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305
〈 305화 〉 죽음에 맞서는 방법(4)
* * *
하늘에서 용이 울부짖는다.
그림자를 드리운 용의 골격은 수백 년간 재앙으로 군림한 흑룡의 것을 닮아있다. 저 용의 모습을 아는 기사들도 이 자리에 몇 있다.
검은 폭풍, 흑룡 벨리알.
지금 피난민 앞에 모습을 드러낸 저 용은, 그 두려운 재앙 흑룡의 헤츨링이다. 허나, 저 용에게서 기사들은 흑룡과 같은 고고함을 느끼진 못한다.
평균적인 용보다 몇 배는 거대한 크기이나, 그 거대한 흑룡에 비하면 볼품없는 덩치. 날갯짓 할 때마다 후두둑 떨어지는 점액질. 마치 허물을 벗듯이 찢어지고 재생을 반복하는 외피.
그 모든 것이 흑룡과 다르다.
흑룡, 벨리알에게서 인류는 신화적인 공포를 느꼈다. 대항할 수 없는 재앙. 거대하여 어찌 상대해야 할지 모르는 두려움. 그러나, 눈앞을 날고 있는 용에게서 기사들은 그와 같은 두려움을 느끼지 못한다.
느껴지는 것은 혐오감.
두려움보다도 본능적인 혐오감이 앞선다.
완벽과는 거리가 먼 생물이다. 그 몸을 구성한 것은 인간의 시체다. 마수의 시체다. 수많은 것들이 뒤섞여 만들어진 용의 모습은 끔찍하기 짝이 없다.
【■■, ■■■■■■.】
저주룡이 입을연다.
그 아가리에 맺힌 것은 회로다.
한번도 본 적이 없는 회로.
“저게 뭔···?”
기사들은 그 회로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낀다. 등골이 쭈뼛 서는 감각에 기사들이 황급히 방패를 들어 올린다. 무엇이 올지는 모르지만, 어찌 됐든 막아내기 위해.
기사들로서는 최선의 판단이다.
하지만, 회로를 알아본 벨노아가 보기에 그것은 최악의 판단이다. 벨노아가 황급히 움직였다. 슬럼가에서 유년기를 보낸 벨노아가 내세울 만한 특기는, 상황판단이 빠르다는 것이다.
“공양(Offering).”
우득, 소리를 내며 벨노아의 손가락이 뒤틀린다.
힘을 아끼는 짓 따위 하진 않는다. 한순간에 열 손가락이 모조리 부러지고, 벨노아의 몸을 그림자가 휘감는다. 완성된 것은 그림자 갑주.
탁.
기사들이 들어올린 방패를 밟고 도약한 벨노아가 팔을 휘두른다. 저주룡의 아가리가 다물어지는 것과 동시에 벨노아의 그림자가 그 회로에 닿았다.
끽, 끼긱■■■■ 끼긱!
그것을 아예 없애지는 못한다.
벨노아는 이를 악문 채, 그 방향을 뒤튼다. 아래로 향하던 주술을 위를 향해.
키이이이잉!
흑룡의 아가리에서 광선이 뿜어져 나온다.
아래를 향했던 광선은, 벨노아에 의해 뒤틀어져 비스듬히 하늘로 쏘아진다. 쏘아진 열선에 하늘이 붉게 물든다. 구름이 흩어진다.
그것을 지켜본 기사들의 동공이 흔들린다.
벨노아가 궤도를 틀지 않았더라면, 자신들이 내세운 방패에 저것이 직격했더라면··· 흔적도 남지 않고 사라졌으리라.
그 열선을 틀어낸 소년은 어떤가?
소년을 보고 희망을 얻기도 힘든 판국이다.
하늘에서 추락하는 소년은, 몸에 둘렀던 그림자의 태반을 잃었다. 결코 멀쩡해 보이는 상태는 아니다.
“큭···.”
바닥에 추락하듯 떨어진 벨노아가, 몸을 추스른 채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 시선은 저주룡의 날개에 고정되어 있다.
‘주술···.’
조금 전, 저주룡이 아가리를 벌린 순간 벨노아는 무언가 ‘공양’ 되는 것을 보았다. 그땐 무엇을 공양했는지 알수 없었지만, 이제는 안다.
저주룡의 날개에 구멍이 뚫려있다.
금세 다시 메꿔지지만, 그 구멍을 차지하고 있던 것은 점액질이 된 인간의 시체다. 수십의 인간을 공양해 흑룡은 주술을 발현시킨 것이다.
섬뜩하다.
궤도를 트는 것에만 손가락 열 개를 모조리 써야 했다. 그러나, 저주룡은 멈추지 않는다. 다시 한번 아가리를 벌리고 날갯짓하기 시작한다. 그 날개를 이룬 인간의 사체는 셀 수 없이 많다.
“막아, 막아라!”
“피난민을 최우선으로···!”
기사들은 몰려드는 구울을 막아서느라 정신이 없다. 그들의 뒤에는 지켜야 할 피난민이 몰려있다.
“꺄아아아악!’
기어코 빠져나간 구울 한 마리가 피난민을 물어뜯는다. 곧장 내지른 기사의 검에 구울은 명을 달리했지만, 구울에게 물어뜯긴 여인은 이미 죽은 뒤다.
공포가 전염된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쏟아진다.
한순간에 지옥이 되어버린 풍경 속에서, 누군가 앞으로 한걸음 내디딘다. 벨노아의 곁에 선다. 벨노아는 고개를 돌려 옆을 보았다.
“···클로에?”
백금색의 빛을 두른 용사.
성류의 용사, 클로에.
그녀가 하늘을 노려보고 있었다.
2.
죽음이 칼을 휘두른다.
그 칼끝은 하늘에 닿지 않았지만, 하늘은 쩌적 소리를 내며 갈라진다. 하늘이 찢어진다. 하늘이 찢어지며 내는 기이한 소리는 마치 비명과도 같다.
끼이이이이익!
하늘에 비춘 별이 갈라졌다.
그것은 작은 흠결에 불과하나, 별과 연결된 무언가를 일시적으로 베어냈다.
한번의 검격.
뒤이어 몰아치는 바람이 일대를 휩쓴다.
“윽···!”
라니엘은 자세를 낮춘 채 몰아치는 바람을 견뎌낸다. 광풍이 몰아치고 난 뒤, 라니엘은 간신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옆을 본다.
“야, 카일! 괜찮···?”
그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는다.
바닥에 칼을 꽂고 버텨낸 카일의 표정이 어딘가 이상하기에. 카일의 시선이 흔들리고 있었다.
“카일?”
“······.”
카일이 라니엘을 바라본다.
흔들리던 시선이 천천히 가라앉는다. 그리하여 초점이 잡힌 눈동자는, 조금 전까지의 카일과는 다르다. 그러나 라니엘은 그것이 낯설지 않다.
“···너?”
몇년 전, 마왕을 만나기 이전의 카일.
아직 망가지기 전의 카일과 같은 눈빛이었다.
* * *
계약이 끊어졌다.
일시적으로 계약이 끊어지고, 대가로 바쳤던 것들이 잠깐이나마 제자리를 찾는다.
그리하여, 별의 사도는 인간이 된다.
“컥, 커흑.”
카일은 막힌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라니엘이다.
그 푸른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카일은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떠올린다. 혼란스러움 속에서도 카일은 목적을 잃지 않는다.
“쿨럭, 컥.”
입안에 들어찬 핏덩이를 뱉으며 카일이 몸을 추슬렀다. 몸이 무겁다. 무겁지만··· 평소처럼 정신이 몽롱하지 않다.
어느 때보다정신이 말끔하다.
이것이 오래가진 못하리란 것을 카일은 안다.
계약의 끊어짐은 일시적인 것이요, 지금도 시시각각 수복되고 있다. 그것을 느끼며 카일은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봤다.
“······.”
그곳엔 말없이 자신을 지켜보는 죽음이 있다.
자신이 극복해야 할 시련이 있다.
계약을 이행하기 위한 조건이, 눈앞에 있다.
“쓸 수 있는 모든 걸 써도 좋다.”
죽음의 칼, 가니칼트가 말했다.
“별빛을 써도 좋다. 마법을 쓰든, 동료의 도움을 받든, 무엇을 하던 좋다. 막지 않는다. 그리해라. 재앙이란, 무슨 수를 써서든 막아야 하는 존재이니.”
그가 인간의 팔을 들어올린다.
“단.”
손가락을 뻗어 카일을 가리킨다.
“그것은 오롯이 네 의지여야만 한다. 별의 꼭두각시 따위에 쓰러질 마음은 없다. 나를 막아서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이어야만 한다.”
자신의 의지로 바로 선 인간.
“네 의지로 움직여라.”
죽음이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딘다.
“네 의지로 검을 들어라.”
쿵, 쿠웅.
죽음이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땅이 갈라진다. 협곡에 균열이 번진다. 다가오는 죽음 앞에 카일은 두려움을 느낀다.
“네 의지로, 검을 휘둘러라.”
그렇지 않은 것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것이 검사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이다.”
인간.
긍지 높은 인간
“너는 인간인가, 아니면 노예인가?”
죽음이 묻는다.
다가오는 죽음 앞에 카일은 온전한 제 의지로 사고한다. 느껴지는 것은 두려움이다. 별과의 연결이 흐릿해진 지금, 카일은 공포를 느낀다.
무능함, 무력함,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
별이 떠난 지금 한낱 인간은 공포를 느낀다.
공포 속에서 카일의 정신을 붙잡는 것은, 결국 제 의지로 맺었던 계약이다. 지금 이 순간, 계약은 흐릿해졌지만··· 카일은 계약을 잊지는 않았다.
“······.”
카일이 제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입을 살짝 벌린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소녀가 있다. 라니엘이 있다. 그녀를 마주 바라보던 카일은 이윽고 쓰게 웃는다.
결국에,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카일은 몸을 일으켜 세운다. 죽음이 던진 질문에 답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서 증명해야 하는 일이므로.
어느샌가 놓아버린 성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카일의 손가락이 성검의 칼자루에 얽힌다. 카일은 힘을 주어 성검을 뽑아냈다. 부드럽게 뽑혀 나온 성검을 카일은 가볍게 휘둘렀다.
후웅.
성검은 좀 전처럼 찬란히 빛나지 않는다.
은은한 빛이 흘러나오는 검을 쥔 채, 카일이 자세를 잡는다. 숨을 내뱉으며 호흡을 갈무리한다.
“나는.”
카일이 입을 열었다.
죽음을 바라본 채 카일이 말한다.
“나는, 카일 토벤.”
그것은 언젠가 나눴던 대화의 연장선이다.
“긍지 높은 검사, 쿤텔의 제자다.”
카일이 성검을 들어 올린다.
그 칼끝은 눈앞의 죽음을 겨누고 있다.
“검을 들어라, 가니칼트.”
인간이 의지를 보인다.
두려움에 떨면서도 검을 놓지 않는다.
그 의지에 죽음 또한 긍지를 보인다.
후웅.
검을 가볍게 휘둘러 칼에 눌어붙은 구정물을 떨쳐낸다. 당장 눈앞의 것들을 쓸어버리고, 검을 가져오라는 그늘의 목소리를 가니칼트는 무시한다.
왼손으로 칼을 쥔 가니칼트가 자세를 잡는다.
카일이 취한 자세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검의 협곡에 내려지는 검술이요, 가니칼트 반 갈라트릭이 만들어낸 검술이다.
같은 자세, 같은 호흡, 같은 보폭.
둘은 동시에 서로를 향해 움직였다.
3.
“레미아, 단검.”
죽음을 향해 달려드는 카일을 바라보며, 사라는 레미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단검은 왜?”
“피를 흘려야 하니까요.”
의아해하면서도 레미아는 단검을 내민다.
그것을 받아 쥔 사라가, 단검으로 제 팔뚝을 길게 베었다. 그녀가 아끼던 옷이 찢어지고 팔을 타고 흘러내린 피가 손끝에 맺힌다.
툭, 투둑.
눈밭 위로 붉은 피가 떨어진다.
사라는 계속해서 제 몸을 단검으로 그으며 기도를 읊는다. 성혈(?血)이 스며든 눈밭에 신성술을 새긴다.
“부디.”
사라는 기도한다.
“부디···.”
오롯이 한 사람을 위해서 사라는 기도한다.
“부디, 살아남기를.”
* * *
눈이 증발해버린 설원의 협곡에서, 카일은 검을 휘두른다. 몰아치는 눈보라마저 빗겨가는 협곡의 중심에서 카일의 검이 은백색의 궤적을 그린다.
칼끝이 그리는 궤도는 좀 전과는 다르다.
별빛이 흐릿해진 지금, 카일의 몸은 언제나와 같이 빠르게 움직이진 못한다. 신체능력을 앞세워 초인들의 검술을 따라 하지도 못한다. 하지만, 카일은 지금 어느 때보다 정신이 맑음을 느낀다.
후회도, 집착도, 망설임도 없다.
카일은 오롯이 검을 휘두르는 것에만 집중한다.
부족한 육체 능력을 메우는 것은 기술이다.
속도와 힘이 아닌 검의 묘리를 떠올리며 카일은 움직인다. 그리하여 자신이 보았던 숱한 초인들의 검을 흉내 낸다.
카앙!
카일이 휘두른 칼날이 감아치듯 가니칼트의 대검과 얽힌다. 대검에 뚫린 구멍에 제 칼을 끼워 넣은 카일이 몸을 비튼다. 검의 궤도를 흘린다.
후웅!
머리위로 스쳐 지나간 검격.
등 뒤에서 울려 퍼지는 협곡이 무너지는 소리.
일격 일격이 죽음으로 직결된다. 허나 카일은 망설이지 않고 검을 휘두른다. 망설임은 곧 죽음임을 알고 있으므로.
캉, 카앙!
검과 검이 맞부딪친다.
카일이 한 자루의 검으로 펼치는 것은, 쿤텔에게서 배운 검의 협곡의 검술이다. 그 검술을 카일은 능숙하게도 펼쳐낸다.
초견살, 허상검, 절검···.
차례로 펼치는 기술에 상대 또한 같은 기술로 응수한다. 대검에 비해 앙상한 인간의 팔로 검을 쥔 가니칼트는 더욱 완성도 높은 기술로 카일을 상대한다. 당연하게도 카일은 밀린다.
밀리는 카일을 지탱하는 것은, 그가 보고 경험하며 배운 또 다른 기술들이다.
「나는 초인이지만, 여전히 인간이지.」
「당장 내가 카일 너보다 힘도 약하고, 빠르지도 않은데 대련에서 번번이 이기겠냐?」
검의 초인, 쿤텔.
「난 죽음의 칼에게 검의 협곡의 긍지를 보여야 한다. 죽어간 스승들의 넋을 달래야 하지.」
「하지만, 협곡의 기술들로만은 부족하지. 이건 약자가 강자를 상대하기 위한 검술이 아니니까.」
노쇠한 육체로 죽음을 막아섰던 인간.
「인간이 재앙을 상대하기 위한 검.」
「약자가 강자를 꿰뚫기 위한 검.」
「보고 배워둬라. 언젠가는 쓰게 될 테니.」
그가 죽음을 상대하기 위해 고안한 검(?).
흘리고, 빗겨치고, 파고드는 검술.
카일은 그것을 떠올리며 검을 휘두른다.
“커흑!”
완벽하진 않다.
피를 토하고, 바닥을 나뒹구나 곧장 일어서 카일은 다시금 죽음을 향해 달려든다. 죽음을 그 자리에 붙잡아둔다. 그런 카일을 돕는 이들이 있다.
달빛 화살이 계속해서 쏘아지고.
계속해서 몸을 감도는 축복이 흐릿해진 별빛을 대체한다. 아슬아슬 할 때마다 끼어드는 사슬과 주문이 카일의 부족함을 메꾼다.
그리하여, 카일은 1초와 1초를 이어간다.
1초가 이어질 때마다 카일은 성장한다.
카일은 눈앞의 검사가 펼치는 완벽한 검술을 본다. 한없이 완벽한 검(?). 검사가 추구해야 할 극한. 그것에서 카일은 깨달음을 얻는다.
잘못된 부분은 버린다.
제 움직임을 교정한다.
필요없는 힘을 뺀다.
칼끝의 흔들림을 줄인다.
카일의 검이 조금 더 가속한다. 여전히 밀리지만, 좀 전처럼 아예 밀리지는 않는다.
* * *
라니엘은 멍하니 눈앞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죽음과 칼을 맞대고 있는 카일이 있다.
‘1분은··· 진작에 넘었는데.’
1분은 진작에 넘었다.
그러나 카일은 여전히 검을 휘두르고 있다. 피 흘리고 바닥에 나뒹굴지언정, 검을 놓치는 않는다. 벌떡 일어나 다시 죽음에게 달려든다.
마치, 옛날처럼.
그 뒷모습에서 라니엘은 과거의 카일을 보았다.
‘···하지만.’
저것 또한 오래 버티지 못하리라.
카일의 육체가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일은 무너진다. 그 전에, 방법을 찾아야 한다. 라니엘은 남아있는 회로를 살핀다.
여전히 주문은 많이도 남아있다.
하지만, 죽음에게 닿을 주문은 아니다.
무엇이든 베어버리는 죽음 앞에 자신이 가진 주문은 무가치하다. 라니엘은 빠득, 이를 갈며 답을 갈구한다.
‘방법, 방법이···.’
매장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목적은 도망치는 것이 아닌, 격퇴 시키는 것이었으므로.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피해를 입혀야 한다. 죽음에게 유의미한 피해를.
수백 년간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위업을, 이 자리에서 이루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저주의 마나 조차 통하지 않았다.
가진 수는 모조리 부정당했다.
머리를 쥐어짜 내며 라니엘은 답을 찾아내고자 한다. 그러다 문득, 라니엘의 시야는 지면에 새겨진 어느 회로에 맞닿는다.
그것은 변수를 대비하기 위한 회로.
또한, 흑룡의 목을 떨구는 위업을 이루었을 때 쓰였던 회로와 정확하게 같은 것이다.
‘변수.’
라니엘이 그 회로를 바라본 순간이다.
번쩍.
등 뒤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라니엘의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그것은 카일이 내뿜은 빛이 아니다. 그보다 더 멀리 떨어진 곳, 성지가 놓여있을 방향에서 터져 나온 빛이었다.
* * *
“라크 반 그레이스.”
“예.”
“가려는 거냐?”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망령이 검을 던졌다.
던진 검을 라크는 붙잡았다.
“각오는 됐고?”
“전사는 언제나 죽음에 맞설 각오를 다져야 한다. 시조님께서 남긴 유언 아니십니까. 각오는 됐습니다.”
“그래, 그래 보이는군.”
망령이 흡족스레 웃었다.
“가봐라.”
그가손을 뻗어 길을 가리켰다.
“나가는 길은 저쪽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