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399
【어서 오렴.】
들려온 목소리에 라니엘이 고개를 내렸다.
비스듬히 고개를 내려 그녀가 바라본 곳은 정면이다. 단절되었던 공간의 일면이 무너져내려 드러난 것은 쭉 뻗은 길이다. 신전의 중심으로 향하는 길.
【나의 땅에.】
길이 열린 것은 라니엘뿐만이 아니다.
드라카에게도, 켈르할름에게도, 데스텔에게도 같은 길이 보였다. 이곳에 모여든 모두가 앞을 보았다.
【나의 성역에, 나의 공방에, 나의 태내에.】
신전의 중심.
그곳에는 탑이 세워져 있었다.
【이곳은 판데모니움, 알케이아.】
만신전이 아닌, 만마전(萬魔殿).
판테온이 아닌, 판데모니움.
하늘에 닿을 것만 같은 거대한 탑. 그 탑을 이루는 것은 목재도 석재도 그 무엇도 아니다. 인간의 시체가 아니며 마수의 시체도 아니다.
【이름 잃은 신들의 무덤이란다.】
이름 잃은 신.
태초의 신들의 시체로 쌓아올린 탑의 아래서 배교자가 웃음을 흘렸다. 환희하며 광소했다. 울려 퍼지는 웃음소리. 쏟아지는 검은 소나기. 목소리가 메아리치고 빗소리가 고막을 울리는 난잡한 상황 속에서도···.
쩌억.
모두가 같은 소리를 들었다.
일대에 울려 퍼진 기이한 소리에 모두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을 올려다본 이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들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자아.】
하늘이.
【하늘을 열 시간이란다.】
하늘이, 열리고 있었다.
2.
최초의 성녀 글레리아 벨 아르미아스는 신에게 배반당했다. 그녀는 최후의 순간 깨달았다. 자신이 바라는 구원은 별 아래서 성립될 수 없음을. 자신이 삶을 바쳐 이루고자 했던 모든 것들이 무의미했음을.
최후의 순간 별은 인간을 외면했다.
별은 성녀의 기도에 답하지 않았다.
그 순간 글레리아는 느꼈다. 깨달아야만 했다.
그녀는 별과 연결된 존재요, 그 누구보다도 별과 가까웠던 성녀였다. 그렇기에 최후의 순간 그녀는 별이 자신을 외면한 이유를 깨닫고 말았다.
···별은, 균형을 이루는 존재다.
교단에서 이야기하는 완벽한 존재도, 아름다운 존재도, 인간을 위하는 존재도, 구원을 행하는 존재도 아니다. 별의 실체는 차라리 마법사들이 이야기하는 저울 그 자체에 가까웠다.
저울, 천칭, 평등.
안정된 균형 속에서 세상을 유지하는 존재.
“처음부터 잘못된 거였어.”
글레리아가 웃음을 흘렸다.
“우리는 신의 뜻을 따라 그늘을 토벌하고자 했지만, 그건 처음부터 신의 뜻이 아니었던 거야. 신은 그늘의 토벌 따위 바라지 않았어.”
글레투스가 조소했다.
“별은 그늘의 기세가 줄어들기를 바랐을 뿐이야. 자신과 같은 선에 놓이도록. 자신과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존재로 떨어지기를 바랐을 뿐이야.”
저울의 수평을 맞추기 위한 작업.
그건 맞은편에 놓인 것을 ‘덜어내는’ 것이지, 완전히 치워버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리 수평이 이루어졌을 때.”
글레리아는 절망했다.
“별은 우리를 버렸지.”
글레투스는 환희했다.
“결국 이용당한 거야. 나의 구원도, 가니칼트의 긍지도, 카르디의 맹목도, 벨리알의 소망도, 그 모든 건 별에게 이용당했을 뿐이야. 우리는 구원받지 못해.”
영겁토록. 영원토록. 하염없이.
“그럼에도.”
글레리아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나는 여전히 구원을 바라노니.”
글레투스는 여전히 구원하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 방법이 잘못되었을지언정, 비틀렸을지언정 글레리아는 여전히 구원을 바랐다.
그릇된 신의 아래 구원은 가치를 잃었다.
거짓된 신은 모두를 기만했다.
그렇다면 배반당한 사제는 어찌해야만 하는가. 최초의 성녀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신과 가장 가까운 자신은, 무엇이 돼야만 하는가? 그 답을 그녀는 아주 오랫동안 고민해왔다.
고민 끝에 그녀는 답을 찾았다.
별이 닿지 않는 곳에서 답을 손에 넣었다.
세상에서 가장 깊은 곳에 존재하는 이 땅, 알케이아는 만신전이자 신들의 무덤이었다. 수만 년 전 하늘이 열린 그날 수많은 신들이 추락한 곳. 알케이아에는 한때 신이었던 것들의 시체가 묻혀있었으니, 이는 곧 어느 사실을 증거했다.
신을 추락시킬 수 있음을.
그릇된 신을 떨어트리고.
단 하나의 신을 하늘 위에 걸 수 있음을.
과거 고룡의 마법사가 깨트렸던 금기를 그녀는 깨달았다. 하나의 인간이 저질렀던 만행을 이해했다. 이해했기에 그녀는 선택했다.
“그날의 약속을, 맹세를, 소원을 잊지 않았으니.”
그녀가 기도하듯이 두 손을 맞댔다.
끽, 끼기긱.
맞댄 손바닥을 기울이며 비틀었다.
하늘과 수직을 이루던 손은 어느새 수평이 되었다. 왼 손등은 하늘을 향하고, 오른 손등은 아래를 향했다.
“내 바라건대.”
성녀, 글레리아는 신에게 배반당했다.
광인, 글레투스는 신을 배반하기를 선택했다.
“하늘을 열어, 그릇된 신을 떨어트리고.”
순교자, 글레리아는 스스로를 신앙했으며.
배교자, 글레투스는 타인의 순수를 열망했다.
“나의 신을 하늘에 걸어 두리라.”
글레리아가 왼손을 땅 아래를 향해 뻗었다.
글레투스가 오른손을 하늘 위를 향해 뻗었다.
맞댔던 손이 떨어진 순간 그녀가 눈을 떴다. 그녀는 더는 광소하지 않는다. 더는 환희하지 않는다. 스스로의 인격을 분리하지도 않았다.
배교자, 글레리아 벨 아르미아스가 눈을 떴다.
【일어나라.】
그녀가 외쳤다.
【눈을 떠라, 잊힌 것들아.】
지난 수백 년의 세월 동안 알케이아에 축적된 신성이 그녀의 목소리에 반응했다. 쏟아지던 빗방울이 모조리 멈췄다. 허공에 붙들린 검은 빗방울 사이로 글레리아의 눈동자가 녹빛으로 번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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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가장 찬란했던 시기로 회귀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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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술, 회생(回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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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향해 검은 역십자가가 솟구쳤다.
역십자가를 따라 빗방울이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더는 빗방울은 아래를 향해 떨어지지 않는다. 섭리가 뒤집히기라도 한 듯, 땅에 고였던 구정물들마저 십자가를 따라 하늘로 치솟기 시작한다.
검은 빗방울은 하늘을 향해 치솟는다.
인간으로 만들어낸 구정물은 하늘을 향했다.
투두두두둑.
그와 대비되듯 잊힌 신들의 눈과 입에선 검은 피가 땅을 향해 떨어졌다. 신들의 피가 지면을 검붉게 적셨다. 잊힌 신들의 몸이 거세게 경련하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궁.
거대한 울림 속에서.
【■■■■, ■■■■. ■■■■■■■■■■■■.】
【■■. ■■■■. ■■■■. ■■■■■■.】
【■■. ■■■. ■■, ■■■■■.】
【■■. ■■■■. ■■■■. ■■■■■■. ■■■■■■.】
잊힌 신들이 눈을 떴다.
3.
하늘을 향해 치솟은 검은 역십자가.
가느다란 빛의 기둥은 기어코 하늘에 맞닿았다. 쩌억, 소리를 내며 열리기 시작하던 하늘이 십자가에 꿰뚫린 순간 균열은 더욱 거대해졌다. 하늘이 갈라지며 세상의 바깥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게, 무슨···.”
데스텔이 신음을 흘리며 무심코 뒷걸음질치지만, 한 걸음 뒤로 물러선 순간 데스텔은 깨닫고 말았다. 이 신화적인 풍경보다 자신이 먼저 보아야 할 것이 있음을.
“···피?”
데스텔이 바닥을 보았다.
고랑을 타고 흐르는 검은 핏물. 신전의 중심에 있는 탑에서 흘러내린 핏물이었다. 그 핏물이 흐르고 흘러 향하는 곳은 어디인가.
대공동의 중심에 위치한 거목이다.
그 거목에 피가 스며든 순간.
쿠웅.
거대한 기척이 대공동을 찍어 눌렀다.
한순간에 무거워진 공기 속에서 데스텔은 보았다. 대공동의 중심에 위치한 거목(巨木). 불에 타들어 간 거목의 뿌리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모습을.
직후.
저주를 품은 토지의 주인이 눈을 떴다.
* * *
탑에서 흘러내린 검은 핏물이, 대공동의 중심에 고여있는 썩은 물과 맞닿은 순간이다. 썩은 물이 출렁이기를 잠시, 대공동의 중심으로부터 격류(激流)가 밀려들었다. 한순간에 불어난 물이 대공동을 채우기 시작했다.
저주에 잠식된 호수가 범람했다.
* * *
마수의 왕을 본뜬 뼈. 그 뼈에 스며든 검은 핏물은 살이 되고 근육이 된다. 한순간에 육체를 얻은 짐승이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어둠 속에서 짐승의 눈동자가 시퍼렇게 빛났다.
스릉.
마수의 왕이 검을 뽑아들었다.
* * *
라니엘 반 트리아스는 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제 앞에 떠오르는 태양을 보았다. 핏물을 마신 검은 태양이 하늘에 걸렸다. 한순간에 공기가 달궈지고, 숨을 틀어막는 열기가 대공동을 가득 메웠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밀려드는 열기에 땅이 메말라 쩍, 쩌적 하고 갈라졌다.
저주를 비추는 태양이 떠올랐다.
떠오른 태양의 아래에서 라니엘은 주변을 둘러봤다. 배교자로 향하는 길은 옛 재앙에 의해 가로막혔다. 데스텔도, 켈르할름도, 드라카 쪽도 마찬가지다. 배교자에 도달하기 위해선 고대의 재앙을 토벌해야만 했다.
“···하여간.”
라니엘이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그녀는 앞만을 바라본 채 걸음을 옮겼다.
입가에 흐르던 웃음은 온데간데없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라니엘은 쿠웅, 하고 땅을 내려찍었다.
그녀가 바라보는 것은 신전의 중심.
그곳에는 잊힌 신들에 둘러싸인 한 여인이 있다. 여인의 아래 잊힌 신들은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조아렸다. 자신을 되살린 이에게, 단 하나의 신(神)이 될 이에게 충성을 맹세하듯이.
하늘을 연 여인이 라니엘을 바라보았다.
라니엘이 배교자를 바라봤다.
두 명의 시선이 교차하는 가운데, 배교자는 라니엘을 바라보며 웃었다. 부드러운 미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거리가 멀어 닿지 않아야 할 소리는 라니엘의 머리에 메아리치듯이 울렸다.
“이게 내가 추구한 구원이란다.”
이곳이 나의 종착역이란다.
“나의 구원이 틀렸음을 증명하고 싶다면.”
나의 길이 그릇됐음을 증명하고자 한다면.
“이곳으로 와. 나의 앞에 서.”
그리고 증명해.
“나의 모든 걸 부정해보렴.”
배교자, 글레리아 반 아르미아스가 웃었다.
“사랑스러운 후배야.”
그 웃음소리에, 자애롭기까지 한 미소에 라니엘은 비웃음으로 화답했다. 라니엘이 제 손가락을 뚝, 뚜둑하고 가볍게 풀었다. 군화의 끝으로 툭툭 두어 번 땅을 두들긴 라니엘이 짧게 숨을 뱉었다.
“그래.”
라니엘이 제 양팔을 쫙 펼쳤다.
“그렇게 원한다면, 보여줘야지.”
펄럭이는 옷자락.
흔들리는 소매.
목에 감긴 머플러가 바람에 나부꼈다.
구웅, 하고 일대를 찍어누르는 마나.
라니엘의 손가락에, 손등에, 팔에, 쇄골에, 온몸에 새겨진 회로가 모조리 불타올랐다. 백금색의 섬광이 찬란히 빛나며 라니엘의 눈동자에 빛의 고리가 나타났다. 빛의 고리를 끌며 라니엘은 걷는다.
또각.
하늘을 바라보지도 않은 채 라니엘은 배교자를 향해 걸었다. 걸음을 옮기며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소리가 울려 퍼지는 찰나의 순간 검은 태양의 앞에 그와 비슷한 크기의 태양이 하나 더 떠올랐다. 전조도 없이 떠오른 것은 백금색의 태양.
또각.
계속해서 걸음을 옮기며 라니엘은 손가락을 튕겼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야.”
라니엘이 미소 지었다.
웃음이 향하는 곳은 신전의 중심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여인. 배교자를 향해 라니엘은 조소한다.
“저거 하나로 충분하겠어?”
배교자를 바라보며 라니엘이 하늘을 가리켰다.
하늘에 떠있는 검은 태양은 하나뿐.
“난 일곱 갠데.”
검은 태양을 에워싼 일곱 개의 백금색 태양. 태양을 가리키며, 라니엘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덤벼, 좆같은년아.”
라니엘이 팔을 휘둘렀다.
일곱 개의 태양이 추락했다.
일곱 개의 태양이 추락한다.
백금색의 태양이 검은 태양을 집어삼킨 채 세차게 점멸했다. 연달아 번뜩이는 섬광과 거센 열기의 폭풍. 일곱 개의 태양이 부풀어 오른 순간이다.
번쩍.
일대를 후려치는 한 번의 섬광.
직후 들려오는 것은 고막을 찢어발기는 굉음이다.
————!
세찬 섬광과 함께 터져 나오는 굉음.
일곱 개의 태양이 모조리 폭발하며 만들어 낸 굉음은 어느 의성어로도 표현되지 못한다. 차라리 삐이이, 하는 이명에 가까운 소리.
첫 번째 충격이 일대를 휩쓸고, 뒤이어 폭발의 여파에 휘말려 튀어 오르는 돌무더기가 추락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쿵, 쿠웅!
몰아치는 열풍에 라니엘의 머리칼이 흔들렸다. 제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라니엘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일곱의 태양에 좀 먹힌 검은 태양이 그곳에 떠 있었다.
태양에는 구멍이 뚫려있다. 일부가 떨어져 나가고 남은 태양은 이제 완전한 구(球)의 형태를 이루지 못한다. 차라리 반월에 가까운 모습이다.
치이이익.
뚫린 구멍에선 피처럼 검은 화염이 바닥을 향해 쏟아졌다. 하늘에 솟아있던 태양이 기우뚱, 하고 기울어지며 땅을 향해 천천히 추락했다.
그러나, 그러기를 잠시.
우뚝, 하고 추락하던 태양이 제자리에 붙들린 듯 멈춰 섰다. 쏟아지던 화염이 역류했다. 처음보다는 낮은 고도에 걸린 태양이 화염을 마시며 팽창하기를 한순간.
키이이이이잉!
들끓는 열선이, 수백 가닥에 이르는 열선이 라니엘을 향해 쏘아졌다. 밀려드는 열선 다발을 바라보며 라니엘은 짧게 혀를 찼다.
···고대의 재앙, 저주를 비추는 해.
북부의 탑에서 보았던 기억을 라니엘은 곱씹었다. 기억 속의 카르디는 이렇게 말했다. 태양이 하늘에 떠있는 이상 승산은 없다고. 해를 떨어트려 땅에 처박아야만 완전히 죽일 수 있으리라고.
그리고 그들은 실제로 그리했다.
카르디와 벨리알이 태양을 떨어트렸고, 글레리아의 축복을 받은 가니칼트가 단칼에 태양을 반으로 갈랐다.
‘물론, 그때와 같은 위용은 없다.’
과거, 최초의 용사 일행이 상대해야 했던 재앙들과 달리··· 되살아난 재앙은 이미 한차례 죽음을 맞이한 존재들이다. 잊힌 신들의 피로 되살렸다곤 하나 태양의 한복판에는 가니칼트가 남긴 흉터가 새겨져 있다.
태양의 핵을 반으로 가른 검흔(劍痕).
신들의 피와 신성력으로 메꾸고 있다곤 하나, 온전히 상처를 숨기지는 못하리라. 밀려드는 열선을 바라보며 라니엘이 발을 들어 올렸다. 그리곤, 쿠웅.
대격변(Cataclysm).
재구축(Rebuild).
군화와 맞닿은 땅이 뒤흔들렸다.
뒤흔들리며 지면이 융기했다. 일대의 지형이 뒤바뀌는 가운데, 밀려드는 열선은 흙과 돌바위로 이루어진 벽을 모조리 꿰뚫으며 라니엘에게 향했다.
열선은 결국 검은 태양의 일부다.
열선은 휘어지고, 꺾이며 라니엘을 추적한다. 자신을 따라오는 열선을 흘겨보며 라니엘은 솟아오른 땅을 밟으며 달리기 시작했다.
가속(加速).
수백 가닥의 열선의 추적.
밀려드는 열기와 열풍. 온몸의 수분이 증발할 것만 같은 고열 속에서 라니엘은 눈을 부릅뜨고 달렸다. 챠르륵, 하고 그녀의 손에 감긴 사슬이 출렁였다.
솟아오른 땅을 타고 달리면서.
라니엘은 제 앞에 떠오른 검은 태양을, 그 검은 태양의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하늘을 열고 있는 배교자가 있다. 하늘에 맞닿은 역십자가와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은 수많은 고대신.
그것이야말로 라니엘이 상대해야 할 적이었다.
‘···역천(逆天), 그리고 개천(開天).’
지금 배교자가 무엇을 행하고자 하는지 라니엘은 알고 있다. 하늘에 뚫린 구멍은 계속해서 크기를 키워간다. 저 구멍이 완전히 ‘열렸을’ 때, 배교자의 소망은 현실이 되리라.
그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그렇기에 라니엘은 선택을 내렸다.
탁.
라니엘이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솟아오른 땅이 녹아내려 흘러내리는 곳. 태양의 바로 앞에 도달한 라니엘이 태양을 향해 제 팔을 뻗었다. 그녀가 콱, 하고 손을 움켜쥔 순간이다.
챠르르르르르르르르르륵!
뻗어나온 사슬 다발이 태양을 옭아맸다.
백금색의 사슬은 태양의 열기에도 녹아내리지 않는다. 태양을 옭아맨 사슬을 잡아당기며 라니엘이 태양을 향해 투신했다.
‘다소의 부상을 각오하더라도.’
온몸이 녹아내리면서도 라니엘은 태양의 핵에 도달했다. 검은 화염에 휩싸인 채 라니엘은 태양의 핵에 새겨진 검흔(劍痕)에 손을 밀어 넣었다.
‘단기 결전으로 간다.’
내가 상대해야 할 건 되살아난 재앙이 아닌, 신이 되고자 하는 여인이다. 아직 알케이아 섬멸전을 끝맺지 못했음을 라니엘은 알고 있었다. 섬멸전을 끝내야만 배교자 토벌전에 들어설 수 있으리라.
여전히, 속도전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핵에 새겨진 검흔에 손을 맞단 채.
라니엘은 주문을 발현했다.
2.
이름 잃은 신들이 고개를 조아렸다.
모든 권능도, 지성도, 이성도 잃어버린 그들은 그저 힘의 덩어리일 뿐이다. 추락한 신성들에게서 글레리아는 핏물을 짜냈다.
툭, 투두둑.
모든 것을 잃었다 한들, 그들은 여전히 신이었던 존재들이다. 그들의 피는 곧 최상의 성유물이요, 지난 수백 년의 세월 동안 알케이아에 축적해둔 신성력은 마르지 않는 샘물이다.
그 모든 것을 바쳐 글레리아는 하늘을 열었다.
서서히 쪼개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글레리아는 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더는 광소하지 않았다. 그녀의 입가에 맺힌 웃음은 환희에 가까웠다. 그토록 소망했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으므로.
거짓된 신을 끌어내리고, 세상의 모든 생명을 가장 순수한 상태로 배교자는 되돌리리라.
열린 하늘의 아래에선 살아오며 지었던 죄도, 업보도, 선행도, 악행도 모두 무의미하리라. 그런 그을음과 핏물은 벗겨지고 새하얀 영혼만이 남게 될 테니.
‘그렇게 된다면.’
모든 것이 순수해진다면.
‘다시 만날 수 있을 테니까.’
글레리아가 쓰게 웃었다.
‘더럽혀지지 않은 채로, 당신의 앞에 설 수 있게 될 테니까. 모두가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돌아갈 테니까.’
그것이 글레리아가 추구하는 구원이었다.
모두가 그릇된 신이 정한 규율에서 벗어나, 가장 순수한 상태로 돌아가는 것. 그리하여 자유로워지는 것.
오직, 그것만이 구원으로 향하는···.
“······.”
···성녀, 글레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배교자, 글레리아 벨 아르미아스는 심장이 아려옴을 느꼈다. 심장에 새겨진 흉터. 어느 용사가 새기고 간 흉터가 욱신거렸다.
“이미 늦었어.”
배교자, 글레리아는 웃음을 흘렸다.
돌아가기엔 너무 먼 길을 걸어왔다. 자신은 이미 미쳐버린 광인이었으며, 신을 배반한 배교자였다. 돌이킬 수 없는 죄악을 범한 죄인이었다.
용서 받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용서받아서도 안된다.
배교자는 앞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걷는 길을 내려다보았다. 검게 물든 길. 시체로 쌓아올린 길. 그 길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그녀는 알고 있다. 종착지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파멸뿐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배교자는 파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자신에게 남은 길은 이것뿐이었으니까. 그렇게 걸음을 옮기며 배교자는 뒤를 돌아봤다. 보이는 것은 망가지고 뒤틀린, 흉하기 짝이 없는 자신이 걸어온 길이다.
하지만, 조금 더 뒤로 시선을 옮기면···.
그곳에는 갈림길이 놓여있다.
자신이 망가지기 전에 걸었던 길이 있다. 배교자가 아닌, 성녀로서, 용사의 일행으로서 걸었던··· 찬란히 빛나는 길이 놓여있다.
그 길에 누군가 서 있었다.
배교자가 눈을 감았다 떴다. 길이 아닌 현실을 보았다. 현실에서도 배교자는 뒤를 돌아보고 있었고, 그 시선이 향한 곳은 검은 태양이 떠오른 곳이었다.
번쩍, 하는 섬광.
일곱 개의 태양이 폭발하며 세상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태양은 여전히 떠 있었지만, 그 고도는 이미 충분히 낮아진 뒤였다. 직후 땅이 뒤흔들리며 태양을 향한 길이 만들어졌다.
그 길을 타고 누군가 달렸다.
찬란한 빛을 끌며, 잿가루를 끌며 달리는 마법사가 있었다. 잿빛의 머리칼을 나부끼며 마법사는 검은 태양을 향해 투신했다.
그러기를 잠시.
번쩍, 하고 검은 태양의 내부서부터 무언가 부풀어 올랐다. 태양의 핵을 집어삼키며 팽창하는 것은 백금색의 태양. 찬란히 빛나는 태양이 검은 태양을 완전히 집어삼켰다.
화륵.
백금색의 태양을 비집으며 검은색 불길이 새어나오려고 하나, 태양은 불길을 끌며 아래로 추락했다. 해가 지평선 너머로 지듯이 태양은 땅에 처박혔고···.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귀가 먹을 듯한 굉음과 함께 폭발했다.
태양이 폭발하며 지평선이 백금색으로 물들었다. 밀려드는 열풍에 배교자의 머리칼이 흔들렸다. 뜨거운 열기. 백금색으로 반짝이는 지평선. 태양이 남긴 흔적을 바라보며 글레리아는 무심코 웃음을 흘렸다.
저 풍경을 글레리아는 알고 있다.
태양이 만들어내는 열기를 알고 있었다. 모를 리가 없다. 저 주문은, 다름 아닌 그 사람이 쓰던 것이었으니까.
“아하···.”
그래, 네가 있었구나.
“정말이지.”
그 사람과 닮은 네가, 있었구나.
“또···.”
그날 나를 붙잡아 세웠던.
언제나 나를 붙잡아 세워주던, 그 사람이. 그 사람과 닮은 네가··· 이번에도 나를 붙잡으려 하는구나.
“그래.”
배교자가 웃음을 흘리며 팔을 벌렸다.
“나를 막고자, 나를 붙잡고자 왔니?”
뚜벅, 하고 울려 퍼지는 걸음 소리.
잿가루를 끌며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인간.
“막으러 온 건 아니고.”
인간이 재앙의 물음에 답했다.
“쳐 죽이러 왔지.”
잿빛 마법사, 라니엘 반 트리아스.
녹아내려 눌어붙은 살점을 손가락으로 뜯어내고, 포션을 들이부으며 그녀가 배교자를 향해 걸어왔다. 온몸에 그을음이 가득하나 그녀의 푸른 눈동자만큼은 조금도 때 묻지 않았다.
탁.
잿빛 마법사가 배교자의 앞에 섰다.
“그리고.”
용사가 재앙의 앞에 섰다.
“증명하러 왔다.”
“무엇을?”
“당신들의 여정이 무의미하지 않았음을.”
후배가, 머나먼 선배의 앞에 섰다.
“용사, 가니칼트 반 갈라트릭. 용의 주술사, 벨리알 반 드라고닉. 대현자, 카르디 반 아르미엘.”
“······.”
“그리고, 당신.”
라니엘이 담담히 말했다.
“성녀, 글레리아 벨 아르미아스.”
일찍히 세상을 위해 제 모든 것을 바쳤던 여인을 바라보며, 라니엘이 입을 열었다.
“수백 년 전, 여정의 끝에서 당신들이 했던 선택. 당신들의 희생. 그 모든 게 무의미하지 않았음을 증명하고자 왔다.”
그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들려는, 당신을 막아서기 위해 나는 이곳에 섰다.
“배교자.”
라니엘이 배교자를 가리켰다.
“계약이 가리키는 후인(後人)을 맞이하라.”
계약을 이어받은 이. 계약의 후인. 그 말을 들은 순간 배교자의 시선이 한순간이나마 흔들렸다.
『다음으로, 다시 다음으로.』
그리 기도하며 바랐던 존재.
자신들의 뜻을 알아주고, 유지를 이어받아 자신들이 닿지 못했던 곳으로 향할 후인(後人). 재앙으로 변한 자신들을 모조리 꺾고 결말에 도달할 영웅.
“역시, 너였구나.”
글레리아가 웃었다.
“그래, 증명해보렴.”
그녀가 손짓했다.
이름 잃은 고대의 신들이 라니엘을 향해 손을 뻗는다. 파도가 되어 라니엘을 덮쳤다. 밀려드는 잊힌 신들을 향해 라니엘은 걸음을 옮겼다.
언제나처럼, 그저 증명하기 위해서.
3.
사방으로 뻗쳐있던 뿌리가, 땅에 파묻혀있던 뿌리가 흙더미와 함께 솟구쳤다. 솟구친 거대한 뿌리는 채찍처럼 지면을 휩쓸고, 후려치기를 반복했다.
쿵, 쿠웅.
땅이 뒤흔들리고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피어오르는 흙먼지 너머로 보이는 것은, 뿌리의 주인이자 이 대공동을 가득 메운 거대한 존재감의 주인이다. 흙먼지가 서서히 걷히며 그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주를 품은 땅의 주인.
거목(巨木), 아바돈.
고개를 들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거목은, 꼭 엘프들의 성지인 세계수를 보는 것만 같다. 그러나 저 거목은 세계수처럼 생명체를 품기 위한 것이 아닌, 에워싸 가둬 죽이기 위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뿌리에 휘감긴 것은 날카로운 가시덩굴.
땅의 생명을 빨아들이고 착취하기 위한 뿌리.
그 뿌리의 중심에 위치한 나무 기둥은, 마치 아가리를 쩌억 벌린 마수와도 같은 형태를 띠고 있다.
‘저게 대체 무슨···.’
어디서부터 잡아야 할지,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는다. 그 압도적인 존재감 앞에 데스텔의 몸이 굳은 순간이다.
카가가가가가가각!
땅을 뒤집어엎으며, 일대를 휩쓰는 뿌리가 데스텔을 향해 밀려들고 있었다. 몸이 굳은 나머지 데스텔의 회피는 늦어졌고, 그대로 뿌리에 휩쓸리려는 순간이다.
탁, 하고 누군가 데스텔의 앞으로 나섰다.
폭풍을 두른 채 벨노아가 밀려드는 뿌리를 향해 팔을 휘둘렀다. 뿌리와 폭풍이 충돌한 순간 밀려나는 것은 뿌리다. 뿌리를 밀어낸 벨노아가 뒤를 돌아봤다.
“데스텔 님.”
데스텔은 벨노아를 보았다.
벨노아를 보고있자니 옆에서 또각, 하는 발걸음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바라보면, 자신의 옆을 지나친 클로에가 앞을 향해 걷고 있었다. 클로에를 따라 데스텔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클로에는 벨노아의 곁에 섰다.
클로에가 움켜쥔 지팡이가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클로에와 벨노아가, 자신보다 어린 후배들이 자신을 바라봤다. 데스텔과 시선을 마주한 채 둘은 말했다.
“지시를.”
저것을 잡겠노라고.
저 거대한 괴물을, 재앙을 상대하겠다고 저들은 말하고 있었다.
수만 년 전, 태초라 불리던 시대에 고룡의 마법사는 하늘을 열었다. 개천(開天)이라는 금기를 범한 그는 그릇된 신들을 모조리 땅 아래로 끌어내렸고, 그들을 만신전의 깊은 곳에 파묻었다.
수많은 신앙이 사라졌다.
수많은 신이 이름을 빼앗기고 잊혀졌다.
그리하여 만신들이 묻힌 알케이아는 더는 신을 모시기 위한 만신전이 아니요, 그릇된 신들을 파묻은 만마전이 되었다. 그로부터 수만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만마전은 다시 한 번 만신전이 된다.
구우우웅.
공기가 떨렸다. 공간이 삐걱였다. 되살아난 신들의 거대한 존재감이 일대를 찍어 눌렀다.
“······.”
라니엘은 말없이 앞을 보았다.
한때 신(神)이라 불리던 존재들이 그녀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거신, 땅을 기어 다니는 낮은 신, 거대한 기둥을 휘두르는 신······.
수많고 수많은 신들이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들이 땅을 내려찍을 때마다 쿵, 쿠웅 하고 땅이 울렸다. 하늘이 울렸다. 잊히고 이름을 빼앗겨 더는 신이 아니게 된 존재들이라곤 하나, 저들 모두가 한때는 별과 같은 위치에 걸려있던 존재들이다.
영락했다 한들, 여전히 초월적인 존재들.
거대한 존재들에 비해 땅에 발을 디디고 선 라니엘의 모습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잊힌 신을 상대하는 건 한낱 인간이다. 그러나···.
【■■■■, ■■■■. ■■■■■■■■■■■■.】
【■■. ■■■■. ■■■■. ■■■■■■.】
【■■. ■■■. ■■, ■■■■■.】
이름 잃은 신들은 결코 방심하지 않는다.
이성을 잃고, 자아를 빼앗기고, 긍지마저 잃어 모든 것을 잊어버린 그들에게도 단 한 가지, 잊지 못하는 것이 존재한다. 수만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 것.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그것은 수만 년 전 자신들의 앞에 섰던 한낱 인간의 모습이다.
「너희 모두를 끌어내리고.」
신들에 비하면 초라한 한낱 인간.
「짓밟아서, 뭉개뜨려서, 이 땅의 가장 낮은 곳에 파묻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그녀에게 바칠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일 테니.」
그리 말하는 인간을 신들은 비웃었다.
모든 신이 그 인간을 조롱했다.
한낱 인간이 하늘 위의 초월적인 존재들에게 도전하겠다고? 가능할 리가 없었다. 가장 호전적이었던 전쟁의 신이 인간을 짓밟고자 땅에 내려왔지만···.
「나의 이름은 요르문. 요르문 반 드라고닉.」
하늘에서 내려온 전쟁의 신은 찢어져 죽었다.
쏟아지는 신의 피를 맞으며 인간이 웃었다.
「너희 모두를 죽일 인간의 이름이다.」
요르문 반 드라고닉.
그 이름을 신들은 결코 잊지 못한다. 그날, 그 순간, 그 자리에서 모든 신이 죽음을 맞이했다. 한 명의 인간에게 공포를 느껴야만 했다.
【■■. ■■■■!!】
이번에는 그리되지 않겠다는 듯, 이름 잃은 신들은 인간을 향해 달려들었다. 쿵, 쿠웅 소리를 내며 그들의 발자국이 땅에 깊게 찍혔다. 가장 먼저 인간에게 도달한 거신이 발을 내려찍었다.
쿠우우웅!
거대한 탑과 같은 발이 인간을 짓밟은 순간이다. 거신의 발이, 발목이, 다리가 크게 경련했다. 그리곤 투확. 거신의 다리가 폭발했다. 사방으로 신의 핏물과 살점이 튀어 오르고 다리 잃은 신이 비명을 지르며 기울어졌다.
쿵, 쿠웅.
다리 잃은 신이 주저앉고, 흙먼지가 하늘까지 피어올랐다. 피어오르는 흙먼지 사이로 인간이 걸어나왔다.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인간이 웃음을 흘렸다.
“노망난 도마뱀이 신을 다 떨어트렸다기에, 그게 어떻게 가능하나 싶었는데···.”
그녀의 눈동자가 시퍼렇게 빛났다.
“꼬라지 보니 알만하네.”
챠륵, 챠르륵.
라니엘의 등 뒤로 사슬이 늘어졌다.
탁.
이제는 신을 향해 라니엘이 달려들었다.
신의 핏물을 뒤집어쓴 채 달려드는 인간을 마주한 신들의 머릿속에는 같은 풍경이 떠오른다. 자신들을 찢어 죽이던 인간의 모습.
【————————!】
인간, 인간, 한낱 인간.
가증스러운 인도자.
다시 나타난 천적의 존재에, 공포에 질린 신들이 괴성을 내지르며 인간을 향해 달려 들었다.
* * *
솟구친 검은 역십자가의 앞.
글레리아는 십자가를 등진 채 피어오르는 흙먼지를 보았다.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신들의 비명이 쉴 새 없이 울려 퍼졌다. 솟아오른 흙먼지가 폭발의 여파에 휘말려 한순간에 걷히고 다시 피어오기를 반복했다.
“아하.”
그 모습을 보며 글레리아는 웃었다.
기어코 거신의 머리를 뽑아낸 라니엘이, 거신의 머리를 배교자를 향해 집어 던졌다. 날아오던 거신의 머리는 배교자에게 닿지 못하고 신들에게 붙잡혀 뭉개졌다. 후두둑, 하고 쏟아지는 핏물.
상상 이상인걸, 하고 배교자는 중얼거렸다.
계약의 후인, 라니엘 반 트리아스.
근 몇 년 사이에 그녀는 신위에 도전할 만큼의 강함을 손에 넣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몇 번이고 살아남은 저 마법사는 과거의 자신들에 비견될만했다.
‘정말이지, 닮았어.’
대마법사, 카르디 반 아르미엘.
고룡의 눈동자를 뽑아내며 제 실력을 증명한 대현자. 그런 카르디의 전성기 시절을 보는 것만 같았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하지만 말야, 후배야.”
글레리아가 미소 지었다.
“특별한 건 너 혼자뿐이지 않니.”
처음부터 글레리아는 ‘라니엘’이란 존재를 경계했다. 그녀의 강함이 예상을 벗어났다곤 하나, 여전히 라니엘은 혼자였다. 글레리아는 자신이 되살린 재앙들이 있는 쪽을 흘겨보았다.
신의 핏물을 마셔 되살아난 재앙들.
그 재앙들의 앞에 인간들은 고전하고 있다. 재앙을 넘어서지 못한 채 피 흘리고, 상처 입고, 쓰러진다. 그 모습을 보며 글레리아는 조소했다.
“너 혼자서는 이기지 못해.”
잊힌 신들은 몇 번이고 되살아나리라.
끝없이 살아나는 신들을 뚫고 라니엘이 이곳까지 도달했을 때는, 모든 것이 끝나 있으리라.
“네가 졌어, 아이야.”
배교자가 쓰게 웃었다.
2.
검은 호수가 출렁였다.
범람하는 호수가 대공동을 가득 메운 지금, 켈르할름과 레스티는 사역마에 매달린 채 공중에서 맴돌고 있었다. 저 호수에 닿아선 안 된다고 본능적으로 느낀 까닭이다.
“분열(Split).”
그리고, 그 선택은 옳았다.
켈르할름을 중심으로 떠오른 수십의 회로가 각양각색의 주문을 토해냈다. 분열된 주문이 호수에 명중한 순간, 거센 폭발음 같은 건 들려오지 않았다.
파사삭.
주문이 호수에 닿은 순간 바스러졌다. 켈르할름이 눈살을 찌푸렸다. 마나 자체가 분해된 것이다. 대공동을 가득 채운 구정물은, 닿는 모든 것을 분해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가?’
그 답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호수는 켈르할름이 답을 떠올릴 시간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호수가 크게 출렁이기를 한순간, 호수가 범람하기 시작했다.
“···와요!”
레스티가 소리를 지르며 사역마와 연결된 줄을 잡아당겼다. 사역마가 가속하며 자리를 이탈했고, 좀 전까지 두 사람이 있던 자리를 물줄기가 꿰뚫었다.
치이이이이이익!
물줄기가 벽에 맞닿는 순간, 퍼석. 소리를 내며 벽이 바스러졌다. 레스티는 이를 악문 채 호수를 내려봤다. 저 호수와 그녀는 상성이 좋지 않았다.
‘···어지간한 사역마를 풀어봐야.’
호수에 녹아 사라질 뿐이다.
그렇다면, 걸작을 풀어야 할 텐데··· 걸작을 이자리에 풀어놓는다 하더라도 저 호수를 ‘어떻게’ 치워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물며 그것들은 알케이아 섬멸전이 아닌 배교자 토벌전에 사용돼야 할 것들이다.
출렁.
그리 고민하는 사이에도 호수는 움직인다. 크게 출렁인 호수의 중심이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회오리치며 주변의 물을 빨아들인 호수의 중심에서 물기둥이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천장이 사라진 하늘을 향해 솟구친 물기둥.
그것이 하늘에 맞닿은 순간이다. 투둑, 하고 물방울이 떨어졌다. 투두두둑, 하고 빗방울이 거세졌다. 이윽과 쏴아아아아, 소리를 내며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치이이이이이이익!
소나기를 맞은 사역마의 날개가 바스러져 사라졌다. 마치 수십 년의 시간이 한 번에 흐르기라도 한 듯, 앙상한 뼈로 변한 사역마가 바닥을 향해 추락했다.
탁.
보호 결계를 두른 채 레스티가 사역마에서 뛰어내렸다. 새로운 사역마를 소환해 옮겨타나, 그 사역마 또한 오래가진 못한다. 레스티를 둘러싼 보호막도 빗방울이 닿을 때마다 한 뭉텅이 씩 깎여나가고 있었다.
“소환(Summon).”
이계와의 문이 열리고, 무더기로 쏟아져 나온 사역마가 레스티와 켈르할름을 감싸지만··· 그 또한 오래가진 못하리라. 대책을 세워야만 했다.
“켈르할름 님, 방법이···.”
레스티가 무언갈 말하려는 순간이다.
켈르할름이 레스티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그리곤, 대공동의 벽을 향해 집어 던졌다.
“···읏!”
그녀가 벽에 부딪힌 순간 켈르할름이 딱, 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벽에서 토벽이 튀어나오며 레스티를 감쌌다. 갑자기 왜 이러냐고 그녀가 소리치려는 순간이다. 그녀는 사역마들에 둘러싸인 켈르할름과 시선을 마주했다.
켈르할름이 쓰게 웃고 있었다.
직후, 먹구름이 낀 하늘에서 호수와 같은 색의 검은 벼락이 떨어졌다. 떨어진 번개가 사역마를 모조리 꿰뚫고 켈르할름을 집어삼켰다.
콰릉, 하고 뒤따르는 소리.
세상이 새까맣게 물들었다.
* * *
“···마수의 왕.”
초원에서 몸을 일으키는 짐승을 라크는 노려봤다. 저건 마수의 왕이다. 그러나, 라크가 마주했던 마수의 왕과는 다른 존재. 그 존재가 검을 뽑아들었다.
스릉, 하고 뽑혀나오는 검.
검을 쥔 손가락에선 구정물이 뚝뚝 떨어졌다.
마수의 왕의 육체를 이루는 것은 신의 핏물이다. 저것은 마수의 왕을 흉내 낸 가짜에 불과하나, 동시에 마수의 왕의 기억을 지닌 존재다.
‘하지만···.’
그 기척이 강하지는 않다.
라크가 마주했던 마수의 왕, 바르타처럼 긍지를 지닌 존재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 존재감 또한 흐릿하다. 그저 마수의 왕을 모방한 가짜에 불과한 것인가?
꾸욱.
라크가 검을 움켜쥔 채 마수의 왕을 겨누었다. 미래시를 통해 본 풍경에도 흔들림은 없다. 라크가 땅을 박차고 마수의 왕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마수의 왕이 고개를 들었다. 싯푸르게 빛나는 눈동자가 라크를 마주한 순간이다. 라크가 보고있던 미래가 산산이 조각났다.
——————!
마수의 왕이 아가리를 벌리고 소리를 질렀다. 기이한 울음소리. 그것은 스스로를 ‘인간’이라 여기는 바르타는 결코 내뱉지 않는 짐승의 울음이다.
짐승의 울음.
마수의 왕이 내지르는 괴성.
그것은 무리의 주인이자, 온갖 종족의 정점에 오른 왕(王)의 울부짖음이다. 그 부름에 땅이 뒤흔들렸다. 초원에 흐르는 검은 핏물이, 하늘로 솟구치던 검은 구정물이 생명을 토해냈다.
쿵, 쿠웅, 쿵!
바닥으로 추락하고, 땅의 속에서 일어선 것은 배교자가 지닌 마수들. 그녀가 ‘검사 바르타’가 아닌, 마수의 왕을 위해 안배해둔 마수의 군세.
왕의 부름에 마수들이 답한다.
붉게 번들거리는 눈동자와 함께 마수의 군세가 초원을 가득 메웠다. 지평선의 너머까지 이어진 짐승들. 짐승들의 중심에 선 마수의 왕이 칼끝으로 라크를 가리켰다. 그 순간, 짐승들은 하나가 되어 라크를 향해 달려들었다.
왕의 명령에 마수들은 충성한다.
바르타는 스스로가 검사로 남고자 했을 뿐, 그는 모든 마수의 정점에 선 존재다. 마수들이 왕으로 모시는 존재다. 손짓 한 번으로 수천, 수만의 마수를 부리는 존재.
마수의 왕, 짐승의 주인.
그의 명령에 마수들은 충성한다.
밀려드는 군세 앞에 라크의 시선이 흔들렸다.
* * *
···잡겠다고? 저걸?
데스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데스텔의 입술이 벌어졌다 붙기를 반복했다. 데스텔은 머릿속에서 저 거대한 괴물을 뚫는 모습을 상상해보려 했으나, 도무지 떠오르지가 않았다.
“우, 선···.”
그럼에도 데스텔은 당장 해야 할 일을 명령했다. 시간을 끌고, 버티며 약점을 찾는다. 그리 명령을 내린 데스텔이 곧장 무장을 변경했다.
모방, 불멸(不滅)의 트리탄.
바로 이전 세대의 용사였던 불멸, 트리탄.
그의 무구는 대방패요, 그는 ‘수호’를 상징하는 용사이기도 했다. 데스텔은 제 손에 쥐어진 거대한 대방패를 땅에 내려찍었다.
구웅.
종소리와 함께 데스텔을 중심으로 보호 결계가 완성됐다. 거목의 뿌리가 결계를 후려칠 때마다 쿵, 쿠웅 소리를 내며 결계가 흔들렸다.
탁.
그리고, 결계의 바깥으로 벨노아가 걸음을 옮겼다. 클로에는 곧장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둘의 모습을 바라보며 데스텔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저들의 행동에는 망설임이 없다.
저것을 잡고 앞으로 나아갈 생각만을, 라니엘을 지원할 생각만을 하고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건 넘고 가야 할 장애물에 불과했다. 결계의 바깥으로 나가 뿌리를 향해 질주하는 벨노아를 보며 데스텔은 표정을 구겼다. 고개를 숙였다.
그저 방패를 더 강하게 움켜쥘 뿐.
캉, 카앙 소리를 내며 뿌리가 결계에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데스텔이 눈살을 찌푸렸다. 고개를 숙인 채 땅을 보고 있었기에 발견할 수 있던 전조현상. 데스텔이 눈을 부릅떴다.
“클로에!”
데스텔이 클로에를 밀쳤다.
그 순간, 결계의 정면이 아닌 땅 아래서 뿌리가 솟구쳤다. 수십 줄기의 뿌리가 채찍처럼 결계의 내부를 휩쓸었다. 꿰뚫었다.
그리고, 투확.
핏물이 길게 튀었다.
3.
“너 혼자서는, 이기지 못···.”
“내가 왜 혼자야?”
신들의 피를 뒤집어쓴 라니엘이 외쳤다.
“너, 생각을 잘못하고 있나 본데.”
라니엘이 웃음을 흘렸다.
“내가 걱정할 것 같아? 저 애들을?”
그녀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네 방향으로 나뉜 길. 길목을 틀어막고 있는 재앙들. 그 재앙들과 맞서고 있을 이들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라니엘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내가 왜?”
쿵, 하고 그녀가 땅을 내려찍었다.
“하나도 걱정 안 해.”
그녀가 단언했다.
“그만큼 약한 놈들이었으면, 애초에 여기까지 데리고 오지도 않았어.”
타인의 강함을 판단하는 데 있어선, 그 누구보다도 정확한 안목을 지닌 라니엘이다. 그런 그녀가 단언했다. 이 정도의 재앙은 충분히 뚫을 수 있으리라고.
동료간에 필요한 것은 의심이 아니다.
그저, 믿어 확신하는 것.
라니엘은 확신했다. 저들이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뚫고 여기까지 오리라고.
* * *
검은 번개가 내려치고 세상이 검게 물들기를 잠시, 타들어 간 채 떨어지는 사역마들 사이로 켈르할름이 눈을 떴다. 번개에 맞아 몸이 타들어 가면서도 켈르할름의 표정에는 미동도 없다.
“이런 구조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