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388
“생각지 못한 손님이네.”
배교자, 글레투스.
재앙이 벨노아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 * *
「그러고 보니 말야, 벨노아.」
「내가 배교자랑 닮았다는 거 정말이더라.」
지금 이 순간, 벨노아의 머릿속에는 언젠가 클로에가 들려주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라니아 교수님이 착각할만했어.」
배교자와 클로에가 닮았다는 이야기.
과연, 그 말대로였다.
“여긴 무슨 일이니?”
눈앞의 재앙의 외모와 목소리가 벨노아에겐 너무나도 익숙하게 느껴졌다. 익숙하긴 하나, 벨노아는 결코 배교자를 클로에와 닮았다고 인식하지 못했다.
‘다르다.’
근본적인 부분이 다르다.
말로 설명하긴 어려우나, 눈앞의 재앙과 클로에 사이에는 결코 좁힐 수 없는 거대한 간극이 존재했다.
“아이야.”
무언가···.
“내가, 묻잖니.”
소름끼치는 목소리.
벨노아가 숨을 헛삼키며 눈을 깜빡였다. 눈을 감았다 뜨는 찰나의 순간, 인기척이 한순간에 가까워졌다.
“여긴 무슨 일이냐고.”
눈앞에 배교자가 서 있었다.
거리가 제법 됐을 텐데 한순간에 거리를 좁힌 것인가? 아니, 아니었다. 배교자는 여전히 신전의 앞에 서 있었다. 움직인 것은 벨노아 자신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
하지만, 지금은 현상에 대해 고찰할 시간 같은 건 없었다. 벨노아가 떨리는 손을 콱 움켜쥐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녹빛의 눈동자다. 섬뜩한 광인(狂人)의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엇을 선택해야 하나.
생존을 위해선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나.
어떻게, 처세해야 하지?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여전히 대답하지 않는 벨노아를 향해 배교자가 손을 뻗으려는 순간이다. 벨노아는 선택을 내렸다. 벨노아가 입을 열어 말했다.
“···주문에 휘말려 마경의 한복판에 떨어졌습니다.”
배교자의 팔이 멈췄다.
그녀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래서?”
“전선으로 귀환하고자 이동하는 도중, 추격대에 쫓겨 따돌리고자 이 수직굴에 뛰어들었습니다.”
배교자가 눈을 깜빡였다.
잘 이해가 가지 않다는 듯이 그녀가 되물었다.
“그러니까, 지금··· 도망치려고 여기에 들어 왔다는 거니?”
“···예.”
“도망쳐? 여기로?”
벨노아는 고개를 끄덕였고, 배교자는 웃음을 터뜨렸다. 어이가 없다는 듯이. 혹은 즐겁다는 듯이.
“너, 여기가 어디인 줄 알아?”
헛웃음을 흘리며 배교자가 말했다.
“알케이아야. 심연, 알케이아.”
구정물이 향하는 곳.
배교자의 영역, 알케이아.
“세상에, 도망치겠다고 내 영역으로 들어오는 아이는 처음 봐. 너 제정신이 아니구나?”
···알았다면 들어오지도 않았을 거다.
그 말을 벨노아는 속으로 삼켰다.
“하긴.”
배교자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제정신이 아니니까 벨리알의 주술을 이은 거겠지.”
움찔, 하고 벨노아의 어깨가 떨렸다.
마치 어떻게 알았냐고 묻는듯한 그 모습에 배교자가 손가락을 죽 뻗었다. 새하얀 손가락이 벨노아의 심장을 가리켰다.
“수백 년이 지났다 해도 벨리알은 내 동료였어.”
가장 찬란한 시대에서.
가장 즐거운 기억을 함께한 동료.
그리 중얼거리며 배교자가 미소 지었다.
“그런 동료의 주술을 내가 못 알아 볼 리가 있겠니? 모시는 신이 분명··· 그림자 용의 군주였던가?”
배교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이야, 이름이 뭐니?”
“···벨노아 입니다.”
“벨노아, 벨노아라···.”
이름을 몇 번이고 발음하던 배교자가 눈웃음을 흘렸다. 그 모습이 한순간이지만 클로에와 겹쳐 보여서, 벨노아는 숨을 헛삼켰다.
“전선에 돌아가고 싶다고 했니?”
배교자가 질문했다.
벨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오렴.”
배교자가 등을 돌려 신전의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무방비해 보이는 등. 하지만 차마 공격을 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클로에와 닮았기 때문이 아니다.
‘···무슨 수를 써도.’
지금의 몸 상태론.
아니, 만전을 기했다고 한들··· 쓰러트릴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저건 무방비한 것이 아닌 강자의 여유일 뿐이다. 어떤 수로 덤벼오든 전부 대응할 수 있다는 확신에서 나오는 여유.
“뭐하니?”
걸음을 옮기던 배교자가 뒤를 돌아봤다.
“따라오지 않고.”
잠깐의 망설임.
벨노아는 결국 배교자의 뒤를 따라 걸었다.
2.
폐허가 된 아르티아.
가루가 된 건물의 잔해에 파묻힌 광인이 커흑, 하고 입에서 무언갈 토해냈다. 토해낸 것은 광인의 몸을 이루는 구정물이다.
철퍽.
질척하게 늘어지는 구정물은 바닥에 닿는 순간 증발하듯 사라졌다. 잃어버린 구정물이 돌아오지 않는단 사실을 깨달은 가운데 광인이 헛웃음을 흘렸다.
“정말이지.”
몸이 붕괴하고 있다.
붕괴하는 것은 육체뿐이 아니다. 광인의 근간을 이루는 그림자에도 붕괴의 여파가 닥쳐왔다. 파직, 하고 연신 튀어 오르는 번개가 광인의 영혼을 좀먹었다.
“어이가 없을 지경이군, 이쯤 되면.”
한순간이었다.
알 수 없는 회로를 라니엘이 기동하기를 잠시, 싸움의 승패는 한순간에 결정 났다. 회로를 분석할 시간도, 저 주문이 무엇인지 이해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은 채 그저 순식간에.
“저주를 먹는 마나만 해도 어떻게 만들었는지가 의심스러운 와중인데, 이젠 더 나아갔군.”
“본질은 같아.”
탁, 하고 라니엘이 광인의 앞에 바로 섰다.
잔해에 처박힌 채 쓰러져있는 광인과 두 발로 땅을 디디고 선 채 광인을 내려다보고 있는 라니엘. 승자가 누구인지는 물어볼 것도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주문이군.”
“그러니까 네가 실패한 거겠지.”
“뼈 아픈 곳을 때리는군, 이것 참.”
광인이 너스레를 떨며 질문을 던졌다.
“무엇을, 대가로 바쳤지?”
광인의 시선은 라니엘을 향했다.
광인이 짜낸 주문은 그녀에게 닿지조차 못했지만, 지금 라니엘의 눈은 붉게 충혈돼 있었으며··· 코와 입에서 검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육체에 드러난 부하는 그 정도 뿐.
하지만, 광인은 알고 있다.
드러난 것이 저 정도일 뿐 더 많은 대가를 라니엘이 치러야만 함을. 대가 없는 힘은 없으니.
“결코 가볍진 않을 텐데?”
또 수명을 갉아먹었나.
그렇다면, 내 작전은 성공이군.
그리 중얼거리는 광인의 머리를 라니엘이 군화로 콱, 짓밟으며 제 중지를 들이밀었다.
“내가 호구냐? 그걸 곧이곧대로 알려주게.”
그래도, 하고 그녀가 말을 이었다.
“너 기분 나쁘라고 말해주면, 수명을 깎는 건 아니야. 그 방법은 쓰면 안 되거든 이제.”
수명을 깎는 방식은 쓰지 않는다.
이 목숨은 자신만의 것이 아니니까. 남에게 받은 목숨을 자신의 것마냥 갈아 마시는 방법을 라니엘은 더는 쓰지 않기로 다짐했다.
“쓰면 안 된다니?”
“그런 게 있어. 빌어먹을 자식하고 약속했거든.”
라니엘이 군화를 비틀었다. 광인의 그림자가 철퍽, 하며 조금 더 빠르게 허물어졌다.
“하기야, 대가는 내가 신경 쓸 것이 아니겠지.”
반쯤 허물어진 얼굴.
하나 남은 눈으로 광인이 라니엘을 바라봤다.
“잿빛 엘프의 계약을 이어받았을 테지?”
“주도권을 쥐긴 했지.”
“그럼 그들이 어째서 토벌에 실패했는지 또한, 알고 있다는 뜻이겠고?”
“알고 있어.”
“그럼에도···.”
광인이 조소했다.
“여전히, 그쪽에 서 있는 건가?”
“어.”
라니엘이 군화에 힘을 줬다.
광인의 절반 남은 얼굴조차 빠르게 무너졌다.
철퍽, 튀어 오른 구정물이 라니엘의 얼굴에 묻었다. 치이익 타들어 가는 구정물과 함께 라니엘이 제 고개를 조금 더 숙였다.
“그래야 하니까.”
“그게 최선인가?”
라니엘은 답하지 않았다.
답하지 않음으로써 답했다. 그 확고한 눈동자 앞에 광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
그는 제 그림자에 달라붙어 영혼을 좀먹는 번개를 바라봤다. 육체의 붕괴를 넘어 영혼에까지 침범한 번개는 사라질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이건 육체를 옮겨도 따라붙겠어. 정말이지 독한 주문이야. 아니, 주문이 아닌가?”
광인이 조소하며 말했다.
“지독한.”
정말이지.
“지독한 저주로군.”
철퍽. 광인의 육신이 완전히 무너졌다.
3.
벨노아는 배교자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신전의 내부는 어둠에 잠겨 있었는데, 그것은 출입구뿐이었다. 조금만 걸음을 옮기자 어둠은 걷혔다. 알 수 없는 빛이 신전을 환히 밝히고 있었다.
그리하여 드러난 풍경에 벨노아는 입을 다물었다.
처참한 몰골이 된 인간이, 철퍽이는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신전의 내부에 가득했다.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
비위가 좋다고 생각했지만, 이 광경 앞에서도 평정을 유지할 만큼은 아니었다. 벨노아의 시선이 흔들렸다. 신을 모시기 위한 신전에서 그 무엇보다 끔찍한 배교(背敎)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철퍽, 찌이익.
무언가 벨노아에게 다가왔다.
바닥을 기며 다가온 무언가가 벨노아의 발목을 콱 움켜쥐었다. 가볍게 힘을 주면 떨쳐낼 수 있는 손아귀. 그러나 벨노아는 제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아, ■■아. ■ ■■.”
알 수 없는 언어를 내뱉으며 그것은 눈물을 흘리고 있다. 형체를 알 수 없게 됐음에도, 육체의 태반이 녹아내리고 다른 것과 뒤섞였음에도 그 눈동자만큼은 인간의 것이다.
“왜.”
그렇게 벨노아가 멈춰서 있자니, 앞서 걷던 배교자가 고개를 돌려 벨노아를 바라봤다.
“불쌍하다고 생각하니?”
아무런 온도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
“아니면, 끔찍하다고 생각하니?”
순수한 의문이 담긴 질문에 벨노아는 뭐라 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벨노아는 침묵했고, 배교자는 담백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아름답다고 생각하는데.”
배교자가 미소 지었다.
아름다운 미소였다. 그 어느 때보다.
“육체를 벗어던지고 본질로 돌아간 모습이잖니. 아무리 추악한 이라 한들 본질은 아름다워. 그러니 아름다운 것끼리 이어줬지. 인간이든, 마수든, 마인이든, 변절자든, 본질은 아름답잖니?”
아름다웠으나.
“모두가 구원받을 자격이 있어.”
그 무엇보다도 기괴하게 느껴지는 웃음.
“그릇된 신이 정한 규율에서 벗어나, 아름다워진 저 모습이야말로 구원이지. 그렇지 않니?”
벨노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배교자는 그런 벨노아의 얼굴을 바라보며 웃었다.
“관점의 차이겠지. 이해해주길 바라진 않아.”
그래도, 하고 그녀가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너희도 언젠간 구원받을 날이 올 거야.”
그러기 위한 장소니까, 이곳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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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救援)이라고 배교자는 말했다.
벨노아는 말없이 제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제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는 인간이었던 무언가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흘러내린 구정물이 피처럼 흘렀다.
그것은 무언갈 말하고 있었다.
뭉개진 발음과 뭉개진 언어 탓에 알아들을 수는 없었으나, 최소한 저건 살려달라는 말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죽여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이게.”
···벨노아는 자신 스스로가 그렇게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은 클로에를 따라 전장에 섰을 뿐, 사람을 구하는 데 큰 뜻을 두고 있지는 않으니까. 구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어쩔 수 없는 경우에 벨노아는 확실히 선을 긋고는 한다.
필요하면 버린다. 필요에 따라 선택을 내리기도 한다. 모두를 구해야 한다는 대단한 신념 같은 걸 가지고 있지도 않다. 그러니, 지금의 이 풍경 또한 벨노아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눈 감고 넘어갈 수 있었다.
눈을 감고, 입을 다물고, 가면을 쓴 채 저 손길을 뿌리치고 앞으로 걸음을 옮길 수 있을 텐데.
“이게, 구원이라고요?”
결국 입 밖으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으므로. 저 말을 결코 수긍할 수 없었으므로 벨노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딴 게 구원 일 리가···.”
“아이야.”
벨노아의 말을 배교자가 끊어냈다.
“말했지만, 나는 딱히 이해를 바라지 않아. 네게 내 가치관을 강요할 생각도 없어. 네가 가지고 있는 ‘구원’이란 단어의 정의를 고쳐 쓸 생각도, 네 신념을 부정할 생각도 없단다.”
부드러운 목소리.
성교회의 신실한 사제가 신에게 기도를 올리듯, 일종의 신성함마저 느껴지는 목소리로 그녀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너는 그럴 생각이 있니? 부정하고 싶어?”
그녀가 벨노아를 바라보며 웃었다.
“내 신념을 부정하고 싶어? 내가 말한 구원이 틀렸음을, 옳지 않음을, 그릇된 것임을 증명하고 싶니? 하고 싶으면 해. 막을 생각은 없어.”
배교자, 글레투스가 미소 지었다.
그녀의 웃음에 호응하듯 신전의 깊은 곳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쿠구궁, 소리를 내며 떨리는 신전.
그리고 느껴지는 것은 시선이다.
벨노아는 온몸에 소름이 돋음을 느꼈다.
신전의 그늘에 숨어서,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온갖 곳에서 ‘무언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처럼.
“해보겠니?”
벨노아가 짧게 숨을 내뱉었다.
제 발목을 붙잡는 무언가를 떨쳐냈다. 서러운 목소리로 울부짖는 인간이었던 무언가를, 그런 무언가들로 가득한 실험대에서 눈을 뗀 채 벨노아가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없습니다.”
“포기가 빠르구나. 싱겁긴.”
내심 덤벼드는 것을 기대했다는 듯 배교자가 실망한듯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너와 같은 아이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단다.”
걸음을 옮기며 그녀가 말했다.
“올곧은 신념도, 그 무엇에도 굴하지 않는 정신도, 그 무엇도 네게는 없잖니. 빛나지 않는 아이들에게서 나는 가치를 느끼지 못해. 네게도 마찬가지고.”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
“본질에서 멀어진 아이들이지. 아름답지 못한 아이들. 순수한 빛을 잃고 탁해진 이들. 현실에 때 묻은 이들은 더러워. 결코 한계를 넘어서지 못해.”
배교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 무가치하지.”
본질만을 뽑아내는 게 나을 텐데.
그리 중얼거리는 배교자가 고개를 돌려 벨노아를 흘겨봤다. 자신을 훑어보는 배교자의 시선에서 벨노아는 섬뜩함을 느꼈다.
“원래대로라면 해체했을 텐데.”
그럼에도, 하고 그녀가 말을 이었다.
“지금은 별로 그러고 싶지가 않네.”
단순한 변덕. 혹은, 옛 동료를 떠올리게 만드는 아이에 대한 흥미. 배교자가 눈을 가늘게 떴다.
“영혼에 재밌는 것을 심었구나, 아이야.”
배교자의 눈에는 보인다.
벨노아의 깊은 곳에 심어진 성배의 조각, 과거에 자신이 만들어 냈던 기적의 잔(盞)이. 그 잔을 만들어내고자 연구했던 시절. 참으로 즐거웠던 시절을 떠올리며 배교자가 엷은 미소를 흘렸다.
저 잔을 심었다는 것은···.
카르디에게 선택을 받았다는 것과 마찬가지겠지.
카르디. 카르디 반 아르미엘.
정말이지 그리운 그 인물을 추억하며 글레투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카르디는 잘 지내고 있니?”
“···예?”
벨노아가 눈을 깜빡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인물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카르디, 그 노인네에 대한 이야기가 왜 나오는 것인가.
“카르디 말야. 잿빛 머리칼의 잘생긴 엘프.”
“잘생긴···? 그 영감이 말입니까?”
“영감? 재밌는 말이구나. 하긴, 그 사람이 좀 늙은이 같은 면이 있긴 하지. 옛날부터 경험담이라며 쓸 데 없는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곤 했으니까.”
아, 뭔지 알 것 같다.
벨노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간 요즘 놈들은 기본도 모른다··· 하고 중얼거리는 말들 말입니까?”
“그래, 그거. 그 말버릇은 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똑같나 보구나? 하여간 재밌는 사람이야.”
배교자가 쿡쿡 웃음을 흘렸다.
그녀의 말을 흘려들으며 벨노아는 카르디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나이가 많다는 것을, 그리고 숨기는 사실이 많다는 사실을 깨달은 참이지만··· 우선은 그것에 관한 의문은 접어두기러 했다.
“그 사람에 대해 아는 이야기가 있으면 조금 더 들려줘 보렴.”
배교자가 걸음을 옮기며 속삭였다.
“내 변덕이 조금이라도 더 오래가게끔 말야.”
내가 재앙이 아닌, 그저 선배로서 네 앞에 있을 수 있게끔 말야.
2.
광인의 격퇴에 성공했다.
그림자가 허물어지고 아르티아를 둘러쌌던 결계 또한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라니엘은 벽에 기대어 선 채 길게, 아주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쿨럭 퉷.”
입안에 굴러다니는 뼛조각을 라니엘이 퉷 하고 뱉었다. 입안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더듬어 보니 박살 난 어금니가 만져졌다. 오돌토돌한 감촉.
하필이면 부러져도 어금니다.
“에라이 씨발.”
지랄맞네, 지랄 맞아 하고 중얼거리며 그녀가 부러진 어금니를 손으로 잡고 뽑아냈다. 핏물이 끈적하게 이어지는 가운데 라니엘이 짧게 신음했다.
육체의 내부에 반영되는 용사의 치유력은 외상에 비해 덜하다. 뽑아낸 어금니가 새로 돋아날 때까진 다소의 시간이 필요하리라.
‘···이러다 틀니 끼는 거 아닌지 몰라.’
진짜로 틀딱이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라니엘이 짧게 어깨를 떨었다. 아무리 그래도 30··· 아니, 20대에 틀니를 끼는 건 너무 슬프지 않은가.
대가를 가져가는 방식도 참 좆같다.
그런 감상을 느끼며 라니엘이 몸에서 힘을 뺐다. 밀려드는 반동에 온몸이 쑤셔왔다. 대가는 불규칙하며 정확히 어느 곳에서 징수해 갔는지도 알 수 없다.
‘좀 쉬고 싶은데···.’
그럴 여유가 있을 리가.
곧 진입할 마도 기사들과 마주치기 전에 멀쩡한 모습을 보여야 하리라. 완벽해야 할 의무가 있으니. 흐트러진 옷자락을 다듬고, 입가에 묻은 핏물을 닦아냈다.
포션을 입안에 털어 넣으며 라니엘이 몇 번이고 눈을 깜빡였다. 그제야 탁 풀렸던 동공에 조금이나마 빛이 돌아왔다.
“너도 고생이 많다, 켈르할름.”
비틀거리며 켈르할름에게 다가간 라니엘이 켈르할름의 뺨을 툭툭 쳤다. 포션을 잔뜩 들이부어 응급처치야 했다지만 부상이 얕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