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327
〈 327화 〉 판을 엎어라(5)
* * *
고대 리치 스케발.
오랜 세월을 살아온 마법사가 으레 그렇듯, 스케발 또한 비대해진 자아를 가지고 있다.
자신이 남들보다 뛰어나다는 오만. 남들보다 진리에 더 가까워졌다는 자만. 결국에 살아남은 자신이 그 누구보다 강할 것이라는 착각.
오만과 자만, 그리고 착각.
그 누구도 그것을 깨주지 않았다.
그렇기에 수백 년의 세월 동안 스케발은 마법사들에게 있어 악몽으로서 군림했으며, 전장을 지배하는 재앙이었다.
「내려와, 이 개새끼야.」
잿빛의 계보를 잇는 마법사를 마주하기 전까지는, 그러했다. 그날 스케발은 수백 년 만에 패배를 경험했다. 지독하리만치 수치스러운 패배를. 허나 스케발의 비대해진 자아는 그 패배를 결코 인정하려 들진 않았다.
그렇게 다시 시간이 흐른다.
「이야, 또 왔어?」
시간이 흐르고 흐르는 와중.
「이번엔 또 뭘 준비해 왔냐?」
몇 번의 패배가 있었다.
단순히 ‘몇 번’ 이라는 단어로 치우기엔 뼈가 시릴 정도의 굴욕이 있었다. 스케발은 더는 그 굴욕에서 눈을 돌리지 않는다.
‘인정한다.’
대단하다고 여겼던 자신이, 어쩌면 초라한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가정.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수치스러운 패배를 감내하며 스케발은 초심으로 돌아온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그 무엇이든 놓아버린다.
‘어떤 추한 짓거리도 마다치 않으리라.’
자신을 몇 번이고 굴복시킨 마법사 앞에, 스케발은 제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한 명의 마법사로 자신의 적수를 마주한다.
『쓸 수 있는 모든 것을 써서.』
스케발의 로브가 펄럭였다.
로브 속에서 검은 수정구들이 부유한다.
『너를 죽이겠다, 잿빛 마법사.』
“어 그래.”
라니엘은 같잖다는 듯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2.
떠오른 수정구를 보며 라니엘은 무표정히 제 가슴팍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이미 저 빌어먹을 수정구에 한 번 당한 경험이 있는 와중이다.
‘같은 수에 당할 수는 없지.’
이미 대책은 마련해놨다.
꾸욱.
라니엘의 손가락이 살결에 파고든다.
그대로 끼릭, 하고 라니엘은 심장에 새겨진 회로를 반 바퀴 돌렸다. 쿵쿵, 심장이 거세게 뛰고 라니엘의 눈동자가 잿빛으로 물들어간다.
허공에 떠오른 수정구가 파장을 퍼뜨린다.
파장에 반응해 라니엘의 심장에 고인 그늘이 출렁이지만, 그보다 빨리 회전한 회로가 그늘을 억누른다. 더는 저 마도구는 라니엘에게 통하지 않는다.
딱.
라니엘이 손가락을 튕겼다.
스톡된 주문이 해방되고, 섬광 다발이 라니엘의 머리 위로 떠오른다. 화살이라기엔 그 크기가 거대해 마치 창처럼 보이는 섬광. 그것은 라니엘이 가장 애용하는 주문이다.
강타(Smite).
라니엘이 가볍게 손을 휘두른다.
섬광 다발들이 난잡한 궤적을 그리며 하늘 위로 쏘아진다. 스케발이 허공에 늘어놓은 수정구가 요격당하고, 스케발을 향해 섬선이 날아든다.
고대 리치로서의 위엄도 버린 채, 스케발은 공중에서 회피기동을 펼친다. 로브가 펄럭이고 섬선들이 스케발을 추격한다.
쐐에에에엑!
회피기동을 펼치며 스케발 또한 주문으로 상응한다. 섬광 다발을 검은 화염으로 불태우고, 원소계열 주문으로 격추시키나···.
쾅.
마치 대포가 쏘아지는 듯한 소리가 스케발의 귓가에 울린다. 스케발의 고개가 확 돌아간다. 마나의 기척을 따라 고개를 들어보면, 그곳에는 자신보다 높은 곳에 떠있는 라니엘이 있다.
인간이 비행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단순한 각력으로 뛰어올랐단 소리인데, 마법사가 그것이 가능한가? 그런 당연한 의문을 가질 틈도 없다. 저 마법사 같지도 않은 놈의 손아귀에 더 흉측한 것이 모여들고 있었으니.
그것의 정체를 이젠 스케발도 안다.
잿빛의 상징과도 같은 주문.
그 놀라우리만치 끔찍한 위력을 몸소 겪어본 스케발이다. 스케발이 보호주문을 몇 겹으로 펼치는 순간 라니엘이 빙글, 하고 허공에서 회전했다.
재는 재로(Ashes to Ashes).
섬광이 스케발을 집어삼킨다.
빛이 먼저 스케발을 후려치고, 뒤늦게 콰아아앙!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마치 천둥이 칠 때와 같다.
콰앙!
땅 아래로 수직으로 추락한 스케발이 자신과 함께 튀어 오른 돌무더기들을 손으로 짚은 채 일어선다. 그래도 갈고 닦은 보람이 있다. 이젠 저 주문에 반응할 수 있을 정도는 됐으니.
끽, 끼긱.
그러나 방심하진 않는다.
곧장 스케발이 주문을 읊는다. 하늘 위에 새겨진 수많고 수많은 회로가 차례로 빛을 뿜는다. 공중에 떠있던 라니엘은, 그저 고개를 살짝 들어 쏟아지는 주문을 흘겨볼 뿐이다.
번개 다발.
쏟아지는 화염비.
날카롭게 갈린 바위 송곳.
닿는 것을 모조리 얼려버리는 고드름.
존재하는 모든 속성의 원소마법이 하늘에서 비 내리듯 쏟아진다. 무릇 마법사라면 눈을 크게 뜨고 경악해할 만한 상황이나, 라니엘은 심드렁히 팔을 휘두른다.
분쇄(Smash).
주문이 쓸려나간다.
그녀가 손가락을 튕기고, 팔을 휘두르는 등 스톡(Stock)해둔 주문을 차례로 해방할 때마다 스케발의 주문은 맥없이 쓸려나간다.
발동 속도도, 위력도, 그 무엇도 라니엘이 우위에 서 있다. 심지어 현재 그녀의 푸른 마나는 조금씩 잿빛으로 변질해가고 있다. 저주를 닮은 그 기이한 마나를 스케발은 도저히 상대할 자신이 없다.
‘하지만.’
스케발이 돌 먼지가 묻은 제 로브를 펄럭인다. 로브에서 흘러내린 구정물이 치이익, 소리를 내리며 돌 바닥을 녹인다.
‘여기까진 예상한 바이다.’
진짜는 지금부터···.
“뭘 숨기고 있네.”
목소리가 코앞에서 들려온다.
스케발의 검은 안광이 수축한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돌무더기를 밟고, 땅 아래로 쏘아지듯 떨어진 라니엘이 스케발의 눈앞에 서 있다.
콱.
그녀가 스케발의 두개골을 움켜쥔다.
용사의 육체에 근접한 손아귀가 스케발의 두개골을 압박한다. 안 그래도 불리한 상성이거늘, 접근을 허용한 지금 스케발은 더욱더 불리해진다.
쩌어어어어억!
스케발의 두개골이 돌 바닥에 쳐박힌다.
쳐박은 채, 라니엘은 앞으로 걸음을 내디딘다.
드드드드득!
스케발의 머리가 갈린다.
라니엘이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땅이 뒤흔들린다. 한 걸음 한 걸음에 힘을 담아 내딛던 그녀가, 바닥에 쳐박힌 스케발을 뽑아냈다.
끽, 끼긱.
라니엘의 몸에서 삐걱이는 소리가 들린다.
그것이 한계까지 힘을 모은 근육이 삐걱이는 소리라는 걸, 스케발로서는 알 수가 없다. 그저 닥쳐올 충격에 대비할 뿐.
팔을 들어 올렸던 라니엘이, 다시 한 번 스케발의 두개골을 돌바닥에 쳐박는다. 단순히 힘으로 쳐박는게 아닌 몇 개의 주문을 중첩해서.
가속(Accel).
충격(Shock).
분쇄(Smash).
세개의 주문이 동시에 빛을 뿜고, 가중된 충격이 스케발의 두개골을 뒤흔든다. 그 두개골에 쩌적 금이 가기 시작한다. 저항해보려곤 하나, 라니엘의 손아귀에 붙잡힌 순간부터 마나가 모이지 않는다.
저 빌어먹을 잿빛 마나 때문이다.
저항하지 못하게 된 스케발의 두개골을 라니엘은 몇 번이고 돌바닥에 쳐박아댄다. 무식하기 짝이 없는 공격이나 이것만큼 효율 좋은 공격이 없다. 그를 증명하듯 스케발의 머리가 박살 나기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라니엘은 주문을 몇 겹으로 중첩해 스케발의 두개골을 광장의 돌바닥에 처박았다.
쩌어어어억!
그것으로 끝이다.
광장의 타일들이 모조리 튀어 오르고, 박살 난 스케발의 두개골 파편 또한 튀어 오른다. 그리하여 노출된 스케발의 뇌와 라이프베슬을 라니엘이 쥐어 터뜨렸다.
콰직!
박살 난 라이프베슬이 바닥에 흘러내린다.
구덩이에 쳐박힌 스케발의 남은 뼈가 바스러지기 시작하는 것을 보며 라니엘이 등을 돌렸다. 그렇게 몇 걸음 내딛다 말고, 라니엘이 뒤를 돌아봤다.
“이야.”
라니엘이 실소를 터뜨렸다.
“뭘 준비해왔나 했더니···.”
분명히 스케발의 라이프베슬을 터뜨렸다.
그 두개골을 박살 냈을 터다. 그러나 스케발은 죽지 않았다. 새로운 라이프베슬이 박살 난 두개골을 짜맞추고, 스케발의 몸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
번뜩.
검푸른 안광이 다시 한 번 번뜩였다.
『말하지 않았나.』
파스스.
돌부스러기가 떨어지며 스케발의 육체가 허공으로 떠오른다. 검푸른 안광을 흩뿌리며 스케발이 제 양팔을 쫙 펼쳤다. 펄럭이는 로브 자락 아래로 스케발의 라이프 베슬이 공중으로 떠오른다.
『수백 년간 모아온 나의 목숨.』
고대의 리치가 조용히 읊조렸다.
『너를 죽이기 위해 쓰겠다.』
자존심도, 마법사로서의 긍지도 모조리 내려놨다. 스케발에게 남은 것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갈망뿐이다. 하나의 목숨으로 안된다면, 될 때까지 시도하면 그만인 문제다.
『진리를 목도하라, 잿빛.』
이것이 나의 방식이다.
3.
마법과 마법이 충돌한다.
광인을 상대하기 위해 힘을 아끼던 라니엘은, 이젠 눈앞의 스케발을 치워버리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다. 라니엘은 스케발에게 접근하고자 하고, 스케발은 어떻게든 라니엘에게서 도망치고자 한다.
주문과 주문이 얽힌다.
라니엘의 접근을 막기 위해 스케발은 몇 번이고 주문을 난사한다. 그것이 엄한 곳으로 튀지 않도록 모조리 잡아 꺾으며 라니엘은 추격을 계속한다.
섬광 다발이 꽂히고.
화염을 뚫고 라니엘이 손을 쭉 뻗는다.
스케발은 지면을 융기해 라니엘을 막아선다.
그런 추격 끝에 라니엘이 스케발의 두개골을 붙잡고 터뜨린다 한들, 스케발은 또다시 새로운 라이프베슬을 꺼내 들 뿐이다.
“진짜 좆같게 구네.”
라니엘이 벌써 세 개째 두개골을 박살 내며, 스케발의 몸을 짓밟아 으스러트렸다. 그러나 어디에다 숨겨놨는지 모를 라이프베슬을 중심으로 스케발은 다시 태어날 뿐이다.
정말로, 구석구석 잘도 숨겨놨다.
라니엘이 쯧 혀를 차며 눈을 가늘게 떴다.
스케발의 노림수야 알만하다.
이렇게 소모전으로 끌고 가서, 자신이 지쳤다 싶을 때 수정구슬과 라이프베슬을 활용한 주문으로 전황을 뒤엎을 작정인듯싶었다.
‘소모전이라 이거지?’
라니엘은 짧게 숨을 내뱉었다.
마나를 갈무리하며 라니엘은 잿빛 마탑을 살핀다. 그곳에서 흘러넘치는 구정물, 모여드는 기이한 마나를 중심으로 주어진 시간을 역산한다.
답은 나왔다.
시간이 그리 여유롭지는 않다.
소모전으로 끌고 가려는 스케발의 계획에 어울려줄 시간은 없었다. 라니엘이 단숨에 끝내버릴 작정으로 심장을 옥죄이려는 순간이다.
『급해 보이는군, 잿빛.』
허공에 떠오른 스케발이 웃음을 터뜨렸다.
『너는 패배할 것이다. 네 패배는 너만의 패배가 아니지. 인류 전체의 패배로 이어질 것이다.』
광소하며 스케발이 말했다.
『너는 광인을 모른다!』
『너는, 너희는 별조차 증오하는 그 미치광이를 몰라. 모르니 대비할 수 있을리가 없지!』
최초의 광인.
그가 이 순간을 위해 얼마만큼의 계획을 짜 올렸는지 스케발은 잘 알고 있다. 그 모습을 바로 곁에서 지켜봤으니까.
『변절자가, 그들이 이곳에 풀어놓은 마(?)의 군세가 인간을 학살할 것이다. 네가 지키고자 했던 모든 것들을 망가트리고 있지. 그러나, 너는 아무것도 하지 못해!』
라니엘의 정신을 흔들고자 던지는 도발이다.
과연 그 말이 효과가 있는지 움찔, 하고 라니엘의 눈썹이 움직였다. 스케발은 언성을 높이며 라니엘을 도발했다.
『광인은 왕도에 머무르는 군세를 작은 것 하나까지 모조리 파악했다. 모조리 파악하고, 막을 수 없을 만큼의 마수를 준비했지.』
변수가 하나 있었지만.
『유일한 변수인 너는 지금 네 손에 묶여있다. 너희는 모두 광인의 손아귀 아래서 놀아나고 있을 뿐이야. 너는 이미 패배한 거나 마찬가지다!』
스케발이 소리치며 제 양팔을 쫙 펼쳤다.
몰래 외우고 있던 주문이 발현된다.
마탑에서 흘러나오는 구정물을 활용한 주문이다. 검은 파도가 라니엘을 덮친다. 구정물 아래서 라니엘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도발이 제대로 먹힌 모양이로군.
정신을 흔들어놓는 데 성공했다.
스케발이 드디어 일격(一?)을 먹였다는 사실에 웃음을 터뜨리려던 순간이다.
“방심을 한 건 맞지.”
덮쳐드는 파도 앞에서도 라니엘은 잔잔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목소리가 너무나도 평온하다. 스케발의 안광이 수축했다.
“솔직히 당황한 것도 맞아.”
라니엘은 담담히 말했다.
설마 왕도의 중심에 이런 규모의 침입이 가능할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최초의 광인이란 존재의 강함을 라니엘은 제대로 가늠하지 못했고, 대비가 부족했다는 사실 또한 인정한다.
검은 폭풍, 흑룡은 토벌했다.
죽음의 칼, 가니칼트는 북부에서 격퇴했다.
배교자, 글레투스는 갈라할의 창에 꿰뚫려 제대로 된 활동이 불가능해졌다.
연이어 재앙을 격퇴하다 보니 마음이 풀어졌다고, 라니엘은 스스로를 자책한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라니엘이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근데, 내가 방심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냐?”
쾅, 하고 라니엘이 발을 내려찍었다.
땅이 뒤흔들리며 라니엘의 육신이 가속에 가속을 거듭한다. 피어오른 잿가루를 움켜쥔 채 라니엘이 덮쳐드는 파도를 향해 정면으로 뛰어든다.
투확!
한줄기의 불길이 되어 라니엘은 파도를 뚫어낸다. 그녀가 지나간 곳마다 불길이 타오른다. 타오르는 불길은 뱀처럼 탑을 타고 올라, 공중에 떠있는 스케발에게까지 이어진다.
콰직!
한순간에 거리를 좁힌 라니엘이 스케발의 머리를 움켜쥔다. 화염을 두른 그녀의 손가락이 치이익, 소리를 내며 스케발의 두개골에 파고든다. 검은 눈구멍에 손가락을 밀어 넣은 채 라니엘이 말했다.
“전력을 다 파악해?”
막을 수 없을 정도의 군세를 투입해?
그녀가 웃음을 터뜨린다.
“미안한데, 정보 갱신이 좀 느리네.”
스케발의 두개골을 움켜쥔 채, 라니엘이 탑의 외곽을 박차고 하늘 높이 뛰어오른다. 왕도의 정경이 한눈에 보이는 상공에서 라니엘이 외친다.
“못 막긴 뭘 못 막아, 이 병신아.”
스케발 또한 라니엘과 같은 것을 본다.
왕도를 생지옥으로 밀어 넣었어야 할 군세들이, 빠른 속도로 밀려나고 있었다. 그 밀림이 시작된 곳이 어디인가. 바로 아플리아 아카데미가 있는 위치다. 그곳에서 시작된 흐름이, 마의 군세를 순식간에 몰아내고 있다.
라니엘이 입가를 비틀었다.
자신이 방심한 이유가 있다.
무엇이 와도, 막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무슨 변수가 발생한다 한들··· 왕도를 지킬 인물은 자신뿐이었던 옛날과는 다르다.
“배교자, 죽음의 칼. 그 둘 중 한 명이라도 데려왔어야지, 왕도를 전복할 거면.”
최초의 성검을 쥐게 된 전사가 있다.
태초의 신과 계약한 주술사가 있다.
갈라할의 유지를 이어받은 용사가 있다.
신의 눈동자를 가진 마법사가 있다.
그들을 지휘할, 별에게서 독립한 아이가 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마수들을 갈아 마시고 있을 초인 또한 있다. 재앙이라도 데려오지 않는 한, 그들을 막을 적은 없다. 라니엘이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들에게 신호를 주는 것이다.
이곳으로 와라.
‘이곳에, 모든 사건의 원흉이 있다.’
왕도의 어디에서나 보일 신호를 주기 위해, 라니엘은 한줄기의 화염이 된다. 스케발의 머리를 마탑의 외곽에 쳐박은채, 마탑의 외곽을 타고 라니엘이 달리기 시작한다.
치이이이익!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라니엘이 스톡(Stock)해둔 주문이 불길에 녹아든다. 불길은 그림자를 불태우며 그 자리에 화인(火?)을 남긴다. 그녀가 마탑에 찍은 발자국 하나하나가 전부 주문의 회로다.
스케발의 두개골을 갈아 만든 길.
발자국으로 찍어낸 정교한 회로.
마지막 걸음은 가볍게 툭, 하고 찍힌다.
그 종점을 장식하듯 불에 타들어 간 스케발의 두개골을 라니엘은 땅바닥에 쳐박았다. 그것으로 마침표는 찍혔다. 회로가 완성됐다.
딱, 하고 라니엘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도화선을 타고 불길이 타오른다.
왕도의 어디에 있던 보일 특대의 주문이, 그림자로 뒤덮인 마탑을 무너트릴 주문이 섬광을 내뿜었다. 일순간 잿빛 마탑 일대가 새하얗게 물들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섬광이 점멸한 직후, 천둥이 내리 꽂히는듯한 굉음이 일대를 후려쳤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