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78
〈 78화 〉 외전, 배교자(6)
* * *
해가 지평선 너머로 떠오른다.
햇빛이 비치는 평야 위로 마수들이 진군한다. 안개를 두른 그들은 마치 파도와 같다. 마수의 파도를 보며 기사들은 겁에 질린다.
재앙의 앞에 인류는 무력하다. 기사들은 애써 외면하던 사실과 마주한다. 깨닫는다.
여태껏 전선이 유지될 수 있었던 건, 자신들의 노력이 아니다. 그저 그들의 변덕에 불과했다. 손바닥 뒤집듯 그들이 태도를 바꾼 것 만으로 전선은 붕괴하고 만다.
‘옛 왕국을 멸망시킨 넷의 재앙.’
그중 하나인 흑룡을 죽였다.
고대 리치인 스케발을 물리쳤다.
희망이 생겼다. 어쩌면, 이라고 기사들은 기대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
‘···우리는 무엇이지?’
고작 한 명.
‘의미가 있는 건가?’
상대는 고작 한 명에 불과한 소환사다.
그 하나가 저만한 대군을 부린다. 몰려드는 마수의 파도 앞에 모든 게 휩쓸릴 미래가 훤히 그려진다.
기사들의 심장에 공포가 싹튼다.
그들이 쥔 창칼이 파르르 떨린다.
그러나, 그들은 물러서지 않는다.
인류는 재앙의 앞에 짓밟힌다.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그러나, 재앙을 베기 위한 검이 인류에겐 있다.
용사.
별이 선택한 용사가 자신들과 함께한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기사들은 창칼을 세운다. 인류를 위해서라는 사명 하나로, 그들은 제 목숨을 버릴 각오를 다진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나는, 소드 마스터 쿤텔이다.”
검의 초인이 있다.
인간의 몸으로 초인의 영역에 도달한 검사가 입을 열었다. 그의 눈동자는 어느 때보다 날카롭다.
“작전의 개요는 간단하다. 현자가 발을 묶고, 용사가 재앙을 벤다.”
쿤텔이 기사들을 향해 말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용사가 달릴 길을 만든다.”
그가 칼자루를 쭉 뻗는다.
칼끝이 향하는 곳은 먼 곳에서도 보이는 갑각룡의 모습이다. 땅을 파헤치며 다가오는 갑각룡을 가리키며, 쿤텔은 말했다.
“저것의 시선을 끈다.”
목숨을 바쳐 미끼가 된다.
“쇠뇌를 장전해라.”
그리고, 그 첫 번째 미끼는 자신이 될 것이다.
2.
지평선을 가득 메운 채 몰아치는 마수의 파도를 흘겨보며, 카일은 성검을 고쳐 잡았다.
‘무겁다.’
오늘따라, 유난히도 칼자루가 무겁게 느껴졌다. 어깨가 뻐근하다. 발목이 욱신거린다. 전투의 피로가 채 가시지도 않았거늘, 다시 검을 쥐어야만 한다.
그러나 불평할 시간은 없다.
“후우···.”
카일이 숨을 가다듬으며 칼자루를 매만지고 있자니, 누군가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준비됐냐?”
걸어온 라니엘이 카일의 곁에 섰다.
카일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녀석만큼은 여전하다.
“···그럭저럭 된 것 같군. 무슨 일이지?”
“간단히 설명은 해 줘야 할 것 같아서.”
라니엘이 측면에 선 기사들을 가리켰다.
그들은 쇠뇌에 작살을 먹이고 있었다. 작살에는 라니엘이 그린듯한 회로가 새겨져 있다.
“작살을 한 발 쏠 거야. 마력을 있는 대로 다 먹여놓은 놈인데··· 한 발은 길을 여는데, 남은 세 발은 갑각룡을 끌어들이는 데 쓰겠지.”
그가 기사들을 가리켰다.
“그 뒤로, 사라의 축복을 받은 기사들이 돌격할 거고··· 레미아가 계속해서 달빛 화살로 지원할 거야.”
“라니엘, 너는 뭘 할거지?”
“나는 곧장 천칭에 거래를 해야지. 마나가 아닌, 신체를 공양하는 식으로 말야.”
그가 자신의 손을 흔들어 보였다.
“양손, 양팔. 다 갖다 공양하면··· 적어도 15초 남짓은 묶을 수 있겠다는 계산이 섰어.”
“···그런가.”
“카일.”
라니엘이 카일을 불렀다.
그 목소리는 언제나와 같다.
“갑각룡은 기사들과 쿤텔 아저씨가 맡을 거야. 대부분의 마수도 기사들에게 시선이 끌리겠지.”
라니엘이 손가락을 쭉 뻗었다.
그 손가락은 마수 무리의 너머를 가리킨다.
“너는 앞만 보고 달려.”
“······.”
“남은 건 우리가 할 테니까.”
천천히,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15초라고 했나?”
“어. 뭐, 정 안 되겠다 싶으면 다리까지 공양해 봐야지. 나보다는 네가 살아야 할 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라니엘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기왕이면 도망칠 다리는 남겨주면 좋겠는데.”
“···노력해보겠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마수 무리가 더 가까워졌다. 마수들의 악취가 코끝을 찌른다. 그들의 진격에 땅이 울린다.
뿌우우우우!
뿔나팔 소리가 울려 퍼진다.
철컥,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쇠뇌가 장전된다. 수많은 기사가 눈을 부릅뜨고 마수를 응시한다.
“쏴라.”
그리고, 전쟁이 시작된다.
3.
쇠뇌가 마력 광을 뿜는다.
허물어지는 안개를 꿰뚫고 쏘아진 쇠뇌가 갑각룡의 표피에 박힌다. 깊게 박히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거면 충분하다.
자극(Stimulus).
작살에 발린 주문이 빛을 뿜는다.
갑각룡들의 시야가 좁아진다. 주인인 소환사의 명령을 듣지 않는다.
키에에에에에엑!
괴성을 내지르며 갑각룡이 날뛴다.
좁아진 갑각룡의 시야는 작살을 쏜 기사들에게 향한다. 기사들이 곧장 흩어진다.
“대열을 지켜라!”
사령관들의 명령이 떨어진다.
흩어지는 기사들 사이로, 한 명의 초인이 뛰쳐나간다. 소드 마스터 쿤텔이 칼을 낮게 끌며 갑각룡을 향해 뛰어들었다.
소드 마스터 쿤텔.
성녀의 축복을 받는 기사단.
레미아의 보조를 받는 기사단.
그들이 각각 한 마리의 갑각룡을 맡는다. 셋의 갑각룡이 흩어진다. 남은 건 둘이다.
“으아아아아아아아!”
비명인지 기합인지 모를 목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진다. 기사들은 죽음을 각오한다. 목숨을 버릴 각오를 다진다.
“별에 영광 있으리라!”
오직, 용사를 위해서.
“·····.”
카일이 다리를 굽힌다.
그 시선은 올곧게 글레투스만을 바라본다. 안개를 꿰뚫고, 마수 무리를 넘어 글레투스에게 가닿는다.
새까만 눈동자에 별빛이 뭉쳐 고리를 이룬다.
백금색의 빛 고리가 떠오른다.
카일이 성검을 창처럼 쥔다.
두 손으로 칼자루를 잡은 채, 달리기 시작한다. 첫걸음은 가볍다. 퉁, 하고 카일이 땅을 박찬다.
쐐에에에에에에엑!
거대한 작살이 카일이 노려보는 곳을 향해 날아간다. 잿빛 마력을 품은 작살은 갑각룡에게 먹이던 것과는 다르다.
일점 돌파(PointBreakthrough).
안개가 잠시나마 허물어진다.
마수들의 살점이 튀어 오른다. 그러나, 그도 잠시다. 글레투스가 손짓하자 안개가 빈 곳을 메꾼다. 마수들이 다시 쏟아져 나온다.
“거래한다.”
그 순간이다.
“내 양손, 양팔을 바친다.”
천칭(Balance).
카일의 뒤에서 딱, 하는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끄러운 전장 속에서도 그 소리만큼은 선명하다.
차르르륵!
사슬이 글레투스의 몸을 옭아맨다.
휘두르려던 글레투스의 팔이 멈춘다. 안개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한순간이지만, 전장에 정적이 찾아온다.
정적 속에서 잿빛 마법사가 입을 열었다.
“가라, 카일.”
카일은 답하지 않는다. 땅을 박차는 것으로 그 대답을 대신한다. 가벼웠던 발걸음에 무게를 더한다.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땅이 쩍, 하고 갈라진다.
작살이 꿰뚫은 틈을 향해 카일이 달렸다.
그가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별무리가 모여든다. 모여든 별빛은 한줄기의 선을 그린다. 용사는 별에게 축복받은 육체를 가진다.
별이 안개를 물리친다.
······전장에서, 하나의 초인이란 누구보다도 돋보이는 법이다. 갑각룡에게 돌진하던 기사들이 빛을 본다. 소드 마스터 또한 빛을 본다.
빛이 그들과 함께한다.
기사들의 마음속 공포가 사라진다. 그들이 괴성을 내지르며 마수와 충돌한다.
피가 튄다.
인간의 피와 마수의 피가 뒤섞인다.
키에에에엑!
빛 앞에 안개는 모여드는 것을 포기한다. 안개에서 마수들이 쏟아져 나온다. 수십, 수백의 마수가 카일의 앞길을 틀어막는다.
서걱.
막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카일이 창처럼 세웠던 칼날을 찌름과 동시에 휘둘렀다. 한 번의 휘두름에 수십의 마수가 흩어진다.
후두두두둑.
마수의 피와 내장이 흩어진다.
쏟아지는 내장을 밟고 카일은 달린다. 찰박, 하고 푸르고 검은 피가 튀어 오른다.
‘여기까지가 3초.’
카일은 칼이 쉬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달리면서 휘둘렀고, 찌르면서 휘둘렀으며, 마수의 몸을 가르고 피를 뚫고 나오며 칼을 휘둘렀다.
끊이지 않는 칼은 다가오는 마수를 갈아버린다.
갑각룡이 기사단을 갈아버리는 것처럼, 카일 또한 마수를 갈아버리고 있었다.
‘4초.’
마수들은 카일에게 맞서기를 포기한다.
수를 앞세워 카일을 덮친다. 수십 마리의 마수가 카일을 덮는다. 성검이 내뿜는 빛무리가 마수들에게 가려진다.
그러나, 그도 잠시다.
고작 마수의 몸으로 빛을 가릴 수는 없다.
‘5초.’
촤아아아악!
마수를 뚫고 카일이 튀어나온다. 마수의 피를 뒤집어쓴 채 그는 달린다. 마수들의 시체가 쌓인다.
카일은 멈추지 않는다.
마수가 앞길을 틀어막으면 벤다. 베는 동작과 뛰는 동작 간의 결림이 없다. 카일의 속도는 줄지 않는다. 오히려 그 몸은 빨라져만 간다.
서서히 안개가 뚫린다.
한줄기의 빛무리가 재앙의 앞에 닿는다.
‘7초.’
절반가량의 시간.
드디어 글레투스의 앞에 도착했다. 그러나, 아직도 앞길을 가로막는 것이 있다.
‘갑각룡.’
글레투스의 곁을 지키는 갑각룡.
두 마리의 갑각룡이 움직이지 못하는 글레투스를 대신하여, 카일을 향해 달려든다.
카일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생각한다.
‘로디멜 요새 때와는 다르다.’
흑룡을 베이스로 만든 갑각룡 보다 약하다. 그러나, 그 수는 두 마리다.
‘주어진 시간은?’
7초 남짓.
‘멈춰서 벨 시간은 없다.’
카일은 판단을 내린다.
‘베면서 돌진한다.’
성검을 고쳐 잡으며 갑각룡을 향해 뛰어든다. 요새 때와는 달리 충분히 힘을 모았고, 충분히 제 몸을 가속했다.
도약하며 성검을 아래로 찍듯이 휘두른다.
빛무리가 갑각룡의 두개골을 으깨며 폭발한다. 폭발의 반동으로 카일의 몸이 붕 뜬다. 한 마리의 갑각룡을 땅에 처박았지만, 아직 하나가 남았다.
키에에에에에엑!
공중에 뜬 카일을 향해 아가리를 벌린 채, 갑각룡이 돌진한다. 카일은 본다. 시야를 가득 메운 갑각룡의 아가리를.
‘벤다.’
답은 언제나와 같다.
카일은 공중에서 몸을 회전한다. 빛무리를 끌며 카일이 갑각룡의 아가리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화앗!
잠시 꺼졌던 빛이 갑각룡의 눈구멍을 통해 새어 나온다. 핏물과 함께 백금색의 빛무리가 솟구친다.
카가가가가가가각!
성검이 갑각룡의 아가리를 가른다. 그 표피를 가르고, 목을 찢으며 카일이 튀어나온다.
탁.
찰박이는 핏물과 함께 카일이 허물어지는 갑각룡을 밟고 도약한다.
‘13초.’
남은 시간은 2초다.
그리고, 그 2초면 충분하다.
글레투스에게 떨어지며, 카일이 칼을 휘두른다. 처음부터 목을 노리지 않는다. 당장은 마수를 물리치는 게 먼저다.
빛무리를 끄는 성검이 글레투스의 팔을 노린다.
“···아?”
글레투스가 처음으로 당황한듯한 표정을 짓는다. 그녀는 움직이지 못한다. 팔을 허공에 찔러넣은 그 자세 그대로 멈춰있다.
카일은 검의 초인에게 검을 배웠다.
멈춰있는 상대의 팔은 손쉽게 베어낼 수 있다.
서걱.
성검이 글레투스의 팔을 벤다.
검게 물든 팔이 공중을 난다. 동시에, 평야를 가득 메우던 마수들이 허물어진다.
사역마들이 이계로 튕겨 나간다.
안개가 걷힌다. 그것을 일일이 확인할 시간은 없다. 카일은 곧바로 다음 동작을 잇는다.
내려쳤던 검이 바닥에 박힌다.
카일의 발끝이 바닥에 닿는다.
카일은 발끝에 힘을 주고, 팔을 들어 올린다. 칼을 다시 쳐올린다. 쳐올린 칼끝이 향하는 곳은 글레투스의 심장이다.
15초.
시간이 끝났다.
글레투스가 움직인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카일의 칼날은 글레투스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다.
카일은 승리를 직감했다.
오싹.
그 순간이다.
카일의 직감이 비명을 질렀다.
* * *
“···이상하군.”
“엉? 뭐가?”
“라니엘, 너 글레투스도 토벌했었나? 내가 기억하기로 네가 토벌한 건··· 흑룡 뿐이었던 거 같은데.”
“어, 그렇지.”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글레투스가 살아나갈 방법은 없어 보인다만.”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
라니엘이 웃었다.
“움직임을 멈췄고, 팔은 날렸고, 지키는 사역마들은 없고··· 정말 끝이라고 생각했어.”
그때 부러트렸던 손가락을 매만지며,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거기서, 그게 나타나지만 않았어도 글레투스를 토벌할 수 있었겠지.”
“···뭐?”
“배교자, 글레투스의 토벌전. 그 작전의 성공을 앞에 두고 우리는 마주했어.”
무엇을?
그 물음에 라니엘이 답했다.
“죽음의 칼, 가니칼트.”
* * *
“공양(Offering).”
멈춘듯한 시간 속에서 글레투스의 입술이 움직인다. 그녀가 발음한다.
“연다.”
무엇을?
알 수 없다.
“■■로 향하는 길을.”
그저 무언가 발음되었고, 글레투스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리고, 이변이 일어난다.
뚜욱.
성검에 베여 날아가던 글레투스의 팔이 정지했다. 정지한 팔에서 무언가 튀어나왔다. 튀어나온 것은 검은 구정물이다.
구정물이 가장 먼저 이룬 형태는 칼이다.
거대한 칼이 카일의 성검을 쳐냈다.
카앙!
그 검이 카일의 성검을 튕겨낸다.
너무나도 간단하게.
콰직.
이윽고, 대검을 쥔 팔이 나타난다.
기괴한 팔이 움직이며, 다시 한번 휘둘러진 검이 성검채로 카일을 후려친다.
콰아아아앙!
굉음과함께 카일이 날아갔다.
바닥을 구른 카일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칼자루를 쥐었던 손가락이 전부 부러져 있었다.
‘···뭐지?’
알 수 없다.
‘도대체, 뭐야.’
고개를 들어 카일은 본다.
흘러내린 구정물이 완전한 형태를 이룬다. 완전한 육체를 가진 그것이, 배교자의 앞에 선다.
“아, 아,아아···.”
그것을 마주한 순간, 깨질 듯이 머리가 아프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비명이 새어 나온다. 카일의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죽음이다.
죽음이 눈앞에 서 있었다.
카일의 직감이 경종을 울렸다.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카일은 눈앞의 저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죽음의 칼, 가니칼트.
가장 두려운 재앙이 눈앞에 서 있었다.
* * *