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486
가니칼트. 벨리알.”
동료들의 이름을 곱씹으며 카르디는 웃었다. 불길을 뚫고 나오는 손아귀에 스쳐 피를 흘리지만 고통스럽진 않았다. 어느새 카르디는 길의 끝에 다가서고 있었다.”
저 끝에 심장이 있다.”
자신이 불태우지 못했던 그늘의 심장이, 그늘을 만들어낸 저주의 중심이 있다. 저것을 박살 낸다면 대륙의 끝에 있는 라니엘이 ‘그늘의 모체가 된 영혼’에 다가갈 수 있으리라.”
라니엘과 자신에 세운 계획을 곱씹으며 카르디는 제단에 놓인 심장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그가 일으켰던 화염들이 한순간 거세게 출렁였다. 일천 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이 주문만큼은 카르디는 잊지 않았다.”
그의 상징과도 같았던 주문.”
적색궁의 깊은 곳에 난데없이 태양이 떠올랐다.”
잿빛 화염을 머금은 태양이 벽에 들러붙은 저주들을 불살랐다. 복도에 가득한 원한을 남김없이 불태웠다. 그러나 여전히 화력은 모자라다.”
“가져가라, 전부.””
그렇기에 카르디는 바쳤다.”
자신이 돌려받았던 마나를, 다시 한 번 제 몸에서 모조리 뽑아냈다. 이것이 자신이 대현자로서 행하는 마지막 주문이리라. 다시는 마법을 쓸 수 없는 몸이 되어도 좋았다.”
화르르르르륵!”
일천 년의 세월을 견뎌온 엘프의 집념이 타올랐다. 태양은 더욱 거대해졌다. 곱절의 크기가 된 태양이 제단에 놓인 그늘의 심장을 집어삼켰다. 치이이이이익, 소리를 내며 심장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거세게 타오르는 태양이 크게 점멸했다.”
직후 세찬 섬광과 함께 막대한 양의 열기가 적색궁을 후려쳤다. 그리고 정확하게 같은 순간··· 라니엘 또한 길의 끝에 도달했다. 마왕의 중심에 도달한 라니엘이 움켜쥔 주먹을 휘둘렀다.”
두 명의 잿빛 마법사가 동시에 종착지에 도달했다.”
아르카디아의 깊은 곳에 잿빛 태양이 떠올랐다. 떠오른 태양은 적색궁을 모조리 집어삼키고, 아르카디아에 남은 마(魔)의 흔적을 모조리 불살랐다. 정화의 불길이 아르카디아를 집어삼켰다.”
대륙의 끝자락, 대평야에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하늘까지 치솟은 불길과 함께 폭발의 여파가 땅과 하늘을 뒤흔들었다. 폭풍이 휘몰아치고, 구정물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마왕의 진체가 불타올랐다. 폭발에 휘말린 그늘의 손아귀가, 죽어버린 것들의 머리가 모조리 떨어져 나갔다. 마왕을 이루는 모든 요소가 불에 타올라 잿더미가 됐다.”
투확.”
마왕의 진체에 거대한 구멍이 뚫렸다.”
그 구멍에 고인 것은 검디검은 물이다. 우물과도 같은 그곳에 보이는 것은··· 마왕의 모체가 되는 타락한 영혼이었다. 영혼과 라니엘이 시선을 마주했다.”
시선을 마주한 순간 라니엘은 깨달았다.”
저것이 아르카디아의 마지막 여왕의 영혼이라고.”
“······!””
휘몰아치는 열기와 폭풍을 이를 악물고 견디고 있던 카일의 눈이 크게 뜨였다. 카일 또한 라니엘과 같은 것을 보았다. 구멍이 뚫린 마왕의 중심에 존재하는 새까만 영혼.”
저 영혼을 카일은 과거에 한 번, 마주한 적이 있었다.”
“라니엘!””
카일이 다급히 소리쳤다.”
“물러서라! 그건···!””
저 영혼은 자신이 마왕을 베었던 그날, 마왕의 잔해에서 튀어나왔던 것이다. 자신을 집어삼키고 자신의 귓가에 속삭였던 목소리의 주인. 저건 자신의 검으로도 벨 수 없었던, 그 무엇으로도 개입할 수 없었던 세상 바깥의 존재다.”
다급해진 카일이 라니엘을 향해 달려들려던 순간이다.”
카일의 목소리를 들었음에도 라니엘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여왕의 영혼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검디검은 영혼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콱.”
카일의 예상과 달리, 라니엘은 그 영혼을 움켜쥐었다. 그 무엇으로도 영향을 줄 수 없는 세상 바깥의 존재일 텐데 도대체 어떻게?”
···본래대로라면 라니엘 또한 저 영혼에 개입하진 못했으리라. 그저 영혼을 무시한 채 영혼이 고인 검은 물을 모조리 불태움으로써 마왕을 토벌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라니엘이 추구하는 결말이 아니다.”
‘내가 바라는 건, 부탁받은 건···.’”
마왕의 근원을 부정하는 것.”
저곳에 붙잡힌 여왕의 영혼에 안식을 주는 것.”
그것을 위해 아르카디아로 향한 카르디는 제단에 놓인 마왕의 심장을 불태웠다. 그로 하여금 저 영혼에 라니엘은 개입할 수 있게 됐다.”
“거 같이 좀 갑시다.””
피차간 할 말이 좀 많을 것 같은데.”
그리 중얼거리며 검은 영혼의 머리를 움켜쥔 채 라니엘은 우물 안으로 뛰어들었다. 첨벙, 하고 우물이 라니엘과 여왕의 영혼을 집어삼켰다.”
아르카디아에 태양이 떠올랐다.”
천 년의 세월 동안 태양이 뜨지 않았던 저주받은 땅에, 한 명의 마법사가 태양을 만들어낸 것이다. 잿빛 태양은 고대의 왕국을 좀먹은 어둠을 불살랐다. 거세게 몰아치는 불길이 일천 년의 저주를 태웠다.”
왕국이 화마(火魔)에 뒤덮였다.”
다만 불길이 태우는 것은 왕국이 아닌, 왕국을 좀먹은 어둠이었다. 어둠만을 태우는 잿빛 불길은 화마라기보단 차라리 성화(聖火)에 가까웠다. 태워서 정화한다는 교단의 옛 교리를 떠올리며 잿빛 마법사는 웃었다.”
타들어간다, 모든 것이.”
그날 남겨둔 미련도, 후회도, 회한도, 그 무엇도 가리지 않고 불길은 모조리 집어삼켰다. 타들어 가는 불길 속에서 마법사는 길게 숨을 내뱉었다.”
“···후우.””
잿빛 마법사, 카르디가 벽에 기대어 섰다.”
일천 년의 세월 만에 대마법사로 돌아온 것이 무색하게도, 지금 자신의 몸에는 한 방울의 마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 거대한 불길을 만들어내는 데 자신의 모든 마나를 털어냈으니까.”
‘앞으로 쓸 수 있는 마나까지 전부, 말이지.’”
그 모두를 남김없이 털어냈다.”
더는 마법사가 아니게 되어도 좋았으니까. 처음부터 그리 다짐하고 카르디는 이곳으로 돌아왔다. 그러니 떠나보낸 마나에 미련은 없었다.”
‘애초에···.’”
마나를 가지고 살아온 시간보다, 그렇지 않은 시간이 더 길어진 마당이다. 이제 와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카르디는 제 몸을 떠나가는 마나를 보았다. 자신의 영혼과 육체를 떠난 마나는 장작이 되었다.”
타닥, 타다다다닥.”
자신의 일천 년을 장작 삼아 불길은 더욱 거세졌다. 거세게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카르디는 무심코 웃음을 흘렸다. 흘러나온 웃음은 가벼웠다. 가벼운 웃음이 불길 사이로 흩어졌다.”
일천 년을 견뎌온 마법사는 홀가분함을 느꼈다.”
타들어가는 것들을 바라보며 카르디가 제 귓가를 두들겼다. 아마, 마왕의 근원으로 뛰어들었을 녀석에겐 닿지 않을 테지만··· 닿지 않아도 좋았다.”
“뒤는 맡기마, 라니엘.””
부탁한다, 라니엘.”
아르카디아의 태양을.”
그날 우리가 모셨던 이 땅의 주군을.”
침전한다. 아래로, 다시 아래로.”
마왕의 중심에 놓인 검은 호수에 뛰어든 라니엘은 제 몸이 가라앉음을 느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으로 라니엘은 침전했다. ”
어디까지 내려왔는지.”
그리고 또 얼마나 내려가야 하는지.”
바닥이란 게 있기는 한 것인지.”
그 어느 것도 알 수 없는 검은 호수 속에서 라니엘은 간신히 제 이성을 붙잡았다. 사방에서는 비명이 울려 퍼지고 있었으며, 사방에 가득한 어둠은 자신을 할퀴기 위해 손을 뻗어오고 있었다.”
마왕의 중심, 마왕의 근원.”
자신이 있는 곳을 다시 떠올리며 라니엘이 몸에서 불길을 피워냈다. 단 하나의 길(The one)은 여전히 건재하다. 불길을 끌며 라니엘이 아래로 추락했다. 그러다 문득, 라니엘은 제 오른팔을 보았다.”
■■, ■■■■■■. ■■■■.”
오른손으로 움켜쥐고 있는 여왕의 영혼.”
검게 물든 영혼이 기괴한 울음을 내뱉으며 라니엘의 팔을 할퀴고 있었다. 팔에 휘감은 불길 덕에 딱히 아프진 않지만, 몹시 거슬렸다.”
“쓰읍.””
라니엘이 혀를 찼다.”
카르디의 부탁도 있고 하여, 될 수 있으면 인도적인 방법을 선택하려 했으나···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리면 이쪽도 방법이 없다.”
때마침 끝이 없을 것만 같던 호수의 바닥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라니엘은 바닥을 향해 추락하며 여왕을 움켜쥔 팔을 뒤로 크게 젖혔다. 화륵, 손에서 불길이 조금 더 거세게 타올랐다.”
탁, 하고.”
발 끝이 바닥에 닿음과 동시에 울려 퍼진 경쾌한 소리는 이윽고 콰직, 하고 발을 땅에 깊게 박아넣는 소리로 뒤바뀌었다. 땅에 단단히 발을 고정한 채 라니엘이 들어 올린 팔을 지면을 향해 휘둘렀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여왕의 영혼을 움켜쥔 채, 라니엘이 오른손을 땅에 깊게 박아넣은 것이다. 굉음과 함께 땅이 깊게 파였다. 화염이 크게 너울 쳤다. 너울 치는 화염이 라니엘을 중심으로 원형을 그리며 퍼져 나갔다.”
화륵.”
불길은 그리 멀리까지 퍼져 나가지 않았다.”
이곳의 모든 것을 불사를 수 있음에도 제 주인이 아직 때가 아니라고 말한 까닭이다. 원을 그리는 화염은 라니엘을 중심으로 자그마한 공간을 만들어냈다.”
“슬슬.””
그늘의 근원에 만들어낸, 그녀만의 공간.”
“정신이 좀 드십니까?””
영혼의 머리를 움켜쥐었던 오른손을 가벼이 털어내며, 라니엘이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녀가 물러선 자리에선 잿빛 불길이 피어올랐다. 마치 모닥불과도 같은 형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