은 이야기를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았다.
‘제 1 왕자의 거처에서, 얼굴 없는 시체들이 대량으로 발견됐다.’
그리고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핏물로 그린 듯한, 정체를 알 수 없는 붉은 회로 또한 발견됐다는 거지.”
“그렇게 됐습니다. 궁중 마법사들은 전부 고개를 가로저었다는군요. 통상적인 회로와는 그 결부터가 달라서, 알 수가 없는 회로라면서.”
내 옆을 따라 걷던 칼트가 말했다.
출입이 통제된 제 1 왕자의 거처, 적색궁의 최심부를 향해 나와 칼트는 나란히 걷고 있었다.
“옷은 잘 맞으십니까?”
“편하네. 잘 맞아.”
나는 지금 칼트와 같은 로얄 가드의 정복을 입고 있었다. 얼굴을 가릴 수 있는 로브가 딸린, 검은색으로 통일된 복장.
‘왕실에서 얼굴을 가리고 다닐 수 있는 건, 하운드 뿐이라고 하던가.’
그 덕분에 별다른 변장이 필요가 없었다. 지난번 르뤼엘 왕녀의 호위 임무를 수행할 때 입었던··· ‘그 복장’과 비교도 안 되는 편안함이었다.
“딱 달라붙어서 별로 안 좋아하실 줄 알았는데.”
칼트는 그리 중얼거리며 내 바지를 가리켰다. 딱 달라붙는 가죽바지. 그 지적에 나는 그만 쓰게 웃고 말았다.
“치마가 아닌 게 어디냐···.”
“···예?”
“아무것도 아니다.”
나풀거리는 치마.
프릴이 주렁주렁 달린 메이드 복.
‘그거에 비하면 이건 뭐···.’
불만이 없다. 무척 만족스러웠다, 정말로.
“여기입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우리는 굳게 닫힌 문 앞에 멈춰섰다. 칼트가 문을 향해 마도구를 들어 올렸고, 끼이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한 시간 정도 사람을 물려놨습니다. 이 틈에 확인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시간이 더 필요하십니까?”
“한 시간이면 충분해.”
내가 장갑을 끌어 내렸다.
“문 앞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으로 걸음을 내디딘 순간 확, 하고 악취가 밀려들었다. 시체가 썩는내도, 피비린내도 아니었다.
‘···이건.’
약물의 냄새다.
코를 찌르는 악취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냄새다. 나는 그것을 쫓아 걸음을 옮겼다.
‘적색궁의 최심부.’
제 1 왕자가 머물렀던 장소.
그곳에는 미리 들었던 대로 대량의 시체가 쌓여있었다. 얼굴 가죽이 뜯긴 시체들은 기괴한 형태로 몸이 구부러져 있었다.
‘꼭, 인형이라도 만들려는 것 같군.’
그런 감상을 품으며 나는 더 안으로 들어갔다. 한곳에 모아둔 시체를 넘어, 적색궁의 가장 깊은 곳으로 향한다. 걸음을 옮길수록 악취는 더욱 심해져 갔다.
그리고.
“······.”
목적지에 도착했다.
걸음을 멈춘 채 나는 고개를 들어 올린다. 적색궁의 가장 깊은 곳, 벽을 허물어트린 듯한 잔해의 너머에 그것이 있었다.
피로 그려진 회로.
벽에 새겨진 거대한 회로.
나는 그것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확실히, 통상의 회로와는 그 결이 다르다. 궁중 마법사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고대 왕국의 회로.”
이건, 잿더미가 된 고대의 왕국에서 만들어진 회로였으니까. 지금의 회로와는 새기는 방법도, 마나를 순환시키는 방법도 전혀 다른 회로.
고대 리치, 스케발이 사용했고.
온갖 옛 유적에서 발견할 수 있는 회로.
그 누구도 고대 왕국의 회로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회로를 해석하기 위한 어떠한 자료도 남아있지 않았으니까.
‘고대 왕국과 관련된 정보는, 남김없이 불타 사라졌다. 말 그대로 잿더미가 됐다.’
고대 왕국과 관련된 것을 마주하더라도, 그것이 고대 왕국에서 나왔음을 짐작할 수는 있지만··· 어떠한 의미를 가진지를 파악하기란 어렵단 뜻이다.
하지만, 불가능 한 건 아니었다.
나는 회로가 새겨진 벽을 향해 다가갔다. 한걸음, 다시 한걸음. 그렇게 벽의 앞에 멈춰선 나는 벽을 향해 손을 뻗었다. 회로를 손으로 더듬었다.
‘몇 번이고 마주했다.’
고대 리치, 스케발에게서.
배교자, 글레투스가 남긴 폐허에서.
잿빛 마탑에 남은 유적 조사의 기록에서.
나는 고대 왕국의 회로를 마주한 적이 있었고, 그것을 연구한 경험이 있었다. 물론, 연구의 성과가 그리 좋지는 않았다. 고대의 회로를 완전히 해석하는 건 여전히 불가능했다.
‘하지만.’
고대 회로를 문장이라 가정한다면.
“맥락 정도는 읽을 수 있지.”
수십 개의 단어와 단어가 이어진, 긴 문장 중에서 나는 ‘몇 개의 단어’를 해석할 수 있었다.
‘몇 개의 단어, 단어를 통한 해석.’
사실상 때려 맞추는 것에 가깝다.
하지만, 아무리 고대의 회로라고 한들 주문을 사용하기 위한 회로다. 단어와 단어를 읽다 보면 주문이 흘러갈 방향이 눈에 보이는 법이다.
사락.
나는 벽을 더듬었다.
회로의 결을 느꼈으며, 선과 선이 겹치는 위치에 자리 잡은 단어를 해석했다.
『잇는다.』
연결.
『삶』
생명, 혹은 수명.
『피.』
혈액. 피. 혹은 핏줄.
『취하다.』
취함, 강탈.
“······.”
내가 말없이 고개를 들었다.
천천히 뒷걸음질 치며, 나는 회로를 한눈에 전부 담았다. 그리곤 회로를 타고 마나가 순환하는 길의 순서대로 내가 읽어낸 단어를 배열했다.
『피』 『취하다』 『삶』 『잇는다』
조금 더.
『피』를 『취해』 『삶』을 『잇는다』
매끄럽게.
『혈육』을 『취해』 『삶』을 『잇는다』
다시.
『혈육』을 『강탈』함으로써 『삶』을 『잇는다』
그렇게.
“혈육을.”
나는 완성된 문장을 입에 담았다.
“혈육을, 강탈함으로써 삶을 잇는다.”
3.
“찾아냈군.”
왕성의 가장 깊은 곳에 숨겨진 방.
그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는 곳.
인간의 시체와 뼈, 그리고 얼굴 가죽으로 장식된 그곳에는 옥좌가 하나 놓여있다. 인두겁이 깔린 옥좌에는 한 인간이 앉아있다.
“찾아내고 말았어, 드디어.”
희열에 젖은 한 인간의 목소리가 메아리친다. 울리는 것은 인간의 목소리뿐이 아니다.
『어째서 광인을 불러들였지.』
출렁이는 어둠.
그곳에 숨은 리치가 옥좌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것이 방해를 했다. 성공을 앞둔 계획이, 광인으로 하여금 틀어지고 말았지. 이것에 대해 할 말이 없나?』
“그편이 재밌어질 테니까.”
『재미? 네 그 알량한 재미를 위해 일을 그르쳤단 말인가?』
리치의 정신파가 분노에 떨린다.
그러나, 인간은 웃음을 흘릴 뿐이다.
“오, 이런. 스케발, 천년이 넘는 세월을 살다 보면 유희에 목말라하는 법이야. 너라면 날 이해할 줄 알았는데.”
『네가 이해받기를 원하다니, 웃지 못할 농담이로군.』
“누구든 이해를 바라지. 그 누구든.”
옥좌에 앉은 인간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는다.
“수백 년의 삶을 견뎌온 최초의 잿빛도, 수백 년 동안 어둠 속에 잠긴 그 아이도, 광기에 사로잡힌 최초의 성녀도, 그 모두가 이해를 바라.”
나도 마찬가지이지.
그리 말한 인간이 제 팔을 활짝 벌렸다.
“상상해 보아라, 스케발. 광인이다. 최초의 성녀를 닮은 광인! 광기 속에서 그는 백 년의 삶을 인내했다. 찬사를 보내 마땅할 일이지.”
희열에 젖은 목소리로 그가 열변을 토한다.
그러나, 그것은 찬사와는 거리가 멀다.
“——그렇기에.”
그것은 비웃음이다.
조롱에 가까운 웃음이다.
“그 백 년의 삶이 허무해지는 순간은 과연, 달콤하지 않겠나? 나는 그것을 보고 싶었을 뿐이야.”
『악취미로군.』
“새삼스레.”
까득, 하고 옥좌가 비틀린다.
고대 리치의 손가락이 옥좌를 바스러트리기 시작한다. 신경질적인 정신파가 일대를 뒤흔들었다.
『나는 너와 선문답 따위를 나누고자 온 것이 아니다. 실패의 책임을 물으러 온 것이지.』
“오, 스케발, 이 재미없는 친구야.”
인간의 발밑에 그림자가 요동쳤다.
“우리, 조금 더 큰 그림을 봐야 하지 않겠나?”
인간은 그림자를 담아두기 위한 그릇에 불과하다.
“이만한 수가 모였다.”
인간이 웃는다.
“이만한 별빛이 모였어.”
인간의 탈을 뒤집어쓴 그림자가 웃는다.
“수백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지. 이 말의 뜻을 아직도 못 알아듣겠나?”
『그 말은.』
“다음으로 나아갈 차례라는 것이지.”
다음.
“다음으로, 다시 다음으로.”
누군가가 남긴 말을 조롱하듯, 그림자가 이리저리 출렁였다. 기울어지고 출렁이는 그림자는 휙, 하고 손에 쥐고있던 체스말을 내던진다.
박살난 나이트.
무너진 비숍.
바닥을 나뒹구는 수많은 말들.
그리고, 인간의 손에 남은 것은 폰(Pawn)이다.
“이제막 별빛을 머금고, 앞으로 크게 나아간 폰이 있지. 앞으로도 이 아이는 계속해서 나아갈거야.”
백금색의 폰.
“그리고 체스판의 끝에 도착하겠지.”
그것을 콱, 하고 그림자가 움켜쥔다.
“우리는 그날을 기다리면 되는거야. 그저, 차분히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거지.”
그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곳.
무대의 뒷편.
내려간 막의 너머.
흑막(??).
검은 장막에 숨은 그림자는 조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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