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61
〈 61화 〉 고대 리치, 스케발(1)
* * *
쩍, 쩌적!
레스티를 가둬두던 꿈에 금이 간다.
백금색의 마나가 해체된 회로를 집어삼킨다. 그렇게, 꿈은 무너지기 시작한다.
파삭!
이윽고 꿈이 완전히 박살 났다.
꿈에서 깨어난 레스티는 곧장 몸의 주도권을 빼앗아왔다. 미리 주문을 해체해뒀으므로, 그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읏···.”
가벼운 현기증이 인다.
레스티는 비틀거리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천천히 눈을 떴다. 꿈이 아닌 현실을 본다.
‘···대체 어디야?’
알 수 없었다.
모든 것이 회색빛으로 물든 풍경이다. 그곳에는 나무가 있다. 풀숲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이 가졌어야 할 색이 없었다.
끝없이 펼쳐진 무채색의 풍경은 삭막하기까지 하다. 그 풍경이 무엇인가, 레스티는 그 답을 찾기 위해 기억을 뒤적였다.
‘무채색.’
이런 풍경을 본 적은 없다.
그러나, 기록으로 접한 적은 있다.
‘회색밖에 없는 세계, 그러니까 중간 차원.’
레스티는 소환사(Summoner)다.
그리고, 사역마를 소환할 때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차원이 있다. 레스티는 그것을 입에 담았다.
“이계(??).”
레스티가 그것을 발음한 순간이었다.
“···꿈에 잠겨있는 것은 최소한의 배려였다.”
목소리가 들렸다.
레스티가 고개를 돌렸다.
“그대로 있었다면, 편한 길을 골라 주었을 텐데.”
그녀의 눈동자가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본다.
“어찌하여 깨어났느냐, 아이야.”
회색인 세상에서 홀로 검은 것이 있다.
그것은 그림자였다. 그림자의 끝자락이 레스티의 발끝과 이어져 있었다.
“꿈이 만족스럽지 못했나?”
그림자가 레스티에게 다가온다.
이계에서 홀로 색을 가진 그것은 불온하다. 본능적인 거부감이 든다.
“원하는 것을 말하거라. 처음부터 다시 걸어주도록 하마. 무얼, 이전에 말했다시피 나는···.”
“소환(Summon).”
레스티는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듣고 있을 이유도 없고, 가치도 없다. 짧게 읊조리며 레스티가 팔을 휘둘렀다.
콰직!
어디선가 튀어나온 늑대가 그림자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그림자의 목소리가 끊어진다.
“소환(Summon).”
계속해서 주문을 잇는다.
그녀가 손가락을 한번 튕길 때마다 어디선가 사역마가 나타난다. 그림자를 물어뜯는다.
까드득!
소환에는 머뭇거림이 없다.
잠깐의 여지조차 주지 않고 사역마들은 그림자를 물어뜯기 시작했다.
다중 캐스팅(MultiCasting).
“중첩 소환(NestingSummon).”
소환수의 물결은 멈추지 않는다.
레스티는 조금 더 빠르게 주문을 읊었다. 한쪽 손으론 회로를 그리고, 입으로는 주문을 발음하며, 다른 손으로는 회로에 마나를 불어넣는다.
레스티는 그 모든 걸 동시에 이었다.
사역마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 수가, 본래 레스티의 한계인 열을 넘겼음에도 사역마는 계속해서 소환됐다. 그 속도도 이전과는 비할 바가 못 된다.
이런 기행이 가능한 이유는 하나뿐이다.
지금, 이곳이 이계(??)인 까닭이다.
소환이란 주문은 이계를 거쳐 현실로 소환수를 불러내는 과정이다. 이계를 반드시 거쳐야 하는 주문의 특성상, 낭비되는 마나와 딜레이가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여긴 아니야.’
레스티가 서 있는 이곳은 이계다.
이계에 서 있는 이상, 그 과정이 통째로 생략된다. 마나 소모가 줄어들고, 딜레이가 사라진다.
달리 말해, 기량 이상의 것이 가능하다.
레스티의 눈이 그녀를 보조한다.
그녀가 사역해둔 백에 가까운 사역마가 이계를 가득 메운다.
까득, 까드드득!
콰직!
무언가 할퀴고, 물어뜯고,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다. 사역마들에게 파묻힌 그림자는 형상이 제대로 보이지조차 않는다.
“·····.”
그 시점에서, 레스티는 쌓아 올리던 주문을 멈췄다.
승리를 확신해서가 아니었다.
“···도대체, 뭐야?”
오히려 그 반대였다.
백에 가까운 소환수가 그림자를 물어뜯고 있지만, 그림자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선다.
끽, 끼기기긱.
그림자의 움직임을 따라 소환수들이 바닥에 질질 끌려다녔다. 그림자는 귀찮다는 듯 가볍게 손을 털었다.
위로 든 손을.
아래로 휙, 하고 휘둘렀을 뿐이다.
퍼석.
그게 끝이었다.
사역마가 터졌다. 뭉개졌다. 어느 것은 목이 뽑혔다. 그 모양은 제각각이지만, 그 모두가 레스티와 연결이 끊겼다.
“배교자에 비하면··· 아직 아쉽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구나. 재능이 발아하지 않은 지금부터 이 정도라면, 썩 나쁘지가 않겠어.”
그림자가 사역마들의 시체를 밟으며 레스티에게 다가왔다. 그가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그를 둘러싼 그림자가 허물어졌다.
“아이야.”
그림자가 레스티의 앞에 선다.
마지막 남은 허물마저 완전히 벗겨진다. 그림자로 감춰졌던 그 속을 레스티는 바라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앙상한 뼈마디다. 그것에겐 살이 없다. 피가 없다. 오롯이 뼈로만 이루어진 앙상한 것이 레스티를 바라본다.
“나는 의식이 끝나면 너와 계약을 주선할 것이다. 내가 직접 주선하마. 어쩌면, 그분께서 직접 너를 고를지도 모르겠지.”
사람의 것이라기엔 기이한 두개골이다.
그 두개골의 안쪽에서 검은 안광이 반질거린다. 시꺼먼 안광이 레스티의 눈동자를 마주 바라본다.
그것과 마주한 순간.
본능적인 공포가 레스티를 휘감는다.
레스티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아···.’
레스티는 이 망자가 무엇인지 깨닫는다.
그것을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수많은 역사서에서 이 망자를 다뤘으니까.
‘고대의 마학자.’
마법사들의 악몽.
산자를 증오하는 이.
죽음으로 진리에 맞닿은 자.
그리고.
과거, 왕국을 불사른 넷의 재앙 중 하나.
“···고대 리치, 스케발.”
“그런 이름으로 불리고 있지.”
스케발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앙상한 뼈마디가 레스티의 이마로 향했다.
“모든 것이 끝날 때까지, 조금 더 잠들어 있거라.”
툭.
그 뼈마디가 레스티의 이마에 닿는다.
스케발의 검은 마력이 레스티의 정신에 파고든다. 그것이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으려는 순간이다.
파직.
불똥이 튀어 올랐다.
스케발의 손가락이 튕겨 나갔다.
“···무엇을?”
고대 리치가 눈을 가늘게 뜬다.
레스티는 스케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내렸다. 시선이 향한 곳은 교복의 안주머니다. 그곳에 빛을 뿜는 무언가 담겨있다.
“어째서?”
고대 리치가 반문한다.
그는 빛에 다가오지 못한 채 제자리에 서 있다. 레스티는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툭.
손끝에 무언가 잡혔다.
레스티는 그것을 꺼냈다. 곱게 접힌 쪽지였다. 그 재질이 익숙하다. 얼마 전 썼던 회로 기록지이다.
‘···이게 왜?’
의문이 든다.
그러나, 기록지에 새겨진 회로를 보는 순간 의문은 사그라든다. 기록지의 한 면을 가득 메운 회로가 있다.
놀랍도록 정교한 회로.
보는 순간 아름답다는 생각이 드는 회로.
그 한없이 정교한 회로는··· 레스티가 기억하는 한, 한 사람 만의 것이었다.
‘···라니아 교수님?’
그 회로에 마나는 담겨있지 않다.
회로를 따라 흐르는 건 레스티의 마나다. 레스티는 한눈에 그 회로가 무엇인지 이해했다.
“당장 그걸···!”
고대 리치가 소리를 지른다.
그 울부짖음은 짐승의 것과 같다. 기이한 목소리가 고막을 뒤흔든다. 정신마저 뒤흔드는 고함 사이로, 레스티는 쪽지를 들어 올렸다.
“정말.”
그리곤,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웃음을 터뜨렸다.
“보고 계셨구나.”
레스티는 곧장 회로에 마나를 실었다.
백금색의 마나가 회로에 차오른다. 회로도가 빛을 내뿜는다. 그 빛이 레스티를 집어삼킨다.
“아아! 아아아아아!”
그 모습을 본 스케발의 안광이 분노로 흔들린다.
“별이여! 계약을 이행하라! 외부의 간섭으로, 계약의 흔들림은 곧 주도권의···!”
스케발이 별을 향해 묻는다.
그 물음에 대한 답이 돌아온다.
외부의 간섭이 아니다.
회로를 새긴 건 레스티가 아니다.
그러나, 회로에 마나를 담아 주문을 발동시키는 건 레스티다.
현상에 이상은 없다.
별은 그것에 이상이 없음을 단언한다.
회색빛의 세계가 바스라지기 시작한다. 이계에서 현실로 넘어가는 문이 열린다.
“잿빛!”
그것을 바라보며.
“가증스러운 잿빛!”
스케발은 자신의 두개골을 긁는다.
끼기긱, 날카로운 뼈마디가 두개골을 할퀴는 소리 사이로 스케발의 괴성이 메아리 쳤다.
“또다시 너인가! 또다시!”
파삭!
꿈도, 이계도 무너진다.
돌아오는 건 완전한 현실이다.
“아아아아아아!”
괴성을 내지르며 스케발은 손바닥을 맞부딪친다. 뼈마디를 꺾어 바닥에 박는다. 뼈마디에서 뻗쳐나온 마기가 결계를 이룬다.
그 결계가 숲을 가두기 직전.
먼 곳에 있는 누군가의 시선이 스케발을 꿰뚫는다.
“아.”
그녀가 말했다.
“찾았다.”
2.
“후우.”
칼트가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었다.
그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위치는 특정했습니다. 보이십니까?”
“어, 고맙다. 수고했어.”
칼트는 약속대로 10초가 채 안 돼서 그 위치를 특정했다. 나는 특정된 위치를 회로에 새겼다.
그러고 있자니, 문득 시선이 느껴진다.
“·····.”
칼트가 멀뚱멀뚱 날 쳐다보고 있었다
“···뭐하냐?”
“제가 할 일은 더 없습니까?”
더 할 일이라.
“너는 아래 내려가서 기사들이나 도와. 곧 마수들 나타날 테니까.”
“···혼자서 괜찮겠습니까?”
“너 데려가서 뭐 하게? 너, 마기 중독된 거 다 안 나았잖아. 저 결계만 넘어도 골골댈 텐데? 난 짐더미 메고 싸울 생각은 없다.”
지난 몇 년간 짐더미 둘을 데리고 싸웠다.
‘그 짓거리를 다시 하라고?’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내려가기나 해, 임마.”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뭐.”
칼트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무릎을 웅크렸다. 옥상에서 뛰어내릴 준비를 하는 듯 싶었다.
그러다 문득 할 말이라도 생각난걸까.
“라니엘님.”
뛰어내리기 직전, 칼트가 나를 돌아봤다.
“뭐. 불렀음 말을 해.”
“그냥, 뭐···몸 성히 돌아오십쇼. 일 끝나면 오랜만에 술이나 한잔합시다.”
피식, 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말했다.
“그래, 이따 보자.”
나는 뛰어내리는 칼트를 보며 소매를 걷어붙였다. 칼트는 제 역할을 다했다. 레스티도, 생각한 것 이상으로 잘해주었다.
“남은 건.”
내 역할이겠지.
나는 손목을 꺾으며 결계를 노려보았다.
결계는 계속해서 그 크기를 키워나간다. 숲을 덮었던 결계는 숲의 너머까지 범위를 확장한다.
끽, 끼기긱.
그 결계는 조금씩 아플리아 쪽으로 다가온다.
결계와의 거리를 계산하며 나는 입을 열었다.
“해방.”
팔뚝에 스톡해둔 회로가 차례로 타올랐다.
들어 올린 발을 옥상의 난간에 박아 넣는다. 쩍, 쩌적 소리를 내며 옥상의 타일에 금이 간다.
가속(Accel).
근력 향상(Muscular).
근력 강화(EnhanceStrength).
팔을 들어 올린다.
손가락을 차례로 접는다.
주문 가속(SpellBoost).
주문 강화(SpellEnhance).
삼중 주문(TripleSpell).
회로가 계속해서 타오른다.
타오르는 회로가 파직, 소리를 낸다. 불똥이 회로 위로 튀어 올랐다. 나는 손을 뻗어 그것을 움켜쥐었다. 한톨의 마나도 낭비할 생각이 없었으므로.
이윽고, 결계가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다가온다.
다가오는 결계는 검은 파도와도 같다.
검은 파도를 앞에 둔 채, 나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팔을 등 뒤로 끌어당겼다. 팔꿈치를 굽혔다.
분쇄(Smash).
강화된 주문이 손안에 담긴다.
요동치는 마나를 움켜쥔 채, 나는 결계를 바라본다. 보다 정확히는, 그 안에 숨어있을 겁쟁이를.
“야.”
나는 고대 리치, 스케발을 보며 말했다.
“숨지 말고 쳐 나와, 씨발아.”
주먹을 휘둘렀다.
중첩된 주문이 빛을 토해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