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389
깜빡.
간신히 의식을 찾은 켈르할름이 눈을 가늘게 떴다. 눈을 깜빡인 켈르할름이 제 뺨을 두들기는 라니엘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라니엘인가.”
“라니아. 라니아 이 자식아.”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리 중얼거리며 라니엘이 켈르할름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르티아의 중심. 폐허가 된 도시가 한눈에 보이는 장소였다.
“미안하게 됐다.”
“···뭐가 말이지.”
“이 도시 말야. 네 고향이잖아. 저 그림자랑 싸우다가 좀 많이 부숴 먹었어.”
중심에서 바라본 도시에는 전투의 흔적이 가득하다. 그나마 형태라도 남아있던 건물은 난사한 주문에 의해 박살 나고, 뭉개져서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됐다.
“미안할 것까지야.”
켈르할름이 쓰게 웃었다.
“구해줬단 사실에 감사해도 모자랄 판이지 않나. 염치도 모른 채 너를 탓할 생각은 없다. 그리고···.”
“그리고?”
“애초에, 형태 같은 건 중요하지 않으니까.”
켈르할름이 길게 숨을 내뱉었다.
“무너지고, 바스러져서 없던 것이 되었다 한들 내 눈에는 보인다. 적어도 나는 기억하고 있다. 그거면 됐다고 생각한다.”
“좋은 말이네.”
라니엘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켈르할름은 한동안 폐허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또 도움받았군.”
“상대가 상대이니 어쩔 수 없었겠지.”
켈르할름이 백 년을 전장에서 살아온 마법사이자 광인이라면, 상대는 천 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온 마법사다. 지는 게 당연한 일이라며 라니엘은 적당히 위로의 말을 뱉었으나···.
“그걸 네 입에서 들으면 기만 정도로 느껴져서 참 묘한 기분이다.”
“위로를 해줘도 그러네. 기만은 무슨 기만.”
“생각해봐라. 고작 서른···.”
“스물.”
“······.”
“뭐.”
켈르할름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라니엘을 흘겨봤다.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당당하게 스물이라 외치는 라니엘을 흘겨보며 켈르할름은 속으로 ‘주책이군.’ 하고 중얼거렸다. 결코 입 밖으로 내뱉진 않았다.
딱히 생명의 은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라기보단,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었을 때 벌어질 일이 쉽게 예측이 가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라니엘은 논리적으로 ‘자신이 20대인 이유’를 주장하며 설득하려들 것이고, 그 모습은 분명 몹시 추할 것이다. 아름다운 것만을 보고 살아도 피곤한 세상이다. 굳이 추한 모습을 끄집어낼 필요는 없으리라.
“···고작 스물 남짓한 녀석이 말이다.”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라니엘이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켈르할름이 말을 이었다.
“혼자서 다 때려 부숴놓고선, 살아온 시절이 다르니 어쩔 수 없다는 등의 이야기를 해보아야 기만으로 느껴진다는 뜻이다.”
“뭐, 그럴 수도 있겠네.”
라니엘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도시 안으로 진입한 마도 기사들의 기척이 느껴진 까닭이었다. 슬슬 일어날까, 하고 라니엘이 말을 꺼내려는 찰나다.
“그래도 얻은 게 전혀 없지는 않군.”
켈르할름이 제 로브 주머니에서 무언갈 꺼냈다.
꺼내 든 것은 광인에게서 빼앗은 것. 그것을 라니엘에게 건네며 백 년을 산 마법사는 말했다.
“백 년 치 관록을 지켜보려고 노력은 했다.”
3.
신앙하지 않는 이를 위한 땅, 알케이아.
그곳에 놓인 신전이자 배교자의 공방은 거대했으며 또한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각 구획 별로 나누어진 공방은 거대한 문으로 가로막혀 있었으며, 문마다 사역마가 배치되어 있었다.
시체와 사역마, 그리고 온갖 실험의 흔적.
벨노아는 걸음을 옮기면 옮길수록 헛웃음이 새어나오는 것을 참아야만 했다.
‘···4년 전, 갈라할 님에 의해 모든 마수를 잃었다고 했던가.’
그럼 이곳에 있는 모든 것들이 고작 4년 만에 그녀가 만들어낸 것들임을 의미했다. 눈에 들어오는 수많고 수많은 사역마를 바라보며 벨노아는 마른침을 삼켜야만 했다.
배교자, 글레투스.
홀로서 능히 군세를 이루며··· 새로운 재앙을 태어나게 할지도 모른다고 평가받은 이가 바로 글레투스다. 그 말이 거짓이 아님을 벨노아는 통감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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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섭리에서 어긋난 것들이, 멀어진 것들이 가득하다. 배교자의 표현을 빌리면 본질에 가장 가까워진 것들이 사방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들이 지르는 비명은 신에게 닿지 않는다.
신이 외면한 땅에서, 인간이 내지르는 비명에 귀 기울이는 이는 구원을 바라는 망가진 성녀뿐이다.
“아름다운 소리 아니니?”
그리고, 망가진 성녀는.
그들의 비명을 비명으로 느끼지 않는다.
“가장 간절한 소망이 담긴 소리야. 소리를 낼 수 있는 모든 기관을 뭉개버려도, 어떻게든 소리를 내고자 발버둥치지. 그렇기에 강렬해.”
그녀의 말에 벨노아는 귀 기울이지 않았다.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으니까.
벨노아는 그저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시선을 떼지 않았다. 언젠가 이곳에 다시 도달하게 될 날이 올 것이요, 그때 이 정보가 도움될 테니까.
지금 할 수 있는 건 그뿐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은 신전의 끝이다. 신전의 끝에는 길게 언덕길이 이어져 있었는데, 그곳에는 세 마리의 갑각룡이 지면을 파헤치며 수호하고 있었다.
카가가가가가각!
심연의 끝, 지상으로 향하는 길.
그곳까지 배교자는 벨노아를 데리고 왔다. 벨노아에게 조금도 손을 대지 않은 채.
“저곳을 따라나가면 된단다.”
그녀가 가볍게 손짓했다.
꿈틀거리던 갑각룡들이 모두 멈추었다. 배교자를 향해 다가온 갑각룡들이 거대한 머리를 조아리는 가운데, 배교자가 뒤를 돌아 벨노아와 시선을 마주했다.
또각.
그녀가 벨노아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들려준 이야기는 즐거웠어. 기회가 된다면 그 사람에게 이걸 전해주지 않겠니?”
그녀가 건넨 것은 낡은 편지다.
오랜 세월 동안 전해지지 않은 편지.
“내용을 확인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그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이 열면 끔찍한 꼴을 맞이하게 만들어 놨으니까.”
“···알겠습니다.”
“보여주기 부끄러운 내용이니 네가 이해하렴.”
그렇게 중얼거리며 미소 짓는 배교자는, 그저 평범한 여인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클로에를 닮은 그 웃음에 벨노아가 꺼림칙함을 느꼈다.
“그리고.”
또각, 하고 그녀가 다시 한 걸음 다가갔다.
벨노아의 바로 앞에 멈춰선 채 그녀가 손을 뻗어 벨노아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마음만 먹으면 뿌리칠 수 있는 손길이나, 벨노아는 그러지 못했다.
“언젠가 말야, 아이야.”
그녀가 벨노아의 손등에 돋아난 용의 비늘을 매만졌다. 그림자 주술의 흔적이었다. 그 흔적을 매만지며 배교자가 아련한 웃음을 흘렸다.
“너도 선택해야 할 순간이 올 거란다.”
그 웃음에서.
그 목소리에서 벨노아는 위화감을 느낀다.
“그 순간에 부디 후회하지 않기를 바라. 기도를 올려야 하는 것은 신이 아닌 네 자신임을 잊지말렴.”
재앙이 아닌, 먼저 길을 걸은 선배로서의 조언.
그 진지한 조언 앞에 벨노아는 어찌 답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눈앞에 선 것은 재앙이다. 아주 끔찍한 재앙이나··· 지금 이 순간 만큼은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
“현실이 아닌 이상을 좇으렴. 그래야 찬란히 빛날 수 있는 법이니···.”
그리 중얼거리며 배교자가 벨노아를 툭 밀쳤다.
“가봐.”
그녀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
“이 언덕을 넘는 순간, 뒤도 돌아보지 말고 달리렴. 밑에서 뭐가 올라오든 간에··· 붙잡히면 그걸로 끝이야.”
배교자의 손가락이 덜덜덜 떨리고 있음을, 그녀의 눈동자가 조금씩 초점이 틀어짐을 벨노아는 확인했다. 마치 광기에 잠식당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잡히면, 넌 죽는단다.”
그녀가 웃었다.
“어서 가 보렴. 내 변덕이 끝나기 전에.”
등록된 마지막 회차입니다
신앙하지 않는 이를 위한 땅, 알케이아.
알케이아는 그 이름에 걸맞게 빛이 새어 들어오지 않는 지하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다. 이 땅의 주인은 하늘 위의 해와 별이 자신을 비추지 않기를 바랐기에, 세상의 깊은 곳에 자신만의 신전을 세웠다.
알케이아의 주인, 글레리아는 미소 지었다.
“어서 가 보렴. 내 변덕이 끝나기 전에.”
벨노아는 말없이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어째서 끔찍한 재앙에게 고개를 숙인 지는 벨노아 자신조차 알 수 없었다. 그저 눈앞의 여인이 재앙이 아닌 선배처럼 느껴졌던 탓일까.
벨노아가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땅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했다.
경사로는 심연의 바깥까지 이어져 있었으며, 그 누구도 심연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길을 지키고 있을 갑각룡들은 지금 침묵하고 있다. 거대한 갑각룡의 표피 사이로 벨노아는 달렸다.
어느 순간 해와 별을 대신해 알케이아를 비추던 광원이 흐릿해졌다. 언덕의 중턱에 깔린 안개를 통과하자 더는 따스한 빛은 내리쬐지 않았다. 시뻘겋게 물든 달이 언덕을 비출 뿐이다.
···마경으로 돌아왔다.
돌아왔다는 표현에 어색함을 느끼기도 잠시, 벨노아는 자신이 디디고 있는 땅이 흔들림을 느꼈다. 쿵, 쿠구궁 하고 땅 아래로 무언가 지나가는 느낌.
“······.”
벨노아는 말없이 뒤를 돌아봤다.
검은 안개에 가려져 마치 심연으로 향하는 입구처럼 보이는 언덕길. 가파른 언덕길을 가리고 있는 구정물이 거세게 출렁이기 시작했다.
무언가, 온다.
벨노아가 이를 악물고 속도를 올렸다.
체력적으로 한계에 몰린 지는 오래지만, 지금 이 순간 벨노아는 남은 체력을 쥐어짜 내야 할 필요를 느꼈다. 벨노아의 몸을 출렁이는 그림자가 감쌌다.
[···구나!]
귓가에 울리는 익숙한 목소리.
심연에서 벗어나자 끊어졌던 여신과의 연결점이 다시 이어진 가운데, 여신께선 정말이지 놀란듯한 목소리로 벨노아의 귀에 대고 소리쳤다.
[돌아왔구나, 도대체 어찌?]
그 물음에 답해줄 시간은 없었다.
벨노아는 제 손가락 하나를 꺾어 공양했고, 여신께선 벨노아의 어깨에 매달린 채 등 뒤를 돌아봤다. 출렁이는 안개, 그리고 안개를 꿰뚫고 나오는···.
카가가가가가가가가각!
배교자의 사역마, 갑각룡.
[···도망치는 게 우선이겠구나. 알았다.]
한때 자신의 피조물이었던 용(龍)의 아종.
수많은 것들과 뒤섞여 자신을 잃은 용을 바라보며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녀가 내뱉은 숨결이 안개가 되고 그림자가 되어 벨노아를 감쌌다.
그림자를 두른 채 벨노아가 달리기 시작했다.
등뒤에서 느껴지는 거센 진동.
흙더미와 돌바위가 갈려나가는 소음. 그것들은 점차 가까워지다 못해 바로 등 뒤에서 느껴졌다. 아가리를 쩍 벌린 갑각룡이 벨노아를 집어삼키려는 순간이다.
움찔.
한순간이지만 갑각룡의 움직임이 멈췄다.
찰나에 불과한 순간이지만, 갑각룡의 아가리는 허공을 물어뜯었고 벨노아는 언덕의 위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헉, 허억···.”
숨을 몰아쉬며 벨노아는 뒤를 돌아봤다.
갑각룡은 더는 벨노아를 추적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시 안갯속으로 모습을 감추었고, 벨노아는 안개의 너머에서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다.
시선은 아주 잠깐동안만 느껴졌다.
이윽고 시선은 사라졌고, 갑각룡을 집어삼킨 심연은 잠잠해졌다. 벨노아는 긴장이 풀려 털썩, 제자리에 주저앉은 채 제 목덜미를 연신 문질렀다.
죽을 뻔했다, 정말이지.
[···솔직히 말해 끝이라고 생각했다.]
벨노아가 식은땀을 닦는 가운데 여신께서 벨노아의 목에 팔을 감은 채 중얼거리셨다.
[그 누구보다 신실했던 이의 말로. 그 아이가 자리 잡은 곳에 네가 떨어졌을 때··· 정말 끝이라고 생각했다. 용케도 살아 돌아왔구나.]
떨리는 여신의 목소리를 들으며 벨노아가 쓰게 웃었다.
“예, 어떻게든···.”
벨노아가 제 손등을 문질렀다.
배교자의 손길이 닿았던 손등.
“아무래도 제가 인맥을 잘 둔 것 같습니다.”
[···인맥?]
“벨리알 님, 그리고··· 왜인지는 모르지만 카르디 영감 덕에 살아 돌아온 것 같긴 해요.”
벨노아가 품에서 편지지를 꺼냈다.
카르디에게 전해달라며 배교자가 맡긴 편지. 그 편지를 노려보다가, 벨노아는 말없이 로브 깊은 곳에 편지를 도로 밀어 넣었다.
“돌아가면 영감을 만나긴 해야겠네요.”
물어 볼 게 많으니까.
그리 중얼거리며 벨노아는 여신을 흘겨봤다. 그녀는 무언갈 알고 있는 눈치였지만, 벨노아의 의문에 답해주지는 않았다.
[그래, 본인에게 듣도록 하거라.]
“알고 계신 게 많긴 하나 보군요.”
[알고야 있지. 그러나, 내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건 더는 스스로 말할 수 없게 된 아이들의 이야기뿐이란다.]
여신께선 쓰게 웃으셨다.
[직접 듣도록 하거라.]
벨노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짧게 한숨을 내뱉고선, 벨노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알케이아에서 벗어나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곳은 여전히 마경의 내부였다.
탁.
돌아가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긴 가운데, 벨노아는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2.
배교자, 글레투스는 심연의 끝에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조금 전 이곳을 빠져나간 청년이 향할 곳을 쳐다보다가··· 그녀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
“부럽구나.”
벨리알을 닮은 아이, 벨노아.
옛 동료의 뜻을 이은 후인을 마주한 순간 그녀는 과거를 추억할 수밖에 없었다. 찬란했던 과거.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 그렇기에 아름다웠던 기억.
가장 찬란한 시기를 보내고 있을 아이에게 글레투스는 약간의 질투심을 느꼈다. 약간의 기대감 또한.
그녀의 눈에는 인간이 가진 영혼의 색이 보였다. 영혼의 형태가 보였다. 그리고, 그녀가 보아왔던 대부분의 영혼은 탁했다. 새하얀 본질에서 멀어진 것들. 현실에 더럽혀지고, 타협을 거듭하며 이물질이 낀 영혼.
그런 영혼들은 초월의 길에 이르지 못한다.
스스로를 깨부수고 저 너머로 나아가지 못한다.
강한 열망, 강한 동기, 혹은 순수, 혹은 동경. 그런 감정들만이 인간을 본질에 가깝게 만든다. 인간을 초월의 길로 이끌곤 했다.
『나는 네년을 반드시 죽인다.』
『네가 내게서 빼앗아 간 모든 걸 잊지 않는다.』
『너를 죽이기 위해, 네게 복수하기 위해 나는 내 삶 전부를 바친다. 반드시, 반드시···.』
복수를 바라는 한 아이의 아버지가 그러했고.
『이런 비극을 다시는 만들지 않겠다.』
『이 자리에서 너희와 맺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는 내 남은 삶 전부를 바치겠다.』
맹세를 지키기 위한 마법사가 그리했으며.
『단 한 번도.』
『저는 단 한 번도 이 힘을 저주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이 힘이 있었기에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이게 축복이 아니라면 뭐겠습니까?』
순수한 동경을 좇았던 용사가 그리했듯이.
초월이란 결국 본질로의 회귀다.
영혼이 가장 새하얗게 빛날 때 인간은 다음으로 나아갈 기회를 손에 넣게 되는 법이요, 가장 찬란한 광채를 품게 되는 법이다.
“그 아이들에 비하면 초라하지만···.”
덧없지만. 미약하지만.
그럼에도, 배교자는 벨노아에게서 빛을 보았다.
“너도 가지고 있구나.”
벨노아에게 그녀는 너 같이 더럽혀진 아이는 싫다고 말했지만, 그리 말하는 동시에 배교자는 보았다. 더럽혀진 영혼 속에서도 빛나던 하나의 조각을.
그것은 자신이 만들었던 성배다.
기적의 잔에 새겨진 벨노아의 소망을, 결코 더럽혀지지도 타협하지도 않는 하나의 소망을 배교자는 엿보았다. 그 소망에 배교자는 흥미를 느꼈다.
‘다음에 만날 때는.’
어쩌면, 찬란한 빛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아하.”
‘글레리아’가 미소 지었다.
그녀는 웃음을 흘리며 무심코 제 가슴팍을 매만졌다. 법의에 가려진 흉터를 매만지며 그녀는 아련한 미소를 흘렸다. 그녀가 보아왔던 그 어떠한 영혼보다 순수함을 간직했던 이가 새겨넣은 상처다.
상처를 매만지며.
글레리아는 두 눈을 감았다.
조금이나마 머리를 맑게 해주는 흉터. 맑아진 머리로 그녀는 또다시 과거를 추억했다. 정말이지 즐겁고 보람찼던 나날을 추억하며, 그녀는 자신의 신전으로 걸음을 옮겼다.
돌아가고 싶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음을 그녀는 안다.
이미 너무나도 먼 길을 걸어왔으니까. 길에서 벗어나고 말았으니까. 글레리아는 눈을 감았다. 감았던 눈을 뜨며 글레투스는 신전의 깊은 곳으로 향했다.
자신이 마땅히 있어야 할 곳으로.
3.
이틀의 시간이 흘렀다.
마경에서 시간을 보낸 지 어느덧 열흘이 다 되어가는 가운데, 벨노아는 제정신에 무언가 파고듦을 느끼고 있었다. 마경의 마기는 인간의 육체에만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정신 또한 침식해온다.
[정신 차려라.]
그나마 다행인 것은, 흐릿해지는 의식을 붙잡아 줄 존재가 곁에 있다는 점일까. 벨노아의 동공이 흐릿해질 때마다 여신께선 벨노아의 정신을 일깨웠다.
[거의 다 오지 않았느냐.]
“예, 확실히···.”
벨노아가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 걸음걸이에 옛날 같은 경쾌함은 없다. 기척을 줄이는 것도 힘겨워서 이제 벨노아의 걸음 소리는 ‘탁’이 아닌 차라리 지익, 하고 끄는 소리에 가까웠다.
이런 몸으로 전투를 몇 차례고 치른 걸까.
중간부터 세기를 포기해 잘 모르겠다.
발을 질질 끌며 벨노아는 황야를 걸었다. 그렇게 한참 걷다 보면 드디어 목표로 했던 지점이 눈에 들어왔다. 저 멀리 보이는 기괴한 절벽.
저 절벽만 넘는다면, 그다음은 수월하다.
몸을 숨길 곳이 훨씬 많으며 마경의 영향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으니까. 지체되긴 했지만 절벽을 넘어 며칠만 더 걸으면 최전선에 도착할 수 있으리라.
“후우···.”
벨노아가 길게 숨을 뱉으며 걸음을 옮겼다.
이 곳이 마지막이다. 이곳만 넘으면 추적대도 더는 자신을 추격하지 못하리라. 그렇게 벨노아가 절벽에 가까이 다가가던 순간이다.
끼이이이이이이익!
하늘에서 새의 울음소리를 닮은, 찢어지는 듯한 소음이 울려 퍼졌다. 벨노아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하늘에는 와이번들이 맴돌고 있었다.
“···하.”
벨노아가 헛웃음을 흘렸다.
하늘에서 맴돌고 있는 와이번들은 모조리 뿔이 꺾여 있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벨노아는 안다. 이윽고 하늘에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와이번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덩치.
와이번들보다 더 높은 곳에서 용이 벨노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용은 울부짖지 않는다. 그저 제 머리를 살짝 아래로 내릴 뿐이다. 자신에게 올라타 있는 주인이 내려갈 길을 만들듯이.
이윽고 탁, 하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누군가 용의 머리를 밟고 도약했다.
빠른 속도로 낙하한 그것이 쿠웅, 하고 땅에 착지한 순간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피어오르는 흙먼지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이지 놀랍군.”
와이번 부대의 지휘자.
“마경에서 그리 오랜 기간 동안 생존한 것도, 부상을 입은 채로 전투를 이어간 것도, 하물며 위대한 분의 땅을 무사히 빠져나온 것도···.”
마경의 오래된 초인.
“기어코 이 지점까지 도착한 것도.”
용잡이, 아스테리오.
“경이로울 뿐이야. 솔직히 박수를 쳐주고 싶군. 비꼬는 게 아니라, 정말로.”
그가 가볍게 손을 휘둘러 흙먼지를 걷어냈다.
“기다리고 있었다. 그림자 기사.”
벨노아가 이 지점을 마지막 관문으로 여겼듯이, 그것은 벨노아를 추격하던 마왕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국에 벨노아는 이곳을 넘어야 했으므로 아스테리오는 이 절벽의 위에서 벨노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이곳은 못 넘어간다.”
그가 벨노아에게 대검의 끝을 겨누었다.
자신에게 겨누어진 칼끝을 바라보며 벨노아가 헛웃음을 흘렸다. 여정의 끝. 마지막 관문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마경의 초인이다. 그것도 수백 년은 족히 살아왔을 초인.
···그에 비해 자신은 어떠한가.
벌어져 진물이 뚝뚝 흐르는 상처.
중독으로 인해 흐릿한 정신.
마기 침식으로 나타나는 마기 중독현상.
제대로 된 식사도, 휴식도 취하지 못해 서 있는 게 고작인 몸 상태. 그 외에도 자잘한 상처가 몸을 움직이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다.
이런 상태로 초인과 전투를 해야 한다. 하물며 그가 이끄는 악명 높은 와이번 부대와 함께. 솔직히 말해서 여기서 죽으라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지랄 맞네.”
벨노아의 중얼거림에 아스테리오가 쓰게 웃었다.
“미안하게 됐다.”
하지만, 하고 아스테리오가 말했다.
“명령은 명령이니 따라야지. 위대한 존재께서 너의 죽음을 바라신다.”
전사이기 이전에 아스테리오는 마왕군의 간부다.
개인의 명예보다 작전의 달성을 우선시해야만 함을 알기에, 그는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하늘 위에서 맴돌던 와이번들이 일제히 하강하기 시작했다.
“이곳이 네 마지막이다.”
불을 내뿜으며 하강하는 와이번.
일대를 휩쓸 브레스를 준비하는 용.
그리고, 그들 사이로 달려드는 초인.
다 죽어가는 자신을 상대하는데도 전력을 다하는 초인을 바라보며 벨노아는 이를 악물었다.
최악의 상황이다. 정말이지.
밀려드는 열기, 공기를 밀어내며 강하하는 와이번 부대, 대검을 긁으며 질주하는 용잡이. 그리고 제 등 뒤에 놓인 것은 물러설 곳 없는 거대한 절벽이다.
궁지에 몰렸다.
세상이 마치 자신에게 죽음을 강요하는듯한 상황 속에서 벨노아는 눈을 감았다.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렇게 벨노아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이미 벨노아의 몸은 그림자에 뒤덮여 있었다.
그림자 갑주, 육체 강화, 용의 발톱.
남은 마나와 열 손가락을 모조리 공양해 벨노아는 제 몸을 강화했다. 부러진 손가락을 대신하는 것은 용의 발톱. 그렇게 쿵, 하고 땅에 발을 박아넣는 벨노아를 바라보며 여신께서 경고했다.
[알고 있겠지만···.]
이게 마지막 거래일 것이야.
지금의 네 몸으로는 이 이상의 거래를 견디지 못할 테니까. 여신께선 그리 중얼거리셨고, 벨노아는 짧게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라고.
마기 중독. 부상. 독에 곪은 상처. 흘러내리는 진물. 피로. 갈증. 허기. 바닥난 체력. 탈진. 마기에 의한 정신 침식. 몽롱하고 흐릿한 의식.
이만큼이나 지랄 맞은 상황에서 싸워본 적이 또 있을까. 이만큼이나 궁지에 몰렸던 상황이 또 있었을까. 벨노아가 생각하기에, 아마도 없었다. 그렇기에 벨노아에게 있어서도 지금의 상황은 ‘처음’이다.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것.
닿지 못했던 영역.
그 영역에 도전하기 위해, 이미 한계를 맞이한 육신을 벨노아는 조금 더 혹사시켰다. 부디 이 한 번의 전투를 버텨주기를 바라면서.
‘이길 확률은, 당연하게도 없다.’
없음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포기할 수는 없으리라. 자신은 돌아가야만 하니까. 그렇게 약속했으니까. 약속을 지키기 위해 벨노아는 눈을 부릅떴다.
느려졌던 시간이 제 속도를 찾는다.
밀려드는 와이번의 아가리를 향해 벨노아가 손을 뻗었다. 우선은, 이것들부터.
* * *
용잡이, 아스테리오는 마법에 대해 무지하다.
마나를 다룰 줄도 모르며 당연하게도 마법을 읽는 눈 따위 가지고 있지도 않다. 그 대신 그는 초인의 감각을 지니고 있다. 힘의 흐름을 느끼는 감각.
“···하.”
그렇기에, 아스테리오는 헛웃음을 흘렸다.
다 죽어가던 인간.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던 인간을 중심으로 격류가 몰아쳤다. 거대한 힘의 흐름. 가히 초인에 비견되는 힘의 흐름은 거세기 짝이 없다.
꺼지기 직전의 촛불이, 마지막으로 찬란한 빛을 내는 것인가. 아니라면 마지막까지 힘을 비축해 두었던 것일까.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방심해서는 안 되겠지.’
아스테리오는 알고 있다.
숱한 전장에서 궁지에 몰린 이들은 언제나 변수를 만들어내곤 했다. 그 변수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결코 방심해선 안 되리라.
화아아아아아아악!
와이번들이 내뿜은 불길이 지면을 휩쓸었다. 솟구치는 화염 속으로 와이번들이 육탄 돌격을 감행했고, 불길 속으로 와이번이 모습을 감춘 순간이다.
스걱.
다섯 줄기의 바람이 불길을 가른다.
가느다랗고 날카로운 바람에 화염이 말려들어 가고, 바람에 휘말린 와이번의 몸이 토막 났다. 화염 속으로 모습을 감췄던 와이번은 토막 난 시체로 돌아왔다.
서서히 걷혀가는 화염.
그 화염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제 양팔을 축 늘어트리고, 자세를 낮춘 채 눈을 빛내고 있는 벨노아다. 그 안광은 흉흉하기 짝이 없다. 마치 짐승의 눈동자와 같다.
그림자 기사, 벨노아.
그 이명에 걸맞게 벨노아의 육신은 그림자로 뒤덮여있다. 그림자 갑주는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도 벨노아를 보호하고 있으며, 끊임없이 재생한다.
‘소문대로군.’
그런 감상을 느끼며 용잡이는 질주했다.
아스테리오가 쿵, 하고 땅에 발을 박아넣으며 검을 휘둘렀다. 칼끝이 공기를 밀어내다 못해 가르기 시작한다. 공기를 찢으며 다가오는 참격 앞에 벨노아는 회피를 선택했다.
하지만 그 퇴로에는 이미 와이번들이 기다리고 있다. 용잡이, 아스테리오는 결코 자신만의 강함을 과신하진 않는다. 그는 전사이기 이전에 간부요, 지휘관이다.
전장에서 수백 년을 살아남은 초인. 제 강함만을 믿어서는 결코 그만한 시간을 전장에서 버틸 수는 없는 법이다. 쓸 수 있는 것은 전부 쓴다. 그것이 아스테리오의 방식이자 강함이다.
콰직!
와이번이 벨노아를 물어뜯는다.
발목을 물어뜯고, 몸통과 다리를 물어뜯는다. 물론 그들의 이빨과 발톱은 벨노아의 그림자 갑주를 뚫지도, 벨노아를 오래 붙잡아 두지도 못한다.
그저 시간을 끌 뿐이다.
걷어차인 와이번의 머리가 박살 나고, 송곳에 꿰뚫려 축 늘어지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시간을 벌었다. 벌어낸 것은 1초 남짓한 시간.
그리고, 아스테리오의 검은 1초를 삼킨다.
밀려드는 검격이 벨노아를 후려쳤다. 검격에 휘말린 와이번들이 터져나가는 가운데 벨노아는 양팔을 교차해 검격을 받아냈다. 당연하게도, 온전히 받아낼 수 있을 리가 없다.
우득, 우드드득.
그림자 갑주가 벗겨지고 벨노아의 팔에서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연달아 울려 퍼졌다. 검격에 밀린 벨노아가 등지고 있던 벽에 처박혔다. 검격이 닿은 벽이 움푹하고 파헤쳐졌다.
“···커흑!”
벨노아의 입에서 피가 토해져 나오며, 벨노아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 아스테리오는 후두둑 비처럼 내리는 와이번의 살점을 맞으며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쿠웅, 하고 울리는 땅.
잔상을 흩뿌리며 아스테리오의 검이 땅을 긁으며 하늘로 솟구쳤다. 튀어 오르는 흙더미와 함께 거친 검격이 땅을 파헤치며 벨노아에게 쇄도했다.
이격(二擊), 파쇄.
닿는 것을 모조리 갈아 마시며 다가오는 검격 앞에 벨노아가 양손을 휘둘렀다. 부러진 팔을 그림자로 수복하며 휘두른 손톱. 열 가락의 바람이 검격을 갈라내는 듯 보이지만···.
삼격(三擊), 분쇄.
이어진 검격이 벨노아가 일으킨 폭풍을 찢어발겼다. 벨노아가 몸을 옆으로 던져 범위에서 벗어난 순간, 방금까지 벨노아가 등을 기대고 있던 절벽이 폭발하듯 터져나갔다.
‘···대체.’
무슨 검술인지 감이 안 잡힌다.
베어내기 위한 검이 아닌 깨부수는 검. 하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라는 것이 문제가 된다. 벨노아가 욱신거리는 제 옆구리에 눈살을 찌푸렸다.
촤아악.
미끄러지듯 자리를 이탈하고, 호흡을 다듬으려는 순간 확 하고 흙먼지를 꿰뚫으며 누군가 벨노아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벨노아가 눈을 부릅떴다.
“···!”
코앞까지 다가온 용잡이.
용잡이는 건틀렛과 각반을 제외한 갑주를 모조리 벗어던진 상태였다. 육중한 갑주를 벗어던지고 그저 한 자루의 검만을 쥐고 달려드는 용잡이의 속도는··· 그림자를 두른 벨노아를 웃돈다.
저만한 무게의 대검을 들고도, 그 움직임은 결코 둔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코앞까지 파고들어 휘두른 대검. 벨노아가 고개를 숙여 회피하지만, 칼끝이 그리던 궤적이 한순간에 꺾여 벨노아의 어깨에 파고들었다.
우득!
뼈가 부서지는 소리.
참격에 살갗이 찢어지는 고통. 벨노아가 이를 악물고 고통을 견뎌냈다. 제 어깨에 박힌 검을 붙잡으려고 손을 뻗지만, 그 순간 용잡이가 검을 놓으며 벨노아의 머리를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콰직!
무릎으로 벨노아의 머리를 찍는다.
벨노아의 고개가 확 뒤로 젖혀진 순간, 용잡이는 벨노아의 복부를 걷어차며 벨노아의 어깨에 박힌 검을 비틀며 뽑아냈다. 상처가 벌어지고 찢어지며 벨노아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허어.”
그렇게 벨노아를 밀어낸 순간, 용잡이는 제 양 손바닥과 무릎에서 흐르는 피를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그 와중에도 두른 갑주를 변형해 상처를 입혔다라, 과연 감탄할만한 집념이었다.
“대단하군.”
밀려난 벨노아가 제 어깨를 움켜쥐며 거친 숨을 내쉬는 가운데, 용잡이는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렸다. 내버려두면 초인의 영역에 오를 청년을 바라보며 용잡이는 쓴웃음을 흘렸다.
“그러니, 더더욱 여기서 끝내야겠어.”
땅과 수평을 이루는 검을 양손으로 쥔 채, 용잡이가 눈을 가늘게 떴다. 딱히 여유를 부렸기에 곧장 벨노아를 추격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저, 말려들지 않기 위함이다.
“쏴라.”
짧은 한마디.
직후, 하늘에서 거센 불길이 땅 아래로 떨어졌다. 와이번들이 내뿜는 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거대하고, 거센 불길. 용의 숨결이 벨노아를 집어삼켰다.
화아아아아아아아악!
거센 불길에 땅이 녹아내렸다.
지면이 자글거리며 진흙으로 변하고, 불길 속에서 벨노아의 몸이 타들어 간다. 벨노아가 팔을 휘두르긴 하나 폭풍은 화염을 완전히 밀어내진 못한다. 육체가 한계에 내몰린 탓이리라.
“······.”
용잡이가 머리를 옆으로 기울였다.
화염을 뚫고 쏘아진 그림자 가시가 용잡이의 볼을 스쳐 지나갔다. 미래시 덕에 피해낸 일격이나 이 와중에 반격했다는 사실에 감탄할 뿐이다.
그 일격에 보답하고자 용잡이가 눈을 부릅떴다.
···아스테리오는 힘의 흐름을 읽는다.
지면을 휩쓰는 용의 숨결의 흐름을 부릅뜬 눈으로 용잡이는 읽어낸다. 그가 휘두르는 대검은 그 흐름의 결에 파고들어 힘의 방향을 바꾸고, 더욱 거센 방향으로 몰아치게끔 만든다.
그것이 아스테리오의 검술이다.
아스테리오가 휘두르는 대검의 궤적을 따라 용의 숨결이 빨려 들어갔다. 이제는 불투명한 검기가 아닌, 시뻘겋게 소용돌이치는 열기를 머금은 검기.
서걱.
검기가 벨노아의 어깻죽지에 파고들었다.
벨노아가 두른 그림자가 응축된 열기에 모조리 타들어 가고, 오른쪽 어깨부터 왼쪽 갈비뼈까지 일선을 그었다. 치이익, 하고 살갗이 타들어 가는 소리. 뒤이어 밀어닥치는 열기를 머금은 폭풍.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벨노아가 절벽에 처박혔다.
벨노아의 눈에 초점이 사라지고, 벨노아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것만을 기다렸다는 듯 저공비행을 하던 와이번들이 벨노아에게 달려들었다.
콰작, 하고.
몰려든 와이번들이 하이에나처럼 벨노아의 몸을 물어뜯었다. 살점과 피가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2.
최선을 다한다 한들, 반드시 보답 받으리란 법은 없다. 당연하게도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은 법이다.
벨노아는 패배를 직감했다.
몸을 일으킬 수가 없으며 감각은 희미했다.
콰작, 하고 무언가 제 몸을 물어뜯고 뼈를 부수는 소리만이 간헐적으로 들려올 뿐이다. 튀어 오르는 살점. 쏟아지는 핏물과 흐릿해지는 의식.
···돌아가야만 하는데.
도저히 그럴 수 없을 것만 같다.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의식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바닥에 엎어진 채 벨노아는 시선만을 굴려 앞을 보았다. 무릎을 쪼그리고 앉은 여신께서 그곳에 계셨다.
느려지다 못해 멈춰버린 시간.
신과의 거래를 위한 시간 속에서 여신께선 아프게 웃으셨다. 여신의 손길이 벨노아의 얼굴에 닿았다.
“아이야.”
그녀가 벨노아에게 말했다.
“네가 바라는 것은, 그날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을 테지?”
그 아이를 지키는 것.
그리고, 그 아이의 곁에서 함께 걷는 것.
벨노아는 말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듣지 않더라도 알겠다는 듯 여신께선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래, 그렇다면···.”
여신이 벨노아의 이마와 제 이마를 맞대었다.
“네게 각오를 묻겠다.”
이마를 맞댄 채 그녀가 눈을 감았다.
감겼던 눈이 천천히 뜨일 적, 가느다란 속눈썹 사이로 보이는 것은 언제 나와 같은 밤하늘을 빼다 박은듯한 눈동자가 아니다. 붉은 눈동자.
붉은 용안(龍眼)이 벨노아를 직시했다.
“다음으로 나아가면 너는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단다. 많은 걸 잃게 될 것이야. 하지만, 잃는 것은 언제나 너뿐이겠지.”
그녀가 슬프게 웃었다.
“나는 네게서 많은 것을 가져갈 거다. 네가 바라는 힘을 주기 위해선 그래야만 하니까. 단순히 육체를 공양하는 데서 그치지 않을 것이란다.”
더 많은 것. 돌아올 수 없는 길.
그럼에도, 하고 여신께선 질문을 던졌다.
“어쩌면 이성이 흔들릴지도 모르지. 짐승이 될지도 몰라. 한낱 미물이 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너는 내게 기도를 올릴 생각이더냐?”
눈에 비추는 붉은 눈동자.
망막을 가득 채운 붉은빛이 말했다.
“네가 원한다면 이번 한 번은 힘의 대가를 모조리 내가 감당할 수도 있단다. 그러나 너와의 계약은 끊어지겠지. 네가 바란다면 그리 해주마.”
여신께서 물으셨다.
“살고 싶으냐, 아니면 나아가고 싶으냐.”
어느 것을 선택해도 원망하진 않으리라.
여신께선 자애롭게 질문을 던지셨다.
선택의 기로 앞에서 벨노아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쉽고 간단해서 매력적인 길이 하나. 거칠고 힘든 길이 하나다. 두 개의 길을 시선에 담은 순간, 벨노아는 며칠 전 들었던 누군가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언젠가 너도 선택해야 할 날이 올 거야.」
「하지만, 기억하렴.」
「기도를 올리는 건 신이 아닌 너 자신이어야만 해. 때로는 현실이 아닌 이상을 좇으렴.」
고민은 길지 않았다.
벨노아는 현실이 아닌 이상을 선택한다. 타협하며 살아온 소년은 이 순간만큼은 타협하지 않는다. 타협해선 이상만을 좇는 그녀의 곁에 설 수 없으므로.
“······.”
벨노아가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