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363
〈 363화 〉 검사, 그리고 초인(6)
* * *
초인(?人).
그렇게 불리는 이들에게 나타나는 가장 큰 특징은 성장의 한계점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초인들은 말한다.
벽을 허물고 앞으로 나아가면 보이는 것이라곤 드넓게 펼쳐진 초원이라고. 한평생을 달려도 끝을 볼 수 없을 것 같은, 애초에 끝이 존재하는지 의심이 드는 풍경이 그곳에 펼쳐져 있다고.
최초의 초인, 최초의 검성.
가니칼트 반 갈라트릭 또한 같은 초원을 보았다. 그는 한평생 검을 휘둘렀고, 수많은 초인들이 의심하던 초원의 끝에 기어코 도달했다. 그곳에서 하늘을 올려다본 가니칼트는 웃었다.
끝에 도달했거늘.
성장이 멈췄다고 생각했거늘.
그럼에도 베어야 할 것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 * *
만신창이인 몸. 붕괴되는 육체.
남은 것이라곤 그늘에 물들지 않은 인간의 눈과 인간의 팔. 초인적인 육신도 그 어떤 부상도 즉시 회복하는 신의 축복도 없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에 카일의 검은 조금 더 빨라졌다.
스겅.
카일이 검을 휘둘렀다.
더는 칼끝에서 검기가 사출되지 않았다. 검을 휘두르는 순간 시작점과 끝점이 이어졌다. 카일이 베고자 하는 위치가 서걱,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땅을 뒤흔드는 검격이 아니다.
보이는 모든 것을 가르는 검격이 아니다.
하지만, 베고자 하는 것을 베어내기엔 충분한 검격이다. 카일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공간이 쪼개졌다. 쪼개지고 쪼개지는 공간 사이를 라니엘은 달리고 있었다.
탁, 하고.
그녀가 걸음을 내디디는 순간 카일이 검을 휘둘렀다. 라니엘이 앞으로 내디디려던 걸음을 제자리에 쿵, 내려찍으며 가속했다. 직후 라니엘이 서 있던 곳과 그녀가 내디디려던 곳이 챠악, 하고 비스듬히 갈라졌다.
촤아아아아악!
미끄러지듯 착지한 라니엘이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의 몸에는 어느새 상처가 또 늘어나 있다. 숨을 내쉴 때마다 후두둑, 하고 피가 쏟아졌다.
‘···보이는 건가?’
아니, 그런 건 아니었다.
카일의 눈동자는 라니엘을 쫓아오지 못하고 있다. 라니엘의 순간적인 가속을 카일은 여전히 따라잡지 못한다. 그러나, 카일이 휘두른 검은 라니엘이 걸음을 내디디려는 곳에 미리 닿아 있었다.
마치, 미래를 보는 것처럼.
카일의 눈동자에는 실핏줄이 돋아 있다.
부릅 뜬 눈동자가 보는 것은 현재가 아니다. 한 걸음 앞의 미래다. 미세한 움직임으로부터 정보를 수집하는 초감각, 그 정보를 통해 미래를 예측하는 미래시.
한 걸음 앞의 미래를 내다보며 카일은 검을 휘둘렀다. 칼이 가르는 것은 현재. 갈라지는 공간은 미래다. 라니엘이 이를 악물고 땅을 박찼다.
서걱.
라니엘이 서 있던 곳과, 앞으로 향할 곳이 비스듬히 갈라졌다. 한순간의 판단으로 방향을 바꾸지 않았다면 검격에 휘말려 죽었을 것이다. 라니엘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한 번의 판단, 한 번의 실수.’
그것이 곧장 죽음으로 이어졌다.
그야말로 사지(死?)다. 발을 내디디는 모든 곳이 죽음이었다. 그럼에도 라니엘은 나아갔다.
탁, 그리고 서걱.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발을 디딜 곳이 한 뼘씩 사라져갔다. 주변을 둘러보면 비스듬히 갈라진 공간이 한가득이다. 닿는 순간 죽는다. 더는 뒤로 물러설 수 없게 됐다.
그러니 앞으로, 다시 앞으로.
그녀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검을 휘두르는 카일이나, 라니엘 또한 카일의 검을 노려보고 있다. 그 검이 휘둘러지는 순간에 맞춰 라니엘은 가속했다. 아슬아슬하게 검격을 회피했다.
···당연하게도.
라니엘에겐 초감각이나 미래시 같은 특별한 기술은 없다. 그저 눈을 부릅뜨고, 보이는 정보로부터 미래를 유추할 뿐이다.
휘둘러지는 칼끝.
공간의 떨림과 공기의 울림.
휘둘러지는 카일의 칼끝을 바라보며 라니엘은 계속해서 움직였다. 그녀의 예측은 초인의 것처럼 정확하지 않다. 정교하지도 않다. 그렇기에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라니엘의 몸에 상처가 늘었다.
후두둑.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피가 쏟아졌다.
바닥에 찍히는 핏자국이 곧 그녀가 내디딘 발걸음이었다. 상처는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무언가 끊겨버린 것처럼.
‘···앞으로.’
몇 걸음 남지 않았다.
다가갈수록 카일의 검은 더 빠르게, 더 정교하게 라니엘을 압박해왔다. 조금씩 예측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쾅!
라니엘은 아껴두려던 수단을 썼다.
바닥을 구른 순간 마나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흩뿌려지는 것은 잿가루. 베일 것을 예상하고 흩뿌린 마나다. 저것으로 동작을 유도할 수만 있다면 빈틈이 생길 테니까.
스릉.
라니엘의 예상대로 카일이 검을 들어 올렸다. 그 칼끝이 향하는 곳은 라니엘이 아니다. 라니엘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카일을 향해 파고들었다.
하지만, 그 판단은 틀렸다.
카일의 검이 기이한 궤적을 그렸다.
하늘을 향해 치솟았던 검이 떨어지는 듯 싶더니 곡선을 그리며 사선으로 쳐올려 졌다. 쳐올려 진 검은 다시 아래로, 아래로 향했던 검은 다시 위로.
스겅.
멈춰버린 시간 속에서 카일의 칼만이 움직였다. 라니엘은 그 검격을 보고도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할 수 없는 검이었다. 잔상을 흩뿌리며 검은 계속해서 움직였다.
틱, 티디디디디디딕.
사방에 흩날리던 잿가루가 모조리 베였다. 잘려나간 잿가루는 더이상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마나의 흐름이 끊겨버린 잿가루는 바스러지듯 허공으로 녹아들었다.
끝없이 이어진 검.
흐름을 끌며 나아간 검이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카일의 측면으로 파고들던 라니엘이다. 달려드는 라니엘과 칼끝이 일직선을 이루었다.
후웅.
카일이 가볍게 칼을 휘둘렀다.
도신이 일직선을 그으며 아래로 떨어졌다. 카일의 칼끝이 지면에 박혔다. 라니엘의 눈이 크게 뜨였다. 제 머리 위에서 땅 아래로 선이 그어지고 있었다. 공기가 울린다. 공간이 삐걱였다.
서걱, 하는 절삭음이 울려 퍼졌다.
한 박자 늦게 핏줄기가 치솟았다.
2.
라니엘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바닥을 구르며 그녀는 제 왼 어깨를 꾸욱 눌렀다. 몸을 비틀어 검격을 회피하긴 했지만, 어깨의 살점이 뭉텅이로 잘려나갔다. 철퍽, 하고 바닥에 핏물이 쏟아졌다.
살과 뼈가 한 번에 베어졌다.
근육마저 잘렸는지 축 늘어진 왼팔은 들어 올릴 수 없게 됐다. 라니엘이 이를 악물며 오른팔로 땅을 짚고 일어섰다. 비틀거리며 바로 선 라니엘이 어깨를 누르던 손을 뗐다.
끈적하게 핏물이 늘어졌다.
라니엘은 왼손에 감아놨던 사슬을 오른손에 바꿔 감았다. 왼팔을 축 늘어트린 모습은 바로 앞에 있는 카일과 같다. 헛웃음을 흘리며 라니엘이 한 걸음 더 내디뎠다.
거리가 완전히 좁혀졌다.
이제는 라니엘의 주먹 또한 뻗으면 닿을 위치다. 카일의 검격이 아닌, 카일이 쥔 날붙이가 라니엘을 벨 수 있을 위치였다.
···겨우 여기까지 왔다.
카일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선 채 라니엘을 노려보고 있었다. 자세히 바라보면 카일의 다리에는 균열이 내달려 있었다. 한 걸음이라도 내디디는 순간 붕괴하리라.
그래서 움직이지 않았던 건가.
걸음을 내디디는 대신 카일이 검을 들어 올렸다. 라니엘은 비틀거리며 움직였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카일의 육체는 무너지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걸음을 내디딜수록 라니엘의 안색 또한 창백해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둘의 싸움은 처절하다.
카일이 검을 휘둘렀다. 파삭, 하고 카일의 손가락이 바스러졌다. 미끄러지듯 라니엘은 카일의 후방으로 돌며 검을 회피했다. 발을 디딘 순간 으적, 하고 라니엘의 발목이 부러져 라니엘이 비틀거렸다.
콱, 하고 발을 내려찍으며 카일이 몸을 돌렸다. 카일의 검이 반월을 그리며 라니엘을 쫓았다. 라니엘은 꼴사납게 바닥을 구르며 검을 피했다. 완전히 피하진 못해 촥, 하고 라니엘의 몸에 상처가 늘었다.
파삭.
카일의 발목이 바스러져 카일이 휘청였다. 무릎을 꿇은 채 카일이 검을 바닥에 꽂았다. 검에 기대어 균형을 잡은 카일이 다시 검을 휘둘렀다.
그런 싸움이었다.
공격을 받지 않았음에도 카일의 육체는 무너지고 있었고, 검을 회피하고 있음에도 라니엘의 몸에서는 하염없이 피가 흐르고 있었다.
철퍽.
이미 카일의 주변은 라니엘의 몸에서 새어나온 피로 얼룩져 있었다. 검붉은 피를 밟으며 라니엘은 계속해서 움직였다. 비틀거리면서도 그녀는 더욱 빨라진 카일의 검을 피해 움직였다.
맞이한 육체의 한계. 다가오는 죽음.
그러나, 의식은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다. 머리는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돌아갔다. 가속에 가속이 거듭된 사고. 한없이 길게 늘어진 체감시간은 꼭 세상이 멈춘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다.
허공으로 튀어 오른 핏방울.
피어오르는 흙먼지.
아주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그것들의 너머에서 카일의 검은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 그 칼이 그리는 궤적을 읽으며 라니엘은 움직였다. 계속해서 움직이며 라니엘은 생각했다.
답을 찾아야 했다.
이대로라면 진다. 피하기만 해서 결판을 낼 수는 없다. 승리하기 위해선 답을 찾아야만 했다.
‘일격을 먹여야 한다.’
그러기 위한 마법이 필요했다.
라니엘은 마법사였고 그녀는 언제나 답을 찾아왔다. 마법은 답에 닿을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도구나 마찬가지였다. 닿을 수 없는 것에 닿기 위해 라니엘은 이번에도 마법을 떠올렸다.
‘마법, 마법, 마법···.’
가속된 사고로 떠올리는 것은 기본.
마법의 기본(??)이다.
마법이란 별과 거래를 통해 세상에 간섭할 권리를 손에 넣는 것이다. 허공에서 불을 만들어내거나, 땅을 융기시키거나, 때로는 충격파를 터뜨리고 물질을 창조해내기도 한다.
불가능한 것. 섭리에 어긋나는 것.
그것을 ‘정당하게’ 행하는 것이 마법이다.
대가를 바침으로써 섭리에 간섭할 권리를 받는 것이야말로 마법의 근본이었다. 그것에 기반을 두고 라니엘은 마법을 짜왔다. 자신만의 마탑(??)을 쌓아올렸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것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라니엘이 쌓아온 모든 것은 카일에게 통하지 않았다. 섭리를 비틀며 주문이 발현하려는 순간 카일은 그 어긋남을 베어버렸으니까.
통하지 않는다면, 다시 짜올려야 한다.
라니엘은 자신이 쌓아온 탑을 무너트렸다. 몇 번째인지 모를 무너트림이다. 잔해를 뒤적이며 라니엘은 처음부터 다시 탑을 쌓아올렸다.
···생각해보면, 그때도 그랬다.
저주에 침식당해 죽어갈 때도 지금처럼 처음부터 탑을 쌓아올렸는데. 그때처럼 라니엘은 사고를 가속했다. 현실에선 몸을 움직여 검을 피했고, 머릿속으론 탑을 쌓고 허물기를 반복했다.
아슬아슬한 움직임이 이어졌다.
피를 흘리며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라니엘의 사고는 더욱 빨라졌다. 가속된 사고는 라니엘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보여줬다. 주마등이 스쳐 지나가고, 연구해왔던 마법들이 스쳐 지나가며, 수많고 수많은 기억이 머릿속에서 뒤섞였다.
그 기억에 의지해 탑을 쌓았다.
수많은 탑이 쌓였고, 수많은 탑이 무너졌다. 수많고 수많은 과정이 반복됐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다. 라니엘의 시야가 한순간 흐릿해졌다.
그 순간이다.
전혀 다른 풍경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3.
멈춰버린 시간.
흐릿해진 시야와 온갖 기억이 뒤섞인 사고 속에서 라니엘은 전혀 다른 풍경을 보았다. 그녀의 시야에 보이는 것은 드넓게 펼쳐진 초원이다. 라니엘로서는 처음 보는 풍경이었다.
초원에는 무너진 탑의 잔해가 가득했다.
마치 그녀의 내면을 보여주기라도 하는 듯, 박살 나고 무너진 탑의 잔해가 가득한 그곳에서 라니엘은 앞을 보았다. 멀리 떨어진 곳에 그 녀석이 있었다. 카일이 있었다.
카일은 라니엘보다 앞선 곳에 있다.
자신보다 앞선 곳에 있는 카일을 보며 라니엘은 무심코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녀가 뻗은 손은 카일에게 닿지 않았다.
툭.
손에 닿는 것은 투명한 벽이다.
있는 줄도 몰랐던, 그러나 언제나 라니엘을 가두고 있던 벽이다. 벽의 너머에 카일은 있었다. 라니엘이 무심코 웃음을 흘렸다.
···언제나 자신의 뒤에서 쫓아오던 녀석이다.
녀석이 자신을 쫓아올 수 있도록 라니엘은 언제나 뒤를 돌아보며 걸었다. 자신을 따라오는 카일을 바라보며 라니엘은 그것을 원동력 삼아 앞으로 걸었다. 카일이 꿈을 쫓는 동안은 그 앞에 서 있겠다고 다짐한자신이었으니까.
그러나, 카일은 더는 라니엘의 뒤에 서 있지 않다. 라니엘을 쫓아오지도 않는다.
앞서 가버렸다. 라니엘이 닿을 수 없는 곳으로 가버렸다. 그렇기에 라니엘은 뒤가 아닌 앞을 보았다. 그곳에 카일이 있다. 없다고 생각했던 벽이 자신을 가로막고 있었다.
벽, 벽, 벽, 넘어야 할 한계.
이 벽을 넘어서 카일에게 닿아야 했다.
잘못된 곳으로 가려 하는 녀석을 붙잡아야만 했다. 라니엘은 투명한 벽을 향해 손을 뻗었다. 벽에 가로막혀 손은 닿지 않는다.
필요했다. 무언가가 필요했다.
녀석을 쫓아야만 했으므로 라니엘은 무언가를 버려야만 했다. 라니엘은 제 손바닥을 보았다. 그곳에는 별빛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자신에게 없던 것이다. 멋대로 제게 심어진 것이다.
···별을 견딜 수 있는 영혼.
언제나 라니엘이 바라왔던 것이다.
이것을 가지지 못했기에 라니엘은 언제나 망가져 왔다. 힘을 견디지 못하고 파멸로 다가섰다.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라니엘은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의 영혼이 변질했다.
라니엘이 웃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녀가 지닌 모든 별빛이 그녀의 손아귀로 모여들었다. 라니엘이 벽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파챵!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벽이 바스라자는 것과 동시에 라니엘은 현실로 돌아왔다. 현실로 돌아온 순간 라니엘의 몸에서 별빛이 미친 듯이 새어나왔다. 견디지 못하는 힘에 영혼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라니엘은 앞으로 나아갔다.
앞에는 카일이 휘두르는 검이 있다.
공간을 찢으며 다가오는 일격은 지금껏 봤던 그 어떤 검격들보다도 날카롭다. 검을 휘두르는 카일의 손가락이 바스라지고 있었다.
‘마지막 일격.’
라니엘이 승부수를 던졌듯, 카일도 마지막이 될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틱, 티디디디딕.
회피도, 방어도 불가능한 일격.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라니엘은 도리어 앞을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부릅 뜬 라니엘의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느꼈다.
계속해서 무너트리던 탑이 기어코 완성됐음을.
답을 찾았다. 이젠 그 답을 실행에 옮길 시간이었다. 라니엘의 코에서 피가 흘렀다. 실핏줄이 터져 그녀의 눈동자가 붉게 물들었다.
···주문이란 별과의 거래를 통해 세상의 섭리에 간섭하는 것.
그 과정을 라니엘은 모조리 생략하기로 했다. 별과의 거래를 생략한다. 먼저 제멋대로 섭리를 비틀어버리고, 그 대가를 뒤늦게 지불하겠다는 논리로 라니엘은 주문을 짜냈다.
당연하게도 쉬울 리가 없다.
인간의 뇌로 처리할만한 연산이 아니다. 그러나, 한계를 넘어선 라니엘의 연산능력이 그를 가능케 했다. 초연산, 마법사 초인이 지니는 능력을 라니엘은 곧장 활용했다.
연산, 해석, 그리고 실행.
별과의 거래를 건너뛰고 라니엘은 섭리에 직접 간섭했다. 그녀가 손을 뻗는 순간 마나는 피어오르지 않았다. 세상에 새겨진 규율 위에 라니엘의 회로가 한 획 추가됐다.
짜올린 주문이 곧 규율이자 섭리가 된다.
강타(Smite).
한순간이다.
그곳에 ‘원래부터’ 있었다는 것처럼 새하얀 빛줄기가 공간을 찢으며 나타났다. 나타난 섬선이 카일의 검과 맞부딪쳤다.
카아아아아아아앙!
공간이 뒤틀렸다.
쩍, 쩌적 소리를 내며 일대의 공간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빛줄기는 카일의 검에 찢어지면서도 기어코 카일의 일격을 상쇄했다. 역천의 검이라면 베어냈을 섭리이나, 그 검을 휘두를 힘이 카일에겐 남아있지 않았다.
처음으로, 카일이 휘두른 칼이 튕겨져나갔다.
그 틈을 라니엘은 놓치지 않았다.
한 걸음 파고든 라니엘이 카일의 심장을 향해 손을 찔러넣었다. 찔러넣은 손으로 라니엘은 카일의 심장을 움켜쥐었다.
숨겨뒀던 단 하나의 회로.
재의 여신이 만들어낸 회로가 새겨진 라니엘의 손바닥이 카일의 심장과 닿았다. 라니엘은 눈을 크게 뜬 카일을 향해 웃어 보였다.
“필요 없으니까.”
키이이이잉!
“도로 가져가, 빌어먹을 새끼야.”
제 영혼이 견딜 수 있는 한 줌의 별빛.
그것만을 남긴 채 라니엘은 자신이 지닌 별빛 전부를 회로에 담았다.
번쩍.
별빛이 범람했다.
「아주 오랫동안 고민했어.」
「다른 결말이 있지 않을까. 카일과 다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카일을 인간으로 되돌릴 방법이 있지 않을까.」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고 그녀는 말했다.
13년 동안 줄곧 후회만을 거듭해온 재의 여신은 쓰게 웃으며 허공에 무언가를 그렸다.
「줄곧 찾아 헤매왔는데.」
그녀가 웃으며 울었다.
「이제서야 답을 찾았네.」
자신 혼자서 찾아낸 답은 아니라고, 그녀는 단정 지었다. 수많은 변수가 있었기에, 그 변수들이 미래를 바꿨기에 찾아낸 답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너는 나처럼 되지 마.」
그녀가 완성한 것은 회로였다. 그 회로를 내게 건네며 재의 여신은 당부했다.
「신이 되지 마.」
「별빛에 목메지 마.」
「권능은 아무것도 이루어주지 않아. 신은 허울뿐인 존재에 불과해. 네가 걸어온 길을 결코 부정해선 안 돼. 그러니까 말야.」
그녀의 말을 떠올리며.
「다시 돌려줘 버려.」
「네게는 필요 없는 것이니까.」
나는 손을 뻗었다.
「나처럼 되지 말고, 너만의 삶을 살아.」
손을 뻗어 카일의 심장을 움켜쥐었다.
그 순간 내 손바닥에 새겨진 회로가 세차게 점멸했다. 한 줌의 별빛만을 남기고 모든 별빛을 먹어치운 회로에서 빛이 물결치듯 범람했다.
찬란히 타오르는 백금색의 빛.
카일의 심장에 뚫린 구멍으로 별빛이 스며들었다. 차오르는 별빛에 심장에 자리 잡은 그늘이 요동쳤다. 제 몸 안으로 들어오는 이물질을 제거하듯 카일의 심장에서 손아귀가 미친 듯이 솟구쳤다.
콱, 콰악.
솟구친 손아귀들이 내 팔을 움켜쥐었다. 내 살갗을 할퀴며 비명을 질러댔다. 귓가에 울리는 비명을 무시한 채 나는 조금 더 손에 힘을 주었다.
‘놓칠까 보냐.’
절대 못 놓는다.
어디 마음껏 할퀴어봐라. 손가락을 꺾을 거라면 꺾어봐라. 살가죽이 다 벗겨져 뼈만 남더라도 결코 놓치지 않을 테니까.
여기까지 닿기 위해 얼마나 많은 위기를 넘겼던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던가. 죽을 위기를 최소 수십 번은 넘겼다. 정말로 죽을 뻔했을 때도 있었다. 그런 사지를 몇 번이고 넘어 여기까지 왔다.
그러니, 놓을 수 없다.
‘이게 마지막 기회일 테니까.’
빛이 더 거세졌다.
물결처럼 밀려든 별빛은 심장의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씨앗에 닿았다. 사라가 제 모든 걸 바쳐 카일의 심장에 심어둔 씨앗이었다.
그것은 곧 사라의 기원이다.
성녀로서 살아온 그녀의 삶의 기원(起原)이자, 제 삶을 구성하는 모든 걸 바쳐 이루고자 한 기원(冀原). 나는 그것을 붙잡았다. 그녀가 최후에 바란 소망을 들어주기 위해서.
씨앗에 별빛이 스며들었다.
범람하는 별빛을 삼키며 씨앗은 발아한다.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리며, 심장에 자리한 그늘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범람하는 별빛의 사이로 새하얀 빛줄기가 치솟기 시작했다.
···이게 바로 내 목적이었다.
미래의 내게 받은 회로는 미완성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하나의 회로만으로는 카일을 되돌릴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말한 것이다. 카르디의 경우에는 이 방법이 쓸모없을 거라고.
그럴 수밖에 없다.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저항한 끝에, 제 심장에 상처를 남긴 카일이 있었기에.
카일을 살리겠단 일념 하나로 제 모든 걸 바친 사라가 있었기에.
13년의 지옥을 견뎌낸 미래의 내가 있었기에.
그 모든 게 있었기에, 비로소 이 회로는 의미를 가지게 됐다. 그 중 어느 하나라도 빠졌더라면 이 회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조금 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게.
그들의 삶이 무의미하지 않게.
나의 역할은 그들이 만들어낸 변수를 단 하나의 답으로 이끄는 일이었으니까. 그러기 위해 여기까지 왔으니까.
“야, 카일.”
이어진 길의 끝에서 나는 쓰게 웃었다.
“빨리 좀 돌아와라.”
웃으며 말했다.
“할 말이 많으니까.”
번쩍, 하고.
터져나온 섬광이 일대를 새하얗게 물들었다.
2.
카■ ■■은 눈을 깜빡였다.
몇 번이나 깜빡였을까. 카■ ■벤은 머리를 가득 메우고 있던 구정물이 떨어져 나감을 느꼈다. 그을음이 벗겨지듯 서서히 머리가 맑아졌다.
카일 토벤.
제 이름을 기억해낸 카일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주변을 둘러보면 밤하늘과 같은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별로 장식되어있는 밤하늘. 발밑을 내려다보면 새하얗게 빛나는 길이 있었다.
자신이 걸어온 길.
카일이 살아온 삶이었다.
앞을 바라보면 그곳에는 구정물로 가득한 길이 있다. 지금까지의 삶을 부정하는 길이 그곳에 있었다. 한 걸음만 더 내디뎠다면 저 길을 따라 카일은 아주 멀리까지고 가버렸을 것이다.
카일은 제 발을 보았다.
들어 올린 발은 구정물을 밟기 직전에 멈춰서 있었다. 그 발이 구정물에 닿기 직전, 구정물은 무언가에 씻겨나가듯 사라지고 있었다.
“···아하.”
그 모습을 보며 카일은 웃었다.
우려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녀석이 성공한 모양이었다. 변해버리고만 자신을 기어코 죽이는 데 성공한 모양이지.
다행이다, 라고 카일은 중얼거렸다.
미래에서 온 라니엘은 말했다.
자신의 세상은 멸망했다고. 그 멸망의 원인이 무엇인지 이제는 카일 또한 알았다. 재앙으로 변해버린 자신일테지. 그런 자신을 제때 막지 못했기에 그녀의 세상은 멸망했을 터다.
그렇기에 걱정했다.
걱정했기에 최후의 순간까지 카일은 발버둥쳤다. 제 심장에 찔러넣었던 성검이 녀석에게 도움이 됐으리라고 카일은 믿고 싶었다.
···아마도 의미가 있었을 테지.
어찌 됐든 미래에서 온 그녀가 말했던 끔찍한 미래가 반복되는 일은 없으리라. 그 사실에 카일은 안도했다. 무거웠던 발걸음이 조금 더 가벼워진 것 같았다.
“······.”
카일은 말없이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