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278
〈 278화 〉 죽지 못한 인간(4)
* * *
재는 재로(Ashes to Ashes).
잿빛 마법사의 상징과도 같은 이 주문은 잿가루만 충분하다면 최상위 주문조차 능가하는 화력을 선보인다. 심지어 타고 남은 마나의 잔재를 사용하기에, 그 가성비가 끔찍하게도 좋다.
그러나 지금, 라니엘은 가성비를 등한시한 채 주문을 발현시킨다. 흩날리는 잿가루로도 모자라, 체내의 마나를 모조리 끌어다 주문의 화력을 끌어올린다.
제 전부를 걸어 짜올린 단 하나의 주문.
아무리 용사의 육체로 재조립된 언데드라 한들, 지근거리에서 저 끔찍한 주문을 견딜 수 있을 리가 없다. 쿤텔의 초감각이 비명을 지른다.
치이이익!
주먹이 닿기도 전에 쿤텔의 육신은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보며 라니엘이 승리를 반쯤 확신한 가운데, 쿤텔이 움직였다.
뿌득.
그 움직임은 놀라우리만치 빠르다.
쿤텔은 붙잡힌 왼팔을 제 몸에서 뜯어내며, 빈 오른손을 뻗어 살점이 눌어붙은 칼자루를 움켜쥔다. 그리곤, 그대로 휘두른다.
아래가 아닌 위로.
투확, 하고 라니엘의 어깨에 박혔던 검이 하늘로 솟구쳤다. 그러나 다시 한번 검을 휘두를 시간은 없다. 이미 주문은 섬광을 토해내고 있고, 쿤텔의 검은 하늘을 향해있다.
콰직!
제 발목을 물어뜯는 카리옷의 두개골을 짓밟으며 쿤텔이 뒤로 도약했다. 그는 주문의 범위에서 한걸음 물러서며, 검을 휘두를 공간을 만들어낸다.
그리곤, 짓쳐드는 섬광을 향해 검을 휘두른다.
쿤텔의 오른팔이 잔상을 흩뿌리며 움직인다. 재조립된 육신조차 그 움직임을 따라잡지 못해, 근육이 찢어지고 뼈가 부러지나··· 쿤텔의 검(?)은 멈추지 않는다.
서걱.
한번 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섬광이 쪼개지고 열기가 사그라든다. 주문의 근간을 읽으며 쿤텔은 계속해서 검을 휘두른다. 한 번으로 부족하다면 열 번을, 그로도 모자라다면 백 번을.
은백색의 칼날이 섬광을 가른다.
온몸이 갈가리 찢어지면서도 죽음의 칼을 향해 일격을 찔러넣었던 쿤텔이다. 언데드로 되살아났다 한들 그 집념은 여전하다. 열기에 타들어 가면서도 쿤텔은 검을 결코 놓지 않는다.
하지만, 그 저항이 무색하게도 섬광은 기어코 쿤텔을 집어삼켰다. 열기가 쿤텔의 육신을 후려치고, 일대를 새하얗게 물들였다.
콰아아아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라니엘의 시야 또한 점멸했다.
빛과 함께 열기가 걷혔을 때, 라니엘은 그대로 고꾸라질뻔한 제 몸을 억지로 추슬렀다. 아직 쓰러질 수는 없기에.
그 판단은 옳았다.
열기가 걷히고 드러난 주변의 풍경에, 라니엘은 무심코 숨을 헛삼키고 말았다.
후두둑.
쿤텔은 여전히 살아있다.
몸에는 사그라지지 않은 불길이 들러붙어 있으며, 그 몸은 열기를 못 이겨 흘러내리지만··· 여전히 쿤텔은 두 발로 땅을 디디고 서 있다.
녹아내리는 육신, 떨어져 나간 왼팔, 뼈가 죄다 부러져 축 늘어진 오른팔. 그러나, 끝까지 놓지 않은 한 자루의 검. 허나 그마저 오래가진 못한다.
댕그랑.
쿤텔이 검을 떨어트렸다.
그 육신은 분명한 한계에 이르렀다. 그러나, 쿤텔의 눈동자는 여전히 라니엘을 바라보고 있다. 그 소름 끼치는 시선에 라니엘은 마른침을 삼켰다.
‘미치겠네.’
저 상태가 되고서도 살아있다.
물론 툭 하고건드리면 쓰러질 것 같아 보이나, 그것은 비단 쿤텔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라니엘 자신도 마찬가지였으니.
무식하게 강화 주문을 때려 박은 몸에 부하가 오기 시작한다. 시야가 흐릿하다. 숨을 쉬는 것조차 쉽지 않다.
육체가 재생 중인 카리옷도, 검기를 막아내느라 완전히 탈진해버린 갈라할도 크게 다를 바는 없다.
그들로선 쿤텔을 제지할 힘이 남아있지 않다.
“쏴라!”
허나, 이 자리에 있는 건 그들뿐만이 아니다.
일대를 옥죄던 위압감이 사라지자 기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망루에서 화살이 쏟아지고, 창칼을 내세운 채 기사들이 달려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쿵.
쿤텔은 가볍게 발을 굴렀다.
짧게 땅이 울리나 그것뿐이다. 쏟아지는 화살이 쿤텔의 몸에 박히고, 기사들이 내지른 창날이 쿤텔의 숨통을 끊어놓으려는 순간이다.
쿠구구궁.
땅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달려들던 기사들이 넘어지고, 사방에 깔린 성벽의 잔해들이 들썩인다.
“···라니엘!”
갈라할이 황급히 라니엘의 팔을 잡아당겼다.
동시에 무언가 땅 아래서 솟구쳤다. 사방에 깔린 잔해가 허공에 붕, 떠오르고 흙먼지가 흩날리는 가운데, 라니엘은 고개를 들어 솟구친 무언가를 보았다.
“하···.”
일대에 드리우는 검은 그림자 앞에 라니엘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눈동자가 비추는 것은, 칠흑의 갑각을 두른 뱀과 같은 마수다.
카가가가가가가가각!
칠흑의 갑각을 두른 마수, 갑각룡.
이제는 어느 재앙의 상징이 되어버린 사역마가 땅 아래서 모습을 드러냈다. 쩍, 하고 아가리를 벌린 갑각룡이 쿤텔을 집어삼킨다.
쿤텔에게 달려들던 기사들은 갑각룡의 돌진에 휘말려 고깃덩어리로 변할 뿐이다. 그 누구도 갑각룡을 멈춰 세우지 못한다.
쿤텔을 집어삼킨 갑각룡은 곧장 방향을 틀어 땅 아래로 제 모습을 감췄다.
쿵, 쿠웅!
그 모든 게 한순간에 일어났음을 알리듯, 하늘로 솟구쳤던 잔해들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한다. 땅이 뒤흔들리는 가운데, 라니엘은 고개를 푹 숙였다.
“하, 아하···.”
그녀의 입가를 비집고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 웃음소리는 오래가지 않는다. 그녀가 제 입술을 꾹 깨물며 중얼거렸다.
“가지고 노는 거냐···?”
꾹 깨문 입술이 터져 핏물이 흘렀다.
뿌득, 소리를 내며 이를 간 라니엘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한계에 다다른 몸을 일으켜 세운 채 라니엘은 허공에 손을 뻗었다.
천칭(Balance).
비어있는 천칭이 떠오른다.
갑각룡이 파고든 구멍을 노려보며, 라니엘은 감각을 한계까지 확장했다. 갑각룡 까지 나타났다면 배교자 또한 모습을 드러낼 확률이 높다.
그렇게 된다면, 시간을 벌 수 있는 건 자신뿐이다. 그 호흡이 잠시 흐트러지나, 라니엘은 이윽고 각오를 다진다.
그렇게 몇 초의 시간이 더 흘렀다.
땅을 울리던 진동은 완전히 멎었다. 끝까지 배교자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거기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라니엘이 손을 휘저어 천칭을 없앴다.
“······.”
라니엘이 말없이 팔을 축 늘어트렸다.
고개를 돌린 라니엘은 주변을 둘러봤다. 무너진 성벽의 잔해. 쿤텔에게 베여 죽은 기사들의 시체. 갑각룡에 갈리고 남은 육편들.
어딜 둘러보나 시체뿐이다.
“···라니아.”
갈라할이 나지막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라니엘은 그 부름에 답하지 않는다. 이를 악문 채 그녀는 잔해에 깔린 기사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직 숨이 붙어있는 기사들이라도 살리기 위해서.
“라니아, 쉬십시오. 여기는···.”
“놔.”
“라니아.”
“괜찮으니까 놓으라고.”
갈라할이 눈살을 찌푸렸다.
벌어진 라니엘의 어깨에선 핏물이 계속해서 흘러나온다. 당장 응급처치를 하지 않으면, 과다출혈로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억지로라도 멈춰 세워야 겠다고 판단을 내린 갈라할이 라니엘의 팔을 붙잡으려는 순간이다. 그보다 먼저 라니엘의 몸이 고꾸라졌다.
“라니아!”
그녀가 땅에 쓰러지기 직전, 갈라할이 라니아를 안아 들었다. 축 늘어진 몸은 달군 쇳덩어리처럼 뜨거웠다.
2.
“치료는 끝났어요.”
“···괜찮은 겁니까?”
“마나를 바닥까지 끌어다 써서 탈진이 온 것뿐이에요. 도대체 어떤 식으로 몸을 굴리면, 육체에 이만큼 부하를 걸고 움직였는지는 모르겠는데···.”
사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신성술을 있는 대로 쏟아부어 놓았으니, 하루만 지나면 멀쩡히 일어날 거에요.”
“어깨는···.”
“갈라할.”
사라가 갈라할의 말을 끊었다.
“제가 괜히 성녀라 불리는 게 아니지 않겠어요?”
팔이 뜯어져 나가도 단면만 깔끔하다면 쉽게 붙여버리는 사라다. 그녀는 정신을 잃은 라니아를 가리키며 덧붙였다.
“애초에, 문제는 이런 부상이 아닌 것 같지만요.”
“예? 그게 무슨···.”
“갈라할.”
사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라니엘이죠?”
“······.”
갈라할은 침묵했다.
사라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그녀는 착잡한 눈길로 침상에 누운 라니아를 흘겨봤다.
“시치미 때봐야 소용없어요. 당신은 알고 있는 눈치고, 애초에 이런 끔찍한 걸 심장에 담아두고 있는 건 라니엘 밖에 없을 테니까요.”
한때 라니엘의 치료를 담당했던 사라다.
라니엘이 몸에 품고 있는 저주를 주기적으로 억눌러줬던 게 자신이니,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다.
“설마 싶었는데.”
사라가 헛웃음을 흘렸다.
“이런 꼴이 됐으니 정체를 숨길만도 하네요. 어이없어라. 이러니, 카일을 그렇게 다 안다는 것처럼 행동했지··· 이러니···.”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사라가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기절한 사람을 붙잡고 말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냐 싶은 까닭이다.
‘이러니 꼬리를 쳤단 말에 그렇게 발작을 하지.’
사실을 알고 나니까 앞뒤가 들어맞는다.
자신에게 그리 격한 반응을 보였던 것도, 벌레 보듯 자신을 바라봤던 것도··· 눈앞의 소녀가 라니엘이라면 전부 이해가 된다.
‘마음 같아선 콱 소문이라도 내고 싶지만.’
사라가 쯧, 하고 혀를 찼다.
저 지경이 되고도 여전히 제 몸을 갈아가며 싸워가는 라니엘에게 사라는 이제 연민마저 느낀다.
‘다 죽어가는 몸, 얼마 남지 않은 수명.’
그걸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서 소모하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저 마법사를 그렇게까지 내모는지 사라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다.
‘애초에 이해하고 싶지도 않고.’
이러니 레미아가 포기한 것이다.
그 고고한 엘프가 카일보다 먼저 마음에 둔 것은 라니엘이었으나, 라니엘의 드높은 이상에 질려 레미아는 결국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한심한 남자 같으니라고.”
한숨을 내쉬며 사라가 라니아의 가슴팍에 제 손바닥을 올렸다. 별빛이 피어오르고, 라니아의 심장을 옥죄던 저주가 조금 가라앉는다.
“갈라할.”
“예, 사라.”
“소문낼 생각도 없고, 아는 척하고 싶지도 않으니 못 들은 걸로 해요.”
더이상 라니엘과 얽히고 싶지 않다.
그렇게 선을 긋듯이 말하며 사라는 갈라할을 향해 짓궂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엣 동료하고 얽혀봐서 뭐가 좋겠어요? 괜히 질척해지기만 하지. 난 질척한 관계가 질색이라.”
“그럼 라니엘에게는···.”
“눈치 못 채고 쌍욕만 하다가 갔다고 전해요. 저 건방진 마법사 머릿속에 저는 골빈 광신도 정도나 될 테니 의심도 안 할걸요?”
적당히 델로힘 핑계를 대면 될 거에요, 라고 사라는 중얼거리며 손을 휘저었다.
“전 아무것도 못 본 거고, 못 알아본 거에요. 카일에게도 말할 생각도 없고.”
“···그렇습니까.”
“연적을 늘려서 뭐하게요?”
라니엘에게 그럴 맘이 없다고 한들, 카일에게도 없을지는 또 모르는 일이다. 안 그래도 저 소녀에게 흥미를 가진 카일이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의 가능성이라도 무시할 수는 없다.
‘혹시나 더 늘어나면 어떡하려고?’
고향 친구라는 엄청난 이점을 가진 연적 하나가 더 늘어나 봐야, 상황만 피곤해질 뿐이다.
카일 옆에 여자는 두 명이면 충분하다.
여기서 하나가 더 늘어나면 불만족스러운 밤이 길어질 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사라는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려 라니엘을 흘겨봤다.
“하여간···.”
여전하네요, 당신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사라는 걸음을 옮겼다. 자신에겐 더 위급한 환자가 남아있었으므로.
불사의 카리옷.
당연하게도 불사(死) 같은 섭리에서 벗어난 권능이 아무런 대가 없이 이루어질 리가 없다.
37시간 동안은 그 품위 없는 남자의 곁에 딱 달라붙어 있어야 하리라. 사라는 벌써부터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끼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3.
사건으로부터 한나절이 꼬박 지나고 나서야 나는 눈을 뜰 수 있었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와 보면, 잔해들을 치우고 있는 기사들이 보인다.
“아, 라니아 아가씨.”
나를 보는 기사들의 시선이 조금 달라졌지만, 거기까지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얼마나 죽었는가, 피해는 얼마나 심각한가. 몇 가지 질문을 던졌고 답을 얻었다.
피해는 가볍지 않았다.
쿤텔을 막아 세워 최소한으로 줄였다곤 하나, 생각보다 많은 기사들이 휩쓸렸던 모양이다.
나는 갑각룡이 파고들었던 구멍을 바라봤다. 구멍은 카테론 고성에서 멀리 떨어진 평야까지 이어져 있었다.
‘언데드는 지하수로로, 갑각룡은 땅을 파고 왔다 이거지.’
카테론 고성 일대에는 몇 겹의 결계와 요격 주문을 비롯한 함정이 깔려있다. 아무리 갑각룡이라 한들 그 주문을 전부 찢고 들어올 수 있을 리는 없다.
아마도 쿤텔 아저씨의 가죽을 뒤집어쓴 언데드가 베었을 터다. 결계든 함정이든, 검의 초인 앞에서 의미를 가지긴 어려운 법이니.
“후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랄 맞다. 정말로, 지랄 맞았다.
‘도대체 뭐가 목적인데?’
왜 단독으로 이곳에 쳐들어왔는지, 목적은 무엇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결국, 끝까지 배교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빌어먹을 미치광이가 뭘 꾸미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한숨과 함께 머리칼을 헝클어트리고 있자니, 기사 하나가 내게 다가왔다.
“이것 말입니다, 기사단장 님께서 라니아 아가씨게 전달해 드리라고···.”
그가 들고온 것은 한 자루의 칼이다.
내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언데드가 들고 있던 검이었다. 살아생전 쿤텔 아저씨가 쓰던 검과 놀라우리만치 비슷하게 생긴 검.
“근처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이걸 왜 저한테?”
“하인켈 기사단장님께선 라니아 아가씨께서 보관하는 게 옳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칼을 받아들었다.
받아든 칼은 제법 묵직했다. 그 난전 속에서도 무뎌지지 않은 칼날이 햇빛 아래 날카롭게 번뜩였다.
* * *
습격으로부터 이틀이 흘렀다.
이틀간은 뒷수습으로 바빴고, 나는 망가진 카테론 고성의 결계와 함정 회로를 다시 새기는 작업에 참가해 시간을 보냈다.
“어우, 죽다 살았어. 진짜로.”
이틀째 되는 날에 카리옷은 병상에서 일어섰다.
37초간의 고속재생 동안 가불한 대가는 37시간에 거쳐 받게 된다. 예전에는 고위사제 여럿이 달라붙어 치유하는 모습을 봤었는데··· 이번에는 그럴 필요가 없었던 모양이다.
“제가 죽을 거 같거든요?”
고위사제 수십 명은 커녕, 수백 명이 모여도 못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성녀가 그 곁에 있었으므로. 카리옷의 곁에 선 사라의 눈동자가 퀭 했다.
“당신 도대체 얼마나 죽은 거에요? 진짜, 신성력을 이렇게까지 끌어다 쓴 게 얼마 만인지···.”
“글쎄. 어림잡아 50번은 더 죽지 않았나···.”
“37초 동안요?”
“상대가 상대인지라.”
사라가 질린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말없이 사라를 흘겨봤다. 내가 드러누웠을 때 나를 치유한 게 사라라고 들었다. 갈라할은 사라가 내 정체를 몰라봤다고 말했지만···.
‘모를 리가 없는데.’
내 심장에 자리 잡은 저주를, 사라 저년이 모를 리가 없다. 한때 나를 치료했던 게 사라였으니까. 그런 내 시선을 의식했는지 사라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뭘 그렇게 뚫어져라 봐요?”
“치료해줘서 고맙다고.”
“치료? 제가요?”
사라가 코웃음을 쳤다.
“성수만 계속 부어댔는걸요? 무신론자한테 신성술을 써서 뭐하게요?”
미친년인가?
내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기야, 팔이 뜯어진 것도 아니고 칼에 베인 것 정도야 저년한테 어려운 일은 아닐 테니까.
“그래, 어쨌든 고맙다. 성수 드럽게 비쌀 텐데.”
“알면 됐고요.”
손을 휘휘 내저어 사라를 떨쳐내고, 나는 카리옷의 앞에 섰다. 사라의 신성술을 듬뿍 받은 카리옷은 오히려 며칠 전보다 더 건강해 보이기까지 했다.
“몸은 좀 괜찮아요?”
“멀쩡하지. 우리 성녀 아가씨 덕분에.”
카리옷이 성녀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곤,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시련, 계속하지. 그거 도전하려고 온 거니까.”
시원스레 웃으며 그가 말했다.
“지금이라면 될 것 같거든.”
그 말이 맞았다.
그날 밤 카리옷은 성배의 시련을 통과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