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485
과거에 그녀와 나눴던 약속이다.”
「모든 일을 끝마치고 돌아오도록 하지.」”
「네, 반드시···.」”
돌아온 것이다, 자신은.”
그날 찍지 못한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
“그쪽은 맡긴다, 후배.””
잿빛 마법사가 마나를 끌어 올렸다.”
잿빛 마법사가 돌아왔다.”
아르카디아의 심부, 모든 것이 끝나고 또 모든 것이 시작되었던 그 장소에 잿빛 마법사는 돌아왔다. 잿빛 마법사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그가 잃어버렸던 마나가 피어올랐다.”
자그마치 일천 년의 세월이다.”
이제는 대마법사로 불렸던 시절보다, 뒷골목의 노점상으로 살아왔던 시절이 더 길었다. 길었지만, 그는 단 한 순간도 과거를 잊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언제나 여왕의 신하였으며, 영웅의 동료였고, 답을 찾기 위해 먼 길을 걸어온 대현자였다.”
탁, 하고.”
카르디 반 아르미엘이 제단에 발을 디뎠다.”
사방에서 진동하는 악취가, 곪고 곪은 저주가 카르디를 반겼다. 길게 숨을 내뱉은 카르디가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가겠다.””
카르디가 말했다.”
라니엘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마나를 끌며 카르디가 제단의 깊은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길고도 길었던 일천 년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 여왕의 신하로서, 고대의 영웅으로서, 그리고 잿빛 마법사로서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서.”
최초의 잿빛은 걸음을 내디뎠다.”
「가겠다.」”
카르디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라니엘은 시선을 내려 사슬에 묶인 마왕을 내려다보았다. 꿈틀거리는 손아귀, 비명을 내지르는 죽어버린 것들의 머리, 그리고 진동하는 원한.”
그늘의 진체(眞體)를 앞에 두고 라니엘은 무심코 웃음을 흘렸다. 그 진체에 새겨진 검흔을 발견한 까닭이다. 그날, 카일 토벤이 새겨넣었을 일격의 흔적.”
가니칼트 반 갈라트릭은 완전한 신을 불완전한 존재로 격하시켰다. 카일 토벤은 신에게서 불멸성을 빼앗았다. 그렇다면 자신 또한 그에 걸맞은 위업을 이루어야 하리라.”
탁.”
라니엘이 사슬을 밟으며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걸음을 반복할 때마다 라니엘은 조금씩 빨라졌다. 이젠 아예 사슬을 밟고 달리기 시작한 그녀가 허공을 움켜쥐었다.”
챠르르르르르르르르르륵!”
라니엘이 제 오른손에 감긴 사슬을 잡아당겼다.”
그녀의 오른손에 감긴 한줄기의 사슬은 모든 사슬의 시작점이다. 물결에서 솟구쳤던, 허공에서 치솟던··· 그 시작점은 라니엘의 손에 묶여있는 것이다.”
그것을 잡아당긴 순간 사슬이 팽팽해졌다.”
백금색의 사슬은 마왕을 더욱 강하게 옥죄이고, 마왕의 살갗에 파고들기 시작했다. 팽팽해진 사슬을 밟고 라니엘이 크게 도약했다. 공중에 뜬 채 그녀가 몸을 비틀었다.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끼릭, 끼리릭···.”
시곗바늘이 돌아가는 듯한 소음과 함께 라니엘이 손바닥에 새겨놓은 회로가 회전했다. 회전하는 회로는 라니엘에게 있어선 그 무엇보다도 익숙한 회로다. 용사가 된 이후로는 쓸 일이 없었지만, 한때 이 회로에 기대어 삶을 연명했던 시절이 있었으니까.”
과거 자신의 심장에 새겼던 회로.”
제 영혼을 좀먹는 그늘을 억누르고, 그늘을 불태웠던 회로다. 이 회로가 있었기에 자신은 이곳까지 올 수 있었다. 그날 찾아냈던 답이 있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고······.”
「돌아와라, 켈르할름.」”
그늘을 삼킨 켈르할름을 구할 수 있었으며.”
「카일을 구하는 방법은 말야, 어쩌면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던 거야. 그날 네가, 그리고 내가 찾아냈던 답에서 한 걸음만 나아갔으면 됐으니까.」”
그늘의 그릇이 된 카일을 구할 수 있었고.”
「당돌한 후배님이야, 정말.」”
「과연, 처음부터 이걸 노렸었나.」”
고대의 영웅들이 재앙이 아닌 다만 인간으로서 끝을 맞이할 수 있게 만들었다. 결국 역뢰(逆雷)든 뭐든 간에 이 하나의 회로에서 시작된 거였으니까.”
라니엘 반 트리아스는 언제나 답을 찾아왔다.”
그녀는 최선의 결말로 향할 답을 언제나 자신의 손으로 쟁취해 왔다. 지금 이 순간도 마찬가지다. 그녀가 손에 움켜쥔 회로가 거세게 회전했다. 회전하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저주 또한 재로(Curse to Ashes).”
잿빛 화염이 일었다.”
화염이 사슬을 도화선 삼아 타오르기 시작했다. 수백, 수천, 수만 가닥의 사슬은 불길이 되어 마왕의 살갗을 불태웠다. 타들어 가는 사슬과 함께 마왕이 비명을 내질렀다. 요동치며 사슬을 끊어내기 시작했다.”
역시, 이걸론 부족하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다.”
잿빛 화염은 그늘을 불태우는 불길이나, 단순히 불길로는 화력이 부족함을 라니엘은 알고 있었다. 무얼, 그날 카일을 상대하며 깨달은 교훈이었다.”
그날 얻은 깨달음을 라니엘은 다만 흘러가도록 두지 않았다. 붙잡아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렇기에 만들어낸 것이 역뢰(逆雷)였으며, 그렇기에 만들어낸 것이 바로 이 하나의 주문이었다.”
화륵.”
타오르던 불길이 한순간 출렁였다.”
잿빛 화염이 다른 형태로 변질하기 시작했다. 화염에서 검붉은 번개로, 번개에서 다시 무언가로······.”
화염은 하염없이 다른 무언가로 변한다. ”
불길의 형태만을 고집했던 화염은, 제 주인의 삶이 그러하듯이 다른 형태 또한 답이 될 수 있음을 받아들인다. 그렇게 하염없이 불길은 변해가나, 결코 그 본질만큼은 잊지 않는다.”
그렇게 화염은 종착지에 도달한다.”
그늘에 잠식당했고, 그늘을 몸에 품었으나 기어코 극복해낸 그녀이기에 만들어낼 수 있는 주문. 라니엘 반 트리아스가 만들어낸 고유 주문이 빛을 발했다. 그것은 어찌 보면 그녀가 살아온 삶과도 같다.”
단 하나의 길(The one).”
최선을 다해, 최선을 쌓아 올려 만들어낸 길.”
최선의 결말만을 고집해온 망상가의 길.”
그러나, 망상을 현실에서 이루었기에 영웅의 길.”
결코 굽히지 않은 신념으로 이은 단 하나의 길.”
화륵.”
타오르는 화염이, 튀어 오르는 검붉은 번개가, 흩날리는 잿가루가, 그 모든 것을 품은 사슬이 하나로 겹쳐졌다. 그리 완성되는 것은 결말로 향하는 단 하나의 길이다. 라니엘의 눈앞에 완성된 길이 빛났다.”
그녀의 삶으로서 완성한 길.”
타오르는 길은 마왕의 중심을 향해 이어져 있다. 길을 따라 라니엘이 달렸다. 그녀가 지나친 길은 불길이 되어 라니엘의 손에 휘감겼다.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
————————!”
마왕이 괴성을 내지르며 라니엘을 향해 손을 뻗었다. 거대한 손아귀로 마왕은 제 중심으로 이어진 길을 바스러트리고자 하나··· 길은 결코 부러지지 않는다. 제 주인이 결코 굽히지 않았던 것처럼, 단 하나의 길은 무엇으로도 굽힐 수 없다.”
가속(加速).”
길을 타고 라니엘이 달렸다.”
수많고 수많은 손아귀가 라니엘을 막아서기 위해 밀려드나, 라니엘은 맨몸으로 그 모두를 뚫어냈다. 그녀가 지나간 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수백, 수천, 수만의 손아귀.”
그 어떤 장애물이 덮쳐오던 라니엘은 자신을 굽히지 않았다. 멈춰 서지 않았다. 도리어 앞을 향해 더욱 가속했다. 그것이 그녀가 살아가는 방식이었으므로. 그것이 라니엘의 삶이었으므로.”
그리고.”
달리는 것은 그녀뿐만이 아니다.”
이곳과는 멀리 떨어진 곳, 그러나 결국 그늘과 이어진 곳. 그곳에서 카르디 또한 달리고 있었다. 카르디의 잿빛 머리칼이 흩날렸다. 그가 걸친 대현자의 로브가 거세게 펄럭였다.”
카르디 반 아르미엘은, 대현자가 되어 달렸다.”
과거처럼. 오랜 옛날 제 동료들과 함께 마경을 질주했을 때처럼 온 힘을 다해 달렸다. 그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끌어올린 마나가 사방을 할퀴었다. 제단을 향해 달리는 자신을 제지하고자 뻗어나오는 구정물을 카르디는 모조리 불살랐다.”
잿빛 화염이 치솟았다.”
라니엘의 주문에서 깨달음을 얻은 주문이다. 라니엘의 것보다 더욱 짙은 잿빛의 화염이 구정물을 불태웠다. 태움으로써 카르디는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눈에는 하나의 길이 보이고 있었다.”
제 동료들과 함께 꿈꾸었던 길이다.”
그러나, 끝내 완주하지 못했던 길이다.”
대현자가 되어 달리는 지금 이 순간, 카르디는 오랜 과거를 떠올렸다. 제 동료들을 떠올리며 카르디는 웃었다. 달리고 있는 것은 혼자이나, 혼자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에.”
‘아아···.’”
카르디가 웃었다.”
그래, 마왕을 토벌하기 위해 결성된 이들이 있었다. 머나먼 과거에 그들이 있었다.”
그림자 용의 주술사, 벨리알 반 드라고닉.”
최초의 성녀, 글레리아 벨 아르미아스.”
용사, 가니칼트 반 갈라트릭.”
그리고 바로 자신.”
대현자, 카르디 반 아르미엘.”
그늘에 뒤덮인 대륙을 질주했던 영웅들은 모두 쓰러졌다. 그들은 결국 결말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서 카르디는 단언한다. 자신들의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내가.”
내가, 아직 달리고 있으니까.”
내가 저곳의 끝에 도달해 마왕의 심장을 불태운다면, 대륙의 끝에서 우리의 후인(後人)이 그늘의 근원을 박살 낸다면··· 우리의 여정은 성공한 것이라고.”
‘그렇지 않나, 글레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