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298
〈 298화 〉 엇갈림(2)
* * *
라니엘 반 트리아스.
인간관계가 지나치리만치 협소한 이 독선적인 마법사에게 있어, 카일 토벤은 특별한 존재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젠 하나밖에 남지 않은 동향인이었으니.
재가 되어버린 마을의 유일한 생존자이며.
마법사이기 이전의 자신을 아는 유일한 인물이다.
그렇기에 라니엘은 카일에게 만큼은 가벼운 태도를 보이곤 했다. 함께 여정을 떠나기 전부터 그랬다. 모두의 앞에서 라니엘은 존경받는 차기 마탑주였지만, 카일의 앞에서는 농담을 좋아하고 입담이 좀 걸걸한 소년에 불과했다.
그때는 정말이지 즐거웠는데.
그러지 못하게 된 지금 와서 생각해보건대, 그것은 과연 즐거운 추억이었다. 라니엘은 눈앞의 카일을 본다. 이어서 변해버린 자신을 본다.
많은 시간이 흘렀다.
흐른 시간만큼 많은 것이 변했고, 눈앞에 서 있는 저 남자는 더이상 자신이 알던 카일이 아니다. 영웅을 동경하고 마왕을 잡자고 부르짖던 소년은 이제 저곳에 없다.
빠득.
라니엘은 변해버린 카일을 곱게 볼 수만은 없다. 저 개자식에 대한 감정을 갈무리했다 한들, 면상을 마주하고 있자니 짜증이 치밀어오른다. 무어라 콱 쏘아붙이려다가 라니엘은 간신히 참아낸다.
후우, 하고 짧게 심호흡.
몇번이고 숨을 가다듬고, 제 머리칼을 신경질적이게 털어내며 라니엘이 걸음을 내디뎠다. 앞으로 몇 걸음 내디뎌 카일의 앞에 선다.
“오랜만이다.”
“······.”
기껏 이쪽에서 손을 내밀어 줬거늘, 잡을 생각은 커녕 째려보기나 한다. 싸가지 없는 새끼.
“라니엘은.”
카일이 입을 열었다.
“라니엘은어디에 있지? 녀석은 아직 안 왔나?”
니 앞에 있잖아, 새끼야.
그리 한번 쏘아붙여 보려다가 라니엘은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다. 수많은 전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제 정체를 광고할 생각은 없다.
“따라와.”
라니엘이 따라오라는 듯 손가락을 까딱였다.
카일은 그 신호를 대놓고 무시한다.
“너하고 나눌 대화는 없다. 네 스승은 어딨지? 라니엘 반 트리아스. 그 녀석도 이곳에 올 텐데.”
그 목소리에서 라니엘은 위화감을 느낀다.
연기가 아니다. 정말로 눈곱만큼도 자신에게 관심이 없음이 느껴진다. 도대체 왜? 저번에 만날 때까지만 해도 이러진 않았던 것 같은데.
“그러니까, 따라오라고.”
라니엘이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이며 손을 뻗어 카일의 멱살을 잡았다. 그렇게 끌고 가려 하는데, 턱 하고 카일이 라니엘의 손목을 붙잡았다.
“놔라.”
카일이 거칠게 손을 뿌리쳤다.
라니엘이 제 손목에 남은 자국을 바라봤다. 그리곤 다시 고개를 돌려 카일을 봤다.
“뭐냐?”
“내가 묻고 싶군.”
카일이 눈을 가늘게 뜬 채 쏘아붙였다.
“내 앞에서 자기처럼 행동하라고 라니엘 녀석이 명령하기라도 했나? 저번부터 너무 노골적이군.”
“···뭐?”
“불쾌하다. 집어치워라.”
정말로 불쾌하다는 듯 카일이 툭, 내뱉었다.
“어울리지도 않는 연기는 집어치우란 소리다.”
저게 뭔 개소리야?
라니엘은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 속에서 눈을 깜빡였다. 카일이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뭔 개소리야?”
카일은 말이 없다.
“야, 뭔 소리냐고 그게.”
몇번을 물어도 답이 없다.
이제는 아예 관심이 없다는 듯 툭, 하고 라니엘을 밀친 채 사라에게 다가갔다. 고개를 돌려 라니엘은 자신을 지나치는 카일을 바라봤다.
대체 무슨 상황인가, 이게.
무언가 이상하다.
무언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됐다. 상상치 못한 상황에 라니엘은 당황스러움을 느낀다. 그런 라니엘을 바라보는 사라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 모양으로 말할 뿐이었다.
거 봐요, 내가 뭐랬어요?
2.
카일과 함께 걸으며 사라가 조심스레 질문했다.
“카일, 왜 그렇게 싸늘하게 굴어요?”
“불쾌하니까.”
“뭐가요?”
“녀석인 척 연기를 하고 있으니까. 어울리지도 않는 연기다. 심지어, 그마저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질 않나.”
“···연기?”
사라가 눈을 깜빡였다.
“무슨 연기요?”
“그 녀석인 척 연기를 하고 있다고. 녀석이 아닌데도, 그리하고 있어. 나를 헷갈리게 하기라도 할 생각인가? 의도를 모르겠군.”
생각치 못한 사고방식이다.
사라가 당황스러움을 느끼며 되물었다.
“···그럼 처음에 흥미를 가졌던 건?”
“라니엘을 닮았으니까. 녀석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별은 아니라고 말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 의심은 하고 있었지.”
하지만, 하고 카일이 말했다.
“아니다.”
확신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녀석은 절대 라니엘이 아니야.”
“···뭘 그렇게 확신해요?”
더이상 카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걸음을 옮길 뿐이다. 그 걸음은 따라오는 이를 배려하지 않는다. 사라는 뛰다시피 카일의 곁을 쫓아가야만 했다.
“녀석일 리가 없어.”
카일은 계속 그리 중얼거렸다.
마치 무언가에 집착하듯이.
* * *
백야성의 객실.
라니엘은 제 손목에 남은 손자국을 본다.
카일이 자신에게 쏘아붙이던 말을 떠올린다. 그것을 곱씹을수록 드는 것은 의문뿐이다.
“미쳤나?”
진짜로 미친 건가.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연기를 하니 마니, 개소리를 늘어놓는 카일의 반응을 라니엘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더럽게 꼬였네.”
상황이 조금 많이 꼬였다.
북부에 오면서 라니엘이 상상한 것은 어느 순간에 카일에게 제 정체를 알릴 것이냐, 바로 이 점이었다. 카일도 자신의 정체를 의심하고 있을 것이요, 알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상은 어떠한가?
전제부터가 틀렸다.
카일은 자신을 라니엘과 별개의 인물이라 인식하고 있다. 그것도 아주 강하게.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 알 수가 없다.
“···내가 거짓말을 너무 잘 쳤나?”
아르카디아에서 마주했을 때, 생각나는 대로 늘어놨던 거짓말이 너무 잘 먹힌 건가? 사실 남을 속이는데 재능이 있었던 것인가?
이것이 터무니없는 억측임을 라니엘 또한 안다.
거짓말을 잘 쳤다면 애초에 여기저기에 자신이 라니엘이라는 걸 들킬 일이 없었을 테니까. 이제 자신의 정체를 아는 인물만 해도 두 자릿수에 임박할 지경이 아니던가.
‘스승님, 칼트, 카르디, 벨노아, 흑마탑주, 라크, 드라카, 켈르할름, 고룡, 갈라할, 사라, 클로에···.”
해당되는 인물을 하나씩 떠올리며 쫙 펼친 손가락을 접다가, 더는 접을 손가락이 없음을 깨닫고 라니엘이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시발, 열 명도 넘었구나···.’
이쯤되면 공공연한 비밀인 수준이다.
「정체를 숨길 생각은 있나? 잿빛.」
「아주 광고를 하고 다니십니다, 선배님.」
「사실 어느 정도 눈치는 챘지만···.」
자신의 정체를 알아본 이들이 남긴 말이 라니엘의 머릿속을 스쳐지나 간다. 그들 앞에서 자신이 무슨 행동을 했길래 들켰던가? 그것을 더듬어보다 말고, 라니엘이 입을 열어 중얼거렸다.
“아니, 근데 카일 그 자식은 왜 못 알아봐?”
다른 사람이면 말을 안 한다.
하지만, 카일의 앞에선 대놓고 행동하지 않았나? 정체를 숨길 생각은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짜증부터 치민 까닭에 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못 알아보고 있다.
그 사실에 라니엘은 왠지 모를 짜증을 느낀다.
여태까진 다행이라 생각했지만, 정작 정체를 밝혀야 할 때가 오니 짜증이 치밀고 만다.
“거 시발···.”
의자에 걸터앉은 채, 라니엘이 애꿎은 벽을 발끝으로 툭툭 차댔다. 그러기를 한참 누군가 방문을 두들겼다. 이윽고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사라였다.
“···당신 뭐해요?”
“생각.”
“그렇게 인상 팍 쓰고?”
“나 원래 인상 더러운 거 몰라?”
“그건 옛날 일이고요. 지금은 그렇게 인상 팍 써봤자 험상 굳기는 커녕 우스워 보이는데요?”
사라가 한숨을 쉬며 아예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곤 침대에 걸터앉은 채 라니엘을 바라봤다.
“당신, 최근에 뭐 했어요?”
“아무것도 안 했는데.”
“그런 것 치곤 카일이 당신을 노골적으로 싫어하던데. 예전에는 안 이랬거든요?”
실제로 카일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라니아라는 소녀에게 몹시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마치, 라니엘과 연관된 일에 반응하듯이.
“암만 봐도 당신이 뭘 한 거 같은데.”
“그니까, 아무것도 안 했다니까? 애초에 그 자식이랑 마지막으로 마주한 게 유적에서가 마지막인데.”
“···갈라할 장례식 때는요?”
“몰라. 그땐 정신이 없어서.”
심드렁히 답하는 라니엘을 보다가, 사라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둘이 따로 만날 수 있게 자리를 만들어 볼게요. 상황이 상황인 만큼 빨리 준비나 해야 할 거 아니에요. 어차피 카일은 북부에 계속 있을 거 같고.”
팔짱을 낀 채 사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여간, 죽음의 칼을 격퇴할 작전 세우기에도 바쁜데 이런데에 시간을 버려야 하는지···.”
라니엘이 눈을 게슴츠레 뜬 채 사라를 흘겨봤다.
내가 살다 살다 너한테 이런 말을 다 들어보네. 그리 말하는듯한 시선으로 사라를 흘겨보며, 라니엘이 입을 열었다.
“너 곧 죽냐?”
“갑자기 뭔 재수없는 소리예요?”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던데.”
그리 중얼거리며 라니엘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알겠다.”
“뭐를요?”
“잘 이야기 해 보겠다고. 눈앞에다가 재는 재로라도 터뜨려 주면 알아 처먹겠지.”
아르카디아에서 그리했음에도 못 알아봤지만, 아무튼 간.
“어떻게든 되겠지.”
라니엘은 그리 호언장담했다.
그리고 삼일이 흘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당연하게도 어떻게든 되지도 않았다.
3.
삼일이 흘렀고, 라크가 북부에 도착했다.
북부에 도착해 백야성으로 향하던 라크가 처음으로 보게 된 것은, 전사들의 훈련 장소에 의자 하나를 가져다 놓고 걸터앉아있는 라니아였다.
툭툭.
턱을 괴고 앉아선, 발을 떨고 있는 그 모습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심기가 영 불편해 보이는 모습이다.
‘으음.’
분위기를 읽는 눈치는 눈곱만큼도 없는 라크지만,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사람의 곁에 흐르는 어색한 공기쯤은 읽을 수 있다. 하물며 그 대상이 수틀리면 다 때려 부수는 라니아 교수님이라면 더더욱.
‘기분이 몹시 안 좋아 보이시는···?’
그 시선이 향한 곳을 라크도 보았다.
그곳에는 전사들 사이에 섞여 가볍게 검을 휘두르고 있는 인물이 있다. 그 인물의 모습이 눈에 익는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신문과 초상화 따위로 접한 적이 있으므로.
용사, 카일 토벤.
최강이란 칭호를 가진 인물.
“오···.”
라크는 짧게 감탄을 내뱉었다.
그리곤 곧장 카일을 향해 가려다 말고, 걸음을 멈춰 섰다. 동경하던 용사에게 말을 걸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라니아 교수님의 곁을 지나쳐야 하는데, 라크의 직감이 경고하기에 썩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뭔가··· 굉장히···.’
위험해 보인다.
꿀꺽, 라크가 마른 침을 삼키고 라니아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가 고개를 돌린 라니아와 눈을 마주쳤다. 그 시선이 흡사 먹잇감을 찾은 맹수와 같다.
“라크.”
맹수가 말했다.
“잠깐만 일로 와봐.”
흠칫, 하고 라크가 어깨를 떨었다.
* * *
“라크, 하나만 물어보자.”
“무,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말이 안 통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말이 안··· 통한다뇨?”
“어. 말을 들을 생각이 없어. 자꾸 무시를 해. 사람 기분 더럽게. 이런 놈은 어떻게 해야할까?”
스승이 제자에게 상담을 하는, 몹시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연출된 가운데 라크는 제 턱을 매만지며 침음을 흘렸다.
“···으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전사들이 조언해준 것이 있기는 합니다.
라크가 그리 말하자, 라니아가 한번 들려줘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라크는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전사들이 말씀하길,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육체의 대화를 나눠야 한다고 했습니다. 일단 주먹이 오가다 보면 말이 통할 거라고···.”
그 뇌마저 근육으로 이루어진 게 아닐까 의심이 드는 전사들의 조언이다. 평소와 같으면 라니아 또한 웃고 넘겼을 테지만···.
“오···.”
상식적인 방법이 번번이 실패하는 지금, 라니아의 귀에 그 말은 제법 그럴싸하게 들렸다.
“과연, 사람의 말이 안 통하면 짐승 다루듯이 일단 쥐어 패보란 소린가···?”
“예? 그런 뜻이 아닌 것 같···.’
“확실히 그럴싸한 이야기야.”
라니아가 미소 지었다.
“조언고맙다, 라크.”
그 미소에서 라크는 광기를 느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